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제229화, 공수부대 장교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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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04 23:05 조회4,68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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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제229화, 공수부대 장교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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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공수부대 장교들의 증언
전두환 광주재판의 전망 4월 6일 오후 2시 201호 법정
광주인들의 증언과 공수부대 장교들의 증언 비교
광주사람들은 1988년 [광주청문회]를 독점했다. 당시 청문회를 주도한 세력은 광주세력과 좌익세력이었고, 이들은 공수부대 요원들 중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선정하여 청문회에 세웠다. 그런 청문회를 본 국민들은 물론 공수부대 가족들까지도 아빠와 오빠를 부끄러운 존재로 따돌림 했다. 그리고 그후 공수부대 대원들은 물로 그 가족들은 세상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주눅 들어 있었다. 이제까지 언론이 그토록 기회를 주었지만 광주사람들이 내놓은 주장에는 증거가 전혀 없다. “어구 어구 내 새끼, 당신들이 새끼 죽여 봤당가?” “당신들이 사람 죽는 거 봤당가?” “당신들이 5.18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려” “당신들 눈에는 광주사람들이 빨갱이로만 보이능겨?” “어유 분해라” “전두환은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이여” 판에 박힌 이런 종류의 말뿐이었다. 반면 아래의 이야기들은 공수부대 장교들의 증언들이다.
<7공수 33대대장 권승만 중령>
5월17일 밤 전남대에 진입했던 7공수 33대대장 권승만 중령이 1996년 1월 5일 서울지검에서 진술한 진술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1) 5.18일 오전 9:30분부터 10:30분까지 대대는 몰려든 학생들에게 해산을 종용했고 학생들은 돌을 던졌다. 11시경에 여단장이 현지를 방문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위를 진압하려는 마음은 없었고, 여단장이 오기 전에 그들을 빨리 쫓아버리기 위해 20명 정도를 정문으로 내보냈고, 부대원들은 일제히 시위대를 향해 돌진했다. 이에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금남로 쪽으로 모이자”며 달아났다. 대대는 14시까지 주둔지에 있었다. 31사단장이 헬기로 날아와 “16시를 기해 금남로에 출동하여 시위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 강경진압이 초래된 것은 시위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시위대의 퇴로까지 차단하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며 이는 정웅 사단장이 시위 작전과 공수대 운영에 서툴렀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본다.
3) 원래 공수부대 시위진압의 기본은 언제나 주동자를 체포하는 것이었다.
4) “죽음을 각오하고 진압하라”는 말을 정웅으로부터 들었지만 이는 그만큼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상투적인 말로 알아들었다.
<11공수 35대대장 김일옥 중령>
5월17일 밤 조선대로 진입했던 7공수 제35대대장은 육군본부가 작성한 “역사자료”에 5.18체험기를 썼으며, 일부만 발췌한다.
1) 5월19일 오후부터 시위대 구호는 “위대한 민족의 횃불 김대중 선생을 구하자” “광주시민을 주축으로 위대한 전남공화국을 만들자” “현 정부는 미국의 앞잡이, 위정자는 떠나라”는 구호를 외치고 피켓을 들고 다니면서 경찰에 투석을 했다.
2) 5월 19일 초저녁에는 관용차량을 불태우고 경상도에서 생산한 물자를 운송하던 모든 경상도 차량을 불태웠다.
3) 5월 20일부터는 시위방법이 매우 다양해 졌다. 시위 행렬의 맨 앞에는 어린이, 할아버지, 할머니를 세우고 뒤에는 학생 및 중장년들이 삽, 낫, 곡괭이, 각목 등을 휴대한 채 애국가를 부르며 접근하여 투석했고, 계엄군이 물러가지 않으면 이런 무기로 찍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4) 조선대 앞에서는 시위대 버스가 민가를 들이 받아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5) 5월 21일에는 폭도들이 건물 옥상과 산 정상에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전남대에 있던 장병들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6) 5월 21일 19시부터 화순방향으로 철수하는 차량 제대에게 여러 건물의 옥상에서 집중 사격을 가해 공수병 5명이 관통상을 입었다. 차량 2대가 낙오되어 전소됐고, 운전병 1명은 폭도들에 잡혀 광주 사직공원에서 온 몸이 찢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됐다.
