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제251화, 미문서, 발포명령 없었다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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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5-26 22:10 조회4,47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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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1화, 미문서, 발포명령 없었다 확인
https://www.youtube.com/watch?v=lg8jE1Sy6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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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평론가 성원에 감사
윤미향, 검찰수사 속도 강화
부정선거, 집회, 현장감시, 검찰수사
MBC 여성 스토커 기자 이유경
MBC, 2020.5.18. 이유경
현충원 찾은 지만원…오늘도 "북한 간첩의 폭동" 망언
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desk/article/5778060_32524.html
MBC, 2020.5.26. 이유경 260@mbc.co.kr
[탐정M] 지만원과 태극기부대의 5.18 현충원 습격사건…전말은?
https://imnews.imbc.com/newszoomin/newsinsight/5786351_29123.html
1. 시작은 추모행사…끝은 아수라장 – 신동국
2. 어떻게 현충원이 선동의 공간이 됐나?
3. 현충원, “주최측이 행사 내용 속여서 몰랐다”
4. 뒤늦은 고소…내년 5.18엔 엄숙한 현충원 될까?
* 공정한 방송이라면 신사적으로 행동하라, 토론의 장 만들어 달라
* 못 배운 것들이 마이크 잡고 배운 사람 망언자라며 때려잡는다
유죄판결 받은 사람? 전과 80범, 김대중은 사형 선고 받은 사람
지만원tv, 광고 모두 차단
사악하고 파렴치하고 철면피한 대깨문족
조국 가족이 저지른 철면피한 행위들, 지각 있는 국민들에게 실어증을 안겼다. 울산에서 벌인 파렴치한 부정선거, 이를 감추기 위해 추미애와 청와대 대깨문족들이 문란하고 낯 뜨거운 추태의 춤을 추었다. 우려먹을 게 따로 있지, 가장 불쌍한 존재라고 흔들어 대던 그 위안부 할머니들을 늙어 죽는 순간까지 30년 동안이나 비행기 3등간에 태워 외국의 수많은 곳으로 끌고 다니면서 우려먹은 요물이 있다. 늙은 몸들을 앵벌이 삼아 집도 많이 사고, 유학도 보내고, 호화생활도 하고, 종북 반일 반역질을 해오면서도 가장 거룩한 존재로 군림했던 윤미향, 지옥의 불구덩이에 던지고 싶을 만큼 사악하고 파렴치하고 철면피하다.
더욱 사악하고 철편피한 족들이 있다. 그를 감싸주는 문재인과 대깨문들이다. 이들에게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하려는 마음 있었던가? 반 송장이 된 노인들이 돈으로 보였고 종북의 수단, 반일의 수단으로 보였을 뿐이다. 일본군이 겨우 어린 시절의 2년 동안, 길어야 3년 동안 위안부로 삼았던 여성들을 윤미향과 대깨문들은 30년 동안 그것도 늙어 죽기 직전의 반 송장들을 끌고 다니면서 기부금과 성금을 긁어모았다. 보따리에 돈이 넘치는데도 배고프다 밥 좀 사달라 호소하는 노인에게 돈 없다 매정하게 굴었다. 이런 짓 영원히 해 먹으려고 온갖 종류의 표 도둑질 자행해왔다. 3.15 부정선거는 순진했고, 4.15부정선거는 사악했다. 천하에 못할 것이 없는 지옥의 요마악귀들이 바로 대깨문족이다. 반드시 응징-소멸시켜야 할 저주의 대상인 것이다.
비밀해제된 미국 외교문서, 발포명령 없었다 확인
지난 5월 12일, 미국이 140쪽에 달하는 43건의 외교문서를 비밀 해제하여 한국정부에 건네주었습니다. 1979년 12월 13일부터 1980년 12월 13일까지의 외교문서입니다. 외교문서는 2017년 1월에도 미국이 한국정부에 주었습니다. 그 때는 미 CIA도 1980년 5월 9일자 문서에 북한군에 특이동향 없다고 했다며 [북한군 개입] 이론에 쐐기를 박고 광주 판사들은 이를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여 저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문서들에는 5.18을 폭동(riot) 또는 봉기(uprising)으로 정의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시위를 주동한 폭도가 550명이라고 관찰했습니다. 한국 수사기록에 기록돼 있는 600명에 가까운 숫자이고,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 기록돼 있는 [서울서 온 대학생 500여명 환영식 거행]이라는 기록과도 가까운 숫자입니다.
