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목장의 결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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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4-22 19:19 조회24,7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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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목장의 결투
김대중 국정원의 전화 도청과 밥줄 끊기 탄압
김대중은 나를 좋아했다. 굵은 좌익들이 나를 좋아했다. 김상현 전 의원이 나를 여의도 만하탄 일식집 조찬 자리로 세 차례나 불러내 장관을 하라고 권고했다. 코리아나 호텔로 불러내서는 한전 사장이라도 하라고 했다. 총무수석, 경제수석, 안보수석 심지어는 박지원까지 나를 조선호텔 프린세스호텔, 힐튼호텔로 불러내 한자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자유가 좋았다. 좀 지나고 보니 그들의 권고를 거절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갑자기 국정원을 물갈이했다. 4월 한 달에 무려 581명의 대공 전문 수사관들을 자르고 그 자리에 전라도 사람들과 좌익들을 배치했다. 경찰 정보요원 2,000명과 대공 공안 전문 검사 40여 명을 잘라냈다. 금강산 관광사업, 개성 관광사업 등 봉이 김선달식 사업을 통치라는 명분으로 개설하여 북에 현찰을 쏟아부었다. 그 액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수많은 기업들과 공공단체들을 닥달하여 북한에 물자를 지원케 하고 인프라를 건설하게 했다. 쌀과 비료를 1회당 30만 톤, 50만 톤 규모로 북 항구에 수송해 주었고, 심지어는 결핵 백신까지 탈탈 털어 북에 보내주고 보건 계통에는 입단속을 시켰다. 국민 몰래 김정일에 4억 5천만 달러를 퍼주었다가 미국에 덜미를 잡혔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퍼준 달러 가치가 69억 달러나 되었다.
1980년과 81년, 나는 이문동 중앙정보부 차장 특보로 있었다. 그때 나는 S-리포트라는 고위급만 읽는 리포를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는 거의 매일 김대중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기재돼 있었다. 모두가 김대중은 사형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그를 살려주었다. 1980년 5월 18일 자 경향신문이 김대중을 발가벗겼다. ‘선동과 권모술수로 얼룩진 위선의 화신 김대중을 벗긴다. 공판 과정에서 드러난 출생에서 친북 활동까지’라는 제목으로 지면을 도배했다. 출생부터가 혐오스러웠다. 어머니가 이 남자 저 남자와 살림을 차려서 세 개의 성씨 중 어느 성에서 태어났는지 모른다 했다. 횡령을 해서 고발당해 강원도 인제로 도주했다. 유족에 전달해야 할 30만 원 중에서 18만 원을 착복했다. 자파 당원을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때려서 피를 흘리게 해놓고 상대방 당원으로부터 테러를 당했다고 모략했다. 상대방의 완장을 차고 고무신을 돌리게 해놓고 이를 촬영하여 상대방을 모략했다. 자기가 시골길에서 당한 자동차 사고를 놓고 박정희 대통령이 가한 테러라 모략했다. 집안에 폭탄을 설치한 세칭 ‘폭발물 자해 사건]을 놓고 박정희 대통령이 획책한 암살 음모였다고 모략했다. 한 마디로 모략의 달인이고, 모략이 생리인 인생이었다. 그런데 이 모략과 음모는 김대중이라는 한 사람만의 생리가 아니라 전라도 일반의 생리이고 그 전형이 “국군을 살인자 집단이다, 강간집단이다” 라고 모략하는 5.18 세력의 생리다.
김대중의 노골적인 반역 행진에 놀란 나는 김대중의 대북 퍼주기 백서를 작성했다. 이는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 게시되었고, ’한국논단‘에 게재했다. 국정원 차장 권진호가 나를 안가로 불렀다. 삼성동 초특급 호텔에 차려진 고급 스위트 룸이었다. 그는 한 시간 이상 애매한 표현들로 나를 회유했다. 하지만 김대중과 나 사이엔 이미 루비콘강이 형성돼 있었다. 국정원장 임동원이 직접 지휘하여 나를 2년 동안이나 도청했다. 이 도청 사실은 2005년에야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1,800명 도청, 그 1호가 지만원이었다. 임동원에 대한 사전구속 영장에는 “아무런 저항 능력 없는 자연인 지만원을 집중 도청한 것은 반인권적 탄압”이라는 구절이 기재돼 있었다. 국정원 2차장 김은성이 검찰진술 조서에서 밝힌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지만원이라는 사람은 DJ가 유독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2년 동안 거의 매일 임동원 원장으로부터 닥달을 당했습니다. ’네네 하지만 말고 지만원에 대해 캐낸 것을 보고하세요’ 이 부분이 제 임기 내내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찾아낸 정보는 주로 업체 및 정부기관 강연 일정, 방송출연 일정, 신문기고 약속, 사회적 모임, 개별적 만남의 약속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차단된 것으로 압니다.....“
통신을 담당하는 기술국장인 김병두 8국장 역시 원장실(임동원)로부터 지만원에 대한 도청을 철저히 하라는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고 진술했다. 도청만이 아니였다. 내 차 뒤에는 언제나 승용차 한 대가 차종을 바꾸어가면서 따라다녔다. 당시 나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프리랜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글쓰기와 강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밥벌이였다. 모 신문에는 강의료 수입만으로 연 1억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 중에 내가 세 번째인 것으로 기사화했다,. 그외에도 칼럼 기고료, 저작료, 경영진단료 등이 많이 들어왔다. 액수가 큰 경영진단 약속, 기업 토의문화 훈련 프로젝트가 예약돼 있었다. 당시 장관 월급은 월 450만 원이었다. 이 모든 수입, 이 모든 기회가 한순간에 셔터 내려지듯 봉쇄됐다. 도청 사실은 내가 임동원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문서 송부 촉탁 절차를 밟아 수사기록에 접근하여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민주화의 화신이고 노벨평화상을 거머쥔 김대중 슨상님의 민낯이었다.
한 줄 문장에 대한 범국가 차원의 집단 폭력
2002년 8월 16일, 나는 김대중 정책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동아일보에 3,500자의 칼럼형 광고를 냈다. 이 중에는 ”5.18은 소수의 좌익과 북한 특수군이 순수한 시민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었다“는 35자의 문장이 있었다. 이 문장 하나하나에 청와대, 민주당, MBC, 오마이뉴스, 한겨레, 광주 5.18단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지만원을 성토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범 좌익세력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도대체 어느 단어가 ’역린‘이었을까? 단연 5.18과 북한을 하나로 묶은 것이 역린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김정일에 노골적으로 충성했다. ’5.18은 북한 소행‘이라는 문제 제기를 방치하면, 김대중은 김정일 눈 밖에 났다. 5.18이 북한 소행이라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김정일은 꼼짝없이 UN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 신분으로 서야 했다. 이래서 남한의 반국가 친 김일성 세력이 일거에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집단히스테리 현상이 돌출된 것이다.
5.18이 북한 소행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광주에서 5.18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수치심이고 체면이고 없이 몸으로 돌격했다. 40대의 남녀들이 70대 80대 노인들의 턱을 툭툭 치면서 ”야그야~~느그들이 자식 새끼 잃어봐쓰야~~잃어봤냐고~“ 심지어는 뺨을 때리고, 얼굴을 후비려 덤볐다. 노인들 옆에 있던 한 40대 여성은 귀를 얻어맞아 귀걸이에 귓불이 찢어져 피를 낭자하게 흘리기도 했다. 5.18 앞에서 광주의 좌익들은 사람이 아니라 야수였다. 이들은 입만 열면 5.18 피해를 내세우며 통곡하는 시늉을 냈다. 광주의 피해만 호소하면 됐지, 어째서 광주 피해가 반드시 공수부대의 만행에 의해 발생했다고 해야 좋아하고, 북한 특수군의 만행에 의해 발생했다고 하면 얼굴을 긁어놓겠다며 손톱을 세우고 달겨드는 것인가? 국군은 절대로 광주에서 광주시민을 적대시하지 않았다. 전방에서 국민을 지키듯, 광주에서도 폭력 주도자들을 상대로 싸우며 광주시민을 지켜주었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 국민을 위해 목숨 바치는 국군 집단을 살인마 집단이고, 강간 집단이라고 모략하는 국민 있는가? 오로지 광주의 빨갱이, 남조선 빨갱이 집단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지켜주는 국군을 짐승만도 못한 살인⎼강간 집단이라고 모략하고, 북조선 소리만 나오면 눈이 반짝이는 이 빨갱이 집단이 어째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대접 받아야 하는가!
광주의 판사 검사 경찰 모두가 조폭
위 35자의 문장에 대해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이 MBC 손석희였다. 민주당이 공격성 성명을 세 차례씩이나 냈다. 8월 20일, 드디어 5.18 조폭이 올라왔다. 5.18부상자회 회장 김후식이 검은 유니폼과 검정 군화로 통일된 12명의 조폭을 이끌고 상경한 것이다. 이들은 충무로 5층 건물로 진입해 내 사무실 문과 간판과 기물을 마구 파괴하면서 5층 건물에 세 들어있는 사무실 사람들을 한동안 공포에 떨게 했다. 이어서 안양 소재의 거소에 쳐들어와 아파트 대문을 부수고 차량을 마구 부셨다. 아파트 주민들이 비우호적으로 대하자 조폭 매너로 일제히 ”죄송합니다“ 외치고 사라졌다. 충무로에서나 안양에서나 경찰들이 정보를 주어서 가족과 나는 피신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광주와 5.18 앞에는 국가도 법도 없었다. 나흘 후인 2002년 8월 24일 오후 2시, 광주지방검찰청 최성필 검사가 보낸 조사관 1명과 광주 서부경찰서 경관 3명이 갑자기 아파트 문을 따고 들어왔다. 구두를 신고 거실로 들이닥쳐 나를 제압하면서 뒷수갑을 채웠다. 아내와 아이들이 놀래서 울부짖는데도 그야말로 개 끌듯 끌고 나와 호송차 뒷 자석에 밀어넣고 양쪽을 지켰다. 수갑을 뒤로 하면 통상인은 단 10분을 견디지 못해 고통을 호소할 것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아낙의 심정,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하는 나보다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는 가족들 가슴이 숯검정이 됐을 것이다. 35자의 문장 하나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머나먼 광주지역을 관할하는 광주 검사가 안양에까지 경찰을 보내 안양 시민을 마치 독일경찰 게슈타포가 유태인 끌어가는 것보다 더 가혹한 방법으로 국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인가?
