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제253화, 간첩 임헌영이 지배하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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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5-28 21:51 조회4,67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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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3화, 간첩 임헌영이 지배하는 한국
https://www.youtube.com/watch?v=rii0W-85y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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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성역 – 2억 4천만원 배상 –
미국의 호칭과 계엄군에 대한 평가
위안부 성역 – 2,600만원 배상 – 윤미향의 돈벌이- 반일 종북 정치 수단
세월호 성역 – 조롱 받는 주장
부정선거 시위; 김종인 주호영 거주지 사무실 앞에서
시위조직의 다양성. 그 의미 성찰해야 (시장 원리)
모두가 나 잘났다 시위
트럼프 "우편투표, 부정선거 가능성"...공화당에 저지 촉구
쿠팡 코로나 배달소
“마스크 내리고 빨리 빨리” 쿠팡 직원이 고백한 근무환경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0528/101251723/2?ref=main
재난지원금 효과에 오른 소고기 값, 언제 내려갈까
http://www.hani.co.kr/#csidx8e01b8c0394d0ecadd31f92a825b65f
민경욱, 투표용지 제보자 공개
“사무원 추정 男이 참관인에게 건네”
선관위 투개표 시연 쇼
이상로, 저는 분명히 홍준표씨가 말한 세월호 해난사고 발언을 지지한다.
이상로 방심위원, ‘세월호 망언’으로 의견진술 당사자 됐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946903.html#csidx8f1e7268e9e173abda766d377bd484a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세월호, 5‧18민주화운동 모욕하는 이상로 위원을 즉각 해임 건의하라
http://www.ccdm.or.kr/xe/comment/294966
與 의원들 “유신청산 특별법 만들자”
“21대 국회가 유신헌법 원천 무효를 선언해 유신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는 출발점을 마련해야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8/2020052803066.html
백선엽
DJ 3남 김홍걸 당선자 "백선엽은 만주 간도특설대 출신"
윤상현 원희룡은 "나라 구한 영웅,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8/2020052802061.html
한국 현대사를 풍미했던 이들 '3인방’(오마이뉴스)
이승만-백선엽-박정희의 감출 수 없는 과거
[사설] 백선엽 장군이 현충원 못 간다면 더 이상 대한민국 아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27/2020052704642.html
백 장군이 6·25 때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지 못했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다. 백 장군 현충원 안장을 막는 민주당 국회의원들도 당연히 없다. 백 장군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서 800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치려 하자 백 장군이 맨 앞에 나서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독려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미군에 앞서 평양에 입성했고, 1·4후퇴 뒤 서울 탈환 때도 최선봉에 섰다. 6·25의 살아 있는 전사(戰史)이자 전설이다. 그는 국군 창설에 참여했고 휴전회담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군 최초 대장에 올라 두 차례 육군참모총장을 맡으며 군 재건을 이뤄냈다. 이런 백선엽을 미군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장교' '최상의 야전 지휘관' '참모와 지휘관 모두 탁월'이라고 평가했다. 주한미군 사령관들은 취임하면 백 장군을 찾아 전입신고를 했다. 단순한 '한·미 동맹의 상징'이 아니었다. 백 장군을 군 작전가로서 존경했다.
그런데 여권 지지 세력은 나라를 지킨 백 장군을 깎아내리기만 한다. 그의 공훈에는 눈을 감고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한 기록만 부각시켜 '독립군 토벌 친일파'라고 한다. 이렇게 친일파 공격을 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작 자신의 부모가 진짜 친일파인 경우가 숱하게 드러났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백 장군이 "당시 중공 팔로군과 싸웠고 독립군은 구경도 못 했다"고 했으나 이는 외면한다. 이 정부 광복회장은 "백선엽은 철저한 토착 왜구"라고 했고, 현 청와대 정무비서관은 백 장군을 '민족 반역자'로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 장군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남침 공로로 북한에서 중용된 인물을 국군의 뿌리라고 했다. 육사는 백 장군 활약을 그린 웹툰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그의 훈장을 박탈하자는 주장이 나오더니 이제는 현충원 안장까지 시비 거는 것이다.
