[5.18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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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11-28 21:56 조회3,8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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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이유서 증188로 표시된
[5.18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 내용 요약
2019.2.8.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14:00~18:00까지 4시간 동안 발표된 발제문입니다. 스스로를 5.18민주화유공자라고 밝힌 국회의원 설훈, 민병두, 최경환이 이 발제문 내용이 허위사실이고 그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고소를 했습니다. 하지만 영등포 경찰서는 2019.12.30. 위 발제내용이 [의견]에 해당하며 고소인들은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 판례에 의해 고소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의견으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송치하였습니다. 하지만 남부지방검찰청은 이에 대해 아직 아무런 처분조치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래는 [5.18진상규명 대국민공청회] 내용의 요약입니다.
제1장(7~10):피고인의 5.18연구는 두 가지 분야로 이루어져 왔다. 2002년부터 2014년 10월까지는 문헌연구, 2015년 5월 5일부터 현재까지는 노숙자담요가 제공한 영상분석을 토대로 하는 영상연구로 이루어져 왔다.
제2장(10~112):5.18연구가 왜 중요한가? 5.18마패만 들면 헌법도 대통령도 제압된다. 5.18을 등에 업은 민주화세력의 무소불위의 독재가 현실화되고 있다. 이는 5.18이 사악한 정치목적에 악용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제3장(11~41) 5.18 일지: 5.18은 정부와 폭동세력 사이에 발생한 10일 동안의 충돌사건이다. 위 발제문의 11~41쪽에는 이 10일 동안의 폭동-진압 상황이 요약돼 있다.
5월 18일(일): 학생으로 위장한 폭도250여명이 책가방에 돌멩이를 숨겨가지고 전남대 정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대원 20명에게 도서관에 가겠다고 시비를 걸면서 투석하여 분노 유발시킨 후 금남로로 달려가 차량과 파출소를 파괴하고 불을 질러 검은 연기가 나게 하여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광주시민이 수십 명 죽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 계엄군이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희롱하였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살포했다.. 이날 7공수 여단 2개 대대는 광주지역 사단장 정웅 소장의 작전지휘를 받았으며, 오후 4시경, 정웅은 36개 길목에 계엄군을 배치하여 그 안에 들어 있는 젊은이를 모두 체포해 31사단 헌벙대로 넘기라 명령했다. 2명의 대대장은 길목 당 4~5명씩 배치해 젊은이들을 체포하려 했다.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병사들은 곤봉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5월 19일~20일: 이 양일간 계엄군이 수적 열세에 몰려 시민군으로부터 매타작을 당했다. 수적 우위를 차지한 시위대는 대형 버스와 트럭을 지그재그 궤적으로 몰아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고, 계엄군은 이리저리 피하면서 “차온다”는 소리에 노이로제 공황상태로 내몰렸다. 불타는 드럼통을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경상도 차량만 보면 탑승자들을 집단 구타해 살해했다. 5월 20일에는 공수부대 5개 대대(각 1,500명)가 전남대와 시청에서 수만 명 시위대에 포위되어 몰살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고, 5월 21일 오후 5시에는 구사일생으로 시 외곽으로 탈주하기에 이르렀다. 공수부대가 곤봉을 사용한 것은 오직 5월 18일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뿐이었다.
5월 21일: 이날 600명의 조직화된 시위대가 벌인 행위는 군사작전에서도 세계 최상급의 특공작전이었다. 5월 21일 제20사단 지휘차량 부대는 08:00시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하도록 계획돼 있었다. 이 이동계획은 극비 중의 극비에 속했다. 그런데 시위대 300명이 이 이동계획을 사전에 입수해 하루 전에 토끼몰이식 장애물을 설치하고 여러 시간 전에 매복해 있다가 20사단 차량부대가 정확히 그 지점을 08:00시에 통과하자 주로 몽둥이와 화염병으로 공격하여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인근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09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에는 또 다른 300명이 몰려와 600명이 되었다. 이들 600명은 단 한 차례도 출고되지 않았던 최신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0여대를 탈취하여 그들을 몰고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던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습격해 5,403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전남도청에는 TNT를 가지고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놓고 광주시를 히로시마로 만들 수 있다고 협박하였다. 방송국과 세무서, 파출소들을 불태우고 도청과 전남대에 집합해 있는 계업군을 포위 공격하여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내쫓고 도청을 접수하였으며 이날부터 광주교도소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제27~31쪽에는 19개의 현장사진이 소개돼 있다. 2016년 5월 19일, 증인으로 출두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에게 이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이 사람들이 광주시민이냐’고 물었을 때, 김양래는 광주시민이 아니라고 답했다. 전두환이 또다른 군부대에 민간복을 입혀 투입시킨 [전두환 편의대]일 것이라고 답했다.
