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미(3)근대화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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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3-06 09:56 조회17,5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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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화의 뿌리
교육
지구상 모든 나라의 80% 이상이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였다.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식민지로 살았지만 지금은 다 독립해 있다. 그런데 피지배국의 대부분이 지배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미개한 환경과 미개한 사고방식을 개선시켜준 데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조선은 어떠했는가? 양반과 왕들은 백성이 깨우칠까 두려워했다. 사고방식이 바뀌고 생활방식을 바꾸면 자기들에게 달려들 것이 무서워 깨우친 노예를 제거했다. 부모도 자식들을 노예처럼 부렸다. 부모를 능가하면 버림을 받았다. 가정교육도 없고, 학교 교육도 없었다.
조선 역사 518년 동안 유치원이 있었는가, 초등학교가 있었는가? 교육이 없는데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이루어지면서 곧바로 유치원이 생기고 초등학교가 생겼다. 1911년 취학율은 제로. 1948년의 취학율은 74.8%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전국에 세워지고, 대학교까지 설립되었다. 조선인을 교육시킨 존재는 일본이었고, 교육을 방해한 존재가 27명의 이씨 왕들이었다. 교육을 시키면 노예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육은 거져 되는가? 투자가 필요하다. 가장 생산성이 높은 투자가 교육투자다. 교육 없는 산업화가 있을 수 있는가? 교육 없는 문화가 있을 수 있는가? 1910년에 초등학교는 없었다. 1942년에 초등학교 수는 공립과 사립 다 합쳐 3,753개나 되었다. 부모 밑에서 일만 하던 어린이들에게 일본은 1925년에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해주었다. 조선인들이 일본의 선진화된 수준을 향해 깨우침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결산해보자. 조선 백성에게 유익했던 나라, 조선의 앞날을 가꾸어 준 나라가 일본이었는가? 아니면 이씨 성을 가진 27명의 왕이였는가? 1911년부터 1945년까지 34년동안 일본은 취학율을 75% 규모로 향상시켰는데 이씨왕들은 518년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근대화의 초석인 교육. 이는 순전히 일본의 덕분이었다. 감사(appreciation)할 줄 아는 문화인이라면 이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욕을 하고 싶으면 이씨 왕들을 욕해야지 왜 이렇게 고마운 일본을 욕하는 것인가?
기아로부터의 탈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함으로써 일본은 36년 동안 북한에는 29억 달러, 남한에는 23억 달러어치의 사회기반시설(SOC)과 기업 등 일본이 이륙한 일본 자산을 모두 놓고 떠났다. 일본은 이 자산을 일본에 귀속된 귀속자산(Vested Property)이라며 돌려달라는 주장을 폈지만, 미국은 이를 모두 강제로 빼앗아 이승만 정부에 주었다. 1948년 당시 국가의 자산 회계 결과 23억 달러는 대한민국 전체 자산의 80%를 상회했다. 경부선 철도, 중앙선 철도, 경인선 철도 등 철도노선을 구축하고, 전국의 수많은 지방도로를 건설하고, 부두, 탄광, 치수, 상수도, 하수도, 전화 선로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모두 다 일본이 건설했다. 오늘날 유수의 대기업들은 거의가 다 일본이 놓고간 기업들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만일 이 23억 달러 어치의 자본이 없었다면 1948년 출범한 대한민국은 자동차 길도 없고, 기찻길도 없고, 학교도 없고, 기업도 없고, 수도관도 없고, 오로지 똥과 오줌으로 뒤덮힌 냄새나는 땅에서 계속 미신만 믿고, 90%의 백성이 온갖 전염병에 시달리면서 노예 노릇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먹고 살아나기도 어려운 기아의 나라에서 그 누가 이 엄청난 달러를 벌어서 23억 달러만큼의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했겠는가?
이 23억 달러가 SOC로 깔려있었고, 여기에서 이승만 정부가 12년 동안 나라를 가꾸느라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961년의 대한민국은 세계 120개 국가 중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거지나라가 돼 있었다. 보릿고개가 한국경제의 대명사였다.