안양에서 광주까지, 차 속에 갇힌시간만 장장 6시간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최성필 검사가 퇴근하지 않고 나를 기다린다고 하니까 화장실을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네 명의 광주 경찰관, 6시간 내내 번갈아 가면서 뺨을 찰싹찰싹 때리고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저주의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욕설들이었다.
"니미씨발 좇같이,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씨발놈아, 네깟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건드려. 이 씨발 개새끼 가다가 목을 비틀어 파묻고 가야 한당께,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이회창으로 부터 얼마나 받아처먹었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을 얼마나 챙겨 쳐묵었겠냐, 부하 꽤나 잡아 쳐먹었을 것이다. 이런 쥐새끼 같은 새끼, 우익 새끼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당께. 너 이 새끼 가다가 죽을 줄 알아. 너를 때려죽여서 파묻어도 증거가 남냐, 증거가?...“ |
생지옥, 베트남 전쟁터에서도 이런 생지옥은 없었다. 나는 이 네 사람의 이믈을 꼭 기억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이 각자 그들의 상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마다 각자는 자기 이름을 밝혔다. ”네. 김용철입니다.“, ”네. 이일남입니다.“.”네. 이규행입니다.” 이들 중 특히 더 악질은 이일남이었다.
최성필 검사실, 최성필 검사는 마치 내가 한시바삐 오기를 잔뜩 기다린 사람같았다. 얼굴 전체에 독이 흘렀다. 문이 열리고 내가 나타나자 오른손을 높이 들고 때릴 듯이 달려들었다. “당신이 뭘 알아, 당신 이회창한테 얼마나 받아 처먹었어. 돈 벌려고 한 거 아니야? 이 개새끼 수갑 풀어주지 말고 밤새 조사해” 조사를 받은 또 다른 두 시간 동안에도 수갑은 풀어주지 않았다. 조사관도 욕설을 하면서 눈을 부라리고 윽박질렀다. 소변도 놀래서인지 감각이 없었다. 고속도로에서부터 참은 소변, 오줌보가 터지면 안 될 거 같아 화장실을 호소했다. 눈알을 아래위로 굴리더니 그제야 뒷수갑을 풀었다. 등뒤에 붙어버린 팔이 앞으로 내려오려 하지 않았다. 벽에다 대고 비볐더니 한쪽 팔이 느린 속도로 조금씩 내려왔다. 한 손으로 아직도 뒤에 붙어있는 다른 팔을 조금씩 당겼다. 이 새끼 뭐하고 자빠졌냐고 호통을 쳐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화장실 변기 앞에 섰다. 궁둥이 뒤에 바짝 서서 “빨리 싸부러 이 개새끼야” 오줌을 채근했다. 오줌이 빠져나오지 않았다. “ 이새끼 처먹고 운동이나 할 것이지 우째서 엄한 짓 하다가 끌려왔냐고 어기적거리며 다시 검사실로 들어섰다. 이웃 검사로 보이는 여성이 붉은 체크 무늬의 미니스커트 폭을 좌우로 날리면서 나를 째려 보며 들어왔다.
"어이 좀 보소, 이자가 지만원이라는 그 자랑 가엥~, 이보소, 얼굴 좀 들어보소, 당신 눈에는 광주시민 전체가 빨갱이로 보이요 엥~ 당신 눈에는 여기 있는 우리가 빨갱이로 보인당가요엥~ 이자도 인간이단가 잉~ 참말로다잉, 광주가 아니었다면 한국에 무신 민주주의가 생겼겠소, 어림도 없지 잉~ 어이 이 보소. 당신이 시스템 공학박사요엥? 시스템 공학이랑게 잇당감~ 어디서 학위를 받았소? 처음 듣는긴데 이거 가짜 아닝가벼. 좀 알아봐야겠구먼이라. 어이 좀 알아보소.“ |
정기승 변호사, 임광규 변호사 등 네 분의 중량급 서울 변호인들이 자원하여 무료변호에 나섰지만, 광주 토박이 변호인이 있어야 한다며 광주시에 거주하는 이근우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정했다. 영장 실질 심사장, 정경현 판사가 독을 뿜어내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1957년 함평에서 태어난 정경현 판사는 자기보다 21년 연상인 광주 변호인을 노려보면서 탁자를 내려쳤다. ”변호인, 변호인은 광주시민으로부터 무슨 욕을 들으려고 서울 사람 재판을 맡았소.“ 그리고 나를 한동안 노려보더니 ”당신이 5.18에 대해 무얼 아요? 영장은 발부돼오. 이상이오.“ 공포로 장을 마감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그는 56세 때에 하늘의 영장을 받고 떠났다. 나를 노려본지 1년만이었다.
어르신, 꼬옥 갚을 테니 돈 쪼깐 빌려주쇼잉
광주경찰서 유치장인 듯 여러 청년들과 며칠 밤을 보냈다. 젊은이들이 차례로 오면서 어르신 어르신 하며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꼬옥 갚을 탱께 돈 5만 원만 빌려주쇼잉” 어떤 이는 3만 원, 어떤 이는 6만 원 빌려갔다. 나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교도소에서 무슨 돈이 필요할까 싶어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달라는 대로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광주 교도소로 끌려갔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후진 감방이라고 했다. 한방에 14명이 수용됐다. 낮에는 하루 종일 벽에 등을 대고 기대 앉아 있어야 했다. 벽을 3면으로 둘러앉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없었다. 밤에 자려면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다. 바닥은 나무 바닥이어서 판과 판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이력이 난 수용자들이 틈새를 종이로 메우긴 했지만 그래도 찬 겨울바람을 막지는 못했다. 수시로 간수들이 눈을 부라리며 감시를 다니기 때문에 늘 앉은 자세를 똑바로 해야 했다.
방장이 제왕
방의 왕은 방장이었다. 방장은 말발 꽤나 있는 고참이 차지했다. 방장이 찍으면 찍힌 사람은 10여 명으로부터 심리적 이지매를 당한다. 약삭빠른 전라도 사람들은 서로 방장 눈에 잘 들려고 아양 실력을 발휘했다. 인격이라는 것은 없었다. 감방은 그야말로 아양의 전시장이었다.
방안의 모두가 전라도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5.18을 비방했다는 죄로 들어온 것이다. 모두로부터 이지매를 당할 것이라고 예상한 나는 또 한 번의 기상천외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내 편을 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5.18 단체들을 향해 모두 “양아치 깡패 새끼”들이라고 일관되게 욕을 했다. 5.18은 양아치 잔치들이고 수상한 외지 도깨비들에 놀아난 폭동이었는데 일부 사기꾼 같은 조폭들이 5.18 단체를 만들어 광주시민들을 협박하면서 돈을 뜯어내고 옳은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다고 성토들을 했다. 5.18 깡패 놈들 때문에 전라도 전체가 욕을 먹는다고 했다. 바로 이 부분, 5.18단체들에 대한 광주 일반시민들의 불만을 국민과 정권은 알아야 한다. 5.18과 광주는 하나가 아닌 것이다. 권력이 5.18에 아부할수록 광주시민, 전라도 도민은 그 권력을 멸시한다. 매우 중요한 참고사항이 아닐 수 없다. 5.18을 빠는 한 광주와 전라도 주민은 표를 주지 않는다. 광주와 전라도는 5.18 진실을 밝히는 권력에 표를 줄 것이다. 광주와 전라도 주민이 5.18세력의 적인 것이다.
한 수용자는 자기 이웃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1톤짜리 트럭을 모는 이웃이 있었는데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여러 차례 달래서 집에다 쌓아 놓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는데 5.18 유공자가 되어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경찰서에 한번 불려간 거 가지고 뻥튀기하여 유공자가 돼가지고 으스대고 다닌다고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거짓말로 보증하는 인우보증들도 많이들 했다고 했다. 5.18에 대해 만장일치로 성토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학자라고 하니까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식사 때마다 퐁퐁 설거지를 했는데 그러려면 수돗물이 나오는 순간에 수세식 화장실에서 여러 개의 커다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방안으로 옮겨놔야 했다. 내가 힘이 약해 보이니까 방장이 그 일만은 내게 하지 말라고 배려해주었다.
방장으로부터 받은 특별대우
방장은 키가 175cm 정도 되고 군살이 없는 건강체였다. 그는 고급 사기꾼인데 2년형을 받고, 2심에서 부지런히 반성문을 써내고 있었다. 2심 재판장은 여성이었는데 그는 반성문을 통해 여성 재판장의 눈물샘을 자극해야 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반성문에 대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나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내 잠자리를 자기 옆으로 정해주었다. 모두가 모로 누워 칼잠을 잤지만 방장과 나만은 똑바로 누워 잘 수 있었다.
취침시간이 되면 그는 나에게 속닥속닥 이야기를 했다. 그의 주특기는 세 개나 되었는데 하나는 사기, 또 하나는 여자 사냥, 또 다른 하나는 바다낚시였다. 그는 사기를 쳐서 서울 압구정동에서 여인들 속에 파묻혀 살았다. 차를 타고 오가면서 눈에 띄는 여인이 있으면 말재간으로 사냥을 했다. 심지어 부친상을 당한 공직의 여인을 잠깐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꼬셔내 모텔로 데려간 적도 있다고 했다. 그에게 여성 역사는 눈물과 사랑의 서정사가 아니라 육욕을 위한 무용담이었다. 그리고 그를 접했던 모든 여성들은 무용담을 위한 소모품들이었다. “이름 있는 여성 중에 누구누구를 아세요? 다 나를 거쳐 간 여자들입니다.”
여성 재판장을 어떻게 녹일 것인가? 그는 그가 범한 죄에 대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안됐다~” 이렇게 느끼도록 반성문을 구상했다. 문자에 의한 표현력은 없어도 표현 전략만큼은 천재였다. 그는 여성 판사의 모성애를 자극할 수 있는 대목에 초점을 맞춰 이리저리 그 표현을 바꾸어가면서 최적의 표현을 뽑아냈다. 결국 그의 반성문은 눈물 나는 서정시가 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최후의 반성문으로 그는 나보다 먼저 집행유예를 받고 나갔다.
