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내공과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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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10-02 13:14 조회4,4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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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1879~1910): 그의 가문은 황해도 토호였다. 그의 부친 안태훈은 산채에 사병을 거느릴 정도로 정치적이었고 그 정치성향은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개화파에 가까웠다.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의 란을 일으켰고, 그 농민란은 흥선대원군과 접선되어 있었다. 그는 동학란을 평정하기 위해 재산을 풀어 사병을 더 많이 모아가지고 토벌에 나섰고 안중군도 17세의 나이로 이 토벌작전에 참전했다. 안중근부다 3살 더 많은 김구는 황해도 지역의 동학란 선봉장으로 나섰다가 안태훈 진영에 패하였지만 그 후 한동안 안태훈의 식객 노릇을 했다.
안태훈 부자는 사재를 털어 일본을 도왔다. 학교를 두 개나 지을 돈을 일제에 기증했고, 정봉준의 민란을 토벌하는 데 적극 나서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일제에 기부도 하고 일제가 원하는 민란진압에도 앞장섰다면 일제 편에 선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등 박문을 저격했을까? 1909년 10월 26일, 당시 30세였던 안중근은 하얼빈 역전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등 박문 저격한 후 일본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되어 1910.3.26. 관동주 류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도대체 안중근은 왜 그랬을까?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등박문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이등박문이 1907년 고종의 7남이자 황태자였던 ’이은‘을 일본에 유학시킨 장본인이었고, 그가 직접 이은 교육의 책임자 역할을 해 준 데 대한 감사함이었다 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이 동양의 평화를 지킨 것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메이지 천황이 조선의 독립을 도모했고, 평화 유지에 힘쓴 것도 잘 이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저격자로 내몰았는가? 그가 법정에서 진술했다는 표현들을 보면 그는 메이지 천황에 대해 그리고 일본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론적 차원에서 보면 그가 1909년 이등박문을 저격한 행위로 인해 1910년의 한일병합이 촉진됐다. 한일병합을 저지시키기 위해 그를 살해했다면 그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왜 그런가? 이등 박문은 한일병합을 반대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 든든한 후원자를 왜 살해했는가? 이등박문을 살해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순종의 면목이 없어졌다. 안절부절이었다. 이로 인해 한일병합이 촉진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장님 문고리 잡는 식이었다. 안중근이 개화의 불쏘시개가 된 것은 맞지만 그를 개화의 영웅이라고 하기에는 내공이 미천하다.
그의 부친은 수구파로부터 탄압을 받아 이리 저리 이사를 다녔고, 안중근 역시 청소년 시절에 이리 저리 떠밀려 다녔다. 한문을 좀 배우다가 방향을 선회하여 총으로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진남포와 평양 등을 다니면서 석탄상회를 경영했지만 실패했고, 그 후부터 의병대에 가담하여 강원도에까지 떠돌아다녔지만 나이 30이 되도록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09년 10월, 모 신문사로부터 이등박문의 이동계획을 입수한 후 ‘바로 이거다’ 하는 식으로 거사에 뛰어들었다. 여기까지를 보면 안중근의 조적이 김구의 족적과 별로 다르지 않고, 김구의 성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정치판에 떠돌아다니다 한 건 잡으면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되듯이 안중군 역시 반일주의가 가공해낸 영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반박정희주의가 전태일을 영웅으로 가공해 냈듯이.
아래는 1909년 12월 20일, 관동 고등법원 검찰관 신문의 일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중군은 성격이 급하고 독불장군이라 부모형제와도 갈등을 빚었다. 이리 저리 떠돌다가 세상물정도 모르면서 자기 식대로 생각해 일을 저질렀다. 1909년 12월 20일, 당시 일본 검사는 이런 안중근을 대우해가면서 상세하게 사리를 설명해주지만 안중근은 짧은 말로 무식하게 답한다. 세상물정 모르고, 개념이 없고, 논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균형감이 성숙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어중이떠중이들이 하는 말을 동냥하여 그것을 신념으로 믿고 소영웅심에 취해 저돌적으로 일을 저지른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일본 검사의 교육수준과 품성이 아래 신문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무개념의 청년을 놓고 세상물정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면서 마치 배구를 하듯이 문답을 주고받는다. 지금의 한국 검사들로부터 나오는 분위기는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안중근을 신문하던 일본검사에 비해 한참 저질이다. 검찰 부분만 해도 일본에 100년 이상 뒤떨어진 것이다.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신문 스타일이다. 안중근을 신문하는 일본 검사는 마치 피고인과 대등한 위치에서 논리를 주고받듯이 논쟁을 한다. 이런 검찰 문화, 이런 신문 패러다임은 한국 검찰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한국검사는 피고인에게 반드시 죄를 씌워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질문서를 작성해다가 그것만 묻는다. 저자가 아래 논쟁부분을 비교적 많이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被告人 安應七
右者에 대한 殺人被告事件에 대해 明治四十二年(一九◯九年) 十二月二十日 關東都督府 高等法院 檢察官 溝淵孝雄은 書記 竹內靜衛 列席 通譯 囑託 園木末喜 通譯으로 檢察官은 前回에 繼續하여 前記 被告人에 대해 訊問한 것이 다음과 같다.(이하 한글로 번역)
문:평소그대의 부모형제와 의견은 맞고 있었는가.
답: 별로 불화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성질이 급하고 배짱이 세었으므로 부모형제와는 의견이 맞지 않았다.
문: 정근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대가 신천에 있을 즈음에는 총 포 등을 휴대하고 놀고 있었으나 진남포로 이주해서부터는 한재호 한상호의 주선으로 장사를 하고 두 형제만은 공부를 시킨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가?
답: 장사를 했지만 이익도 없고 거기다 7개조 조약이 나왔으므로 외국으로 날아가려는 생각으로 장사고 뭐고 그만두었다.
