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290] 권영해 증언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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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7-17 09:32 조회8,5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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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290]
권영해 증언의 위력
전 안기부장과 최명주 1차장이 공동으로 밝힌 5.18 진실
권영해는 1994-98년, 김영삼-김대중 시대에 걸쳐 안기부장을 지냈다. 권영해 외 최명주 제1 차장이 공동으로 증언하고 2차에 걸쳐 확인해 준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는 전직 상·하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의 수뇌들이 동시에 한자리에서 스카이데일리 허겸 기자와 조우석 평론가가 진행한 특별 대담에서 최종 확인된 불가역적인 내용이다. 1차 증언일은 2024.6.17일, 2차 특별대담은 7월 8일에 있었다.
1. 권영해 부장과 최명주 재직 시, 국정원이 비밀공작을 통해 북한이 5.18에 개입했었다는 사실을 이 두 사람이 직접 확인했다. 확인한 시점은 그들의 재직 시였다고 확인해 주었다. 1998.2.25에 김대중이 취임했고, 권영해는 그 다음달인 3월까지만 국정원장직에 있었다. 사실상 김영삼 시대에 확인했다는 뜻이다.
2. 청진 비석에 새겨진 490명은 남파공작원이고 사망일은 490명 모두가 1980년 6월 19일로 통일돼 있다. 490명의 제삿날이 6월 19일인 것이다.
소결
5.18을 북한이 주도한 사실과 광주파견 관련하여 사망한 북한 특공조 숫자가 490명이라는 사실을 안기부 전 부장과 1차장이 공동으로 2차례에 걸쳐 확인 해 주었다. 이 사실은 누구도 정당한 증거 없이 허위라 단정할 수 없다.
황장엽 증언과 권영해 증언 일치
황장엽은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 정치국 후보위원, 대남 담당 비서,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 예비회담자로이홍구 부총리와 회담을 하는 등 북한 최고의 권력 서클 안에서 극비정보를 다뤘던 특급 정보 보유자였다. 그는 1997년 2월 12일 김덕홍과 함께 넘어왔고, 그 이전에 중국에서 먼저 만난 전 조선일보 편집장이었던 김용삼 기자에게 광주 사태는 북이 저지르고, 그 책임을 남한에 뒤집어씌운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 1순위로 전했다. 귀순했을 당시 황장엽은 이 '간판폭로' 내용을 2차장인 이병기와 부장인 권영해에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황장엽이 이 사실을 스스로 털어놓지 않았다 해도, 권영해는 그가 공작을 통해 확인했다는 북괴 개입 정보를 크로스체크 차원에서 황장엽을 통해 재확인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권영해는 이 중요한 정보 확인의 필수 이정표를 건너뛰었다는 의미로 증언을 했다. 왜 그랬을까? 권영해에게는 황장엽에 대해 숨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권영해가 황장엽의 북한개입 진술을 듣지 않는 상태에서 북한에 공작원을 보내 북 개입 사실을 확인시켰을까? 그것이 권영해의 말 그대로 "일상적인 업무 범위"에 해당하는 공작이었을까? 웃기는 이야기다.
경천동지할 정보, 왜 감췄나?
논리적으로나 업무의 성격으로 보아도, 권영해는 황장엽으로부터 1997년 2월 12일 직후 이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황장엽이 급히 메모지에 몇 자 써서 김용삼 기자에게 인편으로 전하면서 자기가 귀한 정보의 소지자라는 것을 낚싯밥처럼 써먹던 그 귀한 정보를 권영해에게 털어놓지 않았다면 이는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황장엽 제보에 충격을 받았을 권영해의 모습이 상상된다. "아~ 전두환! 전두환은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2개월 후면 대법원 확정판결이 예정돼 있는데~ 북한 개업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면, 나는 어떻게 되고, 내 주군인 김영삼 각하는 어찌 되겠는가?"그래서 훗날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북으로 공작원을 보내 사실 여부를 확인시켰을 것이고, 사실을 확인한 권영해는 입단속을 시키고, 탈북자 신문관들에까지 "탈북자 신문 시 절대로 5.18에 대해 질문하지 말라"는 내규를 설치했을 것이다. 만일 권영해가 전두환을 억울하게 해코지하지 않았다면, 당시 그는 이 '신나는' 초특급 정보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조그만 정보 한 개라도 찾으면 존재가치를 부각시키려고 안달나는 세상에서 이 엄청난 정보를 획득해 놓고도 침묵했다는 것은 달리 이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이 뒤집히고, 세계 여론이 뒤집힐 이 어마어마한 정보가 "일상적 정보다?" 이는 우리가 물고늘어져야 할 커다란 이슈가 아닐 수 없다.
