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의 광주(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수복 작전 직접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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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5-06 17:43 조회4,05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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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5일의 광주(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수복 작전 직접 챙겨)
5월 25일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 날을 기점으로 하여 광주사태는 강경파 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 재야인사들이 지배하게 됐고, 정부와의 대화나 협상의 주제도 광주시의 치안을 수습하는 차원을 떠나 정치적 이슈로 바뀌게 됨으로써 광주사태의 평화적이고 자율적인 해결은 극히 어려워지게 됐다. 홍남순 변호사와 김성용 신부는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에게“ 현 단계에서 무기를 반납해서는 안 되며 계속 강경하게 투쟁하라, 나는 죽을 각오를 하고 목욕까지 하고 왔다. 학생들도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 까지 총기를 반납하지 말고 끝까지 투쟁하라”고 강경투쟁을 주문했다. 이런 지시와 격려를 받은 김종배, 윤개원(윤상원 28, 서점종업원, 5.27 도청 앞 자상으로 사망) 등 학생대책위원회 강경파는 25일 밤 10시,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해제, 정치일정 단축, 김대중 석방 등 정치적인 문제를 학생대책위원회의 대정부 요구사항에 포함시키며 학생대책위원회를 YWCA 인사까지도 포함한 범 투쟁기구로 확대 개편하기로 합의한 후에 무기반납을 주장하는 김창길 위원장을 축출하고 강경파인 김종배를 새로운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학생대책위원회>
참고로 위 개편된 학생수습위원회 간부들의 인적사항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종배(26, 학생 무기징역)
대변인 윤상원(윤개원 30 위장취업 도청 앞에서 자상으로 사망)
외무담당부위원장 정상용(30 사원 무기징역)
내무담당부위원장 허규정(27 학생 15년형)
기획실장 김영철(32 사원 7년형)
민원실장 정해직 (29 교사 5년형)
상황실장 박남선(26 골재운반운전수 무기징역)
보급부장 구성주 (26 건재상 2년형)
홍보부장 박효선 (29세, 교사, 전남대 국문과 졸)
조사부장 김준봉(21 사원 5년현)
기동타격대장 윤석루(20 양화공 무기징역)
경비담당 김화성 (21 종업원 5년형)
재야 종교인들은 25일 오전에 남동성당에서 집회를 갖고 현 상황을 중대 사태로 규정을 하고“피의 대가 없이 물러날 수 없다”면서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였다. 홍남순, 이기홍, 이성화, 조아리, 이애신, 장두석, 조비오, 이종기, 김성용, 이기홍 등 강경파 재야인들도 YWCA 총무실에서 회동을 갖고 김대중 석방, 계엄령 해제, 정치일정 단축(국민연합 주장의 반복)을 정부에 요구하고 관철될 때까지 강력하게 계엄군과 투쟁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16시경 정시채 전남 부지사를 찾아가 학생대표인 김종배 학생수습대책위원장을 배석시킨 가운데에서 결의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계엄군의 후퇴 이후 정부는 시위를 종식시키기 위한 호소를 여러 차례 했다. 5월 23일에는 정래혁, 문형태 등 호남 출신 정치원로들이 광주 KBS 방송에 나와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호소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시민들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고, 5월 24일에는 윤성민 1군사령관이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선무방송을 하였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시민들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소준열 광주지역 계엄분소장도 5월 22일부터 5월 26일까지 매일 광주시민수습대책위원회 간부와 학생수습대책위원회 주도 학생들을 만나 무기 반납과 치안회복을 호소하고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요구는 최대한 수용할 뜻을 전했다. 그러나 광주는 5월 25일에 들어서면서 이미 다른 세상으로 치닫고 있었다. 광주의 협상 대표가 강경파들로 바뀌었고, 이들은 계엄해제, 김대중 석방, 정치일정 단축 등 김대중이 주장했던 정치적 요구를 들고 나옴으로서 모든 협상은 무위로 돌아갔다. 사정이 다급하게 돌아가자 최규하 대통령이 급거 광주에 내려왔다. 17시 40분, 광주 전교사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라디오를 통해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광주재진입 작전 계획지침 입안과정(상무충정작전)
광주재진입 세부 작전계획서 작성
5월 23일에 광주재진입작전 기본계획안이 승인됨에 따라 소준열 장군은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매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전교사가 작성한 세부 작전계획을 보고한 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수정 지침을 받아 세부작전계획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최종 승인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이 입안한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의 내용은 무장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는 중요거점인 전남도청은 3공수여단 특공조가, 광주공원은 7공수여단 특공조가, 전일빌딩, 관광호텔은 11공수여단 특공대가 기습점령하고 20사단은 특전사 특공조가 목표지점을 점령하면 이를 인계 받아 광주시내의 치안을 회복시키며, 31사단, 보병학교, 포병학교, 기갑학교 병력은 후방지원과 광주시 외곽선을 봉쇄한다는 것이었다.
