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제2의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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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6-25 09:29 조회4,00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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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제2의 6.25
아래 사진을 보면 어린 애를 업고, 안고, 손에 잡은 사람들이 있다. 당시 광주의 살벌했던 현장에 어린아이를 업고 안고 손에 잡고 나설 광주인들은 없었다. 모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고 아이들이다. 사진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수백 명으로 보이지만 모두가 북한인들이다. 북한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느냐 의문이 들 것이다.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유병현 대장은 그의 회고록 제453쪽에서 5.18직전 전남해안을 경비하던 해군병력을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다는 사실을 밝혔다. 목포를 비롯한 전남 해안이 텅 비어있었기에 대형 선박들이 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의혹은 6.25직전에도 있었고, 2001년에도 있었다.
6.25 초기,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의 회고록 제55족-57쪽에는 당시의 한국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10대 불가사의가 기록돼 있다. 그 중에는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 및 연대장 급의 대대적인 이동이 단행되어, 지형과 병사에 익숙치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한 사실,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쳐 전후방 부대를 대대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장병들로 하여금 정신을 잃게 한 사실, 6월 11부터 발령됐던 비상 경계령을 6.24일 0시에 해제한 사실, 전쟁 하루 전에 전 장병의 50%를 휴가, 외출, 외박의 형태로 부대를 떠나게 한 사실, 6월 24일, 전군의 중령급 이상을 육군본부 장교 클럽에 초청해 양주와 댄스파티를 열어 고급 장교들로 하여금 6.25일 새벽까지 술에 취하게 한 사실, 국군이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는데도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허위 방송을 하여 군과 국민을 혼란에 빠지게 했고, 한강 나루터에 피란 나간 애국자들을 다시 귀가시켜 인민군 죽창에 찔려 죽게 한 사실, 전방에서 총성이 울리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군을 지휘해야 할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2001년 대통령-청와대-국방부-해군사령부 모두 북한 추종자
1) 2001. 6. 2일 11:43분 울산 앞 바다 22마일 동쪽에서 청진2호(13,800톤 급) 발견됐다. 울산 동쪽에서 항로를 서쪽으로 잡아 제주도 북쪽을 가로지른 후 영해를 따라 북상하여, 6.3일 1500시에 NLL을 통과한 후 해주로 진입했다. 해군 초계정 6척이 27시간 동안 동행. "동행하는 건 좋지만 6척씩이나 따라 다니는 건 좋지 않기요". NLL을 지나면서 그들이 던진 말이다. 이에 대해 정부와 군은 북한 선박이 제주해협과 NLL을 통과한 것은 항로 거리를 300-400마일 단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2) 2001. 6. 2일 12:35분, 청진2호 발견시간으로부터 불과 40분 후에 제주도 짓 북방에서 령군봉호(6.635톤)가 발견됐다.그 큰 배가 제주북방에 나타날 때까지 탐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 배는 서북쪽으로 항로를 잡아 8시간 동안 영해를 침범한 후, 20:20분에 영해를 이탈했다.
3) 6.2일 19:10분, 령군봉호 발견시간 7시간 후에 백마강호(2,740톤)을 제주도 서북족에서 발견했다. 이 배는 제주도와 본토의 중간선을 따라 동쪽으로 항해하여 8시간 영해를 침범한 후 6.3일 03:08분에 영해를 이탈했다. 위 3척의 배 모두가 제주북단과 본토 남단의 중간성을 따라 2척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지르고, 1척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면서 마치 시위를 하듯이 영해를 통과했다.
4) 군 지휘부의 눈 감아 주기 골프치기 작전
김동신 국방장관: 16:30분, 골프 강행(언로사 사장 및 여당 의원)
조영길 합참의장:6.2일13:30분. 청진2호 및 령군봉호 사건을 보고 받고 골프 강행. 클럽하우스에서 맥주-저녁을 한 후, 20:00분에 공관 행
장정길 해군총장: 13:00에 골프 강행
5) 6.3일 17:00시, 임동원 장관 주재로 NSC(안보회의)가 열렸고 아래와 같이 결정했다.
(1) "이번 영해 통과에 대해서는 6.15공동선언정신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허용한다"
(2) "북한에게도 무해통항권을 인정한다"
(3) "사전에 통보하거나 허가요청이 있을 때에는 NLL 통과도 허용한다"
6) 6.4일 15:15분, 대홍단호(6,390톤)가 소흑산도 남서쪽 10마일 상에서 영해 침범하는 것을 발견했다.22:00시에 제주 서북쪽 28마일 해상에서 제주해협을 향해 남하했다. "제주해협을 통과하여 청진항으로 가려한다"는 게 북한의 답변이었다.