한 여인의 종으로 사는 미남 조폭
이웃 방들에는 조폭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기이하게도 내 감방을 지날 때마다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면서 “우리 교수님 잘 모셔라~”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어떤 때는 여성용 로션도 바르라며 창살 틈으로 넣어주곤 했다. 어느 날 미남에다 체격도 좋은 조폭 A가 두꺼운 서류뭉치를 내게 건네면서, 그 내용을 가지고 판사에게 탄원서를 작성해 달라고 했다. 내용을 읽어보니 참으로 딱했다. 그는 조폭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 서울로 가서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속한 조폭이 싸움에 말려들어 경찰에 구속됐다. 구속된 조폭들이 A의 이름을 대면서 A도 관련됐는데 도망을 쳤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그 진술을 사실로 믿고, 서울에 있는 A를 수배하여 잡아왔다. 한번 조폭에 발을 넣으면 빠져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었다.
어느 날 A는 약혼녀와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약혼녀가 있는데도 술집 주인 겸 마담이 A에게 눈짓을 하고,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약혼녀가 화장실에 간 틈을 이용해 마담이 접근하더니, “매우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애인을 보낸 다음 자기를 꼭 보고 가라”고 했다.
A는 약혼녀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마담과 술을 마셨고,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마담은 수시로 A를 불러내 약혼녀와 만날 시간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결국 마담과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담은 잘생기고 마음씨 착한 A를 늘 감시하고 협박했다. 협박의 약점은 조폭 전과 기록이었다. 마담은 경찰 한 사람과 단짝이 되어, A가 저항하면 ‘없는 일’을 ‘있는 일’로 꾸며 검찰에 송치하곤 했다. 일단 전과자로 낙인찍히면 그때부터는 팩트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묶는 프레임이 작용했다. 결국 A는 술집 마담에 걸려들어 그녀의 노예가 되었다. 두 사람은 거미와 곤충의 관계였다. 세상에 참 희한한 운명도 다 있구나! 했다. 이 딱한 운명이 묘사된 탄원서를 받은 재판장의 마음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 과연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감옥과 면회
나는 겨울의 한가운데 계절인 10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초까지 광주교도소에 있었다. 그해에는 눈도 많이 내려 안양에서 가족이 면회를 오려면 새벽 4시, 눈 쌓인 길을 뚫고 칼바람을 맞으면서 오가는 택시를 애타게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광주 비행장으로 와서 또 택시를 타고 와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눈이 많이 쌓인 아주 추운 어느 겨울날, 그날이 내 환갑이었다. 집사람이 와서 5분인지 10분인지 얼굴을 보고 울면서 나갔다.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다 갑자기 설움이 폭발해 인적 드문 복도에서 쪼그려 앉아 펑펑 울었다. 호송하는 교도관도 너무 안돼 보였던지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감옥과 편지
감옥에서 받는 편지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누구로부터 받든 편지는 사랑의 표시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도 전자편지 시스템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한 분은 오로지 생면부지의 일본 교포 여성 한 분뿐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편지 내용도 모두 다 잊었지만 그때 내가 받았던 감동은 매우 놀랍고도 대단했다. 당시 나의 마음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한 편의 조각배였다. 동서남북이 분간되지 않았고, 공포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애롭기 그지없는 그 여성은 내 이 심경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상처를 치유해주려고 애썼다. 다정한 단어들과 미려하고 자상한 문장 솜씨로 지면을 조각했다. 그 글은 인간의 글이 아니라 가장 자애로운 여신만이 쓸 수 있는 사랑의 서정시였다. 이런 편지를 여러 장 받았다. 하지만 소통은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다. 주소가 없으니 답장도 해드리지 못한 것이다.
10년이든 20년이든 5.18 정체를 밝히겠다 결심
전두환 시절. 전라도는 경상도보다 더 전두환을 따랐다. 전라남북도는 1955년 제12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의 민정당 국회의원을 냈고 전라도의 로고 인물 박지원은 전두환을 영웅으로 칭송했다. 1982년 KBS에서 박지원이 한 말이다.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었다.” 전라도 빨갱이들의 씨를 말리려 전두환이 환각제를 먹여 보냈다는 그 계엄군, 광주 수복 이후 40일 동안 남아 폐허가 된 광주시를 말끔히 청소해주었다. 그 무섭다던 계엄군 앞에는 꼬마 여식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계엄군 아저씨와 웃고 노는 사진들이 있다. 공수부대가 광주시를 떠나던 1980년 5월 27일 오전 수많은 광주 남녀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공수부대 장병들을 포옹하고 박수를 쳤다. 이랬던 전라도가 1990년대에는 왜 갑자기 전두환에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전두환 조형물을 만들어 때리고 찢는 동물적 행동까지 하면서 입에서 분말기같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는 것일까?
1990년대에 대학가는 대자보 공간이었다. 전두환이 세기의 악당 알 카포네보다 더 지독한 악당으로 모략돼 있었다. 천주교정의평화협의회의 이름으로 1980년 6월 5일 일본에 뿌린 북괴의 모략물 [찢어진 깃폭, 어느 한 목격자의 증언] 내용이 대자보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찢어진 깃폭]은 남한에도 책자로 발행돼 있고, 북한의 대남 공작 역사물들에는 필수 게재 내용이 됐다. 공수부대가 임산부를 조롱하다가 대검으로 배를 찔러 태아를 꺼내, 임산부 얼굴에 뿌렸다는 이야기, 여학생 셋을 발가벗겨놓고 희롱하다가 등을 X자로 찔러 한 손으로 청소차에 던졌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대학가 주사파 학생들이 새로운 악마를 탄생시켜 거기에 전두환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어제의 역적을 충신으로, 어제의 충신을 역적으로 뒤바꾼 사령관이 바로 김대중이었고, 김일성이었다.
2003년 1월, 101일 동안의 감옥생활을 마감하고 나오면서 나는 결심했다. '10년이 가든 20년이 가는 반드시 이 5.18 음모를 밝히겠다.' 곧바로 전두환 측 변호인단으로부터 18만쪽에 이르는 수사기록을 트럭으로 실어다 사무실 벽 3면을 채웠다. 그리고 6년에 걸쳐, 10.26 밤에 이루어진 시해 사건, 12.12 사건, 5.17 사건, 5.18 사건, 특별법 제정과정, 전두환에게 죄를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모략공작 과정, 5.18의 진실, 재판의 난잡성에 대해 정리하여 1,720쪽 분량의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저술하여 내놓았다. 2008년 9월이었다. 모든 기록을 보니 팩트는 1980년 것이나 1997년 것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동일했다. 달라진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당시 안기부장인 권영해와 그의 육사 동기생 권정달 그리고 법률 하수인 홍준표가 꾸며낸 음모의 공작이 추가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판검사가 서로 야합하여 만들어낸 요설적 해석이었다. 같은 콩을 놓고, 1980년의 판사들은 콩이라 해석했고, 1997년 판사와 검사는 팥이라 해석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세계 인류로부터 용서받지 못할 난잡한 음모가 끼어있는 것이다.
군 상황일지에는 진실이 담겨있다. 그런데 당시 판검사들은 물론 지금의 광주 판사들은 군 상황일지는 증거 자격이 없다고 내쳤다. 모두가 가짜라는 것이다. 그들은 광주, 전남지역 주민들의 증언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우겨왔다. 하지만 당시 군 상황일지는 전두환의 의지가 반영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현장에서 장병들이 관찰한 내용을 수식 없이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한 유일한 현장 기록이 상황일지다. 여기에서부터가 억지 막무가내의 세도가 작용한 것이다. 그 상황일지를 누가 보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군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은 5.18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 상황기록을 내가 보는 순간, 5.18 폭동은 군사작전과 심리전의 배합전이었다. 공수부대를 모략하여 광주인들의 히스테릭한 분노를 유발시키고, 그 분노를 이용하여 계엄군을 공격케 하는 전형적인 비정규전 전법이었다.
수사기록에 나타난 팩트
5.18은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10.26에서부터 발원된 연속 사건의 일부분이고, 김일성의 남침계획과 연결된 사건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 국민 일반이 알고 있는 지식은 수사기록과는 전혀 딴판인 픽션 지식이다. 예를 들면 천만 관람객을 넘겼다는 영화 [서울의 봄]은 12.12와는 전혀 무관한 사실인데, 감독이 픽션화하여 12.12가 곧 '서울의 봄'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12.12는 1979년 12월 12일, 김재규의 내란을 방조한 혐의로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한 사건이고, '서울의 봄'은 1980년 2월 29일, 당시 개념 없는 회색분자 최규하 대통령이 박정희 시대에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시국사범 김대중, 문익환, 윤보선, 지학순 등 687명 모두를 사면 복권 시킨 이른바 '좌익 대박의 날'을 의미한다. 이것이 어떻게 12.12라는 말인가? 이 모두가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에 국민들은 각자의 지식이 수사기록과 얼마나 동떨어진 지식인지 아래에 간단히 요약한 사건들의 실상을 통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10.26 사건
국민 일반은 10.26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키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으로 대통령을 시해했다. 그 자리에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이 있었고, 시바스리갈 양주병이 있었다.' 이 정도로만 알고 있다. 그런데 수사기록에는 어떻게 나타나있는가? 시해 현장에 있었던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이 김재규의 시해 계획에 묵시적 동조를 했다. 최규하는 김재규가 시해범이라는 사실을 김계원으로부터 전해 듣고도 계속 침묵했다. 시해 현장 50m 근방에는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가 있었고, 그는 옆집에서 발생한 40발의 총성을 듣고 있었다. 일을 끝내고 김재규와 정승화는 같은 차를 타고 시해 현장을 빠져나와 전군 상황을 지휘하는 B-2 벙커(국방부 건물 지하)에 와서 김재규가 원하는 계엄 체제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는 국방장관 소관이지만 정승화는 국방장관이 해야 할 일을 월권했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2개 부대, 즉 경호실 부대와 수경사 부대를 직접 지휘했다. 이를 감지한 전두환이, 정승화 총장이 싸고돌던 김재규를 전격 체포했다. 체포된 김재규는 정승화가 공범이었다고 자백했다. 여기까지가 10.26이다. 국민은 픽션과 일부 기자들이 상상해서 쓴 추측성 기사를 사실로 알고있는 것이다.