이들이 백 장군을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그가 친일파여서가 아니라 6·25 때 공산군과 싸워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친일파'라는 것은 대중의 반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현충원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안식처다. 백 장군이 현충원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더 이상 대한민국이 아니다. 6·25 때 백 장군의 지휘 아래 목숨을 바친 12만명의 국군 선열이 통탄할 일이다.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백년전쟁)
임헌영(본명 임준열, 민족문제연구소장)은 父子가 빨갱이
임준열의 아버지 임우빈은 빨갱이 집단인 보도연맹 가입으로 처형되었고, 임준열 자신은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5년형을 받았다. 남민전에 가입할 때까지 37세가 되도록 변변한 직장 없이 열등의식에 차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가 다 대한민국을 증오한 빨갱이다. 대한민국을 증오-파괴한 자가,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국가를 부자로 만든 애국자, 반공을 국시로 하여 빨갱이 사냥을 했던 박정희 대통령에 욕을 해댄다. 빨갱이 물에 들면 선악 구별이 안되고 오직 한풀이에만 올인한다.
1941년 1월생, 남민전 당시의 직업은 문학평론가, 당시 주소는 은평구 녹번동, 본적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구연리, 남민전 가명은 한미정, 필명은 임헌영인 자다. 박헌영을 흉내 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임준열은 임우빈의 2남, 그의 부친은 임우빈 본적지인 의성군 금성면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처형당했다. 이 나라에 한이 맺힐 만한 사람인 것이다.
임준열은 1959년 3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과 동시에 소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이듬해인 1960년 12월에 사임하고 1961년 3월-1965년 3월간 중앙대 국문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8년 3월에 동 대학원을 이수했다.
1969년 10월 경향신문 주간경향 기자로 재직하다가 1970년 10월 월간 ‘다리’지 주간으로 전직하여 여기에 근무하면서 1972년 3월 중앙대 강사를 겸직하다가 1974년 1월 ‘문인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1976년 7월 대법원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4월부터는 ‘태극출판사’ 기획부장으로 있으면서 1978년 6월부터는 월간 ‘독서’ 주간으로 재직하다가 1979년 8월부터 도서출판 ‘상황사’를 설립하여 경영해 오다가 남민전에 뛰어들어 1심에서 징역 15년, 2-3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 형량은 이제오와 동일하다.
남민전은 1976년 3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에 의해 발기를 한 후 박대통령이 서거하신 계절인 1979년 10월에 일망타진되었다. 일당 73명이 재판을 받았고, 임준열의 피고인 번호는 72번, 참고로 이재오는 60번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은 이재오가 포섭하여 키운 사람
임준열은 1976년 11월 하순, 15:00시 경, 주욱 필동 소재 근무지인 태극출판사 사무실로 찾아온 이재오로부터 “민주화투쟁의 핵심 조직”(민투)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자마자 이를 쾌히 승낙하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0:00경 서대문구 냉천동 소재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의 주재와 이재오의 추천 및 사회로 민투의 강령과 규약을 선서하는 의식을 치름으로써 남민전에 가입했다. 수일 후 20:00경 은평구 홍은동 4거리 중국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주화운동‘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12월 초에도 같은 음식점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점조직에 대한 교양을 받았다.
1979년 1월4일 20:00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투의 첫 활동으로 삐라를 뿌려야 하니 삐라 문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익일인 1월 5일, 22:00시 삐라 문안을 작성했다. “오늘 박정희 1인 학정은 군대와 경찰의 사병화 . . 한국 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1인폭정과 무제한 투쟁할 것을 . .”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 1인 폭정을 타도하기 위하여 . .” 그리고 이를 이재오에게 전달했다.
1월 중순 20:00시 임재오, 임기묵,(10년에서 3년으로 확정) 최석진(1,2심 사형에서 무기로 확정) 등과 4인 1조가 되어 삐라 살포를 위한 수개지역 사전답사를 했다. 이재오가 삐라를 살포하다가 구속되자 이재오의 영치금, 변호사 문제를 이재문과 논의하고, 이재오가 맡고 있던 민투책을 승계했다, 이후 수회에 걸쳐 자금을 전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섭하여 남민전 조직 확대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1977년9월 16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 초안을 작성했고, 동년 9월말에는 권오헌의 집 안방에서 안재구가 준비해온 남민전기를 걸어놓고 안재구가 가져온 단도를 임준열과 함께 세 사람이 거머세우고 강령, 규약, 선서문을 낭독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 자는 아버지도 빨갱이, 자신도 빨갱이다. 그가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아간 것은 국가-사회에 대한 아버지의 원한과 그 자신이 치룬 재판들과 감옥생활에 대한 보복심리 그리고 그가 심취했던 사회주의 서적들에 의해 형성된 공산주의 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심취했던 책들은 “1981년 10월 20일, 발간된 ‘좌익사건실록’ 746-747쪽에 수록돼 있다.
