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인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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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13 08:01 조회3,8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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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인들의 증언
2008년 10월 탈북군인들의 모임은 [자유북한군인연합]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모집하여 450쪽 분량의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을 냈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고, 실감나는 16편의 수기들이 실렸다. 아래는 그 일부다.
1)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나 다 알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사실에 대해서 잘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씩 사실이 알려지고 영웅들이 많이 생기면서 사회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다.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하2-8줄)
2)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에 가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968년도에 박정희를 죽이러 남조선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있고 1980년도에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의 영웅묘지도 조선에 있어요.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요.”(165쪽 10줄-166쪽 2줄)
3)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일군들 앞에서 말했습니다.(224쪽 6-12줄)
4) 당시만 해도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5) 김대중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257쪽 하1줄-258쪽 11줄)
6)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습니다.(421쪽 하3줄-422쪽 1줄)
수많은 탈북자들이 입을 모은다. “5.18은 북한이 벌인 실패한 작전이다.” 평시에는 하루 종일 방송을 하지 않던 북한이 5.18 때에는 하루 종일 중계방송 하듯이 광주사태를 중계방송 했고, 방송 내용 중에는 공수부대원이 칼로 임신한 여인의 배를 찢어 태아를 꺼내내는 잔악한 영상이 들어 있었다고 했다. 이를 본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거물간첩 김용규의 증언
거물간첩으로 전향한 김용규는 “소리 없는 전쟁”(1999.11.1일, 원민)에 김대중과 5.18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대중 집권이 만 2년 되는 시기에 그는 매우 용감한 책을 쓴 것이다.
*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다.
*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주: 386주사파 거두 강길모 프리존사장의 증언 과 일치)
* 남한에의 민주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다.
* 4.19도 5.18도 북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였다.
* 김대중은 북이 키웠다.
* 호남은 적화통일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강명도의 증언
북한에서 망명한 거물 강명도씨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240쪽에는“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다. 구태여 강명도씨의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는 당시 대부분의 국민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이 책 241쪽에는 “나의 친구 이화섭은 5.18이 터지자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말해주었다”는 구절도 있다.
임천용의 증언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2006년 12월 20일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장 2시간 이상에 걸쳐 수백 단위의 북한 특수군의 남파 사실과 그 배경을 설명했고, 이에 5.18단체측은 이틀 후에 좌시하지 않겠다, 사과하라는 취지의 반박성명을 냈다.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그 후 1개월 후에 5.18단체 측을 향해 조목조목 공격하는 신랄한 반격을 가하는 성명서를 냈지만 그 후 5.18단체측은 임천용 회장 등을 상대로 고소를 하지 않았다.
남한에는 무수한 고첩들이 있다. 1997년에 황장엽씨는 5만 명이라 했다. 이들이 5.18 광주 사태에서 손 놓고 얌전하게 구경만 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아마 드물 것이다. 이들을 조직화하고 전문적 능력을 점화 기폭 능력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수백 단위의 전문가들이 10.26 이후 김일성 비밀교시에 따라 대거 남파되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많은 간첩들 중 장님문고리 잡듯이 잡힌 간첩이 하나 있었다, 5월 23일 06:15분, 서울역에서 간첩 이창룡(평양시, 중구역, 계림동 36번지)을 주민의 신고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검거했다. 이창용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다. 현금 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등 22종 339점을 압수했다.
1979년 12개월간 검거된 사건은 불과 5건이었는데 반해 1980년 5월초까지 4개월간 발생한 무장간첩 침투사건은 무려 10건이나 되었다. 이 10건 중 7건이 1980년의 3월부터 5.18 발생 직전까지 2개월 반 동안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1979-80의 언론보도집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들이 있다.
1) 1980년3월17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무장공비와 미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2) 1980년3월23일, 서부전선 9사단 지역 한강하구로 침투하던 공비가 아군에 발각되어 교전하다가 도주했다. 3명의 무장공비를 사살했고, 소음기가 달린 기관권총, 물갈퀴 등과 암호문을 노획했다, 암호문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 전사답게 돌격대답게 싸워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3) 1980년3월25일. 무장간첩선 1척이 포항만으로 침투하다가 해군에 의해 침몰하여 무장간첩 8명이 사살됐다.
4) 1980년3월27일, 강원도 15사단 정면에서 남하하던 공비와 교전상황이 발생했다. 모두가 도주했고, 무장공비 1명만 사살됐다.
5) 1980년5월12일, DMZ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침투한 공비와 미군 사이에 또 교전이 발생했다.
6) 1980년5월15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미국초소 전방 20m가지 침투한 무장공비들이 미군과 교전하다가 돌아갔다.
7) 1980년5월16일, 전남 보성군, 득양면으로 침투한 간첩 이창룡을 5월23일에 체포했다.
이상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면 남한에서의 거의 모든 소요는 전문적인 공작수법을 훈련받은 고첩들과 전문 폭동기술을 가진 남파 세력들 그리고 자생 불순세력들이 연합하여 불을 지른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악성유언비어 살포-거짓선동-파괴 방화 살인을 내용으로 하는 폭력행위, 뒤집어씌우는 모략행위, 집단적 억지주장. 역사왜곡에 이르는 일연의 과정들에는 반드시 작전 세력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믿음이다.
광주의 방위병 이재춘의 증언
사건 당시 광주에서는 KBS, MBC 방송국들이 불에 타서 방송을 하지 못했고, 시민들이나 군은 북한방송을 들었다. 5.18 시위대에는 13명의 방위병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이재춘씨는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있었겠는가.” 전라도 지역 계엄 분소장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 역시 같은 진술을 했다. 1996년 7월 11일, 5.18 재판 제1심 21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전남 도청 안에 적색분자가 섞여 있다. 그 근거로는 북괴의 개성 통혁당 방송에서 상무관하고 도청 사이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위와 같은 사실을 방송한 것을 정보참모로부터 들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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