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분만한 5.18(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3-29 00:26 조회3,841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1997년 대법원의 5.18 판결문 속 조롱받아야 할 판결들
일반국민들은 1997년의 대법원 판결문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양이 너무 많고, 판결문 작성에 두서가 없고, 문장 자체가 가독성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 역시 이 판결문을 독해하는데 상당한 인내와 노력을 경주했다. 독해과정에서 저자는 대법원 판결을 쓴 판사들에 대해 분노감과 멸시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래의 판결요지들은 국민 모두가 읽어야 할 필독문이라고 생각한다.
판결1.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제2심(재판장,권성)은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지키기 위해 결집된 준 헌법기관”이라고 판결했다.
제3심인 대법원은 더욱 가관인 판결문을 썼다. “광주시위대는 전두환의 내란음모로부터 헌법을 수호하려고 결성된 결집체다.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가서까지 직접 챙긴 광주작전이긴 하지만 그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5.18진압과정을 보고 놀라 공포감에 휩싸여 대통령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통령은 껍데기에 불과했기에 대통령 재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대통령이 서명한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전두환이 책임을 져야 한다”
판결 문장의 앞이 다르고 뒤가 다르다. 재판부의 주장대로 최규하가 바지 껍데기였다면 그런 바지에게는 처음부터 통치기능이 있을 수 없어야 했다. 최규하가 5.17과 5.18 진압작전을 보고 새삼스럽게 통치기능을 잃었다면 5.17 이전의 최규하는 바지가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바지가 아니었던 대통령이 전두환의 조치를 지켜보다가 놀라서 판단력을 잃고 전두환의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뜻이다. 12.12 사건에서는 최규하가 10시간 동안이나 전두환의 간청과 장군 6명의 간청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국방장관 노재현이 나타날 때까지 재가하기를 거부했었다. 판사들의 판단력이 저질의 소설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재판부가 “준헌법기관에 해당하는 5.18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한 20사단 사단장 박준병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는 사실이다. 똑같이 광주사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박준병에게는 내란하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무죄가 되고, 신군부에는 내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유죄가 된다고 쓴 것이다. 사람 가려가면서 쓴 관심법 판결문인 것이다.
재판부는 순수한 군인 신분으로 5.18 시위를 진압한 것은 무죄라고 했다. 여기에는 5.18 시위가 불법시위라는 뜻이 암시돼 있다. 수사기록을 보면 신군부가 광주작전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없다. 광주작전의 지휘선상에 있었던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소준열 계엄분소장은 법정에 나와 광주작전에 신군부가 개입한 바 없다고 잘라서 증언했다. 그런데도 당시 판사들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저질적 밑바닥 인생들이나 저지를 수 있는 내용들로 소설을 썼다.
광주시위대는 경찰서, 세무서, 방송국 등 국가재산을 파괴했고, 경찰과 계엄군에게 먼저 공격을 가했으며, 방위산업업체에서 4대의 장갑차와 370여대의 군용트럭을 탈취했고, 그 차량으로 무기고를 털어 2개 연대분의 병기와 탄약과 폭발물을 확보하여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광주교도소를 5회에 걸쳐 공격하여 죄수들을 해방시키려 했고, 도청에 2,100발의 폭탄을 조립했고, 행군중인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의 이동계획을 미리 알고 하루 전 밤에 도로장애물들을 설치하고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지휘부 지프차 14대를 탈취하여 인근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공장에 가서 또 다른 300명과 함께 공장을 점령해 불과 4시간 만에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털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전두환 재판)의 판사들은 이런 국가전복 폭동군중을 ‘준헌법기관’이라 하며 이런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돼야 하는 것인데 신군부가 계엄군을 간접정범의 도구로 이용하여 이를 무력탄압 했기 때문에 명백한 내란행위라고 판시했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당시의 한국은 그 전체가 인민 해방구였던 것이다.
판결2. “광주 민주화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조기에 진압한 것은 내란이다”
이 과정에서 시민을 사망케 한 것이 내란목적 살인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북한이 남침하도록 방치했었어야 한다는 판결인 것이다.
판결3. “5월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를 가결하기 위해 중앙청에 모인 총리와 장관들은 집총한 경비병들에 주눅이 들고 공포감에 싸여 만장일치로 가결했기에 무효다.”
대한민국 총리와 장관들은 비상시만 되면 주눅이 들고 공포에 싸인다는 뜻이다.