미국 외교문서는 한국계엄군을 매우 칭찬했습니다. 광주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매우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내 예상 외로 피해를 줄였고, 자신들에 허가돼 있는 자위권을 최대한 자제하여 발포를 하지 않았고, 폭도가 전남도청에 조립해놓은 폭탄을 목숨 걸고 들어가 해체함으로써 광주 탈환 시에 발생했을 엄청난 피해를 사전에 예방했고, 체포한 폭도들의 대부분을 방면해주었다고 칭찬했습니다.
빨갱이 정부는 [발포명령]에 대한 문서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외교문서에는 발포명령이 없었다고 기재돼 있습니다. 계엄군에 허가돼 있는 자위권 발포마저 끝까지 유보하고 폭도가 점령하고 있는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계엄군의 목숨을 담보로 폭탄에서 뇌관을 제거하는 작업을 하여 광주시민의 생명을 보호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빨갱이들은 5월 21일, 도청에서 광주시민이 대량 학살됐다며 5월 21일의 발포명령을 전두환이 내렸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보기관은 발포명령은커녕 병사 각자가 위험에 몰렸을 때 누구의 명령 없이도 발포할 수 있는 자위 권한조차 사용하지 않고 상상 이상의 인내력을 보여주었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피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었다(144명)고 칭찬했습니다. 이런 판에 시민을 향한 사실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있으니 과연 이들이 사람의 자식들이겠습니까?
5.18을 누구 주도했는가에 대해서는 미국이 따로 판단하지 않고 김대중 추종자들과 간첩세력의 합작품이었다는 계엄당국의 판단을 인용 공유하였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으니까 이번에는 정부도 언론도 일체 함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제가 통역해 드리는 자료는 미국무부 홈페이지에서 곧바로 따온 자료들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저는 이번 서울현충원 5.18 국군전사자 추모행사에서 전했습니다. 광주에서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들과 그 유가족들에 이는 최상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번 행사는 차이나 바이러스 때문에 50명 내외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청와대가 움직이고 국방부가 움직였는지 현충원장이 나서서 제가 정치발언을 했고, 태극기와 성조기를 등장시킨 정치행사를 했다며 생떼를 쓰면서 고소를 했다합니다. 정부가 완전히 완장부대로 돌변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본문에 자세히 소개돼 있습니다.
우선은 현충원장
양 섭(전화: 02-811-6379 팩스: 02-822-3762)
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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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전두환-김대중-김일성이 공모한 폭동? 박근혜 Vs. 전두환
비운의 부녀대통령- 저자, 새벽달 초류항 박근혜 Vs. 전두환
학위, 경력 등 사회적 지위, 업적 등 겉으로라도 존중하는 매너
발언의 저작권 존중해야
10.26사건
앙숙지간의 차지철과 김재규, 종말의 서곡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오후 4시,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던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궁정동 안가에서 각하의 저녁식사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김재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랜 동안 엿보다 놓쳤던 기회를 이번에는 꼭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그가 키워준 육군총장 정승화를 궁정동 안기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지시대로 궁정동에 와 대기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최후
김재규는 각하를 시해할 권총을 준비하고 두 대령(박선호 박흥주)들을 불러 무서운 얼굴로 지시했다. “오늘 내가 각하와 차지철을 해치운다. 각하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모두 사살하라” 헬기가 도착하기 전에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별장 앞마당에 쪼그려 앉아 대화를 나눴다. 오늘 차지철 해치웁니다. 이에 김계원이 차지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내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차지철을 해치우면 박정희 대통령까지 해치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었다. 만찬시간 1시간 40분 만에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총을 쏘았다. 차지철은 팔뚝에 총을 맞고 화장실로 도망갔다. “뭣들 하는 짓이야?” 꾸짖는 대통령을 향해 김재규의 총탄이 날아갔다.
김재규와 정승화의 운명적 동행
이어서 궁정동에 M16총소리가 요란했다. 중정요원들이 대통령을 수행하던 경호원들을 쏘아 죽이는 총소리들이었다. 이 소리를 정승화는 바로 40m 거리에서 들었다. 김재규는 김계원에게 각하의 시신에 대한 보안처리를 해 달라 명령조로 말하고 자기는 정승화가 기다리고 있는 이웃 별관으로 뛰어갔다. 맨발에 와이셔츠는 양복바지에서 튀어나와 있었고, 피가 튀어 있었다. 그가 허리춤에 꽂은 권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김재규는 정승화를 밖으로 나오라 불러놓고 주전자 꼭지를 입에 넣고 한동안 물을 들이켰다.