5월 22~24일:전남도청을 완전 점령한 그룹은 광주시민이 아니라 외지인이었다. ‘수습학생위원회’라는 글자가 새겨진 어깨띠를 두른 외지인들이 광주의 똘똘해 보이는 청년들을 연행해가는 사진들이 있다. 이들의 이름은 해남농민활동가 김인태와 학원 교사인 김중식이며 이들은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다.
5월24~27일: 5월 24일 낮까지만 해도 광주시민은 외지인이 점령한 도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증59의 ‘5.18항쟁증언자료집’에는 5.18유공자 최고반열에 속한 ‘5.18항쟁본부’ 핵심 간부들의 증언들이 있다. 이 증언자들은 한결같이 5월 21일 총소리가 나자 자기들은 각자도생하자며 숨어 다녔고, 5월 24일 낮에는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위엄 있는 사람들이 도청출입을 금지시켜 들어갈 수 없었고, 24일 밤부터 도청에 들어왔다고 증언했다. 도청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었고, 매일 토론을 하지만 싸움질만 했다. 그러다가 5.27. 새벽 점령되었다.
제4장, 게릴라 프로필(41~47쪽): 북한 특수군 군인 600명, 비군인 900명 정도로 추산, 내국인 광수 13명으로 추정한다는 내용이 있다. 5,18현장을 누빈 600의 존재가 명시된 것은 4개 자료다. 1995. 검찰이 작성한 [5.18광련사건수사결과], 1985. 안기부가 작성한 5.18상황일지,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제595쪽, 1985년 북한 조국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의 제35쪽에 있다.
제5장, 광수 영상분석 동기와 정확도48~62쪽): 혓바닥광수, 주걱턱광수, 경찰광수, 얼굴만 보아도 무조건 광수얼굴 등으로 소개하였음.
제6장, 5.18이 북한 역사인 증거 제시(63~69쪽):5.18 때 광주 어린이들이 계엄군 아저씨를 매우 따랐다는 사진, 600명 광수 중 전남 광주사람 전무하다는 사실은 객관성 없는 광주-전남인들이 증명한 것이 아니라 1999년 방송 3사가 객관적으로 증명하였다. 2015년 5.18 30주년 기념행사의 가두행진은 김정일-김대중이 횃불을 맞잡은 초대형 조형물이 상진하고 있다. 김일성이 황석영과 윤이상을 북으로 불러 1989~91간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해 해마다 상영하고 있다.
통일부 주간정세보고서들에 의하면 북한은 해마다 전지역의 도, 광역시, 시, 군, 도시 단위로 5.18기념행사를 성대하고 벌이고 있다.
북한 최고의 것에 5.18을 영예의 상징으로 채택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및 석조 기념물에 5월 22일 [15:08분, 대학생 500여명 광주도착 환영행사 거행]이라는 일지가 기록돼 있다.
제7장, 북한군 개입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들(69~83쪽): 12가지 이유와 그에 대한 반론 제시
주장1:대법원 판결로 종결됐다.