광주 재진입작전 지첨서 작성 경위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의 작전계획을 매일 계엄사령관에게 직접 들고 가서 보고한 사람은 전교사 작전참모가 아니라 2군사령부 작전참모였다. 이는 절묘한 조치였다. 왜냐 하면 2군 작전참모가 알고 있는 상황지식은 모두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곧바로 알려지게 되고, 진종채 2군사령관의 지침은 곧바로 전교사령관의 작전 계획에 반영되기 때문이었다. 보고계층을 한 단계 줄임으로써 이는 엄청난 시간을 절약하고 있을 수 있는 오해나 착오를 예방하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드디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5일 아침 4시에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 초안을 작성하여 5월 25일 아침 6시경에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6시 10분경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을 대동하고 주영복 국방장관 공관으로 가서 해군, 공군 참모총장과 합동참모본부 의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설명하고 광주재진입작전을 5월 27일 00시 01분 이후에 실시하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그 날 오후 2시 30분부터 4시20분까지 1시간 50분 동안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재진입작전계획을 보고하여 승인을 받았다. 광주 재진입작전은 소준열 현지 사령관이 입안하여 계엄사령관이 수정하였고,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보고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현장 사령관에 의해 수행된 것이다. 여기에는 보안사령관이나 중앙정보부장서리 등이 간여할 수도 없고, 간여할 환경도 아니었다. 이를 전두환이 주도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군에 대한 모독이요 몰상식 그 자체다. 군은 전두환의 사병도 아니며 대통령의 사병도 아닌 것이다. 군 장성들, 장교들은 하나하나의 인격체이지 도적 떼처럼 두령을 모시는 무지렁이들이 아닌 것이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7시 45분에 육군본부에서 참모차장, 작전참모부장과 군수참모부장이 참석한 광주재진입작전 대책회의를 열어 준비상황을 지시한 후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에 내려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직접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은 이희성 계엄사령광의 지시에 따라 대책회의가 끝난 직후인 5월 25일 12시경에 광주로 가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 지침서를 교부했다. 이날은 비가 많이 내려 헬기를 띄울 수가 없어 규정상 참모총장과 참모차장만이 탈 수 있는 쌍발 경비행기 U-21기를 타고 가야 했고, 그래서 참모차장이 황영시와 함께 타고 갔던 것이다.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이 입안한 상무충정작전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육군본부작전교육참모부 작성“상무충정작전실시판단”)
상무충무작전 지침서
1. 상황
가.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작된 광주지구 및 그 일원의 소요사태는 23일 이후 이성을 되찾아가는 징후가 보임.
나. 폭도들은 상당수의 무기 및 장비를 탈취 확보하고 있으며 주요 도로변에는 기관총을 배치하고 각종 장애물을 구축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양민을 협박하며 난동을 부리고 있음.
다. 군은 광주지역의 격심한 소요난동사태에 대처하여 양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노획하고 민족의 비극을 막기 위하여 선무작전, 봉쇄작전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성을 되찾도록 최선의 협력을 경주하였고 민족 역사상 오점을 피하기 위하여 비상한 인내와 자제력을 견지하여 왔음.
라. 광주지구의 서민층은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의 고갈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의약품의 고갈로 노약자 및 환자의 희생이 증대되고 있어 이와 같이 계속되면 새로운 집단범죄의 발생이 우려됨.
마. 지구 내의 폭도들의 상당수가 살인, 방화 등의 흉악범 및 불량배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계엄군의 선무공작 활동에 의한 순화효과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며 시민자치 능력에 의한 사태수습 및 치안회복의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음.
