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제257화, 임동원의 반역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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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6-01 22:03 조회4,6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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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7화, 임동원의 반역행위
https://www.youtube.com/watch?v=Gjsfz-wx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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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어제 오늘은 작업이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신경에 부하가 걸린 증상이 와서 자가 회복 치료를 하였습니다. 광수들을 찾는 일도 시신경에 손상이 올 정도로 집중이 필요한 일이지만, [5.18영상 고발] 화보를 제작하기 위한 선별 배치작업 역시 어떤 배치가 북한군의 침공 군사작전임을 더욱 뚜렷하게 증명을 해낼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 등 북한군 군사 침략의 입증 증거로 삼기 위해 선별, 배치, 시각적 스토리 구성 등 매우 창의적인 판단이 필요하므로 두뇌의 CPU사용이 매우 빈번하고 시선의 집중과 마우스를 사용하는 오른 손가락 끝과 두뇌의 과도한 사용으로 대장 경락이 막혀 혈액순환이 정체되어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극심한 두통과 시야에 혼화가 오고, 시력이 일시적으로 나가는 등의 증상이 생겨 자가 치료후 회복한 후에 다시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은 증세가 오는 이유는 두뇌의 사용의 과도한 집중입니다. 통상적인 집중을 넘는 과도한 집중은 반드시 신체에 그 증상이 생기게 됩니다. 어린이들이 커다란 TV화면 바로 앞에 앉아 화면과 빛의 전환이 매우 빠른 영상을 집중하여 보면 눈동자가 뒤집어지고 기절하는 등의 뇌진탕 증세가 생깁니다. PC방에서 화면 전환이 빠른 게임에 집중한 청소년이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켜 사망하거나 이상 행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빠른 영상과 빛의 전환을 감당하지 못하는 시신경의 부하가 두뇌에 연결되어 나타나는 증세로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광수작업은 빠른 영상과 빛의 전환은 없으나 고도 판단을 위한 집중이 필요하므로 두뇌의 CPU 중앙집중처리 장치에 과도하게 부하가 걸리게 됩니다. 누구든지 한 10명 정도 광수 찾기에 골몰해 본다면 곧바로 그와 같은 정신착란의 초기 증세가 나타날 것입니다. 1년간에 걸쳐 약 500명의 광수들을 찾아내는 일은 말씀 그대로 인간의 기본적인 신체 기능의 극한의 한계를 넘는 일인 것이 맞습니다. 만약 집중하지 않고 천천히 공무원의 맡은 바 일과처럼 하였다면 몇 년이 걸려도 다 찾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부하가 걸리는 전조 증세를 느끼면 모든 작업에 손을 완전히 떼고 잠시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을 두고 회복해야 합니다. . . ”
광주판사: 전두환도 북한군 개입 모른다 했다
2016.6. 신동아 기사 제11쪽
전두환: 12.12가 뭐더라
이순자: 10.26사건 나고 정승화(육군참모) 총장 새로 수사한 거요.
신동아 기사 제18쪽
기자: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 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전두환: 전혀
고명승: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 한 일이 없습니다.
전두환: 뭐라고? 600명이 뭔대?
정호용: 이북에서 600명 왔다는 거요. 지만원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전두환 회고록(2017.3.27.)
1980.5.21. 연고대생으로 불리던 600명이 벌인 체계적인 작전내용은 도저히 광주의 일용직, 넝마주이, 무직자들이 벌일 수 있는 행동으로 불 수 없다. 북한특수군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해석이 안 된다는 요지의 기재.