12.12 사건
1979년 12월 12일 발생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국민 일반은 어떻게 알고 있는가? 깡패 같은 전두환이 대통령과 국방장관과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하극상의 형태로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대통령을 식물로 만들어 정권을 휘어잡은 쿠데타였다고 알고들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수사기록에는 어떻게 기재돼있는가? 10월 26일 밤 12:00시, 비상국무회의가 끝났다. 이때 정승화 육군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선정됐다. 만일 비상 국무회의 시 정승화가 시해 현장 50m에서 시해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 시해가 끝나자마자 와이셔츠에 피가 이러저리 튀어 있고 화약 냄새 진동하는 맨발의 김재규와 한 차를 타고 왔다는 사실,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한 정승화가 상황실에 오자마자 김재규의 뜻을 받들어 비상계엄에서나 있을 수 있는 병력을 동원한 사실을 국무위원들이 알았다면 정승화는 절대로 계엄사령관에 임명될 수 없었다. 그런데 정승화는 이 사실들을 숨기고 계엄사령관이 되었다. 되자마자 김재규를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정치 일선에 개입하고, 자기의 범죄 혐의를 지우려고 한편으로는 전후방 장군들에 로비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향해 좁혀오는 수사를 방해했다. 마지막으로 김재규 군법회의 재판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자 1979년 12월 12일 저녁 시간을 택해 정승화를 체포한 것이다. 체포하는 과정에서 내심 복잡한 최규하가 직접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먼저 국방장관이 서명한 후에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국방장관 노재현은 군을 팽개치고 일신의 안전과 일신의 손익계산을 위해 대통령 호출을 무시하고 이리저리 숨어다니다가 국방부 청사 1층 먼지투성이인 계단 밑에 숨어 있다가 12월 13일 새벽 4시에 병사에 발각되어 대통령에 가서 성명했다. 최규하는 신현학 총리까지 서명을 한 후에야 자기 서명을 했다. 이렇게 재가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정승화 계열의 군벌이 난동을 부렸다. 이 난동을 진압한 순간, 12.12는 마감됐다.
하극상? 사람들은 계급 질서만 생각한다. 2성 장군이 4성 장군을 체포한 것이 하극상이라 한다. 그러나 군에서는 헌병 대위가 장군을 체포할 수 있다. 범죄 혐의가 있으면 계급이 없다. 수도경비사령부 장태완 사령관 밑에는 30경비단 단장인 장세동 대령이 있었다. 청와대 울타리 안에 대한 경비는 30단 예하 55 경비대대가 담당한다. 장태환 사령관이나 장세동 대령이 청와대 담을 넘으면 그들의 부하인 55 경비대대장 임재길 중령이 즉각 체포한다. 여기에 무슨 하극상이 있는가? 12.12에서 법 집행을 방해한 사람은, 윤성민 참모차장(3성 장군),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2성), 정병주 특전사령관(2성)등 이었고, 이들은 정승화 덕으로 출세한 정승화의 심복들이었다.
5.17 사건
1979년 12월 12일 이후 1980년 5월 17일까지의 6개월은 김대중이 주도한 람보 정국이었다.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던 이 6개월간의 람보 정국은 이념이 불투명한 최규하로 인해 발원됐다. 1980년 2월 29일, 국보법 위반자였던 김대중, 문익환, 지학순, 윤보선 등 그 일당인 687명이나 되는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사면 복권시켜 '서울의 봄'이라는 대박을 안겨주었고, 이들이 물 만난 고기들처럼 정국을 무정부 상태로 몰아간 것이다. 김대중의 선동에 의해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졌고, 시위의 양상은 갈수록 정치화, 폭력화되었다. 1980년 5월 15일, 심재철과 유시민이 주도한 서울역 10만 시위가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김대중은 다음 날인 5월 16일 감히,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최규하 내각이 무조건 사퇴하고, 10.26 직후 발령된 계엄령을 무조건 해제하지 않으면 5월 22일 전국 규모의 폭동(전민 봉기)을 일으키겠다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감히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다니! 이는 생각 없이 벌이는 돌출 행위가 아니라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두 가지가 이를 뒷받침한다. 하나는 김대중계의 아지트인 북악 파크호텔에서 24명으로 구성된 [김대중의 혁명내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22일 전민 봉기가 김일성의 남침계획과 맞물려 있었다는 고급정보다. 과연 김대중은 전국 봉기가 성공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혁명 내각을 발족시켜 국가원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고급정보에 의하면 김일성은 5월 22일, 전국 시위가 발생하기만 하면 남조선 의용군의 초대 형식으로 남침할 준비를 마쳐놓고 있었다. 5월 22일까지만 김대중이 무사하면 5월 22일은 제2의 6.25 남침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전두환의 보안사가 북악 파크호텔에서 나오는 이희호의 핸드백에서 24명의 [김대중 혁명정부 내각] 명단을 압수했다. 김대중의 선전포고를 앉아서 당할 정부는 아니었다. 군은 5월 17일 전군에서 지휘관들을 참석시켜 [전군지휘관 회의]를 열고, 계엄령을 확대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이는 긴급 내각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전두환은 김대중의 혁명 내각 요원 24명을 5월 17일 밤 긴급 구속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선포했다. 두 가지 조치 모두 최규하의 명령에 의한 조치였다.
김일성은 5월 22일 계획이 어긋나자 봉기를 4일 앞당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직후부터 소규모 단위로 침투시킨 특수공작조 600명으로 하여금 광주에서 게릴라전을 수행케하고, 이를 전국 규모로 확대한 후 남침을 하려고 봉기 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5월 22일의 전민 봉기 계획이 5월 18일 광주봉기로 수정되어 시행됐다. 이 추측이 논리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건이 있다. 5월 23일 서울역 근방을 배회하던 간첩 이창룡을 체포한 사건이다. 이창용은 5월18일, 전남 보성군에 침투하여 5월 21일 광주로 침투하려다 실패하고 방향을 잃어 서울에 왔다가 23일 체포됐다. 그의 소지품에는 특별히 환각제와 자금 200만 원이 있었다. 환각제가 간첩에서 발견된 것은 그가 유일하다. 이 환각제와 200만 원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수사관은 없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소지품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다.
환각제! 환각제는 5.18 관련 유언비어(괴담)의 핵심이다. 전두환이 환각제를 독술에 타서 공수대원들에게 마시게 했고, 이를 마신 공수부대원들이 이성을 잃고 광주시민들을 농락하고 도륙했다는 유언비어가 5.18의 로고 말이었다. 이창룡이 환각제를 가져온 것은 바로 이 유언비어가 거짓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망한 공수부대원의 주머니에 넣기 위해 가져왔을 것이다.
200만 원! 당시 강남의 30평형 아파트 가격이 200만 원이었다. 200만 원이면 얼마나 큰 공작금인가? 광주폭동에 동원될 조직에 뿌리기 위해 가져왔을 것이다. 간첩 이창룡의 임무는 이 환각제와 거금을 당시 광주사태를 사실상 현장 지휘하고 있었던 유능한 간첩 손성모에게 전달하려 했을 것이다. 간첩 손성모의 모습은 원체 특이해서 광주 현장 사진 여러 개에서 발견됐다. 2021년 4월 30일, 탈북 1호 박사 안찬일은 안찬일 TV에서 이렇게 방송했다. "손성모는 승려로 위장해 5.18 시민군(김일성 용어는 의용군) 활동의 핵심 근거지로 알려진 증심사에서 비전향 장기수 류낙진의 딸 류소영과 함께 5.18 공작을 했고, 5.18 현장 활동을 사실상 기획 지휘했으며, 그 결과 북한에서 일약 명사가 되어 북한 최고의 훈장인 공화국 영웅 훈장과 1급 국기훈장 등을 받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다." 간첩 이창룡은 바로 이 손성모 총책에게 '환각제'와 거금을 전달하려고 왔는데, 그 거사 기일을 5월 22일에 맞춰, 북한을 떠났기 때문에 광주에 진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간첩 이창룡의 D-데이는 5월 22일이었고, 김일성이 갑자기 변경한 D-데이는 5월 18일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국민 일반에 보급된 지식과 수사기록에 있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수준으로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 충분히 인식됐을 것이다.
북한이 광주에서 수행한 게릴라 작전의 하이라이트
5월 18일 |
대한민국 대학생들과 노동자 시위는 아무리 극렬했어도 공수부대가 얼룩무늬 옷만 입고 나타나면 오금을 저리며 줄행랑을 쳤다. 서울, 부산, 마산, 사북탄광에서 그랬다. 그런데!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30분경, 광주에서는 어깨 부대 300명이 감히도 공수부대가 집결해 있는 전남대를 찾아가 일요일인데도 도서관에 가겠다는 말로 시비를 걸고 갑자기 배낭에서 돌멩이를 꺼내 공수대원들을 향해 던졌다. 7명의 공수대원들 얼굴에서 피가 낭자했다. 공수대원들이 달려갔지만 이들 300명의 도주 속도를 당할 수 없었다. 광주의 청년들을 향한 공수대원들의 감정을 악화시킨 고단위 술책이었다. 광주의 젊은이들과 공수부대원들 사이를 원수 사이로 이간질시킨 것이다. 300명은 금남로로 달려가 파출소를 불태우고 자동차를 불태워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도록 해서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유언비어(괴담) 유인물들을 뿌렸다. 계획된 작전이었다. "전두환이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라고 광주에 보냈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공수부대가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내고 머리 껍질을 벗겨 전봇대에 매달아 놓았다..." 전형적인 게릴라 모략전인 것이다.
공수부대 전투단위인 대대는 정호용 중장(3성)이 지휘하는 특전사 소속이지만 광주에 투입된 모든 공수부대는 광주지역 향토사단인 31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2성)이 지휘했다. 많은 국민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지휘관이 있다. 하나는 양병 지휘관이고, 다른 하나는 용병 지휘관이다. 양병 지휘관은 부하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주고, 교육과 훈련을 시키는 지휘관으로 각군 참모총장과 특전사 사령관이 여기에 속한다. 육군총장과 특전사령관은 작전에 대해 권한도 없고 책임도 없다. 반면 합참의장과 5.18 당시의 정웅 소장(2성)은 용병 지휘관이었다. 양병 지휘관은 상급 부대 작전명령에 따라 부하 부대를 용병 지휘관에 시집을 보내면 임무 끝이다. 시스템이 이러한데도 대부분의 국민, 판사 검사는 이런 구분을 하지 못하고, 무조건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이 광주 현장에서 공수부대원들을 지휘한 것으로 오해하고 판결문을 썼다.
