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서울형사사건 답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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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6-30 17:05 조회4,23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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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변 서
사건 2020노804
가.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명예훼손)
나. 사자명예훼손
다. 상해
라. 명예훼손
마.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피고인 지만원
피고인 지만원은 새로운 증거를 추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서를 제출합니다.
답변서의 요지
1)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북한군 개입] 표현이 ‘허위사실’이냐 또는 ‘의견’이냐에 대한 것입니다.원심은 원심판결서 제28 내지 31쪽에서 4가지 근거를 들어 [북한군 개입] 표현이 ‘허위사실’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이에 대해 피고인은 위 4가지 근거가 허구임을 석명하고,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가 2020.5.12. 출범한 5.18진상규명 위원회가 앞으로 2년 또는 연장하여 3년에 걸쳐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허위사실]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어필하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5.18 무장 폭동을 북한특수군 600명이 주도하였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데 대한 근거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증189는 2020.5.12.자 MBC보도입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2020.5.12.자로 출범한다는 사실과 동 위원회의 제3과가 북한군 개입 여부 등을 규명한다는 사실이 소개돼 있습니다. 이 사실 자체로 [북한군 개입] 여부는 국방부가 동 위원회를 통해 앞으로 2년 또는 연장하여 3년에 걸쳐 조사될 사안이라는 점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는 [북한군 개입 표현은 허위사실]이라는 원심 판결과 정면 배치합니다. 더구나 원심판결은 아래 제(2)항의 석명내용과 같이 증명되지 않은 4가지 허구를 근거로 한 것이어서 파기돼야 할 것입니다.
(2) 원심 판결의 4가지 허구성에 대해 석명합니다. 원심의 판단 근거가 허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은 방어적 차원의 답변일 것입니다.
(3) 한걸음 더 나아가 피고인은[북한군 개입]을 왜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가를 공세적 차원에서 답변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피고인이 2020.6.10.에 발간한[북조선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를 증195로 제출합니다. 이 책은 북한군 개입을 입증하는 연구서이며 이 책의 일정 부분을 답변서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이 신간은 피고인이 무턱대고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와 논리에 근거한 연구결과라는 점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증150의 안양지원 판결은 [북한군 개입] 표현이 피고인의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저서를 통해 주장한 것임으로 이는 피고인의 역사조명 노력의 산물일 뿐, 범의를 가지고 표현한 [허위사실]이 아니라는 취지였습니다. 증183은 피고인이 [북한군 개입]에 관해 4시간 30분에 걸쳐 국회공청회에서 발표한 방대한 양의 발제내용(증188)이 ‘허위사실’이 아니라 ‘의견’에 해당하기 때문에 영등포경찰서가 불기소 송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같은 [북한군 개입] 표현에 대해 광주출신 판사들이 재판을 하면 유죄가 선고되었고, 타 지역 출신들이 판단을 하면 무죄로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2) 피고인은, 1987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 평화위원회 명의로 발행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에 수록한 얼굴 5개의 사진들이 1982년 북한이 발행한 삐라 얼굴 과 일치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울러 피고인은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였다는 것은 정의평화위원회가 북한과 내통하여 북한 자료를 계엄군을 모략하는 용도에 사용했을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또한 통일부가 운영하는 [북한자료센터]에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을 검색하면 ‘자료유형’ 난에 [북한 원전]이라 기재돼 있어 북한이 자료의 원전이라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원심은 이 두 가지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원심은 피고인이 제출한 증61의 삐라가 북한이 발행한 것이라고 믿을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원심 판결은 아래와 같은 3가지 이유로 파기돼야 할 것입니다.
(1) 증61이 삐라는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한국근현대사박물관 3층에 [불온삐라] 난에서 2012.2.23.에 전시돼 있었습니다. 이를 촬영한 사진을 증192와 193으로 제출합니다.
(2)증61의 ‘1982년 삐라’에 기재된 피해통계자료는 정확히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제591쪽에 기재된 내용과 100% 일치합니다. 남한의 어떤 단체나 개인이 1982년에 발행된 문헌 자료 그대로를 같은 해인 1982년에 인용할 수 있는 것이며, 선진 인쇄기술을 팽개치고 구태여 북한의 낙후된 인쇄기기를 사용하여 삐라를 만들 어 살포하고, 그 삐라가 한국근현대사박물관에 ‘불온삐라’ 코너를 장식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아마 드물 것입니다.