제399-406쪽에는 "무기고 습격과 시위대의 무장"이라는 소제목 하에 1980.5.21.자 상황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
“검찰기록과 안기부 기록에는 전남지역 17개 시군 비밀시설에 숨겨져 있는 38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었다는 사실, 600명의 폭도들이 부대 이동계획을 알아내 가지고 매복해 있다가 정규 사단인 제20사단 차량부대를 습격하고, 그 차량들을 가지고 군납업체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 가서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0여대를 운전했다는 사실이 있다. 이런 일들은 당시의 폭동 일선에 서 있던 업소종업원 일용직노동자 넝마주이, 부랑자 등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도소를 6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했고, 8톤 트럭 분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한 사실 등은 북한특수군을 연결짓지 않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제518쪽 내지 522쪽에는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해는가”라는 중간 제목
“교도소를 6회씩이나 공격했는데 그 공적을 내세워 5.18유공자가 된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의문이 가고, 장발에다 군인복장을 하고 시민들을 꿇어앉힌 상태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괴한들은 분명 한국군이 아닌데 위장을 한 광주시민이 어째서 광주시민을 꿇어앉히고 총 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간다. 군 특수장비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하고, 운전수가 귀하던 그 시절에 500대가 넘는 차량들을 운전하는 사람들이 과연 광주의 하층 계급들인가에 대해 의혹이 가고, 참혹하게 훼손된 사신들을 끌고 다니며 이것이 계엄군의 소행이라 한 것은 전형적인 북한의 모략 수법과 일치한다. 연고대생 600명이 존재한다는 설도 많이 떠돌았고, 5월 20일에는 서울대학생 500명이 광주를 지원하기 위해 왔다는 가두방송이 있었고, 22일 15:08에는 서울대학생 500명에 대한 환영회도 열렸는데 이들의 정체가 북한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제530-531쪽)에는 당시 무전교신으로 보아 폭동군중 속에 간첩이 활동하고 있다는 데 대한 의심이 있었지만, 치안이 확보돼 있지 않은 살기어린 폭동 현장에 정보원을 침투시켜 간첩을 색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북한간첩들의 투입 정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서리를 하고 있었지만, 북한특수군 존재에 대해 파악할 능력이 없었고, 그럴 환경도 아니었다. 경찰력이 모두 소멸된 상태에서 쓰나미처럼 뒤엎는 폭동의 한 중간에 정보요원들을 투입하여 정보활동을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은 하루 빨리 사태를 정리하고 정상화시키라는 명확한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차후에라도 그 진실을 조사할 여력이 없었다. 당시 군당국은 무전교신을 포착해 북한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진행하지 못했던 북한군 존재에 대한 연구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만원 시스템공학자의 연구가 그 중의 하나다.
533쪽과 534쪽.
"5.18사태 당시 광주 현장에 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기자 등의 목격담 이외에 관련 자료나 정황 증거 등을 들어 연·고대생으로 알려졌던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의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지난 10여 년간 집중적인 조사와 연구, 출판 활동 등을 통해 5.18광주사태와 관련된 진실을 규명해나가고 있는 지만원 시스템공학 박사는, 광주사태가 '민주화 운동'이 아니고 북한이 특수군을 투입해서 공작한 '폭동'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만원 박사는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기록, 안기부의 자료, 5.18관련 단체들의 기록물, 북한 측의 관련 문서와 영상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그러한 결론을 얻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제537쪽 “진실규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중간제목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로운 조사가 시작돼야 한다. 5.18광주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세력의 반국가적 반역사적 반민족 책동을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이 일들을 둘러싼 사실관계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나아가 그 성격을 재조명해볼 수 있는 동력도 시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것이 안타깝다.”
최진봉과 이현종 (1966년)
2018.11.8. YTN “자유한국당, 지만원 논란에 '골머리'”라는 제하의 프로에 약 27분 동안 공동 출연
-김성태 옹호, 지만원 비하 발언-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
1966년생 (신영복 이재정)
지만원이라는 분은 육사 출신이에요. 원래 군인이었죠. 월남 파병도 갔다 오신 분이고.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런 주장을 계속하고 있어서 극우성향의 보수 논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요. 그런데 최근 들어서 더 극우 성향이 된 것 같아요, 예전보다 훨씬 더.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런데 이분이 주장했던 것 중에 가장 문제가 됐던 게 북한 특수군이 5.18 개입했다, 시민군 안에 북한특수군이 있었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고요.