실업율 30%, 2.88%의 높은 인구 증가율, 산업이라고는 농사일 뿐이었다. 해마다 산은 벌거숭이가 되어갔다. 지금의 북한 민둥산이 바로 이승만 시대의 산이었다. 모두가 가난하니 세금이 걷힐 리 없었다. 해마다 미국이 원조를 베풀었다. 이 역시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력 덕분이었다. 매년 5억 달러, 경제원조가 2.8억 달러, 군사원조가 2,2억 달러였다. 해마다 무역적자는 5천만 달러, 경제원조는 화폐로 주는 것이 아니라 유연탄, 석유, 잉여 농산물이었다. 이것을 정부가 팔아서 세출예산으로 썼다. 이는 당시 ‘대충자금’으로 불렸다. 정부는 대충자금의 상당 부분을 일본이 남기고 간 기업에 조달 명목으로 퍼부었고, 고위층들은 업주와 돈을 나누어 가졌다. 부정부패, 사치, 축첩 문화가 상류층 문화가 되었다. 반면 잉여 농산물의 범람으로 인해 농촌 쌀값이 몰락했다. 농사를 지어서는 자식을 공부시킬 수 없었다. 일본의 개화 노력으로 농촌에서도 내 자식만큼은 배우게 해야겠다는 학구열이 확산돼 있었다. 배워야 살고, 배워야 출세한다는 의식이 사회에 팽배했다. 농촌을 버리고 서울로 서울로 올라와 지게품을 팔았다. 산업이 전혀 없으니 일할 수 있는 곳만 있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김창룡 특무대장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빨갱이 사냥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해산되자 국가는 곧 북으로 넘어가는 듯했다.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판문점에서 남북 청년들이 만나 북으로 가자는 구호였다. 박정희의 쿠테타는 신의 선물이었다. 이때만 해도 북한은 1인당 GNP가 남한의 2배였고, 필리핀은 3배, 태국은 4배나 더 잘 살았다. 남한의 GNP는 겨우 68달러, 이나마 미국의 원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군사 원조품들이 시중으로 흘러나와 민간경제를 도왔다. 배고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산업화였다. 쥐를 잡아 코리안 밍크를 수출하여 무역적자를 메우기도 했고, 서독에 간호사와 광부를 수출하여 무역적자를 메우기도 했지만 이는 그야말로 궁여지책이었다. 1964년, 베트남 전쟁터에 공병 인력을 보내 마을 건설을 도왔고, 이어서 전투부대인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를 파병하여, 장병들의 전투 수당을 차입하였지만 달러 액수도 부족하거니와 달러가 있다고 해서 산업화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박정희에게는 일본 자금과 일본 기술만이 해결책이라는 사실이 보였다. 역시 기댈 곳은 일본뿐이었다. 1964년, 간첩들의 선동과 배후 조종으로 학생데모가 극성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트려는 박정희 대통령의 노력을 무산시키기 위한 시위가 6.3 데모 사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가 앞장선 친북데모였다. 하지만 한일회담은 끝내 성공했다. 1951년 10월부터 13년 8개월 동안 무려 1,500여회의 크고 작은 협상이 진행해오다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2억 달러, 기업들이 꾸어 쓰는 상업차관 3억 달러, 이 조약에서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일본이 꾸준히 반환하라고 주장해오던 일본의 귀속자산 23억 달러에 대한 소유권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일본이 없으면 한국도 없다.
만일 5억 달러의 유무상 자금과 3억 달러의 상업차관만 받아놓은 상태에서 일본이 없었다면 그 돈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무엇을 했을까? 돈만 있고, 기술이 없다면? 돈만 있고, 생산 기계, 부품, 소재가 없다면? 동시대에 일본으로부터 같은 규모의 돈을 받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다른 나라들은 그 돈을 호화시설에 털어넣고 말았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부터 1975년에 이르는 10년동안 기업이 꾸어 쓰는 상업차관을 제외한 유상 및 무상 청구권 자금 5억 달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백서를 작성했다.