(3) 2016. 피고인에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을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서 검색했을 때 자료유형 난에는 [북한 원전]이라고 기재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검색해 보니 [단행본]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통일부가 [북한 원전]을 [단행본]으로 바꿔놓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북한 원전] 기재가 광주에 불리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원심은 [북한 원전]에 대한 피고인의 주장을 아무런 근거 없이 무시하였습니다.
구체적 답변
2. 북한군 개입 표현을 허위사실 적시로 판결한 원심 기재에 대한 구체적 답변
1)[북한군 개입] 여부는 국방부에 설치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3과가 2020.5.12.부터 앞으로 2년 또는 연장하여 3년 동안 조사해야 할 사안입니다.이에 대한 증거는 증189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군 개입] 표현은 지금의 시점에서 미결의 사안이며, 앞으로 2~3년 이후에야 사실 여부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북한군 개입] 표현을 허위사실로 판결한 원심은 파기돼야 할 것입니다.
2) 이 사건 원심이 북한군 개입 표현을 [허위사실]로 판결한 4가지 이유는 허구입니다.
원심은 [북한군 개입] 표현이 [허위사실의 적시]라 판결했고, 그 이유를 4가지로 규정했습니다. (1) 1997의 대법원 판결, (2) 미 CIA의 간이 보고서, (3) 정홍원의 발언, (4) 2016년 6월호에 실린 전두환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4개의 이유는 증명되지도 않았고, 정당하지도 않으며, 허위들입니다.
(1) 1997의 대법원 판결서는 전두환의 내란죄를 판결한 것이지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해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대법원은 [판시사항]에 대해서만 판결합니다. 그런데 1997년의 대법원 판결서에 적시된 20개의 판시사항에는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판사사항이 없습니다. 대법원은 헌법을 수호하려고 결집한 광주시위대를 전두환 등이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것을 내란죄로 규정하였습니다. 시위대를 진압했다는 사실이 그 시위대에 북한군이 개입됐다는 사실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1997의 대법원은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못박아놓고 전두환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원흉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만일 5.18에 북한군이 개입한 사실이 당시에 알려져 있었다면 5.18은 순수한 민주화운동인 것으로 인정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북한군 개입 주장을 시작한 사람은 오로지 피고인 한 사람 뿐이며 그것도 최근입니다. 그런데 1996년 내지 1997년에 다루어진 전두환 내란 사건 재판에 [북한군 개입] 문제가 어찌 다뤄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대법원 판결서 그 어디에도 [북한군 개입]을 배제하는 판결은 없습니다. 따라서 1997의 대법원 판결서를 가지고는 [북한군 개입]을 배제한 원심 판결은 사실을 왜곡한 판결입니다.
(2) 원심이 인용한 미국 CIA 보고서는 2017.1. 경에 미국이 한국정부에 이양했던 자료입니다. 5.18이 발생하기 9일 전인 5.9.자의 기재는 북한이 남한 대학가에 창궐한 극렬시위를 기화로 군사행동을 보일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고, 6.6.자 기재는 북한이 광주사태를 기화로 군사행동을 취할 의사가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를 놓고 원심은 미 CIA 분서에도 [북한군 개입]에 대한 긍정적인 기재가 없다며 피고인의 표현이 허위사실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언어도단입니다. 미국의 감시수단은 주로 인공위성와 통신감청입니다. 미국은 대규모 부대 이동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 간첩 침투 예를 들면 1968년 1월 21일 31명의 김신조 팀의 청와대 침투 사실이나, 그해 11월, 울산 지역에 120여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한 사실과 같은 침투관련 사실을 탐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역시 10~30명 단위로 쪼개서 여러 가지 침투 수단과 경로를 통해 기도비닉 하에 침투하는 것이며, 이러한 침투를 발견하는 임무와 능력은 미군에 있지 않습니다. 한국군이 탐지하지 못한 침투사실을 미국 정부가 무슨 수로 탐지한다는 것입니까.