31사단장 정웅 소장(2성)! 그는 김대중 심복으로 사상이 매우 의심스러운 지휘를 했다. 5월 18일 오후 4시, 그는 헬기를 타고 전남대에 왔다. 전남대에 숙영하는 33대대장 권승만 중령과 조선대에 숙영하는 35대대 대대장 김일옥 중령에게 내려서는 절대로 안 되는 명령을 내렸다. 2개 대대 출동 가능 인력은 겨우 합해서 400명 규모, 이 400명으로 하여금 금남로 길이 1.2km 내에 들어있는 수만 군중들 중에서 젊은이들을 한 사람도 놓치지 말고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광주시민은 당시 80만 명, 그중에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금남로로 달려 나왔겠는가? 자연 몸싸움과 백병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산을 시키라 명령해도 어려운 일인데 “붙잡아 헌병대로 넘기라, 목숨 걸고 업무를 수행하라" 엄명을 내렸으니 곤봉 사용은 강요된 것이었다. 곤봉으로 젊은이를 향해 휘두르는 장면, 이 사진은 광주시민과 세계시민은 분노시키는데 최상의 작품이었다. 이런 장면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그래서 금남로 옥상 곳곳에 사진 촬영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순간을 포착했다. 곤봉 사진은 모두 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것이다. 이 어찌 정교한 간첩전이 아닐 것이며 정교하게 짜여진 심리전이 아니겠는가?
5월 19일 |
31사단장 정웅은 아예 금남로에 나있는 중간 골목 36개 지점을 정해 각 점마다 공수대원을 배치해 젊은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라 명령했다. 젊은이들은 각 건물 옥상을 점령하여 돌멩이, 벽돌, 화분 등을 내려 던졌다. 수도 없이 매타작을 당한 공수대원들은 닥터헬기의 도움도 못 받고, 가로수 밑에 누워 피를 흘리고 있었다. 11공수여단 최웅 준장(1성 장군)이 상부에 호소를 했다. "우리 애들 다 죽습니다. 당장 철수시켜 주십시오" 명령 처리는 굼벵이 속도였다. 대대장들은 정웅 사단장 명령대로 하다가는 다 죽겠다 생각하여 대대 단위로 집결해 핸드마이크로 "시민들은 귀가하십시오" 하나 마나 한 방송만 했다. 공수대원들은 차려 자세로 눈동자 하나 굴리지 않고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시위대가 긴 작대기에 낫을 매 가지고 공수대원 목에 걸어 놓고 "이런 땡겨 말어"하고 조롱은 해도 마네킹 자세, 가위를 가지고 양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해도 마네킹 자세, 도끼로 철모를 내려치는 동작을 해도 마네킹 자세였다. 속으로는 공포감에 떨면서도 그걸 다 참아냈다. 그런 장난질도 싫증이 났던지 갑자기 장난꾼들이 옆으로 비켜나자 불타는 드럼통이 굴러오고, 시속 100km로 지그재그를 그리며 돌진하는 화물차들이 연달았다. 이날 공수부대는 매 맞으려고 시내에 나간 샌드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5월 20일 |
계엄사령부는 사태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여 병력을 찔끔찔끔 투입해 적에게 면역력만 키워 주었다. 이날 오전까지 광주에 투입된 부대는 공수 7 여단 2개 대대, 공수 11여단 3개 대대, 그리고 20일 추가로 3여단 5개 대대가 투입되어 10개 대대가 되었다. 공수부대가 고전을 면치 못하자 20사단을 투입시키고 공수부대를 빼려 했다. 최초에 20사단이 투입됐다면 게임은 벌써 끝났다. 14,000명에 탱크까지 편제돼 있는데다, 20사단 보병들은 자기 생명에 위협을 받으면 즉시 소총을 발사한다. 공수부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공수부대는 강한 군대라는 인식 때문에 일체 사격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피해만 당한 것이다. 북한 특수군 입장에서 20사단이 광주에 투입되는 것은 악몽이었다. 광주에서 북한 특수군을 지휘한 사령관은 게릴라의 전설 리을설 원수, 그는 3성 장군으로 광주에 왔다. 20 사단은 결국 5월 26일까지 광주에 투입되지 못했다. 리을설 장군의 기막힌 계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0사단이라는 대부대는 철로와 고속도로로 올 수밖에 없었다. 리을설은 이 두 개 접근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지시했다. 20사단 주력부대는 광주역으로 오게 돼 있었다. 그래서 제3공수여단 5개 대대가 광주역에서 20사단 주력이 하차하는 과정을 엄호해야만 했다. 그런데 리을설이 600명을 2개 부대로 반반씩 나누어 A부대는 고속도로를 차단케 하고, B부대 300명으로 하여금 광주역 광장에 집결한 3공수 5개 대대를 몰살시키도록 지시했다. 동원된 광주시민이 5만 명, 3공수 5개 대대가 몰살 지경에 이르자 20사단 주력부대는 할 수 없이 송정리에서 내리고 만다.
A부대 300명은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 있는 작은 개천 다리 '군분교'로 달려갔다. 20사단 지휘 차량 부대가 반드시 통과할 수밖에 없는 길목이었다. 중장비를 총동원하여 도로를 여기저기 절단시켜 차가 빠지도록 대하구를 파고, 전봇대, 철 구조물, 버스 등으로 이곳저곳을 막아놓고, 20사단 차량 부대를 유인하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가두리장을 설치했다. 그 공사 규모가 대단했다. 한편 광주역에 포위된 5개 공수대대는 새벽 2시까지 "차 온다" 노이로제에 시달리면서 연달아 달려오는 지그재그 돌진 차량의 희생양이 되었다. 가까스로 실탄과 최루탄이 보급되어 새벽 2시에 전남대로 철수하긴 했지만, 다음날인 5월 21일 오후 5시, 철수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전남대에 포위되어 생사를 건 사투를 벌였다. 여기까지가 5월 20일 작전이었다.
낭중지추 5월 21일 |
북한 특수군 파견 사령관 리을설 상장(3성)은 간첩으로부터 5월 21일 오전 08시에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 계획을 입수하고 A부대 300명을 군분교에 높게 쌓아올린 장애물 뒤에 매복케했다. 20사단 지휘부 차량이 정확한 시각에 군분교에 도착하자 노인으로 위장한 노인부대로 하여금 20사단 병력을 환영한다는 제스처를 쓰게 했다. 20사단 병력은 광주시민들이 20사단의 광주진입을 환영하는 줄로 알고, 기분이 좋아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하면서 노인이 유도하는 대로 차를 몰았다. 아뿔사 속았구나! 생각이 드는 순간, 장애물 뒤에 숨어있던 300명 어깨들이 몽둥이와 낫을 들고 나타나 기습했다. 총이고 무엇이고 다 내던지고 도주하기에 바빴다.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해 지휘부용 지프차 14대를 고스란히 빼앗긴 것이다. 이런 작전을 어떻게 광주에서 천대받던 구두닦이, 양아치들의 작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이 지프차를 몰고 이웃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출발하는 모습, 서서히 그리고 유유히 광주 거리를 달리는 모습들이 고화질로 촬영돼 있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이 보기만 해도 오금 저려 하던 롬멜 대원수의 독일군, 그 독일군을 연상케 하는 아우라가 피어났다. 09:00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에는 A조 300명, B조 300명 계 600명이 모였다. 담장을 높이 쌓아 올리고, 사방에 망루가 있고, 망루 위에 기관총이 설치돼있는 서슬 퍼런 군납업체가 맥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단 한 번도 출고된 적이 없는 이태리 수입 장갑차 4대와 374대의 군용트럭을 빼앗아 몰고 일부는 광주 시내로, 일부는 전남지역 땅끝마을까지의 17개 시군에 감쪽같이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한 듯 곧장 달려갔다.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려 2개 연대가 중무장할 수 있는 총기 5,403정을 탈취했다. 이것이 어떻게 광주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밑바닥 생활에 허덕이던 20세 전후의 양아치 계급이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무기를 탈취해온 A부대는 광주공원, 유동삼거리 등에서 광주시민들에게 총 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총을 나누어 주는 동안, B부대는 광주시내 금남로의 모략 작전을 수행했다. 금남로는 전남도청 앞 200미터에서 10시 방향으로 1.2km 정도의 길이로 뻗어 있었고, 금남로 전체는 도청 앞에 있는 공수부대의 가시권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금남로는 6차선, 양쪽으로 5층에서 10층에 이르는 빌딩들이 늘어서 있었다. 총류탄을 발사할 수 있는 M16 유탄발사기와 주머니에 든 유탄을 가슴에 잔뜩 안고 옥상에 서 있는 우악스런 모습의 무장괴한 사진도 있다. 일부는 도청을 사수하는 공수부대 5개 대대를 향해 장갑차를 고속으로 질주시켜 계엄군을 깔아 죽였다. 일부 지휘관들에만 몇 발씩 할당돼있던 실탄이 장갑차를 향해 날아간다. 이것이 바로 도청 앞 총소리였다. 도청 앞에서 총소리가 나게 해놓고, 북한 특수조는 그 총소리를 빙자하여 금남로 옥상에서 60도~70도 각도로 내려다보고 집중사격을 가해 순식간에 40명을 살해하고 또 다른 40여 명에 부상을 입혔다. 참으로 정교한 모략 작전이었다. 금남로 바닥은 도청에서 총알이 날아갈 수 없는 곳이 없다. 당시 의사들의 검안 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5월 21일 00시부터 24:00시까지 광주에서 사망한 62명 중, 도청 앞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이것을 놓고 영화 [화려한 휴가]와 영화 [택시운전사]가 도청 앞 발포로 2,000명이 죽었다고 모략한 것이다. 광주사태 전 기간인 10일 동안 광주에서 사망한 광주시민 수는 모두 154명뿐이다.