그가 친일파 명단을 작성한 것은 자신이 빨갱이 행각으로 감옥생활을 했고, 변변한 직장조차 가져보지 못했고, 그의 부친은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처형당한 데 대한 한풀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남민전 피고인 번호 제6번, 최석진(1951 법륜의 형), 안철수의 스승이라는 법륜의 실명은 최석호(1953년생),
5.17이란?
10.26 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국민은 북한의 남침을 가장 걱정했다.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이어서 12월 20일에는 남조선에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존재하지도 않던 ‘신군부’라는 말은 이때 김일성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였다.
4월 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다. 1980년 3월부터 5.18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반면 안보에는 관심조차 없는 3김시대의 정치권과 재야세력으로 불리는 불순세력들은 때가 왔다며 최규하 주도의 과도정부를 유신잔당이라 몰아치면서 즉시 퇴진하라며 압박을 가했고, 이에 최규하 정부는 연내에 헌법개정을 마치는 대로 정권을 이양할 것을 수차 약속하면서 재야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학원자유화를 허락했고, 2월 29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지학순 등 긴급조치 위반자 687명에 대해 사면-복권을 단행하는 등 유화조치들을 취했다.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 신나는 계절이었던 것이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신민당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뛰쳐나와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하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폭력시위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 규모로 확산됐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7일, 제1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 퇴진-전국내각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했고, 학생 등을 향해서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김재규도 김주열이나 김상진 못지않은 애국충신”이라며 과격시위를 선동했다.
이어서 김대중은 4월 10일, 5월 1일, 5월 10일 3회에 걸쳐 북악파크에서 문익환, 예춘호, 장기표, 심재권 등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 집단을 이끌고 전국 폭력시위에 의한 국가전복 계획을 수립하고 김대중의 혁명내각을 작성했다. 5월15일은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 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22일을 기하여 군인,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은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하도록 해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과 이들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 조직을 분쇄할 것인가!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 조치였던 것이다.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 이후 선포됐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5.18일 새벽 2시를 기해 전국 136개 국가시설을 보호하고 31개 주요 대학을 점령하기 위해 25,000명의 계엄군을 배치하는 한편, 5.17 자정을 기해 이른바 김대중 내각을 구상했던 김대중, 김상현 등 24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체포하고 학생 주동자들을 구속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규하 정부와 계엄당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됐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당시 북한의 위협은 별로 없었으며,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 되는 것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문을 작성했다.
아울러 폭력으로 국무위원들을 협박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함으로써 국방장관과 국무총리의 계엄지휘권을 배제하고, 바지 같은 대통령을 간접정범으로 이용하여 내란을 했다고 판결했다. 참으로 이해조차 되지 않는 인민재판이요 관심법 재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마디로 김대중이 이끄는 세력은 민주화세력이기 때문에 그들이 5월22일 전국소요를 일으킬 수 있도록 가만 두었어야 했다는 판결인 것이다.
김대중(55,정치인 사형)
문익환(62,목사 15년)
이문영(53,교수 20년)
예춘호(52,전국회의원 12년)
고은태(47,시인 15년)
김상현(45,정치인 10년)
이신법(30,학생 12년)
이해찬(27,학생 10년)
조성우(30,학생 15년)
이석표(27,학생 7년)
송기원(32,학생 10년)
설훈(27,학생 10년)
김종환(47,정치인 4년)
심재철(22,학생 5년)
서남동(62,교수 2.5년)
한승헌(45,변호사 3년)
이해동(45,목사 4년)
한완상(44,교수 2.5년)
송건호(52,전동아일보편집국장 2년)
유인호(54,교수 2년)
이호철(36,소설가 3.5년)
김윤식(66.정치인 집행유예)
이택문(45,전국회의원 집유)
김녹영(56,전국회의원 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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