또한 원심이 인용한 미CIA 문서는 1980.6.6.이 최신입니다. 미국 정부는 2020.5.12, 43건 140쪽 분량의 외교문서를 비밀 해제하여 한국정부에 이관했다합니다. 이를 습득하기 위해 피고인 측은 문서송부촉탁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 43건의 자료들은 1979.12.13.부터 1980.12.13.까지 만 1년 동안의 보고서들이며 이들은 원심이 인용한 미국 보고서들보다 더 최신이고 더 자세합니다. 이미 유튜버들이 미국 국무부 홈페이지를 통해 검색해낸 보고서 몇 개만 보더라도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정황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미국 보고서는 5.18을 폭동(riot) 또는 봉기(uprising)로 표현하지 ‘민주화운동’이라 표현한 바 없습니다.
미국 문서들에 의하면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진 것과는 정 반대로 계엄군은 병사들에게 자동적으로 발동하도록 규정돼 있는 자위권을 끝까지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는 폭도들이 점령한 도청에 목숨을 걸고 잠입하여 폭도들이 설치해놓은 폭발물에서 뇌관을 제거함으로써 광주시 재탈환 시에 발생할 수 있는 대규모 피해를 사전에 제거할 정도로 광주시민의 생명을 존중했으며, 재탈환 시에는 참으로 기발한 방법(RESOURCEFULNESS, 소규모 특공조를 은밀히 목표시설에 침투시켜 족집게 식 진압)으로 진압에 따른 희생을 극소화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 사실들은 지극히 칭찬해 주어야 할 대목들이라고 기재하였습니다. 이렇게 광주시민이 생명을 귀하게 여긴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사살명령(발포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국 정부의 견해로는 만부당한 억지일 것입니다. 광주에서 사망한 광주인은 154명, 계엄군과 경찰은 27명입니다. 이 통계가 10일 동안 무장한 시민군과 실탄이 없는 계엄군과의 전투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의 대차대조표입니다. 그런데 5월 단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일방적으로 [학살](massacre) 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기밀 해제된 미국 외교문서>
CREDIT FOR CASUALTIES BEING NO HIGHER THAN THEY WERE IN KWANGJU IS GIVEN ENTIRELY TO THE TROOPS, WHO "RESTRAINED THEMSELVES FROM USING THEIR RIGHT OF SELF DEFENSE." THEIR RESOURCEFULNESS IS PRAISED AS WELL: AWARE THAT RIOTERS HAD MINED THE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MARTIAL LAW TROOPS INFILTRATED... THE BUILDING AND DEFUSED THE CHARGES, "THUS PREVENTING A MASSIVE BLAST WITH MANY CASUALTIES WHEN KWANGJU WAS RETAKEN. FINALLY, SECURITY FORCES ARE CREDITED WITH GREAT GENEROSITY OF SPIRIT IN R'ELEASING WITH ADMONITIONS 1,010 OF THE 1,740 PERSONS TAKEN INTO CUSTODY DURING AND AFTER THE INSURRECTION.
광주에서의 희생자 수가 예상보다 적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자위권을 발동하지 않고 끝까지 자제한 계엄군의 덕분이었다. 진압과정에서 계엄군이 발휘한 출중한 계략도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계엄군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청 건물에 잡입하여 폭도들이 설치한 폭약의 신관을 제거함으로써 광주시를 재 탈환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대참사를 미연에 방지시켰다. 이 점은 매우 칭찬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끝으로 계엄사가 폭동 과정과 상황 종료 후에 검거된 폭도들 총 1,740명중 1,010명을 훈방하여 관용을 베푼 것도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위 기재의 500명 + 50명은 피고인이 주장하는 600명과 유사한 숫자입니다.
시위대15만 명이 폭도로 변했다는 기재가 있습니다. 이는 광주 폭동의 규모를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공수부대 숫자는 3,000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공수부대가 전남의대 옥상에 거치된 기관총 사격을 받으며 수세에 몰려있었다는 기재도 있습니다.
과격분자들이 실권을 잡아 인민재판을 열었고, 몇 명이 처형됐다는 기재가 있습니다. 이는 광주의 현장사진과 일치합니다. 광주에는 광주인 4명이 건장한 어깨들에 의해 팔이 꺾인 상태에서 또는 집총한 어깨들에 의해 도청으로 끌려가는 사진들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어린 애를 업고, 안고, 손에 잡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시 광주의 살벌했던 현장에 어린아이를 업고 안고 손에 잡고 나설 광주인들은 없었습니다. 모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고 아이들입니다. 사진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수백 명으로 보이지만 모두가 북한인들입니다. 북한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수 있느냐 의문이 들 것입니다.