한편 A조 부대는 광주시민들이 총만 들려주면 반갑게 받아 계엄군과 싸울 것으로 기대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이들 시민들이 총을 반갑게 받을 줄로 믿고 총기를 5,403정씩이나 탈취했던 것이다. 엄청난 판단 착오를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리을설은 북괴 사령부에 SOS를 쳤다. 그러자 ”날래날래 교도소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무전으로 날아왔다. 당시 광주 교도소에는 간첩 수 170명을 포함해 2,700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이들에게 총을 주어서 폭동의 동력으로 활용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이 하달될 때 광주 교도소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정웅이 지휘하는 31사단 병력이 경비 차원에서 지키고 있었다. 계엄사는 전남대에서 몰살할 처지에 있던 3공수 5개 대대에게 즉시 광주 교도소를 방어하라는 급전을 쳤다. 31사단 병력이 교도소를 지키고 있었다면 아마도 교도소 수용 인력이 해방되었을 것이다. 누구의 명령이던가! 김일성의 명령은 신의 명령이다. 600명 중 100명 정도는 북한 파견대 본부를 수호해야 했을 것이다. 밤중에 교도소를 두 차례 공격했고 그다음 날에는 교도소 근방을 2차례 더 정찰했다. 이날 밤 공격에서 475명의 특수군이 죽었다. 475명은 어디에서 나온 숫자인가? 북한은 당시 광주 현장을 동영상 촬영하여 바로 그 해인 1980년 조선기록영화촬영소 명의로 [기록영화]를 제작했다. 그 영화 대사에 475명이 떼죽음을 당했다며 울부짖었다. 북한 노동당 측 판사들에게 1982년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1쪽, 1985년 발행한 [광주의 분노] 86쪽, [찢어진 깃폭] 등 4개 자료에 475명이 명시돼있다. 북한에서는 등교시간에 스피커로 들려주는 노래가 있다. [무등산의 진달래]. "동강난 조국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 찢어진 민족 혈맥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젊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구슬픈 가락에 실린 노랫말이다. 통일을 시키려고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가 떼죽음 당했다는 것을 애타게 절규하며 노래한 것이다. 그 떼죽음(무리 죽음) 당한 숫자가 475명이라 것이다.
475구는 어디로 갔는가? |
1989년 2월, 전남대 5.18 연구소 조사자료에는 당시 43세의 여교사 최봉희의 증언이 있다. 5월 29일까지 광주시립 공동묘지 직원이 처리한 5.18 사망자 시체가 모두 594라 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광주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164명으로 기록돼있다. 164+430=594이다. 2014년 5월 13일, 청주 흥덕지구 야산 밀림 속 1개 깊이의 땅에 평평하게 닦여진 넓은 공간, 규격이 일정하고 하얀 비닐에 싸인 430구의 무연고 유골이 발견되었고, 하얀 비닐에는 매직으로 군번처럼 일련번호가 쓰여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하얀 비닐로 시체를 포장한 곳은 오로지 5.18 광주뿐이다. 시체는 많고, 더위에 부패해 악취 나는 액체가 흘러나오고, 할 수 없이 비닐로 둘둘 말았다. 전남도청 안에는 하얀 비닐을 쌓아놓고 시체를 포장하는 설비가 설치돼있는 사진들이 있다.
1988년 7월 역시 전남대 5.18 연구소 조사자료에는 당시 60세 여성 안병복의 증언이 있다. 5월 27일 새벽, 시체를 가득 싣고 포장을 펄럭이며 시외로 달리는 화물차 여러 대를 보았다는 증언이다. 이때 광주시는 봉쇄돼 있지 않았다. 왜 하필 430구를 200km나 떨어져 있는 청주시에까지 실어다 가매장 했을까? 문경새재는 간첩들의 소굴이다. 5.18을 현장 지휘한 간첩 손성모가 은신하다 붙잡힌 곳이 청주다. 손성모의 지시에 따라 간첩이 감시하기 좋은 청주지역으로 옮겼을 것이다. 475-430=45, 45구는 어디로 갔을까? 북한 시체 12구는 공식적으로 신원불상자로 5.18 묘지에 묻혀있다. 2구는 교도소 근방 창평 야산에 묻혔다. 부산 국제신문 기자 이양수가 5월 23일, 리어커 2대에 관 한 개씩을 싣고, 하얀 찔레꽃을 동여맨 상태에서 여러 명의 청년들이 사방을 계속 둘러 보면서 야산으로 야반도주하듯 올라갔다고 했다. 그 외 저서 [시민군 계엄군]에 기술한 내용이다. 나머지는 이삭, 2개의 리어커에 실려간 시체처럼 야산에 이리저리 묻혔을 가능성도 있고, 부상 당해 철수하다가 배에서 죽기도 하고 북한에 가서 죽기도 했을 것이다.
430구의 행방 |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가 발생했다. 5월 13일 발견된 430구는 이틀 동안 보도되다가 세월호 여론에 묻혔고, 청주시가 전례에 없이 긴급 보도 통제를 가해 널리 보도되지 못했다. 무연고 유골이 발견되면 해당 지자체는 반드시 조달청 나라장터에 화장 및 봉안에 대한 입찰 공고를 내야 한다. 그런데 청주시는 입찰 공고를 회피하고, 이름도 없는 '현대장묘개발'이라는 업체에 수의 계약했다. 화장 및 봉안 단가는 당시 80만 원에서 100만 원 사이였다. 그런데 청주시는 구당 2만 원에 수의 계약했다. 50분의 1 가격이었다. 메디컬 뉴스들에 의하면 2014년 충청북도 소재의 4개 화장터에서 화장한 무연고 유골은 오로지 18구. 430구에 대한 화장 실적이 없는데다, 화장 증명서를 제출하라는 법원 명령에도 화장 증명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현대장묘개발'은 무슨 명목으로 구당 2만 원씩만 받았는가? 나무관(칠성판)에 하얀 비닐로 싸여 있던 유골을 한 구씩 털어 불투명한 비닐봉지에 넣고, 봉지 위에 또 일련번호를 기재한 후 컨테이너 박스 안에 철골 다이를 만들어 한 봉지씩 진열해 놓은 것에 대한 댓가였다. 화장터에 가져간 처리 방법이 아니었다.
이 컨테이너 박스는 어디로 갔을까? 북으로 갔을 것이다. 2014년 9월 19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대상 국가 모두가 참가 신청을 마감했다. 마감할 때까지 북한은 무관심했다. 그런데 청주 유골의 발견이 임박했을 때 청주에 본부를 둔 간첩이 북에 SOS를 쳤을 것이다. 아시안게임에 전혀 관심도 없던 북한이 갑자기 너스레를 떨면서 참가하겠다며 판문점에서 만나자 했다. 2014년 7월 17일, 남한 대표 3명(권경상, 정기영, 김영일)과 북측 대표 3명(손광호, 장수명, 고정철)이 만났다. 북한 측 3명은 5.18 광주 현장 사진에 나온 얼굴들이었다.
2014년 8월 17일, 또 매우 수상한 모임이 있었다. 북한의 대남사업총책 김양건이 간첩보다 더 간첩스러운 임동원, 박지원, 김홍일을 꼭 찝어 김대중 사망 5주기 기념 화환을 증정할 테니 개성으로 오라 했다. 이 의심스러운 3명이 북으로 올라가 컨테이너 운송 방법을 논의했을 것이다. 이어서 2014년 8월 19일, 북에서 또 8명이 인천으로 왔다. 최종적인 점검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변 중의 이변이 발생했다. 10월 4일, 아시안게임이 종료되는 폐막식 날, 북한 권력 3인방,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인천에 와 하루 종일 VIP룸에서 하품만 하다가 돌아갔다. 430구의 공화국 영웅은 이렇게 김정은 전용기에 실려갔을 것이다. 외국 VIP들은 개막실에는 와도 폐막식에 오지 않는다. 권력 서열 1, 2, 3위가 모두 감히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왔다는 이 이상한 사실에 대해 당시 박근혜 정부는 전혀 그 이유를 추적하지 않았다. 이상하고 수상한 사건을 이렇게 함부로 넘기면 나라는 누가 지키는가?
5월 22일 |
5월 21일 오후 5시, 공수부대는 모두 광주시 외곽으로 도주했다. 도주하는 과정에 총격 공격을 많이 당했다. 11공수 여단장 최웅 준장(1성)은 철로길을 가로지르는 순간 총격을 받아 지프차가 전복됐다. 운전병과 경호 병사 1명을 데리고 무등산으로 기어 올라가 미 방공호부대에 며칠 동안 피신해 있었다. 이후 전남도청은 북괴군이 점령해 작전지휘소로 사용했다. 22일 광주 거리는 다시 한산해졌다. 광주 유지들이 도청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들은 통제당해 부 도지사 방에만 허용됐다. 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무기 반납부터 하자고 했다. 대학생들을 찾으니 대학생은 오직 전남대생 김창길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 김창길도 온건파라 무기 반납에 동의했지만 그에겐 수족도 동지도 없었다. 계엄군과 협상하자는 말이 나왔지만 좌충우돌, 의견이 충돌해 헤어지고 수습 위원회라는 이름만 남겼다. 600명 중 475명을 잃고 남은 125명의 특공조, 마지막으로 복면을 하고,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전투능력을 과시하면서 거리를 돌았다. "광주시민 여러분, 악질 계엄군과 싸웁시다". 이때 광주에서는 이미 "속고 있다"는 정서가 일고 있었다. 무력시위로 시민 참여를 유도하는 복면조들과 광주시민이 물과 기름으로 갈라서 있었다. 계엄군이 사라진 고요한 공간, 475명이라는 엄청난 주력을 상실한 북괴 지휘부는 다급해졌다.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하면 꼼짝없이 잡히게 생겼다. 잡히면 침략 사실이 들통나게 돼 있었다. 이들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침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폭파시켜 증거를 남기지 말라는 것이 지상 명령이었다. 그런데 그들만 폭파해 죽으면 금방 진실이 드러난다. 더구나 원정 게릴라 군에는 600여 명의 남녀노소 민간 집단이 있다. 그래서 '너 죽고 나죽자' 식의 마지막 대책이 수립되었다. 여차하면 광주시를 히로시마처럼 잿더미로 만드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도청 지하에 TNT로 2,100발의 폭탄을 조립해 놓은 것이다. 만일 계엄군이 조기에 진입했다면 광주시는 히로시마로 변했을 것이다.
5월 23일 |
이날은 독일 기자, 푸른 눈의 목격자로 미화된 힌츠페터가 두 번째로 광주에 오는 날이었다. 이날의 촬영 주역들은 남녀노소 민간 집단이었다. 시체장사 목적의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면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었다. 사진에 나타난 민간 그룹에는 언제나 군대식 질서가 있었다. 대한민국은 군대를 내세워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만 할 야만의 나라라는 것을 남북한 주민들과 세계인들에게 모략하기 위한 시체장사 쇼를 벌인 것이다. 이 북한 민간인 집단의 무더기무더기 단위는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의 집합체였다. 배우 그룹, 문학자 그룹, 화가 그룹, 외교 그룹, 행정 그룹... 서로 아는 사람들끼리 편하게 북한말을 쓰고 있을 때 낯 모르는 광주 청년이 들어갔다. 이런 청년은 금세 어깨들에 팔이 꺾여 도청 안으로 끌려가 살해됐다. 이렇게 끌려가는 4명의 청년이 사진에 나타나 있다.