포항제철, 산업기계, 원부자재 도입, 중소기업 육성 분야에 55.6%에 해당하는 2억 7,800만 달러, 소양강 댐, 경부고속도로, 철도개량, 건설장비, 해운, 송배전, 상수도, 시외전화, 준선사업 등 사회간접자본에 그 18%에 해당하는 9천만 달러, 농업용수, 농기계 사업, 산림사업, 어선 등 농림 수산업에 그 13.2%인 6,600만 달러, 학교 실험 자재, 해양실습선 연구시설 등 과학기술 교육 분야에 2.4%인 2,000만 달러를 사용했고, 나머지 9.2%는 여러 가지 항목들로 구성돼 있다. 만일 23억 달러어치의 사회간접자본이 깔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5억 달러를 사용했다면, 과연 산업화와 한강의 기적이 창출될 수 있었을까? 이 5억 달러가 가치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무상으로 전수해준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항제철! 종합제철공장은 ‘산업의 핵’이다. 제철공장은 모든 산업국가의 간절한 로망이었다. 외자를 끌어온다 해도 한국에는 플랜트를 건설할 수 있는 기업이 없었다. “한국에 제철소를 지어주세요”, “거지의 나라 한국에 제철소를 지으면 수요가 있나?” 모든 나라들이 시큰둥했다. 철을 생산해봐야 한국의 그 어느 분야가 철을 필요로 하겠는가?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싶었다. 외자를 유치하러 미국의 문을 두드리고, 세계은행(IBRO)을 두드렸지만 비웃음만 샀다. “한국에 고속도로가 왜 필요한데? 물동량도 없는 국가에~” 막막한 박정희 대통령, 제2대 주한일본대사 가나야마를 불러 술 한잔씩 했다. “당신은 일본 수상을 위해서만 일할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일을 좀 해주시오” 일본 수상에 보내는 서한을 내놓았다. 가나야마 대사는 이 편지를 일본 외상을 거치지 않고 곧장 수상에게 전했다. 수상이 일본 제철왕 이나야마를 불러 상의했다. 이나야마, “조선은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힘들여 지어줘봤자 운영도 제대로 못할 것입니다. 각하, 그냥 잊어버리십시오.” 이나야마의 이 말은 사실적 판단이었다.
실제로 손톱깎이는 전두환 시대에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1982년, 전두환은 회의장에 나가기 전에 손톱을 깎다가 날이 무딘 탓에 피를 흘린 적이 있었다. 수출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했다. 유럽에 출장가려고 신고차 들어온 김동휘 상공부장관에게 여비 봉투(금일봉)를 주면서 품질이 가장 우수한 손톱깎이 하나만 사오라 부탁했다. 10여 일 만에 귀국한 장관이 손톱깎이 10개를 사왔다. 손톱깎이는 간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소재, 금형, 열처리, 도금, 연마 등 기술이 집약된 ‘금속가공기술의 종합판’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 10개의 손톱깎이를 장관들에 나누어 주면서 똑같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 내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시작한 손톱깎이는 곧바로 세계시장에 진출하여 세계시장의 50%이상을 차지했다. 일본제 코끼리 밥솥을 능가하는 밥솥도, 컬러필름도 전두환 대통령의 착상으로 개발됐다. 이것이 1980년대인데,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에 포항제철을 짓겠다 한 것이다. 일본에서 받은 자금중에서 1억 2천만 달러가 투입되어 1973년 7월, 열 생산능력 103만톤을 자랑하는 제철공장을 갖게되었다. 포항의 모래 바닥에 세워진 기이한 플랜트, 자본, 기술, 도면, 자재, 소재, 기술지도 등 모든 것이 일본 것이었다. 포항제철이 준공된지 5년, 1978년 8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하고 롤모델로 삼는다는 등소평이 일본 동경 부근에 있는 ‘기미쓰’ 제철소를 방문했다. 등소평은 이나야마 일본 제철왕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 간청했지만 이나야마는 거절했다. 경부고속도로, 1967년 건설계획을 세운 후 소요자금 조달을 위해 세계은행(IBRD)과 미국의 문을 두드렸지만 모든 우방국들이 쌀쌀하게 등을 돌렸다. 이 역시 일본만이 답이었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2년 5개월만인 1970년 6월 27일, 428Km의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했다. 77명이 작업 중 순직했다. 일본 자금 429억 7천만원이 투입됐다.
소양강 다목적댐, 아시아에서는 최대, 전세계에서는 4번째로 큰 댐으로, 발전량은 20만Km, 1967년 4월부터 1973년 10월까지 6년 이상에 걸쳐 일본 자금 2,15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일본에서 전수 받은 이 기술로, 충주댐, 안동댐, 대청댐, 평화의 댐이 건설되었다. 자본금이 대량으로 소요되는 중화학공업과 산업 및 생활 인프라의 기초를 장만하는 데 있어, 일본의 자금과 일본의 기술 지원은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이 5억 달러보다 더 큰 자원은 일본의 ‘귀속 자산’ 26억 달러어치의 산업 및 생활 인프라였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가 이웃 나라로부터 이런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았는가? 아무 나라도 없다.