판결4. “제주도가 제외됐던 10.26의 지역계엄을 5.17에 제주도에까지 확대한 것은 그 자체가 폭력이고, 그 폭력을 내란의 마음을 가슴속에 품은 신군부가 껍데기 대통령을 도구로 이용해 행사한 것이기 때문에 내란이다. 계엄령의 선포는 그 자체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해악의 고지행위이고 계엄업무에서 총리와 내각을 제외시킴으로써 국민은 물론 총리 내각 등 헌법기관들까지도 공포감을 가지게 되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기에 계엄령 확대조치 자체가 내란죄에 해당한다.”
5.17 조치에서 가장 큰 것은 5월 22일 전국적으로 폭력 시위를 벌여 관공서를 점령하고 최규하 과도 정부를 뒤엎겠다는 김대중과 그의 추종자 24명을 긴급체포한 것이다.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 선언]을 발표했다. 최규하 정부가 김대중에게 최규하 내각을 해산하겠다는 결심과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겠다는 결심을 5월 19일까지 알리지 않으면 김대중은 5월 22일을 기해 전국 규모의 시위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선언에는 “모든 군경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고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규모의 시위에 동참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재판부의 위 판결은 김대중 등이 5월 22일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일으키려는 폭력시위를 그대로 두었어야 했다는 판결인 것이다.
판결5. “일반적으로 계엄을 선포하느냐 마느냐는 고도의 정치-군사적 판단을 요하는 것이기에 사법부의 판단대상이 될 수는 없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의 마음에는 이미 내란을 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계엄령 선포행위는 내란행위다.”
이는 관심법 재판의 전형이다. 계엄령은 계엄사령부와 대통령이 선포한 것이지 신군부가 선포한 것이 아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부장인 전두환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지휘관회의,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 국확대(제주도를 추가포함) 조치가 내란이라는 것이다. 1979년 10.27.오전 4시에 발령한 지역비상계엄(제주도만 제외)은 내란이 아니고, 1980년 5.17 자정을 기해 제주도까지를 포함한 전국계엄으로 조금 확대한 것은 전두환 마음에 내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란이라는 뜻이다. 엄청난 궤변이다.
판결6.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법률도 아니고 헌법도 아닌 '자연법'에 의한다.”
현행법과 헌법으로는 이른바 신군부에게 유죄를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자연법에 의해 유죄를 내렸다는 것이다. 자연법이라는 것은 사회인식법이요 이는 곧 여론법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변호인들이 처벌의 법적 근거를 따지고 들자 검사들은 “이 재판은 접근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재판”이라는 말만 반복했고, 신군부 변호인들이 그 접근방법이라는 게 무엇이냐고 따지자 함구했다. 여론법이라는 뜻이다.
판결7.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데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착안하지 않은 분야들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어 건의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망을 얻어 대통령에 오른 것에는 처음부터 반역의 뜻이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2성 장군이 국가적 위기를 맞아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유능한 사람들로부터 온갖 지혜를 동원해서 국가를 구한 행위가 범죄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난을 극복한 행위는 국가에 충성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취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여망을 얻어 대통령이 되려는 역심을 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아이젠하워는 구주군 사령관으로 명성을 얻어 그 명성을 바탕으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반역자가 되는 것이고, 맥아더는 아시아의 영웅이었지만 대통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역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것은 내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판결이다.
판결8. “정호용은 광주진압의 총사령관이라 내란목적살인죄의 주범이고, 12.12에는 직접관여하지 않았다 해도 신군부 중의 한 사람으로 전두환을 추수하며 부화뇌동한 죄가 인정된다”
정호용은 12.12에도 관여한 바 없고, 5.18에도 관여한 바 없다.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단지 7개 공수여단을 전투준비상태로 양병하였고,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그가 거느리고 있던 3개 여단을 육군본부가 보내라는 광주로 보냈을 뿐이다. 5월 17일에는 7공수여단을, 5월 18일에는 11공수여단을, 5월 19일에는 3공수여단을 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광주로 파견된 3개 공수 여단은 육군본부가 명하는 대로 광주로 이동하여 광주지역의 작전을 관장하고 있던 31사단 사단장 정웅과 전라도 계엄분소장 소준열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3개 공수여단으로 하여금 시위 첫날인 5월 18일에 과격한 진압을 하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제31사단장 정웅이었다. 과잉진압은 5월 18일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만 있었다. 광주진압작전 10일 중에서 과잉진압은 5월 18일 하루뿐이었으며 그것도 불과 5시간 동안이었다. 바로 이 5시간 동안 있었던 곤봉 세례를 촬영한 사진들은 거의 다 옥상 등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촬영 작전 팀에 의해 위에서 밑으로 촬영됐다. 사진 촬영은 내국인들이 할 수 없었으며 미리 계획된 각본에 따라 외지 촬영팀이 미리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을 예상하고 옥상 등에서 대기하다가 촬영한 것으로 분석된다. 결론적으로 과잉진압 책임은 정호용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웅에게 있었다. 수적으로 밀린 5월 19일부터는 과잉진압이 있을 수 없었고, 역으로 소수에 불과한 공수부대가 수십-수백 배로 많은 시위대로부터 매타작을 당해 급기야는 포위되어 전멸당할 처지로 몰렸다. 그것이 5월 21일 오후 5시의 계엄군 철수로 이어진 것이다.