7) 폭도들은 야간을 이용, 식량, 금은보석, 가축들을 약탈했다.
8) 5월 27일 진압작전 시 폭도들은 도로 좌우측과 주택가의 소로 양쪽에 마대를 쌓아 초소를 만들어 놓고 우리에게 사격을 가했다. 첨병지대장인 최연안 소위가 사망했고 6명이 부상을 당했다. 응사를 했더니 모두가 달아나고 3명만 체포했다. 이들은 좌측 팔과 머리에 흰 띠를 둘렀는데 거기에는 적색으로 “서열 1번 계림동장”“충장파출소장”등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체험기>
당시 11공수 61대대장이었던 안부웅 중령은 1995년 2월 13일 피의자 신문을 받았다. 그 중 일부만 발취한다.
문(검사): 고소-고발인들이 주장하기로는 공수대원들이 시위학생을 잡으면 먼저 곤봉으로 머리를 대려 쓰러트리고, 서너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군화발로 머리통을 으깨버리고, 등과 척추를 짓이겼으며, 심지어는 군화발로 얼굴을 뭉개고 곤봉으로 쳐서 피곤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떤가요?
답: 교육을 시킬 때는 하반신만 때리라고 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타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병사들은 7-8명씩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시위대를 강하게 때렸다면 오히려 수많은 시위대에 얻어맞았을 것입니다.
문: 5월 19일 시외버스 터미널 상황을 말하시오.
답: 날이 어두워지자 200m 떨어진 지점에서 타이타닉 차가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지역대 병력을 데리고 가보니 경북번호판을 단 차가 불타고 운전수가 구타를 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문: 5월 21일 12시 이후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답: 13시경, 시위대가 장갑차와 다른 차들의 시동을 걸어 부릉부릉 거리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매우 살벌했습니다. 갑자가 장갑차가 빵빵 소리를 내더니, 시위대로부터 화염병이 날아와 62대대 장갑차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뒤로 물러나자 그와 동시에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돌진하는 순간 시위대에서 총성이 연발로 났습니다. 계엄군 1명이 깔려서 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이 때 대대의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로부터 62대대 이창호 대위가 얼굴에 총알이 스쳐 비틀거리기에 부축해 주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헬기가 와서 MBC를 지키던 31사단 분대 규모의 병력을 철수해 갔습니다. 이때 탄약을 인계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휴식하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뭐야” 하고 일어서보니까 시위대 버스 한 대가 우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병력들은 쉬느라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버스가 갑자기 들이닥치니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한 것이었습니다. 버스는 사격을 받은 후 분수대를 들이받고 충장로 족으로 가다가 담을 들이받고 정지했습니다. 이 때 관광호텔 쪽에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톤 트럭이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또 질주해 들어왔습니다. 대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그 차량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차량들이 주춤하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제가 발로 차고 다니면서 사격중지를 외쳤습니다. 그 후 우리는 장갑차 1대만 남겨둔 채 모두 철수했습니다.
<3공수 13대대 9지역대장 이상휴 대위의 체험>
다음에 육군본부가 작성한 역사자료에 실린 이상휴 대위의 체험기다.
1)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시위대와 5m 거리를 유지하면서 메가폰으로 “시민여러분 자제하시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되풀이해서 방송을 했다. 그럴 때마다 일부 군중은 우리에게 돌을 던지고 일부 선량한 시민은 돌을 던지지 말라고 고함을 치기도 했다. 이때 돌에 맞아 쓰러진 병사가 4명 있었다.
