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전 지국장 헨리 스콧의 김대중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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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thfinder12 작성일20-11-02 00:40 조회3,438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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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2013년 12월 출간된 전 뉴욕타임스 지국장 헨리 스콧의 저서 '영국기자가 본 연합국전승사관의 허망' 중 '내가 만난 아시아 지도자'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참깨방송에 보도된 내용으로, 아래에 발췌하여 글로 옮겨 놓습니다.
시스템 클럽에도 어떤 라디오 방송 링크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만 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김대중 소개
김대중은 전남 하의도의 가난한 마을 출신으로 언론이 자신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과하게 신경을 쓰는 남자였다. 코미디언같은 정치가로 언제나 상황에 자신을 맞추어 카멜레온같이 변신했다.
김대중은 군대에 입대한 적은 없으나 일본제국 육군에 지원하여 근무한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일본 하사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김대중에 대한 평
김대중이라는 인물은 껍데기일 뿐이다. 알맹이가 아니다. 김대중은 사기꾼이고 거짓말쟁이다. 언제나 상대를 떠보려 하는 연기자다. 나도 김대중의 연기에 속은 사람 가운데 하나다. 많은 한국 국민들도 속았다. 김대중의 뛰어난 능력이라면 그런 사기 행위들이 들키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의 가장 큰 죄는 민주주의를 기만한 것이지만 그는 이일로 한번도 비판받은 적이 없다. 광주사건이야말로 김대중의 민주주의 기만이 뚜렷이 드러난 사건이다. 광주에서 난동이 벌어지자 김대중은 누구보다 그 사건의 배경을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이 노린 것은 권력이었다. 그는 자기 입장말고는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광주사건이 벌이진 가운데 김대중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광주사건으로부터 20년이 흐른 지난 2000년, 내가 편집을 맡았던 '광주폭동'이 뉴욕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사건을 취재한 10명의 미국 언론기자와 10명의 한국인 기자가 집필하였다. 이 책으로 당시 말하지 못했던 진실들이 햇빛을 보게 되었다. 공동 집필자들은 모두 기꺼이 지난날을 떠올려 주었다.
김대중의 무례한 행태
김대중은 홍보전략과 이용가치에 따라 뉴욕 타임즈 지국장인 나는 바로 접견하면서, 나이 여든을 넘긴 전직 윤보선 대통령은 계속 문 밖에 세워 두었다.
광주 폭동은 김대중이 사주한 것
1980년 광주사태는 김대중 자신이 민주화 기수를 가장하여 대통령이 되기 위해 폭동을 사주한 사건이었다. 우리들 저널리스트들도 모두 이용당한 것이다.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내 부인은 전업주부이지만 날카로운 감성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그녀가 김대중의 연극에 이용당하기 말라며 나에게 주의를 준 일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광주폭동은 발단부터 김대중의 연출이었다.
광주폭동은 김대중이 의도한대로 이루어졌다. 나는 <광주폭동>을 쓰기까지도 김대중의 역할이 그렇게 클 것이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폭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 뒤 사형이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의 구명은 레이건으로부터
김대중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관계자였다. 1980년 가을에 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은 레이건 정부와 밀약을 맺는다. 레이건 대통령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원수로서 전두환이 워싱턴에 초대받는 대신, 김대중의 처형을 철회했다.
[* 주: 손충무 기자의 저서에 의하면 이것은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미국 건국 이래 새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과 처음 만나는 정상은 영국 총리여야 했기 때문이다. 2백년간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1981.2.2. 전두환 대통령 - 레이건 대통령 정상회담
1981.2.26. 영국 마가렛 대처 총리 - 레이건 대통령 정상회담
레이건 대통령 취임일 : 1981.1.20. ]
이처럼 레이건이 김대중의 사형을 막으려 힘쓴 것은, 김대중이 민주화 운동의 기수라는 이미지가 미국에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일파가 폭동을 일으켜 광주를 점령했을 때에도 서구언론들은 하나같이 민주화의 영웅으로 김대중을 치켜세웠다. 물론 군부는 악당이었다. 영웅과 악당으로 나뉜 이 선입견은 오래 이어져왔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김대중을 민주화를 이끈 영웅으로 널리 믿고 있다.
[* "물론 군부는 악당이었다" 라고 표현한 점에서 상당한 사람들이 12.12 등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광주사건을 일으킨 사람들, 김대중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얼마나 세속적 지위나 돈을 중요시하고 일족의 재산축적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외국 언론들은 그 사실을 감추어 왔다.
김대중은 국가반역자이며 사리사욕의 화신
저널리스트로서 어리석었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 재산 축적보다 훨씬 무거운 죄는 나라를 팔아버린 국가 반역행위였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과 연관된 일이다.
김대중은 뼛속까지 부패한 사람이었다.그가 대통령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서민들 사이에서는 김대중의 본명은 김대호 金大好가 아닌가 하는 농담이 유행했다.
한국은 중국문화권에 속해있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을 포함하여 역대 중국과 조선의 권력자들은 횡령과 착복에 빠져 살았다. 김대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민주화의 기수라도 된 듯 노벨평화상을 얻으려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리사욕의 화신이었다.
한국은 가난했으나, 박정희가 오늘의 한국을 만듦
내가 1968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한국은 아직 가난했다. 박정희가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만주군국 장교가 되었고, 청렴한 일본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일본이 남긴 물적 정신적 유산을 토대로 하여 짧은 기간에 한국을 현대적 국가로 만들었다. 만일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많은 위대한 업적을 남겼을 것이다.
북한의 꼭두각시 김대중
내가 아는 어떤 이는 예전부터 '김대중은 믿을 수가 없다. 북한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다. 그는 북한을 위해 일한다.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바보같은 소리가 어디있나. 그는 한국 민주를 위해 몸바쳐 일해왔어. 크리스천이며 선량한 사람이야.'라고 반론했다. 그러나 틀린 사람은 나였다.
<뉴욕타임스 기자 헨리 스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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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true님의 댓글
진리true 작성일
<미국 레이건의 맹인 짓과 한국 전두환의 민주화정치 선전 = 김대중의 정치사면 선전쇼>
김대중의 목숨을 구한 사람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 관계자였다.
1980년 가을에 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전두환 대통령은 레이건 정부와 밀약을 맺는다.
레이건 대통령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원수로서 전두환이 워싱턴에 초대받는 대신, 김대중의 처형을 철회했다.
[* 주: 손충무 기자의 저서에 의하면 이것은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미국 건국 이래 새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과 처음 만나는 정상은 영국 총리여야 했기 때문이다.
2백년간 한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1981.1.20. 레이건 대통령 취임일
1981.2.2. 전두환 대통령 - 레이건 대통령 정상회담
1981.2.26. 영국 마가렛 대처 총리 - 레이건 대통령 정상회담]
이처럼 레이건이 김대중의 사형을 막으려 힘쓴 것은,
김대중이 민주화 운동의 기수라는 이미지(재미 정치공작단의 기부금 지원효과)가 미국에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일파가 폭동을 일으켜 광주를 점령했을 때에도
서구언론들은 하나같이 민주화의 영웅으로 김대중을 치켜세웠다.
물론 군부(박정희 정권)는 악당이었다.
영웅(김대중 좌익민주화 운동가)과 악당(박정희 유신독재 정부)으로 나뉜 이 선입견은 오래 이어져왔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김대중을 민주화를 이끈 영웅으로 널리 믿고 있다.
결론 : 전두한정권의 국제외교 조급성 = 박정희정권(5/16 혁명정부)의 권력승계를 인정받으려한 자가당착(정치군인상 지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