바. 지역 내의 치안공백 상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이를 이용한 불순분자 내지 북괴무장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음.
사. 난동 6일째부터는 선량한 시민의 흥분 기세가 점차 진정됨으로써 공산주의자와 폭도 그리고 시민이 분리되어 진압작전을 실시할 여건이 갖추어져 가고 있음.
2. 작전지침
가. 본 진압작전(상무충정작전)은 전투병과교육사령관 책임 하에 실시할 것.
나. 작전 중 양민 및 계엄군의 희생을 최소로 할 대책을 강구할 것.
다. 5월27일00시01분에 작전을 개시할 것.
3. 작전지도방법
가. 본 작전은 민족사적 의의를 갖는 작전이며 국민의 보루인 국군의 사명을 다하는 성전이어야 함.
나. 공산당과 폭도는 격파하고 양민에겐 필히 피해가 없는 작전이 되어야 함.
다. 군인가족, 정부관공리 가족의 보호책을 수립할 것
라. 군인다운 행동으로 양민, 노약자, 연소자, 노약자 보호할 것.
국방장관 주재 오찬회의
주영복 국방장관은 광주재진입작전 계획이 확정되자 5월 25일 12시에 합참의장, 해군, 공군 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서리, 수도경비사령관이 참석하는 간담회를 주재했다. 주영복 국방장관이 간담회를 연 것은 군 수뇌부와 국가정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서울의 치안책임을 맡고 있던 수도경비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이 실시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광주재진입작전에 따르는‘유관기관과의 협조’를 위한 것이었을 뿐‘광주재진입작전을 심의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국방부 간담회에서는 상무충정작전이 실시될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군사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에게 군사력의 증강배치를 요청하기로 했다.
최규하 대통령 주재의 광주현장 대책회의
전두환, 이희성 등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대통령께서 광주로 내려가셔서 한 번 더 호소를 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는 건의를 받은 최규하 대통령은 5월 25일 17시 40분경 광주에 내려가 전교사를 방문하고 주영복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과 김종환 내무장관, 진의종 보건사회부장관, 최종환 건설부장관 등이 배석한 가운데 광주사태에 관한 현지 대책회의를 개최했다. 대책회의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광주사태에 관한 상황을 보고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에게 광주재진입작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작전은 제가 책임을 집니다. 작전을 안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지만 불가피할 때에는 차선책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광주재진입작전의 불가피성을 건의했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광주재진입작전의 실시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재진입작전이 실시되면 희생자가 얼마나 생기겠느냐고 물었다. 김재명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장은 150여명의 사상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최규하 대통령은 관계관들이 잘 협조하여 희생자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달라고 당부했다.
내가 던진 출사표, 조국이여 영원하라
이 제목은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참모 김순현 장군의 글로 김재명 장군의 회고록에 들어있다. 여기에서 출사표란 재진입 작전계획을 의미한다. 글의 요점만 발췌 요약한다. 이 글에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기세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기세는 군부에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아니라 당당한 군주의 모습이었다.
5월 25일, 소준열 사령관(육사10기)이 그의 작전참모인 나에게 육본에서 작전참모부장 김재명(소장 10기)장군이 곧 비행장에 도착할 것이니 모시고 오라는 지시를 하였다. 소준열 사령관실에 도착한 작전참모부장은 계엄사령관 이희성 대장의 작전지침을 설명하고 이를 정식으로 수교하였다. 그리고 사령관을 비롯한 특전사령관(정호용 소장11기), 3개 특전여단장(최웅, 최세창, 신우식 준장), 20사단장(박준병 소장 12기)보안사 최예섭 장군등과 함께 사태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
이때 최규하 대통령께서 현지방문차 출발하셨다는 급보가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전교사령관 및 참모들은 이 갑작스런 국군최고통수권자이신 대통령의 방문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현지 상황처리에 급급한 나머지, 대통령을 모실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해서 사령부까지 차량으로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약 1시간 정도의 시간 밖에 없었다. . . 차트사가 쓴 표지를 합철해서 2층 소회의실로 뛰어 갔다. 차트를 걸고 지시봉을 들고 서기가 무섭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대통령 일행이 들이닥쳤다. 중앙에는 대통령께서 앉으시고 좌측 열에는 국방장관(주영복), 참모총장(이희성 대장), 작전참모부장(김재명 소장), 전교사부사령관(김기식 소장)이 착석했고, 우측 열에는 방위협의회 의장인 전남도지사(장형태), 광주시장(구용상), 중정지부장(박정인), 경찰국장(박용학)순으로 자리를 잡았다.