증196은 유병현 회고록입니다.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유병현 대장은 그의 회고록 제453쪽에서 5.18직전 전남해안을 경비하던 해군병력을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목포를 비롯한 전남 해안이 텅 비어있었기에 대형 선박들이 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6.25가 임박했을 때까지 군 지휘부에 꼭꼭 숨어 있다가 남침 직전에 10대 불가사의를 연출시켰던 고위 간첩들의 조치를 방불케 합니다.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의 회고록 제55족-57쪽에는 당시의 한국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것을 의심케 하는 10대 불가사의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 중에는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 및 연대장 급의 대대적인 이동이 단행되어, 지형과 병사에 익숙치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한 사실,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쳐 전후방 부대를 대대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장병들로 하여금 정신을 잃게 한 사실, 6월 11부터 발령됐던 비상경계령을 6.24일 0시에 해제한 사실, 전쟁 하루 전에 전 장병의 50%를 휴가, 외출, 외박의 형태로 부대를 떠나게 한 사실, 6월 24일, 전군의 중령급 이상을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초청해 양주와 댄스파티를 열어 고급장교들로 하여금 6.25일 새벽까지 술에 취하게 한 사실, 국군이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는데도 국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허위 방송을 하여 군과 국민을 혼란에 빠지게 했고, 한강 나루터에 피란 나간 애국자들을 다시 귀가시켜 인민군 죽창에 찔려 죽게 한 사실, 전방에서 총성이 울리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군을 지휘해야 할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2001년에도 있었습니다. 2001. 6. 2. 11:43분 울산 앞바다 22마일 동쪽에서 북한의 대형 선박 청진2호(13,800톤 급) 발견됐습니다. 이 선박은 울산 동쪽에서 항로를 서쪽으로 잡아 제주도 북쪽을 가로지른 후 영해를 마구 휘젓고 다녔습니다. 40분 후인 12:35분, 제주도 바로 북방에는 령군봉호(6.635톤)가 한국 영해를 휘젓고 다녔습니다만 한동안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에는 5호담당제가 있습니다. 사진에는 수백 명이 있고, 이들은 다 남남들로 구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얼굴을 아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조별로 활동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알기에 낯선 사람이 끼어들면 그 사람을 끌어다 사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북한 말씨를 사용했을 터인데 한국 사람이 끼어들면 분명히 북한 말씨를 들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북한인들이 광주에 왔다는 것이 발각되면 북한은 유엔에서 전범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철저한 기도비닉을 위해서는 의심되는 남한 사람을 끌어다 사살해야 합니다. 아래에는 4명의 광주인이 건장한 어깨들에 팔을 꺾여 도청으로 연행돼 가는 장면입니다. 이 4장의 사진이 미국 외교문서 내용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정홍원과 전두환은 공무원들이며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피고인이 [북한군 개입]을 주장한 것은 증151 즉 [5.18분석 최종보고서]의 책 내용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피고인 주장이 허위사실인 것으로 판단하려면 증151의 내용이 허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원심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 판결, 미 CIA의 간이 보고서, 정홍원의 발언, 전두환의 인터뷰 등 4가지를 내세워 증151의 내용이 허위라 판결하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정홍원 전총리는 김관진 국방장관의 발언 “북한군 개입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발언에 터 잡아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기 때문에 원심은 피고인의 북한군 개입 표현이 허위사실이라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김관진의 발언은 2005~2007에 진행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보고서 결과에서 북한군 개입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애매한 말로 출발했습니다.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12.12, 5.17, 5.18.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노무현 시대인 2005.5.27.에 형성되어 2007.7.24에 “조사결과보고서”를 내는 순간에 해체됐습니다. 