5월 24일 |
공수부대는 시 외곽에서 광주에서 외부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간첩의 소행인지 5월 24일 오전 10시, 모든 공수부대는 광주 비행장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광주에서 목표로 가는 가장 중요한 통로도 뚫렸다. 광주도청에 모여 있던 지휘부와 125명의 특공대 그리고 600여 명의 민간집단은 광주에서 목표로 내려가 대형 선박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을 것이다.
5월 25일 |
이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계엄군, 광주 재진입 작전을 입안하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로 날아와 학생들과 직접 대화를 하겠다고 나섰다. 장군들이 나서서 큰일 난다며 읍소했다.
최규하 : "작전참모, 광주시민의 생필품 부족과 난동꾼들의 횡포에 매우 불안해하니 속히 수복 작전을 수행해야 하오. 그런데 수복 작전을 하면 피해가 얼마나 되겠소?"
작전참모 김재명 소장(2성) : "예 최소한으로 잡아도 150명 정도는 될 것입니다.
최규하 : 알았소“
북한군은 이미 다 빠져나갔는데, 군은 캄캄했다. 북괴군 지휘소와 민간집단이 사라지자, 그동안 도청에 얼씬도 하지 못했던 광주 부나비들이 한 사람 두 사람씩 도청에 들어갔다. 모두가 서로 낯선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서로 갑론을박을 벌이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려 싸움질하다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손들을 들고 항복했다. 이 중 일부가 저항하다가 17명이 사망했다. 이것이 5.18 사건의 끝이었다. 피 터지게 싸울 줄 알았는데 싱겁게 손을 든 것이다. 5월 18일, 19일, 20일, 21일 상황과는 전혀 딴판인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확산된 북한군 학설
2008년 9월,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 발간되었을 때 사회적 반응이 컸다. 2002년 내가 광주 감옥으로 잡혀갔을 때만 해도 나를 신뢰하는 일부의 국민만 나를 동정했을 뿐 나는 사회적 돌연변이 취급을 당했다. 그런데 이 4부작이 나가면서부터 내 학설에 동조하는 국민들이 꽤 생겼다. 5.18 단체들이 5.18 부상자회 신경진 회장을 간판으로 하여 또 나를 고소했다. 그런데 내 학설을 공유한 사람들이 15명이나 되었다. 신경진은 이 15명 모두를 고소했고, 광주 검찰은 15명 모두를 광주에 와서 조사받으라고 했다. 이들 모두가 관할권을 이유로 사건을 각자의 주거지 관할 관청으로 이송해 달라고 버텼다. 그래서 매우 다행스럽게도 내가 안양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고, 안양법원에서 재판을 받게되었다. 단독 판사가 2명 연달아 사건을 기피했다. 단독 판사로는 자신이 없으니 사건을 합의부로 넘기자 했다. 합의부 판사는 재판 첫날 나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피고인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언제라도 법정에서 구속될 수 있습니다." 저질러서는 절대로 안 되는 범죄를 저지른 죄질 나쁜 피고인으로 낙인찍은 것이다. 유죄를 예단하는 발언이었다.
나는 수사기록 내용 이외에도 수많은 언론 자료들을 종합하여 열심히 수십 쪽씩의 답변서를 냈다. 그것은 답변서라기보다는 학술적 논문에 가까웠다. 통일부 북한 자료 센터에서 북한 자료를 읽었지만 대외비라 복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판사에게 탄원을 했다. 북한 문헌들에 5.18 관련 내용들이 많으니 열람 복사할 수 있도록 재판부 명의로 협조공문을 보내 달라고 했다. 통일부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북한이 해마다 5.18을 전 도시 단위에서 성대하게 거행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북한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28개 전 도시에서 5.18 행사를 하겠느냐는 답변서도 냈다. 뜻밖에도 나를 악인 취급하던 재판장이 공문을 통일부에 보내주었다. 그래서 나는 비밀 북한 문헌들을 20여 종이나 복사할 수 있었다. 이 내용들을 잘 정리해서 수십 페이지 단위로 답변서를 냈다. 재판장이 모두 자세히 읽어주었다. 증거자료 순서가 꼬인 것도 지적해주면서 재판장의 발언이 순해졌고, 눈초리도 우호적으로 변했다. 고소자 자격으로 5.18 부상자회 회장 신경진이 재판 휴정 시간에 내게 와서 인사를 했다. 내가 제출한 답변서를 읽다가 완전히 답변서에 동화되고 있어서 답변서를 집어던진 적이 있다고 했다. 이때 광주 남녀 집단이 버스 두 대를 타고 올라와 법정을 메우고 로비를 점거했다. 법정에서는 변호인의 신문이 이어질 때마다 소란을 일으켜 세 차례씩이나 휴정이 선포됐다. 나중에는 질문지를 증인으로 나온 신경진에게 주고, 남들이 듣지 못하도록 "00번, 맞습니까?" 이런 식으로 해서 신문을 끝낼 수 있었다.
광주에서 올라온 전옥주, 입장하는 나에게 손톱을 매 발톱처럼 오무려가지고 내 얼굴을 긁어 놓겠다고 덤벼들었다. 입장하지 못하고 로비에서 기다리던 노인 분들이 이들로부터 수모를 당했다. "이 보소, 나이 묵어갖고 뭔일로 이런데 따라다니오엥~ 돈 얼마받고 왔당가~" 노인들의 턱을 치켜올리면서 수모를 주었다. 한 남성은 유리창 앞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40대 여성의 귀를 뒤로부터 돌진하면서 가격했다. 귀걸이가 떨어져 나가면서 귓밥이 찢어져 피가 낭자했다. 인간들이 아니라 하이에나 늑대족이었다. 2011.1.19, 안양법원 판사는 뜻밖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5.18단체는 '북한군 개입' 표현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피고인이 4권의 책을 통해 주장한 것은 학설이기 때문에 누구를 비방하여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판결은 서울고등법원에서도 인정됐고,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에서도 확정했다.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았다는 것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유죄를 받아 구속될 줄로 알았던 사람들이 쇼크를 받은 것이다. TV 조선과 채널A에서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어보기 위해 나를 초대했다. 나는 자료를 안고 나가 1980년 5월 21일의 군분교 사건과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었다는 이야기까지만 간단히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남녀 진행자는 동시에 "이런 일은 광주 대학생들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북한 특수군 소행이 명확하네요" 이렇게 반응했다. 몇 차례 더 출연을 요청하더니 두 방송국 모두 경쟁적으로 탈북자들을 섭외하여 ”북한에서는 5.18이 어떻게 알려져 있느냐“는 질문들을 하면서 프로를 재미있게 진행했다. 2013년 1월부터 5월까지 거의 5개월 동안의 방송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계몽되었다. ”5.18은 북한이 한 게 맞네“
광주시의 반격
2013년 5월 24일, 광주시장이 주동이 되어 광주에 있는 338개 단체와 광주 민변 변호사 18명으로 [5.18 역사왜곡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사실상 지만원에 대해 사법 처리를 하겠다는 위원회였다. 이들이 국회의원을 동원하고 김관진 국방장관, 정용원 국무총리, 박근혜 대통령까지 움직였다.
김광진 :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2013.5)
정홍원 : 5.18 민주화 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북한군이 왔다는 발언은 반사회적 범죄 행위다. 강력 처벌할 것이다! (2013.5)
박근혜 : 채널A와 TV조선 방송은 허위다. 사과방송하라. (2013.5.방통심의위)
국방부 대변인 : 북한군 개입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미래에 밝혀야 할 사안이다. (2019.2.12)
2019년 2월 12일 당시까지도 북한군 개입의 진위 여부가 국가기관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국방장관, 국무총리, 대통령이 광주시장에 아부한 것이다. 대한민국이 요지경 공화국인 것이다.
5.18작전에 참가했던 북한 3성 장군 박승원의 귀순
2015년 6월 말, 박근혜 대통령은 매우 상기된 얼굴로 "북한에서 매우 높은 고위급 인물이 귀순했다"고 공언했고,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국정원으로 달려갔다. 고위급 인사를 빨리 확인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2015년 7월 4일과 5일, 채널A와 동아일보는 국방부와 국정원의 조사가 마무리됐고, 곧 인민군 상장(3성 장군) 박승원이 귀순 기자회견을 할 것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몇몇 군소 언론이 박승원의 전력을 공개했다. ①박승원은 5.18 때 광주에 왔다 ②북한 간부급 사회에 박승원은 광주에서 벌였던 영웅적 무용담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③박승원은 북한의 5.18 노래 '무등산의 진단래' 제작에 참여했다. 이 보도는 지금도 인터넷에 살아있을지 모른다. 그러자 채널A도, 동아일보도, 박승원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박승원이 광주에 왔던 군인이었다는 사실이 발표되면 전두환 대통령이 영웅이 된다. 박근혜는 전두환을 불구대전의 원수로 여긴다. 박근혜는 5.18에 계속해서 충성을 바쳐왔다. 박승원을 내놓으면 전두환은 영웅, 박근혜는 그 반대가 되는 드라마가 전개된다. 이는 박근혜에게 악몽이다. 박승원은 지금 어디엔가 감금돼있을 것이다. 이는 반인륜적 범죄다.
'광수'의 역할
1993년 1월부터 5월 사이에는 채널A와 TV 조선이 '북한군 개입' 학설을 널리 전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방송을 들었던 국민들은 정부의 말과 5월 단체들의 말을 비웃는다. 이런 국민들은 ‘광수’의 존재를 믿는다. "5.18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면 현장 사진 속에 찍힌 주동자들의 인물이 북한 특수군 얼굴이 아니겠느냐." 이는 당연한 논리였다. 그런데 어느 청년이 '광주 현장의 로고 인물이 연합뉴스가 보도한 평양노동자회관에서 열린 2010.5.17.자 제30회 5,18기념 행사장 로열석에 앉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관찰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다. 사람들은 왜 평양의 노동자회관에서 5.18 행사를 저토록 성대하게 하는 것인가에 의아심을 가졌고, 두 얼굴이 같은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에 대해 신기하게 생각했다. 인터넷이 달아올랐다. 이에 미 정보기관에서 안면분석 부서에서 근무하다가 8명의 팀을 짜 중국 정부와 안면인식 프로그램 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필명 '노숙자담요'(이하 노담)가 나타나 얼굴의 특징을 전문가적 절차에 따라 설명해주었다. 노담에 대한 네티즌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네티즌들은 평양 로열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3명의 얼굴이 광주에서 캐리버 50 중기관총을 트럭 위에 거치하고, 보닛 위에 타이어로 요새를 만들어 광주시가를 누비던 3인 1개 조 그 순서 그대로라는 관찰도 했다. 노담은 이 세 사람의 북한식 관등성명을 찾아내 네티즌들의 매서운 눈썰미를 과학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네티즌들은 발견한 순서대로 제1, 제2, 제3 광수라고 명명했다. 실제로 제3 광수 이름이 김광수였다.