2) 광장 중앙에 8톤 트럭이 1대 서있었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가보니 경남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이었다. 폭도들이 운전사와 조수를 끌어내려 구타했고 이 두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3) 새벽 2시였다. 대대장으로부터 “광주시청을 장악하라”는 지시를 받고 4열 종대로 구보하여 광주시청을 향했다. 뒤에서 부녀자들이 주고받는 말이 들렸다. “아이고 오늘 도청 앞에 갔더니 여고생을 잡아 옷을 벗기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 새끼줄에 끼어 나무에 매달아놓았더라” “누가 그랬디?” “공수부대 군인들이 그랬다든디” 나는 부녀자들에 가까이 갔다. “우리가 공수부대 군인들이오. 지금 아줌마들이 한 얘기, 직접 보셨습니까,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누가 그럽디다” “왜 그런 유언비어 자꾸만 퍼트립니까?” 참으로 화가 났다.
4) 폭도들이 아시아 자동차에서 끌고 나온 군용트럭으로 16대대 대대장 지프차를 일부러 들이받아 운전수가 즉사했다.
5) 폭도들은 군용트럭을 운전하여 액셀러레이터에 돌을 얹어 놓고 뛰어내려 병력을 다치게 했다.
6) 한 여고생이 가두방송 차량으로 시내를 누비고 다니면서 방송을 했다. 이 소리를 듣고 동조하지 않을 시민이 없었다.
7) 전남대를 밀고 들어오는 차량에서 중학생 1명이 차에서 떨어졌다. 부상여부를 확인하면서 “너 왜 공부는 하지 않고 이런 짓 하느냐”고 했더니 한번 차에 타고 내리면 500원씩 준다며 돈까지 내보여 주었다.
8) 전남대를 포위하고 압박하는 과정에서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가 방송됐다. 이때 인접 지역대 중대장이 나섰다. 중대장의 집은 전남대에서 불과 2km 떨어져 있었다. 이 장교가 갑자기 메가폰을 잡고 “시민 여러분은 유언비어에 속고 있습니다. 여기 나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집이 어디 어디에 있는데 거기에서 부모형제들이 다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다. 이 중대장은 폭도들로부터 심한 부상을 입었고, 나중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중대장의 집은 불에 탔고, 부모형제들은 병원신세가 됐다고 한다.
9) 폭도들은 자기들이 타고 오던 차량에 불을 질러놓고 계엄군 가까이에 와서는 뛰어내렸다. 이런 차량들은 주위의 민가들을 들이받아 불을 냈다. 집주인들이 불을 끄고 아수라장이 됐다. 시위대가 모는 장갑차 한 대가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우리를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공격하는 바람에 몇 사람이 죽고 중상을 입었다. 그러다가 장갑차에 기름이 떨어져 멈추었다. 탑승자를 사로잡으라는 대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해치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어서 사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M-16소총으로 잠망경을 쏘아 구멍을 낸 후 최루탄을 터트렸지만 폭도는 소식이 없었다. 화염방사기 안에 들어있는 분말 가스를 작은 구멍으로 쏘아 넣었더니 폭도들이 윗문을 열고 나왔다. 대대장은 사로 잡으라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충정봉으로 마구 내려쳤다. 말리려 드는 지휘관까지도 맞았다. 병사들의 눈에는 독기가 품어 나왔다. 결국 4명의 폭도는 중상자가 되었다. 이것이 내가 본 최초의 민간피해였다.
10) 광주교도소로 행군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우리 병사 1명이 푹 쓰러졌다. 대원들이 총소리가 났던 민가로 달려가 민간 집 청정에서 카빈 소총 1정을 찾아냈지만 폭도는 찾지 못했다.
11) 그들이 적이었다면 나는 몇 백 명이라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 왜 군이 살인자로 매도돼야 하는지 참으로 한심하다.
<11공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의 체험담 >
육군본부 작성의 ‘역사자료’에서 극히 일부만 발췌한다.
1)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돌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2) 돌진 차량에 5만 원짜리와 8만 원짜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인돌격 차량은 5만원, 유인돌격차량은 8만원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운전수 한명을 잡았더니 타이어로 온몸을 감고 있었다. 그에게 운전을 시킨 배후 조종자는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했고, 그에게서 빼앗은 환각제 같은 것을 군의관에게 확인시켰더니 환각제였다고 했다.
