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제199화, 코로나의 원흉은 중국과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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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2-24 07:20 조회4,5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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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9화, 코로나의 원흉은 중국과 문재인
제199화, 코로나의 원흉은 중국과 문재인
문열어놓고 모기와의 전쟁; 코로나 2위국, 기피대상
세계 각국: 한국에 가지말고 한국인 받지 말자
집회 금지시키려면 전철 운행도 금지
오픈 공간이 문제냐 옥내 모임-전철이 문제냐
집회금지 이후엔 선거유세 금지 (진중권 전광훈 비난)
진중권 "전광훈 집회 강행 철딱서니 없어…황교안이 말려야" 훈수
보건복지장관 박능후, 망언들
“중국에서 들어온 관광객이 감염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중국을 다녀온 우리 국민이 감염원으로 작동한 경우가 더 많다”
“특정 국가의 특정한 사람들만 입국을 제한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사람, 우리 내국인까지도 다 차단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 사실이다”
기자: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모기 잡는 것 아니냐'”
박능후, “지금 겨울이라 모기는 없을 것이다”
우한 폐렴, 중국의 '흑사병'이 될까
글쓴이 비바람(김동일)
1347년 흑해 연안도시 카파는 칭기즈칸의 후예인 킵차크 칸국의 침략을 받았다. 공성전(성 공격)이 벌어지면서 킵차크 칸국 진영에서는 괴질이 퍼졌고, 킵차크 칸국의 군대는 투석기를 이용하여 이 시체를 성안으로 던져 넣기 시작했다. 적진으로 돌덩이를 던지는 것보다 시체를 던지는 것은 적에게 심리적 공포를 배가시켰고 화학전의 효과도 있었다. 이 장면이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의 출발점이었다.
1347년 흑해 연안을 출발한 제노바 상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선단에는 괴질에 걸려 죽은 선원들이 가득했고, 나머지 생존한 선원들도 하나씩 죽어갔다. 시체들은 모두 피부가 검게 물들어 괴사한 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병을 '흑사병'으로 불렀다. 장차 유라시아 대륙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흑사병의 '유럽 상륙'이었다.
1347년부터 1353년까지 흑사병은 유럽 대륙을 휩쓸었고 약 8천만에서 2억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유럽 인구 1/3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거의 80%까지 몰살당한 도시도 있었다. 질병에 대한 지식이 전무 했고 현재와 같은 위생관념도 없을 때였다. 치료는 황당한 미신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기도하는 것만이 최고의 치료책이었다. 그럴수록 시체는 쌓여갔다.
흑사병은 세계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격리, 검역 같은 위생관념을 탄생시켰고, 인구가 대폭 감소한 탓에 노동자와 농민의 몸값이 급등하여 농노에서 중산층으로 상승하는 기회가 커졌다. 흑사병은 제국의 권력구조에도 영향을 끼쳤고 동로마 제국에서 오스만 투르크로 패권이 넘어갔다. 그리고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 신에 대한 불신이 생겨났다. 인간의 사고가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근대의 르네상스로 가는 길이 열렸다.
중국에서 발생한 우한 폐렴은 그 치료약이 없다는 데에서 중세의 흑사병 상황과 비슷하다. 당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환자를 격리하고 감기치료를 하고 완치를 기도하며 지켜보는 것뿐이다. 삶과 죽음이 '재수보기'에 달려있는 판이니. 흑사병 치료를 위해 거머리에게 피를 빨리거나 채찍질을 하던 중세시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우한 폐렴의 주인공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잠복 기간 중에도 사람에게 전염된다는 특징 때문이다. 확진자 격리는 감염 확산을 예방하는 최선책이다. 그런데 감염 - 잠복 - 발현이라는 사이클 중에 확진이 되기도 전에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킨다는 것은 정상인에게서도 감염이 될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무서운 폭발력을 가진 우한 폐렴이 아닐 수 없다.
흑사병은 빠르면 발현 수 시간 내에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었다. 우한 폐렴은 14일의 경과 기간을 두고 있고 사스보다 전파력이 크다. 잠복 기간이 길고 큰 만큼 감염자 한 명이 많은 사람을 감염시키는 '슈퍼전파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에 잠복 중인 우한 폐렴의 전파력이 한 번에 폭발한다면 중국은 망국으로 가는 혼란상태에 휩싸일 수도 있다.
우한 폐렴이 걱정되는 점은 중국 공산당의 폐쇄성 때문이다. 중국은 중화사상의 자존심 때문에 우한 폐렴의 진상을 상당 부분 은폐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일부에서는 우한 폐렴의 사망자 숫자를 중국 당국이 발표한 숫자에 곱하기 3~4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친다. 중국이 진실을 은페하고 있다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중국 당국에게 돌아가게 된다.