최근에 계엄군들의 성추행, 성폭행 이런 문제가 밝혀졌지 않습니까? 정부 조사를 통해서. 거기도 계엄군에 한 게 아니라 북한군이 했다 이렇게 또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문제 때문에 법원에서 몇 번이나 배상 판결을 받았어요. 최근에도 지난 25일날 9500만 원 5.18 유족들한테 배상하라고 판결을 받았거든요. 한두 번이 아니고 법원에서 이분이 계속 얘기한 것이 문제가 돼서 계속 논란이 됐고 그것 때문에 법원에서 판결내리면서 이분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몇 번을 증명해줬어요.
또 잘 아시는 기억하실 텐데 문근영 씨를 향해서 이 사람이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빨갱이라고 했어요, 문근영 씨를 향해서. 배우 있잖아요. 그분이 8억 5000만 원 기부했는데 그 기부한 걸 가지고 천사 이미지를 만들어서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저렇게 주장하고 계신 건데 그러다 보니까 자유한국당 입장에서는 당연히 저분을 5.18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하기가 힘든 거죠. 아까 김성태 원내대표가 얘기했잖아요. 상식적인 분, 합리적인 분 이런 분들이 와야 조사를 제대로 할 텐데 저런 주장 하는 사람이 만약에 자유한국당에서 추천을 하게 되면 과연 그 위원회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저는 김성태 원내대표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저렇게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그런 얘기, 사진도 이상한 사진을 가져다가 그게 북한군이고 북한의 누구라고 비교해서 얘기하고. 그런 얘기를 하는 분을 과연 이런 공정한 5.18진상규명위원회 위원으로 추천한다고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 부분에 대해서 김성태 원내대표가 올바른 판단을 한다고 봐요.
그런데 본인은 본인이 추천됐다가 잘렸다고 얘기하면서 계속 저렇게 반발을 하고 있어서 참 황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역구 사무실에 가서 집회를 열었죠. 거기에 200여 명이 같이 갔다고 얘기하는데 원색적인 비난을 했어요. 이런 표현이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데요. 보면서 말씀드릴까요. 보세요. 못 배운 깡패 출신이라서 그렇다. 뭐 배운 게 있느냐 이렇게 주장을 하고. 비난한 거죠. 그 밑은 읽을 수도 없네요. 노조 출신 빨갱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저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본인이 위원으로 추천받지 못해서 화가 나서 저런 주장을 한다는 것도 저는 이해가 안 돼요. 본인이 위원을 꼭 해야 합니까, 지만원 씨가. 지금 본인이 하는 행동을 보면 위원으로서 부적절해요. 저런 분이 위원이 된다고 하면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저는 시작도 못할 것 같아요, 저런 분이 만약 된다면. 그리고 국민들이 봤을 때 저런 황당하고 황당무계하고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퍼뜨리는 분을 진상규명위원회에 앉혀놓으면 진상규명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아까 이현종 위원님도 말씀하셨잖아요. 정말 객관적인 사실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볼 때 정말 타당하다고 믿을 만한 그런 객관적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의 주장만 저렇게 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그런 차원에서 본다고 하면 저런 비난을 하는 것도 저는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비난하는 거잖아요, 지금. 본인이 위원으로 추천 못 받는 것 때문에 화가 나서 김성태 원내대표를 싸잡아서 비난하고 그게 결국 그러면 본인이 그렇게 원하는 보수의 재건이나 보수의 발전에 도움되는 거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도리어 저런 문제 때문에 보수가 혁신하고 개혁하는 부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보수 진영에서 저런 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그럼요. 보수진영에서도 이 문제가 이렇게 걸리는 것이 계속 부담될 수밖에 없어요. 지금 이현종 위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보수 측에서도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이런 행동을 하기 때문에 결국은 같이 욕먹을 수 있는 상황으로 가게 되는 거 아니겠어요. 보수가 원하는 게 뭐겠어요. 원칙을 지키고 정말 정의를 지키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정의와 원칙의 관점에서 봤을 때 5.18광주 민주화운동 같은 경우에는 계엄군이 들어와서 시민군을 죽이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고 성고문, 성추행도 하고이런 나쁜 짓을 했으면 그걸 다 역사적으로 들춰내서 문제가 있는 부분을 정리하고 가야 되는 거죠.