반론1:1997년 대법원 판결서에는 북한군 개입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 검사가 기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20개 판사사항에 ‘북한군;이라는 단어가 기재되지 않았다. 판시사항에 들어있지 않은 주제에 대해 대법원이 판결하지 않는다. 판결서에는 북한군 개입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전두환의 내란죄와 북한군 개입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 1981년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동기가 불순했다. 김영삼을 보호하고, 전두환을 유죄로 몰아가기 위한 당시 안기부장 권영해의 불법 공작 즉 [집권시나리오]가 창작됐다. 대법원 판결에 10가지 코미디 판시가 있었다.
주장2: 5.18관련 법률이 3개나 있고, 5.18유공자들이 보상을 받고 있으며 해마다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5.18 성역화는 이미 굳어져 있다.
반론2: 북한군 개입이라는 명제는 최근 피고인이 10여 년 동안 연구한 연구내용이다,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 부정되는 사회는 전체주의 독재사회다.
주장3: 해마다 국가차원의 행사가 거행되고 있다.
반론3:북한에서는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5.18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주장4: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굳어져 있다.
반론4: 수천 년 동안 굳어져 있었던 진실, 천동설이 서기 1600년대에 지동설로 뒤집혔다.
주장5: 수많은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북한군 개입 증거 찾지 못했다.
반론5: 진상규명 과정 많았지만 진상규명 범위와 항목에 [북한군 개입]이 설정되지 않았다. 규명범위, 규명항복에 설정되지 않은 항목에 대해 규명하는 위원회는 없다.
주장6:정홍원 총리, 김관진 국방장관이 북한군 개입 없었다는 것이 정부판단이라 했다.
반론6: 정부판단이 있으면 그에 반하는 역사연구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주장7: 2016.6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600명 침투를 처음 듣는 소리(18쪽)라 했다.
반론7:전두환은 정치인지지 연구자가 아니다. 그 11쪽에는 전두환이 12.12도 모른다 했다는 기사가 있다. 전두환의 기억이 고장났다는 증거다.
주장8: 1980.5.9.자 미CIA보고서에 북한군 언급 없었다.
반론8: 5.18 사태 9일 전에 미국정부가 몰랐다 해서 5.18 이후에 밝혀지는 모든 사실이 허위일 수 없다.
주장9: 전두환도 모르고 미CIA도 몰랐는데 지만원이 어찌 알겠는가?
반론9: 전두환은 공무원이다. 미CIA도 공무원 단체다. 공무원은 연구를 하지 않는다. 지만원은 연구를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학자의 라이선스가 있다.
주장10:노숙자담요의 얼굴분석 어떻게 믿나?
반론10: 안면인식 기술에 대한 최근 뉴스조차 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무책임한 이야기다.
주장11: 노숙자담요의 실체가 없다.
반론11: 얼굴과 말을 믿지 말고 그 사람의 작품을 믿으라는 것이 서양의 철학이다.
주장12: 9살짜리 특수군이 어디 있느냐?
반론12:이 말은 탈북자 장진성이 퍼트린 말이다. 5.18은 북한 게릴라전이었다. 게릴라전에는 노인, 부녀자, 어린 아이들이 필수 조직원들이다. 6.25때에는 이들이 총알받이였고, 후방 교란요원들이었다.
제8장: 조갑제와 서정갑이 부정하는 근거들
조갑제의 주장
1) 600명이 침투했는데 어떻게 검문에 걸리지 않았는가?
2) 600명이 왔자면 전투를 했을 텐데 계엄군이 왜 10여명만 사망했나?
3) 당시 합참의장 류병헌에 의하면 당시 국토는 철통같이 밀봉돼 있었다고 한다.
4) 간첩이 해안으로 오면 모래에 발자국이 나기 때문에 100% 다 잡힌다.
5) 조갑제 자신이 5월 23일 광주에 갔었는데 북한군처럼 생긴 사람 보지 못했다.
6) 당시 기자 수백 명 중 북한군 보았다는 기자 없었다.
6) 지만원이 재판에서 패소했다.
반론: 이날 주최측인 이종명 의원은 조갑제, 정규재 등을 포함해 여러 반론자들을 공청회에 참가해 반론을 펴달라고 공한을 보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위 6가지는 그 자체로 군사 및 일반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에 일일이 반론하지 않았다.
2020.11.28.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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