조사위원은 모두 12명, 법조, 언론, 학계 등 외부위원이 7명, 국방부 내부위원이 5명, 그리고 조사관으로는 이중 4명이 지명됐습니다. 위원장은 이해동 목사, 전남 목포 출신이며, 이른바 ‘재야민주화세력’의 원로로 2회에 걸쳐 감옥에 간 족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이해동은 2005년 당시 위원장에 내정되면서 위원회의 주안점이 1) 발포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가와 2) 행불자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조사활동의 핵심이라고 공언했습니다, 다시 말해 5.18에 북한 특수군이 왔느냐에 대한 것은 당시 위원회의 조사항목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김대중의 측근 이해동 목사의 지휘로 이루어진 이 진상규명 노력도 [규명 범위]를 위 3대 요소에 국한했기 때문에 조사결과를 담은 570쪽 분량의 보고서를 냈지만 그들의 원하는 결과는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사실이 이와 같음에도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은 거짓을 말했습니다. 2013년 5월 27일에는 대변인을 통해 그리고 5월 30일에는 강운태 광주시장을 만나 2007년 7월 24에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조사결과를 들먹이면서 조사결과에는 1)북한특수군이 광주에 개입한 사실이 없고. 2)간첩 이창용도 5.18과 관계없이 별도로 남파된 간첩이었다는 결론이 있는데, 현재의 국방부는 그 2007년의 조사결과 보고서 결론을 존중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위 보고서에는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규명 범위]에 [북한군 개입 여부]가 들어가 있지 않았는데 그 누가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해 조사를 했다는 것입니까. “조사하지 않았다”는 말이 맞는 말이고, “조사했는데 확인할 수 없었다”는 말은 정반대의 말입니다. 2019.2.12.자 조선일보를 위시한 수많은 뉴스들에 의하면 국방부는 북한군 개입에 대해 조사한 바가 없고 단지 앞으로 구성될 5.18진상규명위원회가 2년 내지 3년에 걸쳐 조사해야 할 미래의 사안이라고 밝혔습니다. 김관진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김관진의 거짓말에 의해 정홍원 당시 총리는 2013년 6월 10일, 국회 답변에서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정부의 판단과 다른 표현을 하는 것은 반사회적 범죄로 엄벌할 것이다” 이런 발언을 했고, 이 발언 직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북한군 개입]을 기정사실화하여 5개월 동안 방송을 진행한 TV조선과 채널A 두 방송국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북한군 개입]에 대한 방송을 기획하고 진행한 간부 4명씩에 대해 감봉이라는 중징계처분을 내렸고 “이제까지 북한군과 관련하여 방송한 내용은 모두 사실과 다른 것들이었다”는 선언과 함께 사과 방송을 하도록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성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북한군 개입]에 대한 조사가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2019.2.12.자 조선일보를 위시한 수많은 뉴스들에 의하면 국방부는 북한군 개입에 대해 조사한 바가 없고 단지 앞으로 구성될 5.18진상규명위원회가 2년 내지 3년에 걸쳐 조사해야 할 미래의 사안이라고 밝혔습니다. 김관진이 과 정홍원이 엄청난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2020.5.12.자 MBC는 2020.5.12.에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출범하였고, 위원회의 제3과가 [북한군 개입]에 대한 조사를 한다고 보도했습니다(증189). 2019.3.13. [5.19진상규명법]이 발효됐고, 그로부터 만 14개월이 지나 조사위원회 제3과가 설치되어 앞으로 2년 또는 연장하여 3년 동안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해 조사를 하는 것입니다(증189). 따라서 김관진의 발언과 정홍원의 발언은 신중하지 못한 허위사실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며, 이 사건 원심 재판부와 광주 재판부들 역시 허위사실을 근거로 피고인에 죄를 물은 것입니다
4) 원심이, 2016. 6월호에 실린 신동아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북한군 개입은 5.18을 지휘한 전두환도 모른다 했다, 피고인은 거짓을 말했다”는 취지로 유죄를 인정한 부분 역시 황당한 토끼몰이입니다. 아래는 2016.6.16.자 신동아 기사의 발췌입니다(증190). 원심은 피고인에게 불리할 수 있는 위 신동아 기사 제18쪽의 기재만 인용하였고, 피고인에 유리할 수 있는 제11쪽 기재는 감추었습니다.
기자: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전두환: 전혀
고명승: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 한 일이 없습니다.
전두환: 뭐라고? 600명이 뭔대?
정호용:이북에서 600명 왔다는 거요. 지만원씨가 주장해요.
전두환: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위 대화는 수많은 언론들이 확산시킨 내용입니다. 그런데 같은 신동아 기사 제11쪽에는 아래와 같은 기재도 있습니다.
전두환:12.12가 뭐더라
이순자: 10.26사건 나고 정승화(육군참모) 총장 새로 수사한 거요.