중국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날수록 중국 공산당의 능력은 불신을 받게 된다. 흑사병을 기도로 치료하다가 신의 능력을 불신하게 만든 중세의 신부들과 중국 공산당의 처지가 비슷하게 된다. 사망자 상황을 은폐하다가 우한 폐렴의 사망자가 중국을 휩쓸 경우 일당 독재 체제의 중국에 권력 구도가 바뀔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다민족 연합체제의 중국이 여러 국가로 쪼개질 상황도 생길 수 있다. 흑사병이 유럽대륙을 흔들었던 것처럼 우한 폐렴이 아시아 대륙을 흔들려고 하고 있다. (김성남 삽입)
2월 22일 자유당 탄생
자유당은 쐐기 정당
빨갱이들 왜 이렇게 많이 부하했는가? 5.18민주화운동만이 정의라는 선동선전 기승, 잘난 체 하는 사람들-기회주의자들, 이승만 박정희 욕하고 민주화운동 외쳐 소영웅주의 번성
5.18을 거룩한 민주화운동으로 여기는 분위가 확산되면 빨갱이 세력 더욱 번성-기승
한국당 자유통일당 미래통합당. . 모든 정당: 5.18세력에 부역
선거 잘 치러도 결국은 빨갱이 부역당 될 것
오로지 [자유당]만 5.18진실 국민에 알릴 것
지금은 5.18진실 밝히기 원하는 국민이 다수
이들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슈화할 정당은 오로지 자유당
거목을 두 동강으로 뻐개는 도구는 쐐기
쐐기는 덩치가 크지 않는 대신 강력해
강력한 5.18호위전선 뻐갤 존재는 쐐기 정당 뿐
쐐기정당 탄생은 우리의 희망과 축복
쐐기 정당 곧 전국에 5.18현수막 걸 것- 적극적 지원 필요
제24장 독립제1유격대대 작전(1949. 8. 13-12. 28)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자 제2연대는 8월 13일, 제주도 경비 임무를 독립제1유격대대에 인계하고 인천으로 이동했다. 이는 육본이 ‘제주도 공비의 대부분이 섬멸되고 작은 불씨만 남아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때의 잔여공비는 불과 100명 정도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 100명의 공비는 9연대에서 탈주한 고승옥이 지휘했고, 무기가 부족해 무장 1명, 비무장 2명의 3명 1개조로 움직였다.하지만 공비는 매우 끈질겼다. 이들은 한라산 중턱을 연결하는 순환도로(일명 머리띠 도로)를 중심으로 도서남북 4개의 위병소를 설치하고 도처에서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양민을 학살하고 약탈, 방화를 계속했다. 이에 정부는 진주에 주둔하면서 4개월간 공비소탕작전을 펴고 있던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를 제주도에 보냈다. 상황판단이 왔다 갔다하면서 정부의 대응도 헷갈렸던 것이다.
제25장 해병대 사령부 작전(1949. 12. 28-50. 6. 25)
해병대 역시 소탕작전에 앞서 민심작전을 우선시했다. 무의촌에 의무대를 보내고 순회 진료를 전개했다. 도로와 하수도 공사, 농번기에는 대민지원을 제공했으며, 순회강연을 통해 주민들을 계몽했다. 이에 주민들은 군에 대한 공포심을 접고 신뢰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비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다음 해병대 역시 1950년 2~5월까지, 5개월간 한라산 공비토벌작전을 과감하게 전개했다. 수많은 교전을 통해 공비를 사살했고 공비의 야전병원을 찾아내 소탕 했다.6·25 전쟁이 발발하여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해병사령관이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북한군의 남하 속도가 빨라지면서 해병대 사령부의 1개 대대(고길훈 소령)가 군산-장항지구에 투입됐다. 축소된 해병대 사령부는 제주도에서 신병 3,000명을 훈련시켜 증편한 다음, 9월 6일 부산으로 이동했다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제26장 6·25 발발 이후의 제주도 공비토벌
전쟁기간 중에는 제주도에 훈련소가 생기고 수많은 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어 감히 공비가 준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연명을 위해 마을을 습격하고 식량을 약탈하면서 민심을 교란했다. 파죽지세로 남침하는 북한 인민군에 쫓겨 부산 직전까지 밀리는 상황에서 이들 제주도 인민군유격대는 대한민국을 반역하는 후방교란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1950년 6월 25일부터 1951년 8월 31일까지 14개월 동안 한라산 인민군 유격대는 33개 마을을 56회나 습격하여 29명의 경찰을 살해하고 56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10명의 군인을 살해하고 6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38명의 민간인을 살해하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41명의 민간인을 납치하고, 324동의 민간 가옥에 불을 질렀다. 6·25 전쟁이 다소 소강상태에 있었던 1952년 이들은 제주방송국과 서귀포 발전소를 습격했다.우리는 바로 이런 대목들을 중시해야 한다. 