총장 총장 차 대시오. 두 사람은 정승화 차를 타고 궁정동을 나갔다, 김재규가 정승화에 손동작을 했다. 엄지를 세웠다가 밑으로 내렸다. 각하가 쓰러졌다는 뜻이다. 총소리로 미루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정승화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외부의 소행인가요 내부의 소행인가요?” 김재규는 이에는 답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총장의 어깨가 무겁소, 계엄을 선포하면 어느 부대들이 동원되오?”
김재규 혁명에 동참한 정승화
육본 벙커에 도착하자마자 정승화는 김재규를 앞방에 모셔놓고, 자기는 상황실에서 국방방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상황처리를 했다. 1,3군 사령관에 전화를 걸어 진돗개2를 발령하고 20사단장에 전화해 육사로 출동하라 지시하고, 9공수 여단장에게는 육군본부로 출동하라 명했다. 국방장관이 상황실에 있었는데도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 수경사(전성각)는 차지철의 명령만을 듣게 돼 있다. 그런데 정승화는 월권하여 수경사령관에게 청와대를 포위하고 청와대 경호실 인력이 궁정동으로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차지철 바로 밑에 있는 경호실 차장 이재전 장군에 명령을 내려 경호실 변역을 동결하라 지시했다. 차지철이 죽었다고 믿기 전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최규하의 양다리
한편 김계원은 각하의 시신을 국군병원에 옮겨놓고 군의관으로부터 각하가 확실하게 사망했음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비상소집을 한다. 8시 40분,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으로부터 은밀히 김재규가 차지철과 각하를 살해했다는 정보를 듣고도 각료들에게 일체 알리지 않고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비상국무회의를 국방부에 가서 열었다. 밤 11:30분 비상국무회의가 국방부 회의실에서 열렸다.
대통령이 왜 살해됐는지 누가 살해했는지 묻지 않았다. 단지 신현확 부총리 및 몇 사람만 시신이라도 확인하자 따졌다. 각하 앞에서는 그토록 충성심을 자랑했던 국무위원들은 각하가 왜 사망했는지에 대해 따지려 하지 않고 권력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대한 계산에 눈들만 반짝이고 있었다. 국가는 무주공산이었다. 국무회의는 익일 새벽 00:25에 끝났다. 회의 결과는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이었다. 최규하는 이 회의 결과를 즉시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귀띔까지 해주었다. 총리가 이러했으니 다른 국무위원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그 많은 국무위원들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쥐죽은 듯 눈치들만 보았다. 위기에서 국가를 생각하여 나서는 자가 일체 없었던 것이다.
10.26.23:40분 김계원의 배신이 국가 살려
26일 23:40분은 역사적인 시각이었다. 벙커에 온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을 내놓으면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노재현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다른 일을 꾸몄다. 헌병대장 김진기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 이상한 것을 눈치 책 전두환은 육군본부 부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전화를 했다.
자네 김재규 얼굴 아나?
네
김재규는 자네 얼굴 아나?
모를 겁니다
지금 헌병복으로 갈아입고 애들 데리고 국방부에 와서 김재규 체포해
전두환 아니었으면 정권은 막강군벌 거느린 김재규와 정승화 차지
노재현 국방장관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그를 비호했지만 전두환의 순발력에 의해 김재규는 드디어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고, 거기에서 김재규는 자기가 범인이고 정승화와 함께 행동했다는 것을 털어놨다. 이에 이학봉 중령은 정승화를 즉시 체포하자 했지만 불과 두 시간 정도의 시차로 정승화는 이미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된 정승화는 김재규를 비호하고 자신의 개입 사실을 축소하려 갖가지 시도를 했다. 이학봉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승화의 구속을 건의했지만 전두환은 12월 6일에야 구속을 결심했고 D일을 12.12로 결정했다.
판결문에는 전두환이 동경사로 발령 날 것을 눈치 채고 정승화 체포를 결심했다고 하지만 전두환에 대한 인사이야기는 12월 9일 골프장에서 노재현과 정승화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이다. 체포하라 결재한 날은 12월 6일, 인사발령 이야기는 12월 9일이었다. 판결문이 너무 황당한 것이다.
12.12란?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 전두환은 수사국장 이학봉을 대동하고 국무총리 공관에서 집무하고 있던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당시는 정승화에 대한 의혹이 사회적으로 확산돼 있었고, 이러한 것은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곧바로 대통령에게 가져갔다. 전두환은 재가가 쉽게 나리라 생각하고 무조건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사전각본을 짰다.