전두환이 직접 지휘해서 일으킨 12.12에 대해서조차 기억이 없는 것입니다. 전두환이 정신이 없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기재된 것이며, 이는 곧 전두환의 인터뷰 표현들이 증거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런 인터뷰 기사를 언론들은 “전두환도 모른다 했는데 원고가 이상한 말을 한다”는 식으로 매도했고, 원심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유죄로 판결하였습니다.
반면, 전두환 회고록(2017.3.27.)에는 북한군의 개입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5.18 폭동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요지의 기재들을 하였습니다. 이를 증191로 제출합니다.
가)1980.5.21. 연고대생으로 불리던 600명이 벌인 체계적인 작전내용은 도저히 광주의 일용직, 넝마주이, 무직자들이 벌일 수 있는 행동으로 불 수 없다. 북한특수군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는 요지의 기재내용들이 있습니다.
증191의 제406쪽에는 "무기고 습격과 시위대의 무장"이라는 소제목 하에 1980.5.21.자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습니다.
“검찰기록과 안기부 기록에는 전남지역 17개 시군 비밀시설에 숨겨져 있는 38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었다는 사실, 600명의 폭도들이 부대 이동계획을 알아내 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정규 사단인 제20사단 차량부대를 습격하고, 그 차량들을 가지고 군납업체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 가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0여대를 운전했다는 사실이 있다. 이런 일들은 당시의 폭동 일선에 서 있던 업소종업원 일용직노동자 넝마주이, 부랑자 등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도소를 6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했고, 8톤 트럭 분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한 사실 등은 북한특수군을 연결짓지 않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나) “6회에 걸친 교도소 공격을 했는데도 그 중에 유공자가 없다는 사실, 군인복장을 하고 꿇어앉은 광주시민에 총을 겨누고 있는 의도적인 모습, 군특수장비와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고, 자가용 시대도 아닌 때에 수백 대의 군용트럭, 버스 등을 일시에 몰고 다닐 수 있는 운전자들이 광주에 있었는지, 등 풀리지 않는 의혹들 역시 고도로 훈련된 북한 게릴라군의 개입을 의심하게 한다. ”
증191의 제518쪽 내지 522쪽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해는가”라는 중간 제목 하에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여러 가지 의혹들이 제시돼 있습니다. 아래는 그 취지입니다.
“교도소를 6회씩이나 공격했는데 그 공적을 내세워 5.18유공자가 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이 가고, 장발에다 군인복장을 하고 시민들을 꿇어앉힌 상태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괴한들은 분명 한국군이 아닌데 위장을 한 광주시민이 어째서 광주시민을 꿇어앉히고 총 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간다. 군 특수장비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하고, 운전수가 귀하던 그 시절에 500대가 넘는 차량들을 운전하는 사람들이 과연 광주의 하층 계급들인가에 대해 의혹이 가고, 참혹하게 훼손된 사신들을 끌고 다니며 이것이 계엄군의 소행이라 한 것은 전형적인 북한의 모략 수법과 일치한다. 연고대생 600명이 존재한다는 설도 많이 떠돌았고, 5월 20일에는 서울대학생 500명이 광주를 지원하기 위해 왔다는 가두방송이 있었고, 22일 15:08에는 서울대학생 500명에 대한 환영회도 열렸는데 이들의 정체가 북한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다) 통신감청 내용으로는 군중 속에 간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치안이 전무한 상태에서 정보요원을 투입할 수는 없었다. 북한군 개입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 제530-531쪽)에는 당시 무전교신으로 보아 폭동군중 속에 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데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치안이 확보돼 있지 않은 살기어린 폭동 현장에 정보원을 침투시켜 간첩을 색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북한간첩들의 투입 정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하고 있었지만, 북한특수군 존재에 대해 파악할 능력이 없었고, 그럴 환경도 아니었다. 경찰력이 모두 소멸된 상태에서 쓰나미처럼 뒤엎는 폭동의 한 중간에 정보요원들을 투입하여 정보활동을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은 하루 빨리 사태를 정리하고 정상화시키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차후에라도 그 진실을 조사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군당국은 무전교신을 포착해 북한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었다.하지만 자기 자신이 진행하지 못했던 북한군 존재에 대한 연구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라) 지만원 시스템공학자의 연구가 그 중의 하나다.