7) 6.5일 일간지 보도: 5월27일 82톤 꽁치 어선이 조수에 밀려 어망이 북으로 떠밀려 가는 바람에 NLL을 2마일 정도 넘었다가 무차별 사격 8발 중 2발이 배에 명중됐다. 이 사실이 뒤늦게 발표되자 정부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북한은 쏘고, 남한은 안 쏘고"라는 비난이 일었다. 정부는 선장을 처벌했다.
8) 6.13일 23:45분, 남포2호(2,437톤)가 동해 NBL(Northern Boundary Line)을 5마일 넘었다.750톤급 초계함이 "서진" 동쪽 35마일 지점에서부터 218마일까지 183마일을 NLL남쪽 5마일 선을 따라 20시간 이상 동행했다.
9) 6.24일 새벽 2시 50분 경, 9톤 짜리 손바닥만한 북한어선 1척이 서해백령도 서북방 4.5마일 해상의 NLL을 2.5마일 가량 침범한 채 남하하자,대청도 해상에서 초계 중이던 우리 해군 고속정 편대가 즉각 출동해 기적과 경고방송 등 검색을 시도했다. 선원 5명이 탄 북한어선은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며 해군 고속정에 횃불을 던지고, 갑판위로 올라와 각목, 쇠파이프, 식칼을 휘두르며 깡다구 시위를 벌였다. 해군 고속정은 북한어선 전방 45m 해상에 K-2 소총 공포탄 9발을 발사하는 등 경고사격을 가했고 이에 북한어선은 새벽 5시 27분께 NLL을 넘어 북측으로 퇴각했다. 이를 두고 여당은 "해군, 영해수호 의지 과시"했다며 한나라당에 정치공세를 가했고, 한나라당은 "해군 태도는 적절했다"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여기엔 이상한 구석이 있다.
NLL이 너무 넓어서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없다던 군이, 수천톤 짜리 상선(?)이 제주도 북방에 나타날 때까지 2척씩이나 잡지 못했던 해군이, 그것도 새벽 2시에, 거기에다 또 NLL을 넘자마자, 또 한층 더해서 위치를 꼭 찍어 가르쳐 주어도 파도 속에 묻혀 찾을까 말까 한 9톤짜리 어선을 점쟁이처럼 곧바로 찾아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6.2일 제주해협을 유린한 청진2호는 무려 14,000 톤이다. 5.27일 동해에서 무차별 총을 맞고 돌아온 꽁치어선은 겨우 82톤이다. 그런데 불과 9 톤 짜리 어선이 그것도 한밤중에 NLL 부근의 파고 높은 망망대해에 출현했다는 건 어선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9톤 짜리 갑판에서 감히 횃불과 각목, 쇠파이프, 식칼로 저항을 보였다는 것은 순수한 어부들의 행동으로 볼 수 없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코너로 몰린 정부가 북한에 쇼를 요청하자 북한에서 사건을 극화시키기 위해 공작원들에게 그런 쇼를 하게 한 것이라고 보였다. 남한 해군과의 접선 위치 역시 사전에 내통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10) 이어서 해군 관계자는“현재 218마일에 이르는 동해의 NLL을 모두 방어한다는 것은 군사력상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11) 중앙일보 2001년 06월 16일 제1면 보도내용(지난3월 관계부처, 남북해운합의서 협의)
"남북간 해운합의서 추진은 사전밀약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양수산부 초안에는 남북 국적 선박의 자유로운 통항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사실상 국제법상의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 을 의미하는 것이다"
광주에서 벌어진 인민재판과 처형 사건
5월 12일 미국이 비밀해제하여 한국정부에 보낸 외교문서는 광주에서 극렬분자들이 인민재판을 열어 여러 명을 처형했다는 기재가 있다.
그런데 광주 현장 사진들 중에는 4명이 팔을 꺾는 실력을 가진 어깨들과 총을 가진 어깨들에 의해 강제 연행돼가는 4명의 사진이 있다. 이들은 어째서 연행돼 가는가?
북한에는 5호담당제가 있다. 아래 사진에는 수백 명이 있고, 이들은 다 남남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얼굴을 아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조별로 활동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알기에 낯선 사람이 끼어들면 그 사람을 끌어다 사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북한 말씨를 사용했을 터인데 한국 사람이 끼어들면 그가 분명히 북한 말씨를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한인들이 광주에 왔다는 것이 발각되면 북한은 유엔에서 전범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철저한 기도비닉을 위해서는 의심되는 남한 사람을 끌어다 사살해야만 했다.
결 론
5.18은 북한이 광주-전남을 교두보로 하여 획책한 게릴라전이었다. 만일 계엄군이 이를 막지 못했다면 전국적 봉기가 발생함과 동시에 남침과 연결되어 통일전쟁으로 확대됐을 것이다. 5.18은 선전포고 없는 북의 침략전이었다. 제2의 6.25전쟁이었다. 그 후유증은 실로 가공한 것이었다. 북과 야합한 광주-전라도가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0.6.2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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