문제가 있는 부분을 덮고 가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그건 보수의 가치하고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잘못된 부분의 역사적인 그런 과오들이 있다고 하면 그 과오가 뭔지를 다 낱낱이 드러내고 그걸 털고 가야 그다음부터 새로운 발전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자유한국당의 김성태 원내대표가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저런 모습으로 가야만 자유한국당이나 보수가 혁신하고 쇄신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 저렇게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자유한국당의 의미 자체를 희석시키는, 도리어. 좀 더 안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런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저는 이렇게 선을 긋는 것은 잘하는 거라고 저는 보고 앞으로도 저런 분들이 자유한국당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 영향을 행사하는 것을 원천 차단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한국당이 국민의 사랑을 다시 받기는 어렵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이현종 문화일보 논설위원
서울시 중구 새문한로22, 문화일보 논설위원실
(02) 3701-5028
이종명 의원도 자신도 밝혔습니다. 본인이 절대 추천한 적이 없다라고 당에서도 공식 확인을 했고. 그러니까 지금 뭐냐하면 본인은 사실은 추천을 했는데 김성태 원내대표가 중간에서 잘랐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당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특히 이분 같은 경우에 5.18 광주항쟁 당시 사진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온 분들 몇 분을 특정해서 이 사람이 북한군이다,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결국 이게 또 다큐로 만들어졌어요. 이 사람들 찾아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소송을 해요. 무슨 말이냐. 내가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사람인데 왜 나를 광수라고 해서 광수 원투스리 해서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데 내가 무슨 북한군이냐. 결국 이 소송이 지난 광주고법에서 결국 9500만 원 배상 판결이 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분의 주장을 이렇게 유튜브나 이렇게 보면 뭔가 객관적이고 증거가 없어요. 그냥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고 확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보면 추측에 추측이 넘어서 본인 자기 확정으로 오는 거죠. 문제는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분들이 예를 들어서 이런 광주 진상위원회 들어가서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김성태 원내대표 입장에서 만약에 자유한국당 대표 이런 분을 추천하면 진상조사가 안 되지 않습니까? 매번 이런 주장을 하면 진상조사라는 것은 객관적 조사와 자료, 진술, 이런 것들을 모아서 판단하는 곳인데 내가 보니까 이 사람은 북한 사람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근거가 뭐냐, 그건 내가 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리고 저는 이분이 보수논객 이야기하는데 이건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은 그냥 자기 주장만 하시는 분이에요. 뭔가 그나마 논객이라는 것은 자기 주장의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는 게 논객인데 이분은 제가 주장을 아무리 들어봐도 그런 논리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건 그냥 일방적 주장일 뿐이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 자유한국당도 사실 이게 이분의 그런 주장보다는 오히려 태극기 부대 문제와 자유한국당의 가입 이 문제 때문에 사실 이게 좀 중첩돼 보이는 상황입니다.
글쎄요. 이게 정확히 보수 쪽 압박이라고는 저는 보지 않습니다. 이건 일부 특별한 분들 때문에 한 것이지 보수 중에서도 사실 5.18 문제를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보는 분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미 이 사건 자체가 수차례 검증됐고 실제로 피해자들이 살아계시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 지금 북한군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이건 어불성설이죠. 이건 이 주장을 보수라고 한다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저는 그래서 김성태 원내대표의 입장을 보면 일단은 선을 그을 건 그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보수정당, 즉 자유한국당이 이제 어떻게 새롭게 태어나고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불합리하고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딱딱 선을 그어줘야지 나름대로 새롭게 할 수 있는 그런 기반이 생기는 것이거든요. 지금 대표적으로 앞으로 문제가 될 게 뭐냐 하면 탄핵 무효다라는 문제가 있을 겁니다. 지금 일부에서는 당에서 토론을 해보자 등등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이 문제는 이미 지나간 문제이지 않습니까? 이미 법적으로 끝난 문제고. 또 이런 문제를 당내에서 일부에서는 다시 또 시작을 해보자라고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결국은 당 자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시 또 옛날로 돌아가고 다시 설 수 없는 상황이 되거든요. 그러면 이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즉 당의 쇄신이라는 게 다른 게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당이 좀 더 거리를 두고 선을 그어야지만이 당 자체가 합리적 정당으로 설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앞으로 김성태 원내대표가 이런 부분을 소신 있게 할 필요가 있고 또 빨리 진상위원들을 추천을 해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을 빨리 종식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민사재판 결과: 강제 결정(조종)
임동원의 역적행위
임동원은 북한에 많은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인민군 병사로 남침 대열에 참전하였다가 낙동강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육사출신들의 중론입니다. 그 동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그는 최덕신 장군의 신원보증으로 육사 13기로 입교하였다는 것이 육사출신들의 중론입니다. 최덕신은 육사교장을 거쳐 외무장관까지 한 후, 수사망이 좁혀지자 1975년 북으로 넘어간 간첩입니다. 임동원의 출신에 대해서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습니다만 이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김대중 정권에서 골수 빨갱이 김대중 옆을 단 하루도 떠나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그동안 대북정책을 주도적으로 요리해오면서 남긴 족적이 하나같이 빨갛다는 사실입니다.