그 533쪽과 534쪽에서는 다음과 같이 피고인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5.18사태 당시 광주 현장에 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기자 등의 목격담 이외에 관련 자료나 정황 증거 등을 들어 연·고대생으로 알려졌던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의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10여 년간 집중적인 조사와 연구, 출판 활동 등을 통해 5.18광주사태와 관련된 진실을 규명해나가고 있는 지만원 시스템공학 박사는,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북한이 특수군을 투입해서 공작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만원 박사는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기록, 안기부의 자료, 5.18관련 단체들의 기록물, 북한 측의 관련 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그러한 결론을 얻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마) 진실규명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재조사해야 한다, 그 제537쪽 “진실규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간제목의 내용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로운 조사가 시작돼야 한다. 5.18광주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세력의 반국가적 반역사적 반민족 책동을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이 일들을 둘러싼 사실관계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나아가 그 성격을 재조명해볼 수 있는 동력도 시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안타깝다.”
바) 1996-97년 재판은 북한군의 개입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 김대중의 내란행위를 전두환의 내란행위로 뒤바꾸기 위한 정치드라마에 불과했다.
그 제535쪽 상단의 기재입니다.
“수많은 정황증거들과 황장엽씨, 강명도씨의 증언 등 수많은 증언들이 아니더라도 결정적 남침 기회를 노려 대한민국의 내부 혼란을 획책해온 북한이 폭동사태로 번진 5.18광주사태 때 팔장을 끼고 구경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이 없다. 하지만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힌다는 명분 아래 시작된 5.18재판에서 그러한 의문들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 재판은 광주사태에 대한 진실을 철저히 따져보고 그 성격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었고, 김대중씨를 내란의 주범으로 판단한 1981년 대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거꾸로 내가 내란을 일으킨 것으로 몰아가려는 목적에만 집착한 드라마였을 뿐이다”
신동아 인터뷰는 2016년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전두환 회고록은 언제 발행 준비가 되었겠습니까? 노태우 회고록이 2011년에 발행되었습니다. 당시 세간에는 전두환 회고록이 이미 완성되었지만 발행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었다는 소문들이 나돌았습니다. 초점은 전두환 회고록이 매우 구체적인데 반해 2016년의 인터뷰에서는 기억력이 혼미했다는 점입니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5.18에 대해 피고인과 인식과 판단을 함께 했고, 신동아에서는 그가 직접 주도했던 12.12가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원심이 구태여 전두환 회고록은 무시하고 정신이 혼미했던 상태에서 신동아 기자의 질문에 응했던 짧은 단어 몇 개를, 5.18에 대한 진실을 말한 것이라 단정하고 피고인의 연구결과를 유린한 처사는 공의로워야 할 법관의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북한군 개입] 주장에 대한 구체적 답변
정보세계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정보는 그 99%가 적국의 비밀 문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개 자료를 가공한 것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피고인은 위 2항에서 [북한군 개입] 표현이 [허위사실]이라는 원심의 판단 근거 4가지가 허구에 해당한다는 점을 방어차원에서 답변하였습니다. 제3항에서는 [북한군 개입] 표현이 왜 [연구자의 의견]에 해당하는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왜 [사실]이라고 믿는지에 대해 공세적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는 ‘답변서’라는 짧은 지면을 통해서는 충분히 표현할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증195 [북조선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 중에서 직접적인 답변에 해당하는 부분을 지정해 드림으로써 답변서의 일부는 가름하고자 합니다.