좌파들은 4·3 사건이 단순히 미군정 및 대한민국이 제주도 주민을 괴롭힌데 대한 정당한 저항권의 행사라고 주장하지만 제주도 공비들의 만행은 대한민국이 북한과 전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계속된 것이다. 김달삼은 해주에 가서 스탈린원수 만세를 불렀으며, 지금도 이덕구와 나란히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1.5m높이의 흰 대리석을 끼고 누워 있다. 김달삼은 6·25 전쟁 직전 500명 정도의 김달삼 부대를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와 학살과 파괴를 일삼았다. 이를 놓고 제주 4·3 반란이 북한과 무관하다 하는 것이다. 제주도에 공비가 또 준동하자 정부는 제주경찰국 예하에 제100전투경찰대를 편성하여 공비토벌을 다시 시작했다. 1953년 1월 29일에는 대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를 한라산에 추가로 투입했다. 결국은 제100전투경찰대와 무지개부대가 5개월에 걸친 토벌작전을 펼친 끝에 한라산 공비를 완전 소탕하게 된 것이다. 1957년 4월 4일, 제주신보는 “토벌전에 종지부!-9년만에 평화 찾은 한라산, 최후의 잔비 ‘오’를 생포, 유격대, 2일 송당리 장기동서”라는 제하의 기사와 “공비완멸의 의의와 민심개방의 새 과제”라는 제하의 사설을 썼다.“경찰은 4월 2일 상오 10시 마지막 잔비 오원권을 생포했다. 1948년 이래 계속 출몰하면서 부락을 습격하고, 살인, 방화, 약탈, 그리고 양민 납치 학살을 일삼아 전 제주민을 암흑과 불안 속에 몰아넣은 4·3 사건의 여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경찰기록을 더듬어 보면 공비수가 16,900명에 달했으며, 그 중 7,893명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고, 2천여 명이 귀순, 7천여 명이 생포되었다. 128명의 경찰이 전사했고, 89명의 군인이 전사했으며 군경 146명이 부상을 입었다. 공비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학살은 공무원을 포함하여 1,300여 명에 이른다.”당시의 일반 여론 역시 4·3 사건을 무장공비들이 일으킨 사건이고, 마을을 습격하고, 살인, 방화, 약탈, 그리고 양민납치 학살을 일삼아 전 제주민을 암흑과 불안 속에 몰아넣은 사건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건을 놓고 60여년이 지난 오늘날 수많은 억지들을 나열해가면서 역사적 사실을 뒤집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참고로 1980년 광주폭동에서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불과 30년이 조금 넘은 지금 좌파들은 민간인 사망자가 3,000을 넘는다며 허무맹랑한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믿는 국민이 참으로 많다는 것이다.정부보고서는 1947년 3월 1일을 4·3 사건의 시발점으로,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던 1954년 9월 21일을 4·3 사건의 종결시점이라고 주장한다. 1954년 9월 21일에는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가 있긴 했지만 그 세력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무장공비가 소멸된 날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비의 세력이 미미하다 하여 경찰의 공비토벌작전이 종결될 수는 없는 것이며, 실제 그 후로도 토벌작전은 지속되었다. 1954년 9월이면 휴전협정이 서명된 지 1년이 훨씬 넘어선 시기였다. 그런데도 제주도 산 빨갱이들은 휴전 후 만 4년 동안이나 더 제주도 주민들을 괴롭혔다. 제주도 주민들은 과연 이런 이단자들이 통일운동가요 제주도 주민의 친구인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좌파 색채를 노골적으로 노출한 정부보고서는 4·3 사건을 이념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4·3 사건은 누구의 눈에나 분명한 이념사건이다. 이념 사건을 ‘이념이 개입되지 않은 탄압과 저항 사건’으로 변질시키는 데에는 그만한 흉계가 도사리고 있다. ‘국가를 적화시켜 보려는 야무진 착각에서, 순수한 도민을 감언이설로 선동하여 이들을 무기화하고 방패로 삼아 일으킨 반란사건’을 ‘미제, 경찰, 청년단이 유독 제주도민을 업수이 여겨 순수한 주민을 일방적으로 학살하자 이에 항거하여 나선 무장대를, 미군정이 과잉진압한 사건’ 이었다고 몰아가기 위한 흉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4·3 사건은 해방직후에서부터 1957년 4월 2일까지 만 11년 8개월 동안 벌인 지독한 반란사건이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놓고 4.3 사건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사건의 성격을 너무나 축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은 “제주도 반란사건”이라 명명해야 한다는것이, 제주도 반란역사를 정리하면서 갖게 된 필자의 생각이다.
제6부 좌익세력과 노무현정부의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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