(임동원의 보직)
98.2.25-99.5.23 외교안보수석
99.5.24 - 99.12.23 제1차 통일원 장관
99.12.24 - 2001.3 국정원장
2001.3.30 - 2001.9.3 제2차 통일원 장관
2001. 9.11-2003.2. 외교안보통일특보
(김정일 감싸기)
임동원은 북한이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북한을 감쌌습니다. 1998. 7.12일 북괴 잠수정이 속초 앞 바다 꽁치 망에 걸렸을 때, 임동원은 두 가지 두드러진 일을 했습니다. 잠수정 안에서 남한산 빈 페트병이 발견됐습니다. 누가 봐도 남한에 내렸다가 다시 탔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기자들은 공작원들이 이미 공작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다가 걸렸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임동원은 그 페트병에 대해 상상을 초월하는 설명을 했습니다. 북한이 그 페트병을 "연변 등에서 구해 가지고 왔을 것"이라 했습니다. 북한에서 자금을 받는 북한 대변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꽁치 망에 걸릴 정도의 작은 잠수정 속에 든 공작원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공작원을 생포하면 공작내용이 모두 드러납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해군 함정은 그 잠수정을 밧줄에 매달고 이리저리 끌고 다녔습니다. 그래도 모자라 "줄이 끊어졌다"며 수중에 빠져 죽게 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모두 수장된 것입니다.
1999. 3. 11일 민화협(좌익) 초청 강연에서 "미국은 먼저 경제지원, 관계개선, 북한의 안전보장 등으로 대국의 아량을 보여야 한다. 북한이 먼저 해주기를 요구하면 해결이 어렵다"(1999.3.12 한겨레)고 말했습니다.
1999.6.8-6.15 사이에 발생한 서해해전(연평해전) 때였습니다. 임동원은 북한이 달러가 부족해 꽃게로 수입을 올리려는 가련한 행동이니 잘사는 형님이 봐주자는 요지로 여론을 유도했습니다. '영해 침범' 대신 '월선'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했습니다. 서해안 사태는 그 동안 해마다 25회 남짓 발생했으나 역대 정부는 한 번도 이것을 꽃게잡이로 봐주지 않고 명백한 주권수역 침범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렇게 눈에 쌍불을 켜고 북한을 변호하는 사람은 임동원이 처음이었습니다.
연평해전 마지막 날에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는 것은 순전히 현장 지휘관의 배짱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해군은 북괴 해군함정 10척 중 어뢰정 1척을 격침하고 중·소형 경비정 5척을 대파함으로써 북방한계선을 확고히 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휘관은 곧 예편 당했습니다.