이처럼 정호용은 광주시위를 직접 진압한 바 없고, 정웅과 박준병은 직접 진압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박준병 제20사단장이 광주시위를 진압한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했고 정웅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판시했다. 똑같은 재판부가 정호용에게 유죄를 판결할 때에는 광주시위대가 준 헌법기관이라 해놓고, 박준병에 무죄를 내릴 때에는 광주시위대가 진압돼야 할 불법집단이라 판결한 것이다.
판결9. “정승화가 10.26밤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 한 것은 김재규가 권총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이었다고 한 정승화의 법정진술은 설득력이 있다.”
“정중히 대하라”는 명령을 “권총을 소지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좌익이 우익을 때려잡을 때 동원되는 억지 논리가 바로 이런 것이다.
판결10. “12.12 밤, 최규하 대통령은 공관을 경계하는 경비 병력으로부터 공포감을 느꼈고, 밤 9시 30분경에 찾아온 6명의 장군들로부터 공포감을 느껴 자유 의사를 상실한 채 꼭두각시가 되어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결재를 해주었다.”
만일 최규하 대통령이 이 순간부터 장군들과 군 병력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면 그 후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할 때까지 9개월 10일간 그야말로 군에 주눅이 들어 꼭두각시 노릇만 했다는 뜻이 된다. 이는 최규하 대통령에 대한 인격살인이다. 대통령과 한 방에서 밤을 꼬박 새운 신현확 총리는 1996.7.1. 법정에 나와 장군들은 예의바르게 행동했고, 경계병이 밖에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대통령이 경비 병력에 주눅이 들고 6명의 장군들에게 주눅이 들어 장군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재가문서에 재가를 했다면 바로 6명의 장군들 앞에서 밤 10시경에 재가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밤을 새우면서 노재현을 기다렸다가 노재현이 재가서류를 가지고 오자 12월 13일 05:10경에 서명을 했다. 이 대목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고집이 세고, 고집을 관철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눅 들린 사람이 이렇게 할 수는 없다.
판결11. “12.12는‘하나회’가 중심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려고 사전 계획 하에 저지른 쿠데타 사건이다.”
30단에 있었던 9명의 장군들 중 하나회 장군은 노태우, 박준병, 박희도 3인 뿐이다. 최세창, 장기오, 백운택은 육사출신일 뿐이고,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는 육사를 나오지 않은 원로급 장성들이었다. 9명의 장군 중 3명만이 하나회 멤버였다. 또 쿠데타를 하려면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병력으로 시작할 것이지, 어째서 6명의 수사요원을 정승화 총장 공관으로 보내, 예의를 갖추어 가면서 수사실로 가자고 조르도록 했겠는가? 이런 쿠데타는 세상에 없다.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면 대통령 재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윤성민과 장태완이 병력을 출동시키고 난동을 부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초저녁에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했을 것이다. 쿠데타의 주모자가 대통령에게 가서 재가를 요청하고, 대통령과 함께 노재현 장관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대통령과 마주 앉아 시국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앉아있었을 것이며, 새벽 5시까지 10시간 동안이나 노재현 장관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기록들을 보면 30경비단에 모였던 9명의 장군들 중 정승화를 연행할 것이라는 계획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오직 노태우 한 사람 뿐이었다. 당시 사실상의 국가 ‘최고자’는 정승화였다. 정승화를 연행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거사다. 이런 극비의 계획을 9사람이 모여 사전에 계획하였다면 이는 정신 나간 짓이다.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살해하는 것도 생명을 건 거사였다. 김재규는 신문조서에서 “역사상 2인 이상이 사전에 모의한 거사가 성공한 예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사랑하는 두 보좌관인 박선호, 박흥주 대령에게도 거사 30분 전에 곧바로 집행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판결12. “이학봉과 전두환이 사전에 쿠데타를 모의했다”
이학봉은 전두환의 부하다. 이학봉은 전두환에게 정승화의 연행조사를 여러 차례 건의했고, 전두환의 최존 결심에 의해 연행계획을 수립했다. 상하깐의 지휘계통에 따라 업무를 수행한 사실을 놓고, 재판부는 전두환과 이학봉이 쿠데타를 위해 사전 모의를 했다고 판결했다. 판결이 아니라 공산 점령군이나 할 수 있는 억지다.