제품을 만들어 수출을 하고 내수를 충족시키려면 인프라 위에 생산설비를 갖추어야 했다. 제작기계, 부품, 소재, 가공, 열처리, 금형, 도금, 염색 등 다양한 생산 절차를 한 단지 내에 종합하는 대규모 공단들이 필요했다. 창원 공단, 구미 공단, 울산 공단, 인천 공단, 시화 공단, 구로 공단 등 수많은 공단을 설치하고, 그에 필요한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서독의 기능올림픽에 출전시켜 1,2,3등을 싹쓸이하여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국제사회에 확산시켰다. 특사들을 선진국들에 내보내 외국기업들을 한국공단에 유치했다. 이때 어느 나라 기업이 가장 많이 들어와 공단부지를 채웠겠는가? 80%가 일본 기업이었다. 모든 제품에 필요한 부품과 소재는 일본에서 가져왔다. 만일 일본이 저~멀리 아프리카 희망봉에 있었다면 과연 일본 기업이 한국에 대량 입주를 했을까? 일본이 아니었다면 위 6개 공단을 가득 깨워줄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소재와 부품을 개발하는 부자 나라가 이웃에 없었다면 결코 한강의 기적은 있을 수 없었다. 국산화, 현대적 제작 장비와 부품과 소재 없이는 국산화에 도전할 수 없다.
선진국에서 한물 간 제품들에 대한 기술자료(TDP,Technieal Data Package)를 배로 싣고 와서 카피 생산, 모방 생산을 한다 해도, 정밀공작기계와 소재와 부품 산업이 없으면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소재와 부품 산업은 일본이 가장 발달해 있다. 이런 산업이 바로 이웃에 있기 때문에 한국은 일본을 발판으로 하여 조립산업을 육성할 수 있었다. 한국경제는 일본에서 소재와 부품을 가져다 조립하여 미국의 호의로 미국 시장에 내다 팔면서 경제 성장을 했고, 그래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그룹(싱가포르, 대만, 홍콩, 한국)에 끼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일본만큼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유익한 나라는 없다. 산업의 동반관계에서 일본은 언제나 미국에 앞서 왔다.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이렇게 유익하고 고마운 나라는 다시 없다.
1983년 1월 11일, 일본 수상 나까소네가 40억 달러의 선물을 들고 전두환 대통령을 찾아왔다. 한국이 GNP의 6%를 끌어 방위비로 사용하면서 자유민주 진영의 최일선에서 공산주의들과 싸우고 있는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물론 저리(低利)의 차관이긴 해도 이는 당시 IMF위기를 맞았던 한국에는 생명수 같은 것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4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를 풀어 시궁창에 불과했던 한강을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호수 같은 명품으로 가꾸어 놓았다. 폭이 1Km, 54.6Km 깊이에 매머드 콘크리트 관을 묻어 사람과 동물로부터 배설되는 오폐수를 중랑, 탄천, 안양, 난지에 하수처리장에 보내 정화시키게 했다. 210만 평의 고수부지에 수많은 시설들을 설치하고 유람선을 띄웠다.
누구에게나 불가능해 보였던 88국제 올림픽을 세계 올림픽 역사상 가장 크고 화려하게 치를 수 있는 체육시설과 올림픽 마을을 건설했고, 오늘날의 먹거리 산업인 반도체, 스마트 전화기, 통신, 전자, 한국형 원자로 산업을 건설했다. 일본 자금 40억 달러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했다. 이 88올림픽으로 인해 한국의 위상은 세계적인 유지국가로 떠올랐다. 이 엄청난 일본의 지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은 얼마나 아니, 5천만 국민 중 몇 명이나 될까? 이런 것들이 알려지지 않도록 장막을 친 세력이 눈에 보이는가? 이 사실을 알고도 일본에 고마워하지 않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나라에는 일본을 증오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장악하고 있다. 언론을 장악한 세력, 방송, 드라마, 영화, 서적, 교과서 등에 대한 문화 주권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이 바로 일본의 진실을 가리고, 일본을 증오하도록 세뇌교육을 시켜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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