1999. 1.4일, 금강산 관광객 한모(38·여)씨가 관광 도중 김정일 체제에 자극적인 발언을 했다며 환경감시원에 적발돼 장전항 북측 사무소로 끌려가 10일간 억류됐습니다(1999.1.6 조선일보). 이어서 1999. 6.20-6.28일간, 북한이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를 억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임동원은 북한을 비난하지 않고 한국관광객들을 비난했습니다. "북한이 싫어하는 짓거리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2000년11월, 국정원장으로서 그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북한이 110만 대군을 가진 것은 남침용이 아니다. 내보내려 해도 나가면 일자리가 없어 불한당이 된다. 이는 체제유지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110만을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지뢰와 방벽을 설치한 것은 장군들의 머리가 나빠서 엉터리 같은 짓을 한 것이다". "김정일은 합리적인 것이면 즉시 시행하는 명 지휘관이다".
2002.6.29일 서해 도발에 대해서도 임동원은 북한 당국보다 더 열렬하게 나서서 북한을 옹호했습니다. 그는 사건 발생 7시간 후에야 안보회의를 열었습니다. 국군 장병들이 5명씩이나 죽었는데 김대중은 빨간 넥타이들 맸습니다. 임동원은 안보회의에서 "이번 사태는 우발적인 것"이라고 예단했습니다. "김정일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지시를 내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대북지원과 금강산 사업은 계속돼야 한다"며 분위기를 잡았습니다.
이에 대해 황장엽 비서는“대포 한 발이 아니라 총 한 방을 쏘는 데도 김정일의 재가가 필요한 북한 군부 내에서 김정일의 재가도 받지 않은 채 포 사격을 명령할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북한 군부내 강경 세력의 돌출행동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이는 북한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조선일보 2002. 7.10)라며 임동원의 수작을 일축했습니다.
2002. 6.17일 18시30분, 강남 센터 빌딩에서 육사교수모임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임동원이 말했습니다.
1) 공산주의와의 협상은 유익한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것도 협상을 통해서다. 따라서 남북한문제도 협상에 의존해야 한다. 상호신뢰에 의해 남북협상이 잘 되어가고 있는데 미국이 방해를 놓고 있다.
2) 김정일은 평시의 언행이나 나와의 5시간 단독 면담을 통해 느낀 바로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일부 한국사람이 이를 부정하고 특히 미국이 전쟁협박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김위원장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미국이야말로 남북협상에 방해가 되고 있다. 내가 부시를 설득하여 요사이는 미국이 조금은 북미 협상에 응하려 한다.
3) 대북지원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비인도적인 자들이다.
4)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김 위원장은 미국이 북침할까 보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불식시켜 주어야 한다.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갖고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
5) 연방제란 국방과 외교권만을 통합해서 갖고 체제는 각기 유지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 없다.
(김정일에 충성하기)
임동원은 국정원장 시절에 황장엽을 박해했습니다.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만나지 말 것, 외부 강연에 나가지 말 것, 책을 출판하지 말 것, 탈북자동지회 소식지인 '민족통일'을 읽지 말 것, 민간 차원의 대북 민주화 사업에 참가하지 말 것" 등을 강요했습니다. 그래서 2000. 11.16일, 황장엽과 김덕홍은 임동원 국정원장이 부당하게 자신들의 활동을 제약하고 있다고 폭로하는 문서를 언론에 돌렸습니다.
이에 발끈한 임동원이 황장엽, 김덕홍씨를 연금상태로 가뒀습니다. 기고행위, 외부 접촉행위, 강연 등 모든 언론의 자유를 구속했습니다. 드디어 임동원은 이들을 국정원 안전가옥에서 나가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나가라는 것은 곧 이한영 처럼 피살되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신중한 황씨는 햇볕정책과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김정일 수령지배체제를 공격했습니다. 임동원은 김정일을 공격한 황비서를 적대시했습니다. 황비서의 유일한 언론 수단인 "민족통일"지 발간까지 중단시켜 김정일에 대한 공격을 차단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황씨가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서자 임동원은 모 주간지에다가 "황장엽씨와 어떤 여자 사이에 딸이 있다"는 정보까지 흘렸습니다(2002.3.6 월간조선). 공산당이 잘 쓰는 모략전이요 흑색전이었습니다.