3) 오직 3여단만이 E-8 가스탄 발사통을 휴대했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3여단은 위기(주: 20일의 광주역 위기와 21일의 전남대 위기)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발사통은 1987년 극렬시위에서 경찰이 사용한 64연발의 최루탄 발사기이며, 시위학생들은 이를‘지랄탄’이라 불렀다. 이 지랄탄은 광주에서 매우 효과적인 것이라고 인정되어 그 후 계속 사용됐었다.
4) 나는 광주사태가 절대로 ‘시민항쟁’이나 ‘민중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격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공격을 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5) 21일 밤, 교도소를 방어할 때 나는 “여단장님, 발포해도 됩니까?”하고 물었다. 여단장은 대답을 하지 않고 교도소 소장에게 현행 규정을 물었다. 교도소장은 교도소의 담을 넘는 등 외부 침입자가 있을 경우 발포를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여기에서부터 나는 내가 알아서 발포하리라 생각했다. 당시상황으로는 발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대장뿐이라고 생각했다.
<3공수 12대대장 김완배 중령의 체험기>
김완배 중령은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육사 22기 생이다. ‘역사자료’에 실린 체험기에서 일부만 발췌한다.
1) 돌진차량에 중상을 당한 후 계엄군도 공격적으로 변했다.
2) 돌진차량 운전수를 생포해보니 16-18세로 술에 만취돼 있었다. 차주 3명이 다가와 돌진차량을 제지해 달라고 애원했다.
3) 64발의 최루탄이 연발되는 E-8 가스발사통에 의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4) 광주교도소를 향해 도보로 이동하고 있을 때 “차온다”라는 소리가 나자 모든 병사들이 높은 지대로 올라가 사격자세를 취했다. 폭도들은 군용트럭 2대에 각 10여 명씩 타고, 차에 모래주머니로 방탄장벽을 설치하고, LMG기관총과 소총을 가지고 시속 120km의 속도로 달려오면서 사격을 가했다. 대원들의 집중 사격으로 트럭 1대가 전복되고 1대는 도주했다.
5) 나의 부모님이 계시는 광주 집은 MBC 옆에 있었는데 MBC가 불에 탈 때 일부 소실됐다.
6) 광주시민들은 폭도들이 주로 양아치 등 하류 생활자로 구성된 것을 보고 곧 후회를 했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질서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7) 당시 우리 계엄군이 없었다면 무법과 폭력이 난무하고 교도소가 폭파되고 사상범과 범죄자들이 날뛰었을 것이며, 이렇게 됐다면 전남만이 문제가 아니라 전국이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나는 국가를 혼란으로부터 구제했다는 데 긍지를 갖고 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진술>
1995년4월7일, 서울지검에서 정호용이 진술한 내용 중 몇 개만 발췌한다.
문: 광주에 공수부대를 2개 대대씩이나 보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광주에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5월 17일, 22시 30분, 육본으로부터 충정부대를 투입하라는 지시를 받고 명령에 따라 부대가 배치됐습니다. 1공수여단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에 배치했고, 5공수 4개 대대는 모두 고대에 배치했고, 11공수 3개 대대는 모두 동국대에 배치했고, 13공수 2개 대대는 성대에, 9공수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7공수 4개 대대는 전남대, 조선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됐습니다. 광주라고 해서 특별히 공수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닙니다.
문: 광주교도소를 경비할 때 31사단과 20사단이 배치됐을 때는 무장시위대가 교도소를 공격한 일이 일체 없었는데 3공수가 교도소에 가면서 무장시위대의 공격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31사단이 교도소를 지키고 있을 때는 시위대가 무장을 하기 전이라 공격이 없었고, 20사단이 경계할 때에는 이미 폭도들이 공수부대에게 혼이 난 이후이기에 공격을 못했을 겁니다.
문: 5월 27일 3공수가 도청 뒷담을 넘어가면서 맹렬히 총을 쏘고 각 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 진압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범도 지키지 않았다 하던데요.