판결13. “정승화가 전두환을 합수부장에서 해임시켜 동경사(동해안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전보 발령하려하자 전두환이 선수를 쳐서 12월 12일에 정승화를 불법 납치하였다.”
9명의 장군들이 전두환이라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사전에 쿠데타를 모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과, 하나회 장교들이 인사 적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사전에 모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 9명의 장군들 중 하나회 장교는 불과 3명인데다 하나회 장군은 1명의 투-스타와 2명의 원-스타에 불과했다. 나머지 일반장교들은 다 고참 3성이었다. 더욱이 하나회 장교들의 진급은 탄탄 대로였다. 그런데 하나회 장교들이 진급에 무슨 불만이 있었을 것이며, 어떻게 6명의 하늘 같은 선배장군들을 부려가면서 쿠데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이학봉의 반복된 건의에 의해 전두환이 “그럼 연행하자” 이렇게 결심한 날이 12월 6일이었다. 정승화와 노재현이 골프를 치면서 전두환을 전보시키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날자는 12월 9일이었다. 재판부 판결문에 의하면 12월 9일에 나눈 이 대화를 점쟁이처럼 3일 전인 12월 6일에 전두환이 알아가지고 선수를 쳐서 정승화를 연행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재판에 이런 코미디가 들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 사법부 전체의 치욕일 것이다.
판결14. “1980년 정승화가 합수부에서 했던 진술은 고문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무효다.”
이는 과거사위원회가 과거의 간첩사건 모두에 대해 고문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3공과 5공 시절에 발생한 22개 간첩사건은 모두가 고문에 의해 강요된 자백이기 때문에 모두 재심처리 돼야 한다는 것이 이용훈 대법원장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수사기록을 연구해보면 정승화는 분명한 유죄로 판단된다. 그는 사나이답지 못하게 치사한 거짓말들을 너무 많이 했다.
1997 대법원 판결의 의미
1. 대법원은 [판시사항]에 대해서만 판단한다. 1997년 대법원 판결에는 [판시사항]이 20개 있다. 그런데 이 20개의 [판시사항] 중에는 5.18폭동이 어째서 민주화운동이냐에 대한 판시사항이 없다.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판시사항도 없다. 당시로부터 최근 저자가 5.18연구를 할 때까지 광주에 [북한군]이 왔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가설은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1997 대법원 판결서 [판시사항]에 [북한군 개입 여부]가 포함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1,2,3심 재판관들에 북한군 개입 문제는 그 개념 자체가 없었다. 또한 당시 검찰이나 전두환 측 변호인들에도 [북한군 개입]에 대해서는 일체 문제 제기가 없었다. 그런데 대법원이 무슨 이유로 [북한군 개입] 문제를 다루었겠는가. 그래서 당시 법관들은 “5.18은 민주화운동이다”라는 증명되지 않은 명제를 판결의 대전제로 하여 전두환 등에 대한 죄를 물었던 것이다. 5.18은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는데 전두환 등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것이 전두환의 내란죄라는 것이다. 증명이 없는 것을 판결의 대전제로 삼은 것은 위법이다. 사법부가 범죄를 범한 것이다.
가장 황당한 검찰신문
1) 검사가 법정에서 전두환 피고인에게 최규하 대통령이 물러나는 데 대한 위로금 조로 175억 원을 3차에 걸쳐 주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하고 물었다. 이에 전두환은 "대통령직을 사고 팔았다니 이게 국가인가? 최규하 대통령과 나 전두환에 대한 명예훼손이요 국가에 대한 모독이니 증거를 대라" 했다.
2) 1980년 8월 16일은 최규하가 대통령을 사임한 날, 하루 전인 8월 15일 당시 국방장관 주영복이 여러 장관들과 함께 대통령을 만났다. 검찰은 주영복에게 “8월15일 대통령을 만났을 때 대통령의 한쪽 눈언저리가 부어 있었느냐고 물었고, 주영복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전두환에게 맞았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목이었다.