그런데 의외에도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앉힌 자리에서 재가할 것을 고집했다. 정승화를 체포하는 일은 원체 큰일이라 전두환은 평소 군에서 여론을 이끌 수 있는 9명의 장군을 보안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경사30단으로 초청하여 재가가 끝나는 대로 체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승화와 가까운 장태완, 정병주(특전사령관), 김진기(헌병감)에게도 따로 설명해줄 요량으로 신촌만찬을 준비했다.
한편 허삼수와 우경윤 등은 4명의 보안사 서빙고 수사관들을 태우고 7시05분에 정승화총장 공관으로 갔다. 서빙고로 가자는 대령들의 권고를 받은 정승화는 순순히 응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부하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총격전이 유발됐고 그의 부하들과 범수대 대령이 중상을 입었다. 그 자신이 한 때 보안부대장을 했으면 저항해야 피해만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필요한 저항을 하다가 부하들을 다치게 한 것이다. 결국 박 수사관이 응접실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M-16소총으로 위협하고서야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한편 국방장관 노재현은 대통령이 빨리 오라는 호출명령을 받고도 이리 저리 피해 다녔고, 피해 다니는 동안 군에는 지휘공백이 발생하여 정승화 군벌과 30단 군벌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됐다. 긴장이 일자 불길한 생각이 든 5명의 장군은 밤 9시 반에 대통령에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면서 재가를 빨리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통령은 ‘장관 오면 해줄게’ 하고 담소들을 나누었다.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총장 권한 대행인 윤성민 참모차장 등 수도권 실세들이 나서서 30단에 모인 장군들을 무조건 반란군이라 규정하면서 병력을 동원하고, 30단과 청와대 지역을 전차포와 야포로 융단공격하려 하고, 상대방 장교들을 체포 구금함은 물론 장교들의 이름을 지정하여 사살명령까지 내리고, 대통령을 납치하여 정승화를 구하고, 무장헬기로 정승화를 구출하자는 막다른 단계에까지 이르다가 전두환에 의해 진압되고 체포되기에 이른다.
이리저리 숨어만 다이면서 대통령의 호출에 불응한 노재현은 새벽 1시, 제1공수여단과 국방부 옥상에 배치됐던 수경사 병력 사이에 발생한 총소리에 겁을 먹고 부관과 함께 국방부 건물 지하 1층 어두운 계단에 숨어 있었다. 대통령과 함께 하루 밤을 새운 신현확 총리는 참다못해 자기가 나서서 노재현을 찾아오겠다며 국방부로 향했고, 이에 공수대원들이 국방부 건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새벽 3시50분에 계단 밑에 숨은 장관을 발견한다.
총구를 겨눴던 병사들은 “나 장관이다”하는 말에 경례를 한 후 장관실로 모셔온다. 신현확은 장관과 이희성과 국방차관 김용휴를 태우고 총리공관으로 갔다. 노재현은 보안사에 들려 재가문서에 스스로 결재를 한 후 대통령에 가서 꾸중을 듣고 재가를 얻었다. 4시30분에서 05시 10분 사이였다. 최규하는 서명란에 05:10분이라 쓰고 서명을 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1996-97년에 진행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서는 전두환이 죄 없는 정승화를 체포하고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윤성민-장태완이 정승화를 풀어주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 5명의 장군을 보내 대통령을 협박하고, 공관 주변을 경계하는 병사들에 의해 대통령에 겁을 주면서 새벽 5시에 재가를 강요했고, 무단으로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군사반란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1996.7.1. 제18회 재판정에 나온 신현확 전 총리는 장군들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정중하게 건의를 한 후 돌아갔으며, 대통령과 하루 밤을 새우는 동안 공관 경비병을 의식한 적은 전혀 없다고 증언했다. 12.12가 없었다면 시국은 정승화-김재규가 주도한 쿠데타 세상으로 연결됐을 것이다.
5.17이란?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월 20일에는 남조선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 ‘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월 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19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월 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7일, 제1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전국내각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 등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이나 김상진 못지않은 애국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이어서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무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하도록 해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조직을 분쇄할 것인가!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던 것이다.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당시 북한의 위협은 별로 없었으며,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 되는 것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문을 작성했다.
아울러 폭력으로 국무위원들을 협박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국방장관과 국무총리의 계엄지휘권을 배제하고, 바지 같은 대통령을 간접정범으로 이용하여 내란을 했다고 판결했다. 참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인민재판이요 관심법 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마디로 김대중이 이끄는 세력은 민주화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이 5월22일 전국소요를 일으킬 수 있도록 가만 두었어야 했다는 판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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