1. “이 책의 기조”: 17~34쪽
2. 제10장, “남북한 당국 기록들이 공히 증명한 북한특수군”: 254~261쪽
3. 제11장, “현장 사진이 증명한 북한특수군”: 262~279쪽
4. 제12장, “광주가 증명한 북한특수군”: 280~289쪽
5. 제13장, “북한이 증명한 북한특수군”: 290~301쪽
4. 북한 삐라에 대한 구체적 답변
이 사건의 핵심은 피고인이 증61로 제출한 [1982년 발행의 삐라]가 북한이 발행한 것이냐의 여부일 것입니다. 이 삐라가 1982년에 북한이 발행한 것이면, 고소인들이 1987년 발행한 사진 책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의 얼굴사진 5개를 북한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됩니다. 당시는 인터넷이 없던 시대였음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중요한 핵심에 대해 원심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이 삐라가 북한이 발행한 삐라로 보이지 않는다 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제출한 증61의 삐라사진은 아래 5가지 측면에서 북한이 발행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1) 위 삐라의 처참한 시체사진은 후에 광주정평위가 엮은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에서 그대로 실렸으며 이 책자의 원전은 북한으로 표시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일부는 최근 슬그머니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의 자료유형 난에 기재됐던 [북한 원전]을 삭제하고 [단행본]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5.18에 대한 조작이 범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국가 단위에서 자료를 조작하는 나라에서 피고인이 당하는 고통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2)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에 있는 한국근현대사박물관 3층에 북한 불온삐라가 모여져 있는데 유리로 봉해져 있는 것 중에 5.18 관련 북한 삐라가 있습니다(증192). 각 삐라에 아래와 같이 이미지(IMG) 번호가 부여돼 있습니다. 삐라 이미지 캡쳐 날짜는 2012-02-23입니다.(증193)
3)위 IMG 1675호에 기재된 5구의 얼굴사진은 1987년 광주 정평위 발행의 사진 중 5매와 일치합니다. .
4) “광주 대학살 잊지 말자!”라는 위 삐라에는“광주 대학살 5천여명‘, 총기로 사살한 수 2,600여명, 장갑차로 깔아죽인 수 150여명, 화장하여 죽인 수 920여명, 대검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때려죽인수 330여명, 생매장하여 죽인수 1,700여명, 중경상자 1만 4,000여명으로 기재돼 있습니다. 이 삐라에 기재된 내용과 수치들은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에 발간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증194) 제591쪽에 그대로 정확하게 기재돼 있습니다. 북한 삐라의 내용이 북한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5) 증61호 제출한 삐라들의 인쇄술은 1982년의 발전되었던 남한 인쇄술이 아닙니다. 이에 더해 증61은 증185 4부작의 5.18역사책을 저술한 전문가가 5.18 기념재단이 유네스코에 제출한 자료에서 인터넷으로 추출한 것이며, 파주의 전근대사박물관에도 전시돼 있는 것을 2012. 한 네티즌이 촬영해 인터넷에 게시한 것입니다. 또한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1982년에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제591쪽 통계와 표현을 그대로 베껴서 인용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삐라는 남한의 개인이나 단체가 발행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논리와 근거가 있는데도 이를 북한삐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막무가내에 속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증61의 삐라는 대한민국의 발전된 인쇄술에 어울릴 수 없습니다. 같은 시체사진인데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에 반영된 사진기술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결 론
1. 본 사건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광수] 부분입니다. 원심은 광주에 북한군이 절대로 오지 않았다고 판단해놓고, 따라서 광주 현장 사진 속에는 북한의 얼굴이 있을 수 없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피고인의 [광수] 연구결과를 허위사실로 규정함과 동시에 얼굴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고소인들의 주장이 맞다고 인용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증151의 최종보고서나 증195의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에 나타나 있는 연구결과는 북한군이 확실하게 광주에 왔다는 것입니다.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면 수많은 현장의 사진들 속에 북한의 얼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사건 공판기록 제4회에 기재된 재판장님 촉구 사항을 반드시 짚고 가야 할 것입니다.
2. 피고인은 위 2항에서 [북한군 개입] 표현이 [허위사실]이라는 원심의 판단 근거 4가지가 허구에 해당한다는 점을 방어차원에서 답변하였습니다. 제3항에서는 [북한군 개입] 표현이 왜 [연구자의 의견]에 해당하는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왜 [사실]이라고 믿는지에 대해 공세적 답변을 드렸습니다.
3. 증61의 삐라는 북한이 만든 삐라가 확실합니다. 따라서 광주 천주교 정평위 소속인들의 고소내용은 기각돼야 할 것입니다.
증거자료
증189. 2020.5.12. MBC 보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본격 착수”
증190. 2016.6월호 신동아 기사
증191. 전두환 회고록 제1권 발췌분
증192. 파주군 헤일리 근현대사박물관 유리관 속 불온삐라 사진
증193. 근현대사박물관에서 IMG 번호 부여한 삐라 사진들
증194. 1982. 조국통일사 발행의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발췌
증195. 신간 [북조선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
증196. 류병현 회고록 발췌분
2020. 7. 8.
피고인 지만원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 제8-3부 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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