소준열 사령관이 대통령께 보고를 했고 나는 차트를 넘겼다. . . 전교사령관 책임 하에 실시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실 것을 건의했다. 시종 침통한 분위기 속에 보고를 경청한 대통령은 도방위협의회 의장인 도지사를 향하여 “장지사는 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라고 물었다. 장지사는 대통령의 하문에 그저 고개를 숙여 숙배하면서 “각하 죄송합니다” 라고 엉뚱한 답변을 하였다. 그러자 이희성 참모총장이 “장지사 그게 무슨 말이요” 하고 힐책하자 장지사는 참모총장을 향해 똑같은 자세로 고개를 숙여 숙배하면서 “제가 무능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직답을 피한 엉뚱한 대답을 했다. 참모총장이 책상을 치면서 “그게 무슨 말이요. 도방위협의회 의장으로서 계엄군에 작전을 요청하겠다는 것이요, 안하겠다는 것이요” 라고 언성을 높였다. 대통령훈령에 의하면 후방지역 작전은 사태발생시 도지사가 의장이 되는 도방위협의회 (군부대장, 경찰국장, 기관장으로 구성)에서 지역 내 가용한 모든 자원으로 수습하고 불가능할 시 중앙방위협의회 의장인 대통령에게 건의하도록 되어 있었다. 흥분한 참모총장을 향해 대통령께서는“가만있어” 하고 말을 막았다. 이어서 단상에 서있는 소준열 사령관을 향하여 “그 작전을 시행한다면 얼마나 희생자가 날 것 같소” 라고 하문하셨다.
순간, 장관, 참모총장, 사령관 모두에는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답변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김재명장군이 나섰다.“어느 정도의 희생은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통령은 “어느 정도란 얼마를 말하는 것이오” 라고 숫자를 요구하셨다. 김재명 장군은 “약 150여명 정도는 각오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 . 대답이 끝나자마자 대통령께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내가 직접 도청으로 가서 학생대표를 만나 보겠다” 고 말씀하시면서 회의실 밖으로 나가시자 모두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대통령께서 도청으로 가자며 나서자 모두가 우르르 따라나섰다. 대통령이 무력시위대에게 찾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장관, 총장, 작전참모부장, 사령관이 얼싸 안다시피 하여 접견실로 밀어 넣으면서 “각하는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십니다. 도청에 가셔서 만일의 사태(납치되거나 억류되면)가 발생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국가안위를 생각 하십시오” 등등 간절한 애원들을 쏟아냈다. 드디어 대통령도 좌정하셨다. “각하, 하실 말씀이 계시면 녹음을 하십시오” 소준열 사령관은 재빨리 녹음기를 준비시켜 대통령 앞에 갖다 놓았다. 대통령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메모지 위에 말씀하실 요지를 대략 정리 하셨다.
“친애하는 광주시민, 그리고 애국학생 여러분, 저 최규하 대통령입니다. 지금 광주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직접 만나 뵙지 못하고 이렇게 녹음방송으로 대신함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취지로 시작하여 “하루속히 여러분이 원하는 참된 민주주의로 광주시민이 평온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라는 말로 대통령의 애절하고도 눈물어린 호소를 마감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아무 말씀 없이 떠나 가셨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녹음은 즉시, 경비행기(L-19)에 의한 공중방송으로 도청상공과 광주시 전역에 전파되었다. 그 후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장군이 수교한 작전지침(출사표)의 “본 작전은 전교사령관 책임 하에 실시한다” 에 근거하여 광주시 탈환작전은 전교사령관 소준열 장군의 전적인 결심에 의해 실시되었다. 결과는 최소한의 희생자를 낸 세계전사에 유례가 없는 성공적인 작전으로 종결되었다. 그리고 최대통령께서 녹음방송을 통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인사말처럼 오늘의 광주는 “참된 민주주의로 평온을 찾아”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2020.5.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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