황씨는 김대중을 공개적으로는 비판하지 않았으나 비공개 분석 문서에서는 "김정일과 깊이 결탁한 관계"로 묘사했습니다. 황씨는 오직 임동원한테서만 이런 핍박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황씨는 국정원을 "적"이라고 표현하며 죽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망명을 기획한 적도 있습니다.
2001.7월, 황장엽씨에 대한 방미 초청장을 가지고 온 척 다운스씨는 황씨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우방인 한국 정부가 황씨 면담조차 허용하지 않은 것은 현 정부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것"이란 말을 남겼습니다.
2000년 12월, 남한 적십자 총재 장충식이 월간조선 10월호에 할 말을 했습니다. 북한 적십자 총재 장재언이 이를 억지로 트집잡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임동원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잘못이 없는 장충식을 연금-일본추방- 사임케 했습니다.
북측이 문제삼은 장충식 총재의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말이 왜 문제가 됩니까?
“평양은 10년 동안 달라진 것이 없더군요. 한 마디로 발전이 아니라 정체된 기간이었다 는 느낌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숙소인 고려호텔 앞에 가게나 음식점이 있어 저녁때도 불이 켜져 있곤 했는데 지금은 전에 비해 활기가 없더군요”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 양쪽의 이질성과 체제에 대한 우열을 비교할 수 있는 거울입니다. 때문에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 볼 때 이산가족 상봉은 그들의 실생활이 외부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사업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체제유지가 급선무인 북한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의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보다는 점진적 단계를 밟는 쪽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이런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생각대로 인원확대, 상호 고향방문 등을 요구하면 북측에 서 여러 가지 이유를 달아 문을 닫아 걸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을 유심히 본 분들은 아셨겠지만 북한 이산가족 상봉단은 모두 같은 옷을 입고 나왔습니다. 전국 각지에 흩어진 사람들에게 옷감을 줘서 급히 해 입힌 겁니다. 남한에서 올라간 가족들은 양복에 티셔츠, 개량 한 복 등 매일같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만, 북측 가족들은 3박4일간 같은 양복 만 계속 입고있더군요. 옷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이 얼굴입니다. 북한의 가족과 남한에서 올라온 부모형제들이 만났을 때, 고생을 많이 한 북한의 얼굴과 남한의 여유로운 얼굴이 대조되니 북한 관계자들이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저는 순안비행장에 우리 비행기 착륙을 허가할 때부터 北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양으로 출발하는 과정에서 북한 고려민항 비행기에 짐 싣는 장치가 없어 출발이 한 시간이나 지연됐어요. 공항에 환영 나온 평양 시민, 그 비행기를 타고 남북을 오간 이산가족들은 그들의 초라한 고려민항 비행기와 태극마크, 색동마크가 새겨진 우리 비행기의 웅장함을 비교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떤 형태로든 남북교류가 진행되면 밑지는 것은 북한이지 남한이 아닙니다”(2000.11.21 월간조선)
북측 적십자사 총재 장재언이 이렇게 당연한 말을 문제 삼았습니다. 임동원은 즉시 장충식씨를 연금시켰습니다. 이어서 2000.11.30일 일본으로 출국시켰습니다. 그리고 12.21일 해임시켰습니다(2000,12.25 중앙일보).
상전의 자식 장재언은 안하무인격으로 기세가 등등했고, 하인의 자식 장충식은 아무런 잘못 없이 단지 상전의 자식이 화를 낸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수모를 다 받은 것입니다. 장충식은 꼬리를 처박고 도망가는 투견같이 보였습니다. 그런 장충식의 뒷통수에 대고 북적 장재언은 "몰골이 가련하다"는 등 갖은 굴욕적인 언사를 퍼부었습니다. 유혈이 낭자하게 물어뜯고도 분을 삭이지 못하겠다며 검푸른 입으로 사납게 짖어대는 도사견 같이 보였습니다.
이렇게 만든 임동원이 과연 남한의 스파이 대장입니까 아니면 김정일에 충성하는 스파이 대장입니까?
(무조건 퍼주기)
98.6.16일, 1,004마리의 소 떼를 북한에 보냈습니다.