당시의 장군사회는 예의범절 있는 상류사회
바로 여기에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격과 품질이 예단돼 있었다. 이 세상 그 어느 사회에나 상류사회, 하류사회는 분명히 존재한다. 물질적 귀족도 있겠지만, 정신적귀족도 있다. 김영삼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법을 팔아 아부한 검찰과 판사들을 정신적 귀족이 아니라 어쩌다 고시에 패스하여 벼락출세를 한 속 빈 불상놈들이었다.
저자는 당시의 군부사회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당시의 군부사회는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형식을 중요시했다. 당시의 사회부류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깨끗하고 앞서가는 사회가 군인사회였다는 것은 자타가 다 인정할 것이다. 선진 외국문물은 군 장교들을 통해 들어왔고, 군행정이 사회행정을 선도해 왔다. 검찰이나 재판부가 판결한 것처럼 그렇게 막돼버린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육사출신들은 생도 1학년부터 “국제신사”를 지향한다는 모토를 가지고 훈육됐다. 이러한 관계로 육사출신들의 매너는 다른 사회에 비해 평균적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12월 12일 당시 최규하와 함께 밤을 지새웠던 신현확 총리는 장군들이 대통령 앞에서 예의를 깍듯이 갖추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장군들이 대통령을 예의 없게 대했다고 쓰였다. 신현확은 본인이나 대통령이 공관을 지키는 무장 경비 병력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했는데도 판결문에는 대통령이 무장경비병들로부터 공포감을 가졌다고 쓰였다. 노재현과 신현확 그리고 이희성은 대통령이 스스로 판단하여 재가를 했다고 증언했지만 판결문에는 공포감을 주고 협박하여 재가를 받아냈다고 되어 있다. 국방장관 노재현은 그가 국방부 청사 1층 계단 밑에서 병사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병사들이 경례를 했고, 그 스스로 국방장관실로 갔다고 진술했는데도 판결문에는 병사들이 체포하여 장관실로 연행했다고 되어 있다.
윤성민 참모차장이 전두환에게 “총장을 원위치 시키라”는 명령을 한 바 없는데 판결문에는 전두환이 윤성민 차장의 명령을 거역했다고 되어 있다. 윤성민 차장이 비상을 발령했을 때 경복궁에 있던 장군들은 너나없이 부대에 전화를 걸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부대장악을 잘하고 있으라 당부했다. 이는 지휘관들의 당연한 생리다. 또한 진돗개 하나는 대간첩작전에서 최고 수위의 비상수준이며 그 자체가 출동준비명령이었다. 이를 놓고 재판부는 경복궁 장군들이 쿠데타를 위해 출동준비명령을 내렸다고 덮어 씌웠다.
1공수여단이 밤 10시경에 출동했던 사실이 전혀 없는데도 재판부는 출동했다고 했다. 정승화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서 해임하자고 노재현 장관에게 넌지시 던져봤던 날짜는 12월 9일이고, 전두환이 이학봉에게 총장을 연행하라고 지시한 날짜는 그보다 3일 전인 12월 6일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전두환이 12월 9일에 처음으로 장관과 총장 사이에서만 발설됐던 경질소문을 듣고 선수를 쳐서 정승화를 연행했다고 판결했다.
12.12와 하나회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9명의 장군 중 하나회는 3명뿐이었다. 그런데 재판부는 하나회가 12.12를 주도했다고 판결했다. 이학봉 중령과 전두환 소장은 직속 명령관계에 있는 사이다. 건의를 올리고 지시하는 것을 가지고 공모했다고 판결했다. 검찰 조사실에서나 법정에서 검찰이 한 결 같이 묻는 질문은“그 때 권총을 찼었느냐”였다.
위에서 저자가 적시한 판결들을 보면 재판부나 검찰이 군 장성들의 매너수준을 저잣거리 폭력배 수준으로 낮추어 보았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저자는 지난 20여년 동안 검찰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품성을 관찰했다. 이 사회에서 가장 품성이 고약한 사람들이 검사들이요 경찰 수사관들이었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장성들의 사회는 예절과 매너가 우아하게 가꾸어진 사회다. 반면 판검사들의 사회는 지금도 개차반 사회다. 12.12와 5.18과 같은 사건은 좁고 낮은 시각을 가진 한국의 판검사들이 다루기에는 너무나 벅찬 사건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