답: 그런 말 듣지 못했습니다. 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다소 강경하게 나갔을 수 있었겠지만 저는 보고 들은 바 없습니다.
문: 당시 주영복 장관이 “나는 희생이 적어도 500명은 날 줄 알았어, 그래서 작전을 미루어 왔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치러 내다니”하면서 치하를 했다던데요.
답: 여러 사람들이 피해에 대해 걱정들을 했습니다. 희생자가 예상보다 적은 데 대해 치하하는 말씀이었겠지요.
문: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사태를 악화시켰다던데요.
답: 물리력과 물리력이 상호 충돌하면서 상승작용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작전지휘관의 의도적인 명령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시위진압과정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의 법정 진술>
1996년 7월 29일 제25회 공판정에 당시 3공수 여단장이었던 최세창이 증인자격으로 나왔다. 주요 대목만 발췌한다.
문: 증인이 여단장으로 있던 3공수여단에서 최초발포로 인해서 사망자가 생긴 사실은 인정 합니까(광주역에서 공수부대가 포위됐던 상황).
답: 최초발포 아까도 얘기를 했지만 발포가 아니라 좀 부언을 하겠습니다. 지금 거두절미하고 왜 대대에다가 실탄을 지급해서 대대가 발포하게 만들었느냐 이와 같은 논리는 오늘날의 시각과 분위기로서는 타당한 논리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저희 대대가 부여받은 임무가 시위를 진압하라 하는 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요시설과 목에 배치해서 거기에 불순분자들이 들어와 파괴, 점령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 거기에 못지않은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아무리 저희 특전여단이 막강하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임무를 완수하는 데는 빈총 가지고는 절대 될 수가 없습니다. 계엄 하에 여단은 그와 같은 임무를 받으면 반드시 실탄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여단이나 대대는 아주 안일하게 생각하고 사실 처벌 감입니다마는, 실탄도 안가지고 그저 저희들이 나가면 모든 것이 진압이 되겠거니 하고 나갔습니다. 실탄을 새롭게 지급하고 뭐하고 그런 제도가 아닙니다. 대대가 가지고 있는 실탄을 못가지고 나왔으니까 저희들한테 위협용이라도 사격할 수 있도록 보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대대장들의 요청에 의해서 갖다 준 것입니다. 갖다 주면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이것은 위협용으로만 사용하지, 그밖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것을 금하도록 간곡히 당부를 하면서 주었습니다. 또 실제 대대는 그것을 위협용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반드시 위협용으로만 원칙적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혹 잘못 나가서 사상자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위협이 아니고 정조준으로 사격했다면 그 당시 4명 정도의 사상으로 끝날 상황이 아닙니다. 때문에 그것은 최초발포다 뭐다 하는 것이 아니라 대대가 할 수 없이 취한 그야말로 자위권의 일환이었습니다.
문: 원래 여단이 움직일 때 서울에서부터 모든 여단들이 다 기본 장비로서는 가져가게 되어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문: 그러면 다른 여단들도 다 함께 가져갔을 텐데 왜 하필이면 3공수 쪽에서만 서울에서 가져갔던 기본실탄을 분배하도록 증인이 결심했습니까.
답: 대대가 가지고 나가도록 되어 있는 실탄을 못 가져 나왔으니까 그것을 일부라도 보내 달라는 대대의 요청에 의해서 보내준 것입니다.
문: 증인이 단독으로 결심했습니까.
답: 단독으로 결심했습니다.
문: 누구 상급지휘관에게 결심을 받은 사실이 없지요.
답: 예
문: 그러면 다시 같은 질문의 반복인데 증인 단독 결심 하에 기본실탄이기는 하지마는 그것을 대대장들에게 분배할 때는 상황에 따라서는 그것이 시위대에게 살상용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답: 실탄은 늘 위험이 따르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만일 일반부대에서 보초가 사고를 낼까 무섭다 혹은 총기를 가지고 이탈할 것이 겁난다 해서 실탄을 지급하지 않고 보초를 선다면 유사시에 보초가 제 임무를 제대로 수행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대대에도 나가기는 하되 실탄만은 두고 나가라 하는 명령은 내릴 수가 없습니다. 나가서 임무를 수행해라 할 때에는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준비조치를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문: 실탄을 대대장에게 가져가도록 허락한 것 아닙니까.