문: 조선에는 당화라는 것이 있다. 서인의 당파가 집권하면 동인은 박해하고, 동인이 집권하면 서인을 박해한다. 또 동인 중에는 남인 북인의 당파가 생겨 서로 싸워 이씨 치세 300년 이래 대단히 분쟁이 극심하여 인민의 지는 계발을 등한히 하였고, 또 그 후는 외적이 권력을 장악한다든지 혹은 환관 무녀 등 부인의 세력으로 정치가 늘 좌우되어 내치가 소란하였으므로 조선의 국력이 계발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답: 상세히 알고 있다. 조선인민은 뇌리에 새기고 있는 바이다.
문: 인명을 빼앗는 일은 참혹함의 극이며, 가족 친척을 비탄에 빠지게 하고 그 나라에 손실을 주며 암살의 보도는 세계의 사람을 전율케 하는 죄악임을 알고 있는가.
답: 알고 있다.
문: 그대가 이등을 죽인 일도 같은 결과임을 알고 한 일인가.
답: 이등을 죽인 것은 인도에 반하는 것으로 믿지 않는다. 이등 때문에 사살된 몇 만명을 대신하여 내가 이등 한 사람을 죽인 것이다.
문: 어떻게 이등이 수면명을 죽였는가.
답: 명치유신에 즈음한 변한, 청일정쟁, 로일전쟁에서 수만을 잃게 하고 인본의 선왕을 독살하고 통감으로 한국에 와서부터는 수만명의 목숨을 끊었다.
문: 어떻게 선왕을 독살한 일을 아는가.
답: 책 이름은 잊었지만 일본인이 쓴 책에 기재돼 있었다.
문: 나라가 있으면 전쟁은 피치 못할 경우에서 있고 인명을 잃음은 당연한 일이며 전쟁은 이등 한 사람의 소위라 말할 수 없는 게 아닌가.
답: 그것은 그러하나 청일전쟁, 로일전쟁은 한국을 위해서라고 말하고 일으켰던 것이다.
문: 한국인으로서 피살되었다고 하는 것은 폭도를 처형한데 불과한 것으로, 잘못 폭도로 간주되어 피살도힌 자 자에 대해서는 사실이 발견된 후 금품을 주어 유족을 두터이 위로하였고, 멋대로 선량한 백성을 죽인 일은 없는데 어떤가.
답: 이등이 한국을 위해 인민을 죽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이등을 죽인 것도 한국을 위해서며 결국은 동일한 수단에서 나온 것이다.
문: 한국을 위해서 라는 생각에서 나온 點점 이등과 같으나 이등을 죽인 것이 한국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의 완고한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의 관찰을 잘 못한 곧 무지 천박한 까닭일 것이다.
답: 사람에 따라서는 생각을 달리 하고 수단을 따로 한다. 나는 이 수단을 취하는 것이 동양의 평화를 얻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등이 수단이 맞지 않는다 하여 폭도를 죽였으나 내가 한국을 위해 이등의 소위가 수단에 맞지 않는다 하여 죽인 것도 결국 동일하다.
문: 정부의 행위와 일개인의 행위와는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답: 한국 현시의 제도로는 과연 완전한 정부의 행동이라고 하고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결국 이등의 영향력으로 어떻게라도 되는 것으로 곧 이등 한 사람이 한 것이나 동일하다. 나는 3년 이전부터 국민의 진의를 성명하기 위해 만약 자주의 전함과 병력이 있으면 이등을 부근 해상에서 맞아 공격할 희망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지금까지 눈물을 삼키고 있었는데 이번에 겨우 그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나의 이번 행위도 나 일개의 생각뿐만 아니라 곧 한국 2천여만 동포의 대표로 결행한 것이다.
문: 일국의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반대자가 있음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나 당국자는 자기의 경험과 지식에 기초를 두고 국가의 이해득실에 따라 일부의 의향에 반하여도 외교조약을 제결하고 내정을 개정하는 일이 있다. 그대가 자기의 의견에 맞지 않는다 하여 반대하고 과격한 처치를 취함은 의사가 천박 편협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지금도 깨닫지 못하는가.
답: 나는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하고 있다. 이등은 정부를 압박하여 하였으므로 전부 본래의 진의가 아니고 보호조약도 진의가 아니다.
문: 내정개정의 제1로서는 관중 부중의 별을 분명히 하여 부인 환관이 정치에 용훼할 기회를 없게 하고 또 당화로 하여금 관여할 수 없게 하고 사법과 행정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이의 구별을 하고 문교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문명의 학을 받은 교사를 초빙하여 경성을 비롯한 기타 각지에 학교를 개설하고 자본의 운전을 용역하게 하기 위해 금융기관을 만들고 위생에 대해서는 병원을 설치하고 음료수와 하수도의 개량을 꾀하고 교통기관으로서는 우편 철도의 설계를 행하고 일반관리에 대해서는 청렴강직으로써 계칙하여 착착 그 실을 얻고 있다. 그리고 기타 특히 필요한 병마와 외교의 점에 대해서는 종래의 경험상 한국에 독립운용의 능력이 없으므로 일본제국이 대신 행하여 곧 정연 질서적으로 행하고 있다. 그대는 이 점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답: 그렇게도 되지만 나에게 말하게 한다면 그 이상의 반대주장이 있다.
문: 그대는 자기의 생각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답: 그러한 일은 없다. 의견을 토론하여 보면 알 것이다.
문: 그대는 사회의 상황 자국의 역사도 모르고 단지 신문지만을 보고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은 사실에 반한 것이다.
답: 신문지만은 아니다. 사람의 말도 듣고 사실도 관찰한 뒤 생각한 것이다.
2020.10.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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