490명의 정체
배경지식 없이 490명의 제삿날이 1980년 6월 19일이라 하면 사람들은 낯설어 할 것이다. 이 숫자가 광주폭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간단히 요약하고자 한다.
1. 북한 문헌들과 남한 사건 문헌들에는 600명이 광주에서 핵심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 미 CIA 보고서에는 550여 명이 관찰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2. 북한에서는 해마다 28개 전 도시에서 5.18 기념행사가 성대히 열리고 5.18 노래 [무등산의 진달래]가 불린다. 그 가사에는 통일 위업을 달성시키려고 광주에 와서 싸우다 "무리죽음"(떼죽음)당한 영혼이 무등산 진달래로 피어났다는 내용이 있다.
3. 북한 문헌 4개와 기록영화에는 광주에서 475명이 무리죽음 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렇게 많은 인력이 하루에 다 죽을 수 있는 상황은 5월 21일 밤의 교도소 공격이었다. 이날 공수부대가 소모한 실탄은 48만 4,840발이었다.
4. 광주에는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나오는 용병급 전투 매니어 600명만 온 것이 아니라 광주시를 독점한 남녀노소 민간 심리전 부대가 따로 왔다. 광주 현장 사진에는 시체 관들을 늘어놓고, 북한 고위급 얼굴들이 모여 침통한 분위기를 분출하는 사진들이 있고, 1, 2층 넓은 도청 공간에서는 질서 있게 수백 명이 정렬해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식 장면이 촬영돼 있다.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에 5월 22일 15:08분에 서울서 온 대학생 500여 명을 환영했다는 기록도 아마도 이 추도식을 환영식으로 위장한 시간 기록일 것이다.
5. 475명이 죽었다는 것은 북한의 노래 가사와 문헌들과 기록영화와 사진들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면 475명보다 15명 더 많은 490명은 무슨 뜻인가?
북괴집단은 1980.5.24. 정오경 전남도청을 버리고 철수했다. 그중에 부상자 15명이 끼어 있었을 것이다. 이 15명이 북한으로 가서 하나씩 부상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마지막 부상자가 1980.6.19에 사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전사의 사망일을 490명 전체의 사망일로 지정해 제삿날을 통일시켰을 것이다.
화룡점정, 5.18의 마침표
전두환 대통령의 명예회복 문제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제 5.18은 북한이 주도한 남침행위로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남침용 게릴라 폭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사기쳐 국가 위에,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국민을 기만하고 착취한 전라도 인간들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침뱉기를 당하고 돌팔매를 당해야 할 것이다. 이 이상의 증명은 없다. 5.18 진실은 증명되었다! Q.E.D!!
5.18 조사위는 무엇을 했는가?
1. 5.18 조사위는 광주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5.18 유공자로 위원회에 편성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2. 위원회 발간사에는 ‘이 보고서를 5.18 영령들에 정중히 헌정한다’는 발간 목적이 기재돼 있다. 5.18 성역화를 위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자기 고백이다.
3. 모든 연구나 조사에는 전체적인 맥락이 있다. 그런데 국가는 광주인들 107명에 임시 공무원 직급을 부여해 학자가 연구하여 제시한 사실 증거들을 다른 증거로 무력화시킨 것이 아니다. 각 사실들에 대한 학자의 해석을 자의적으로 부정하는 방법으로 북한개입을 부정했다. 이를 위해 516억 원을 탕진한다.
4. 보고서 1,248쪽에는 조사위 명부도 없고, 따라서 각인의 이력도 없다. 보고서 작성 주체가 없는 희한한 유령보고서다
5. 5.18은 북괴가 주도했다는 데 대한 권영해 증언과 미 CIA 문서는 무시, 언급조차 안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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