답: 대대장이 안가지고 간 실탄을 갖다 달라고 해서 갖다 준 데 불과할 뿐만 아니라 또 지금 자꾸 발포, 발포 하시는데 자위권이 뭡니까. 군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 상대방이 생명을 위협할 때 취하는 정당방위권을 자위권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고, 당장 그 자리에서 죽을 판인데 실탄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것도 가지고 나가야 할 실탄을 못 가져갔던 상태에서 갑자기 위험상황을 맞이하여 보내달라고 하는데 여단장이 외면할 수는 절대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 3공수여단에서 최초의 발포행위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80.5.20. 23시30분경 15대대장이 광주역에서 위협용으로 공포 7발을 쏘았다는 것이라고 아까 얘기를 하셨고, 그것이 바로 자위권의 일환이었다 이렇게 증언을 하셨는데 그 사실이 맞는 얘기입니까.
답: 맞습니다.
문: 3공수여단에서 최초로 병사들에게 실탄이 운반, 배부된 것은 80.5.20. 20시30분경 시내에 투입된 대대들이 시위대들에게 포위를 당해서 무방비 상태에 있으니 실탄을 운반해 달라는 건의를 받고 여단 본부에서 광주역으로 실탄을 운반해준 것이지요.
답: 예, 맞습니다.
문: 자위권 발동 명령이 없었어도 실탄분배는 되어 있었을 것이 아니냐.
답: 예. 지금 자꾸 실탄분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당시 상황으로서는 실탄 분배가 아니라 실탄을 마땅히 가지고 나가야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탄을 장병들이 직무유기에 가까울 정도로 안일하게 생각해서 빈 몸으로 나갔다가 상황이 나빠지니까 이것을 수습할 길이 없게 된 것입니다, 수습하려면 군인이 다른 위협이 있습니까, 실탄가지고 위협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문: 예. 좋습니다. 지난 기일에 정웅 증인이 나와 가지고 특전사 산하의 공수여단들을 작전 통제 하에 두기는 했지마는 지휘권의 이원화로 인해서 자기가 실질적인 작전 지휘권을 행사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기가 소환명령을 해도 응하지 않았고, 전화를 해도 불통이었고, 나중에 가서는 소재조차 파악이 안됐다. 이런 취지의 증언을 했습니다. 그러한 증언에 대해서 증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답: 거기에는 저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이 제가 직접 작전지시를 받았습니다. 또 소환했다고 자꾸만 그러는데 소환했다는 직접적인 전화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 전통상으로라도 소환한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또 하나 상황보고를 왜 안했느냐, 그것은 당시 상황이 비단 31사단장한테 상황보고를 안 한 것뿐만 아니라 누구에도 상황보고를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시위대에 계속 쫒기며, 죽을똥 살똥 전남대학으로 철수하고 있는 판에 무슨 수로 상황을 보고하겠습니까. 또 보고를 했다 해서 무슨 조치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든가 하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딴 사람에게는 보고를 하면서 31사단장만 빼놓았다면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하겠습니다만, 그때는 아무에게도 보고를 할 상황이 못 됐습니다. 또 설사 그때 31사단장께서 상황을 판단하고 저한테 특별한 지시를 했다 하더라도 저는 지시를 수행할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전교사령관께서도 저한테 직접 전화를 해서 3여단이 오늘 내려왔으니까 빨리 나가서 강력히 진압을 하라는 독촉전화가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전교사령관님한테도 제가 더 이상은 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31사단장님께 상황보고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정호용)의 지시는 받으면서 31사단장이 지시하는 대로 작전지휘를 하지 않았다 하는 말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제가 직접 31사단장님으로부터 작전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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