98.11.18일, 금강산관광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선전하며 금강산 관광 사업을 만들어 현대를 통해 2조원 규모의 현금 달러를 보내 김정일로 하여금 군자금으로 사용케 했습니다. 관광객이 있던 없던 매년 연간 1억 5천만 달러를 군자금으로 바치도록 계약시켰습니다. 2004년까지 9억4,200만 달러를 "존재하지도 않는 독점사업권"이라는 명목으로 무조건 주기로 하는 계약서를 쓰게 했습니다. 현대가 망하자 삼성 등 다른 대기업에도 대북 투자를 강요했습니다.
그는 "대북정책은 선공후득이어야 한다"(1999.3.12. 조선일보)고 말했습니다. 먼저 무조건 퍼주고 나중에 차차 받아야 한다는 희한한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의해 북한에 간 돈이 5조입니다. 갈 돈이 아직도 줄줄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2000년 10월4일. 정부는 판문점에서 남북 양측의 지정 은행간에 대북 식량차관 계약을 체결하고 즉시 북에 60만톤의 식량을 보낼 계획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차는 모두 생략됐습니다. 그건 계획이 아니라 북한의 긴급명령이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5일에 중국산 옥수수 2만t이 다롄항에서 선적돼 남포항에 도착됐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이해나 여론이 조성될 여유조차 없이 전광석화처럼 도둑질하듯 처리했습니다.
국정원이 이용호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모두를 주도해온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2000. 10, ‘정현준 게이트’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됐던 장래찬 금감원 국장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폭력조직에 의한 타살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국회 행자위 이원창(한나라당) 의원이 26일 주장했습니다((2001.09.26 조선일보).
이원창 의원의 말입니다.
"장래찬 국장이 지난해 10월 31일 도피생활 8일만에 변사체로 발견된 후 자.타살 논란이 일자 경찰과 검찰은 부검도 해보지 않고 자살판정을 내려 사건을 조기 종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증권가에서는 장 국장의 죽음에 폭력조직이 연루돼 있고 폭력조직의 배후에는 검찰조직의 실세가 버티고 있다는 풍문이 파다하다. 당시 동방금고 사건을 정현준씨와 이경자씨 사이의 사기극으로 결론내리기 위해 정.관계 등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장국장을 살해했고 장 국장이 살해되기까지 경찰과 검찰은 장국장 살해범을 비호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정현준 게이트에는 1,000여 억원의 행방을 쫓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정현준 게이트를 국정원에서 주도한 것이 확실시되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국정원이 몸통을 가리기 위해 장래찬을 타살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마저 듭니다. 국정원은 돈을 버는 이런 더러운 게이트를 직접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임동원 시대에 자행됐습니다(2000.12.02 중앙일보).
이렇게 만든 비자금으로 말 꽤나 하는 우익인사들을 매수했고, 남한 사회의 적화를 위해 사용했을 것입니다. 김홍업에게도 때때로 2,500만원씩의 격려금을 상납했습니다(2002.7.11 조선, 중앙). 공적자금과 게이트로 번 자금은 이런 식으로 사용됐을 것입니다.
임동원은 현대가 요구하는 장전항 해상 호텔 카지노와 면세점을 허용하려다 여론의 벽에 부딪혀 보류했습니다(조선일보 2001.4.2).
임동원은 2002.4.3일부터 4일간 북한에 가서 김정일과 5시간 마라톤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려와 다음과 같이 북한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 5월 중순부터 비무장지대(DMZ) 내 경의선 공사를 시작해 10월 이전에 연결을 완료하고, 5월 중 금강산 육로관광을 위한 임시도로 연결 공사에 착수한다. 군사분계선-개성 12㎞ 구간 공사에 필요한 레일, 침목 등 기자재를 북측에 지원하겠다(2002,4.23 한국일보).
2) 군사분계선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북부선 남쪽 구간(127km) 공사를 올해 안에 시작해 2009 년께 완공한다(한겨레, 문화일보 2002. 4. 22).
3) 4월말에 비료 20만 톤을 보낸다(한겨레 2002.04.12)
4) 6월부터 3개월에 걸쳐 북에 쌀 50만톤을 수송한다(세계일보 200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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