네티즌들은 왜 광주 현장 속 북한 인물을 '광수'라고 불렀는가? 2009년 10월 탈북자 임천용이 '자유북한군인연합' 명의로 16명의 탈북자들이 그들이 알고 있는 5.18에 대해 자세하고 실감나는 이야기들을 증언 형식으로 쓴 글들을 모아 중언집을 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이 책은 당시 많이 읽혔고 인기가 대단했다. 그 수기 내용 중에 '광수' 얘기가 나왔다. 5.18 당시 북에서는 다른 TV 프로를 생략하고 광주 현장을 동영상으로 찍어 거의 실시간에 가깝게 방송을 했다고 한다. 군대 내무반에서도 신나는 프로였다고 한다. TV를 시청하던 한 병사가 갑자기 흥분하면서 "야, 야, 거기 좀 봐, 저놈아 광수다, 광수. 야 머리 휘날리며 기관총 가지고 광주시가를 영웅처럼 누빈다 야~" 이 부분을 읽은 네티즌들이 광주 현장 얼굴이 하나씩 분석돼 나올 때마다 번호를 붙였고, 이를 감지한 노담 역시 발굴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만 3년이 지난 2018년까지 모두 661명의 광수를 발굴했다.
이 얼굴인식 과정이 발표되자 인터넷 매체 뉴스타운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호외지를 제작해 광수를 알리자 했다. 4쪽짜리 호외지 1, 2, 3호를 각 10만 부씩 발행했고, 이는 시스템클럽 회원님들에 의해 전국단위로 확산됐다. "영락없네~" 모든 이들의 반응이었다. 김성웅 신부님은 자비로 광수 얼굴 수십 장을 제작하여 광화문 종각 앞에 걸어놓고 주말마다 전시를 했다. 오가는 수많은 시민들이 발길을 멈추고 감탄을 했다. 신백훈 박사는 감탄하는 시민들의 탄성을 유튜브 방송에 담아 수십 차례씩 내보냈다. "영락없네~ 북한군 맞네~" 북한군 개입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광주시장과 5월 단체가 나서서 6개월 사진전 열어
이에 다급해진 광주시가 발 벗고 나섰다. 광수 사진들을 크게 복사해서 광주 지하철 공간 등 연구 밀집 지역에 걸어놓고 6개월 동안 사진전을 열었다. 2015년 10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광주의 5.18 영웅들은 나서달라" 호소했지만 나올 리 없었다. 나온다면 엄청난 혜택을 받을 터인데도 6개월 동안 나서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다. 이보다 17년 전인 1999년 5월 18일, 당시의 방송 조사는 광주 현장 얼굴 4점을 하루종일 스퍼트뉴스로 띄워 광주의 영웅은 나서 달라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광주 사람들 중에는 현장 주역이 없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1999년에 찾지 못한 4명의 주역은 노담이 다 찾아냈다.
5.18 진상규명법 제정
'북한군 개입' 학설이 유행하자 여기에 국가권력으로 쐐기를 박으려고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2018년 2월에 '5.18 진상규명법'을 발의했다. 광주 사람들을 뽑아 위원회를 만들고 위원회의 이름으로 북한군 학설을 잠재우려는 시도였다. 마치 2003년 노무현이 제주 4.3 위원회를 만들어 4.3 사건을 민주화 사건으로 몰아갔듯이. 이 법안 제3조 6항에는 '북한군 개입' 음모 행위를 조사하라는 조항이 있었다. 당연히 지만원을 표적으로 한 조항이었다. 이에 이종명 의원이 발의하여 음모만 밝힐 것이 아니라 진실부터 밝히자 했다. 그래서 '북한군 개입' 여부를 조사하라는 조항이 보태진 것이다. 이 법에 따라 2019년 12월 27일부터 만 4년 동안인 2023년 12월 26일까지 107명의 5.18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516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세금을 사용했지만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결론도 내지 못했고 전두환에 의한 집단 발포 명령에 대한 사실도 찾아내지 못했다. 더구나 조사위원회는 문재인이 직접 구성했기 때문에 조사위원 거의 모두가 광주 사람들이다. 조사위원장 송선태는 5.18 유공자인데다, 5.18 발발 1주일 전인 1980년 5월 11일, 이미 간첩만이 알고 있는 5.18 작전계획 그대로를 [자유 노트]라는 비망록에 기록한 장본인이다. 5.18의 진실을 연구하겠다면서 516억 원이나 사용한 조사위원회 위원장이 왜 꼭 5.18 유공자여야 하고, 간첩과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송선태여야만 하는가? 정정당당하지 못하게 이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타 지역 국민을 열등 국민이라고 멸시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막가파식 횡포인 것이다. 승복력! 처음 민주당 의원들은 거창하게 승복력 있는 조사를 하겠다고 했다. 과연 이것이 승복력 있는 조사 행위란 말인가.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는 표현은 무죄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는 표현은 두 가지 근거로 무죄가 인정됐다. 2019년 2월 8일, 이종명 의원 등의 주도로 국회에서 '5.18 진실규명 대국민공청회'가 열렸다. 600명이 입장했는데도 자리가 없어 돌아가신 국민이 많았다. 4시간에 걸쳐 5.18이 어째서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 전이었는지 그 근거들을 밝혔다. 장내가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에 대해 국회의원 설훈, 민병두, 최경환과 5월 단체들이 나를 또 고소했다. 그런데 이를 조사한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역시 안양법원 판결 그대로
①고소인들은 지만원의 표현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이른바 '집단 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관한 대법원 판례에 의해 피의자는 무죄이고,
②발표 내용은 학문에 의한 학자의 의견이기 때문에 무죄라는 것이었다.
2011년 안양법원 판결, 2012년의 대법원 판결, 2020년의 검찰청 판단에 의해 위 '게릴라전' 표현은 법적인 무죄 대상이 됐다. 여기에 또 다른 실감 나는 근거가 하나 더 있다.
2017년 10월 12일, 당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가 나를 고소한 고소인 자격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 증인석에 섰다. 피고인인 나는 그에게 크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 하나는 그가 운영하는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타임라인 (5.18 역사시간표)에 기재돼있는 한 개의 역사 상황에 대한 질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광주 현장사진 12장에 대한 질문이었다. 타임라인에는 '5월 22일 15:08 서울서 온 대학생 500여 명에 대한 환영식 거행'이라는 글이 있다. 광주인이 아닌 외지인 500여 명이 이룩한 성과에 대한 감사의 행사로밖에 해석될 수 없는 기재였다. 나는 김양래에게 이 500여 명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의 답이 걸작이었다. "아직 규명되지 않은 내용이다.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게릴라)가 아닌가 앞으로 연구할 계획입니다." 서울서 온 대학생 외지인 500여 명에 대해 광주시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환영 행사를 했다면, 그 환영의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유가 분명히 있어서 환영식을 거행했을 텐데 37년이 지나도록 그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광주시가 전두환이 군인 500여 명에게 민간복을 입혀 광주에 보내 공수부대와 싸우게 했을 것이라는 대답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나 대답할 수 있는 헛소리다.
김양래에게 현장사진 12장을 보여주면서 사진에 담긴 모습을 해설해주면서 이런 모습을 광주에서 천대받던 10대 아이들이 보일 수 있는 모습이냐고 물었다. "단련된 몸매에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총기를 북한식으로 거꾸로 메고, 무전기를 듣고, 유니폼을 입고, 부대를 비밀스런 방법으로 나타내는 비표식을 하고, 조직화돼 있고, 총기와 수류탄의 기능 여부를 점검하고 TNT로 폭탄을 조립하고, 북한식 제식 동작을 하고, 장갑차를 몰고, 차량을 타이어로 요새화하고,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이 군사집단의 행위가 광주 시위대의 80%를 차지하는 어린 구두닦이 등이 보일 수 있는 행동인가요?" 이에 김양래는 ”게릴라 부대로 보인다, 전두환의 편의대일 것이다“라는 발언을 했다. 그 누구에게 똑같은 12매의 사진을 보여준다 해도 모두가 다 게릴라 부대라는 말밖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내용을 나는 2020년에 출판된 [무등산의 진달래]에 기재했다. 이에 대해 김양래는 또 나를 고소했고 손해배상도 청구했다. 자기의 발언을 짜깁기하여 마치 자기가 지만원의 북한 개입설에 동조하는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여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2023년 5월 9일, "지만원은 김양래의 증언을 왜곡하지 않았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누구든 12매의 사진을 보면 5.18의 주역이 북한 게릴라 부대라는 인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모든 사실들은 5.18을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 전이었다는 표현의 학설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왜 3억 원의 배상금을 물어주고 감옥에 왔는가? 1995년 11월, 전두환을 잡아넣으라는 김영삼의 명령에 따라 검찰은 일단 전두환 대통령을 안양교도소에 수감했다. 그다음엔 없는 죄를 새로 만들어 뒤집어씌울 수밖에 없었다. 음모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공작 기관장인 권영해 안기부장이 동기생인 권정달을 포섭하고 법률 수족으로는 홍준표를 고용하여 존재하지도 않는 '집권 마스터플랜'이 전두환에게 있었다는 막가파식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그 음모 내용을 100% 그대로 반영한 것이 전두환 대통령의 죄가 되었다. 바로 이와 똑같이 빼닮은 음모가 나에게도 적용됐다.
5.18 기념재단의 음모
5.18 기념재단이 16명의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을 개별 접촉했다. "여기 이 사진 당신 얼굴처럼 보인다. 변호사가 알아서 다 처리할 것이니 무조건 제00 광수가 바로 나라고 우겨라.“
서울중앙지검 이영남 검사의 음모
이영남 검사는 안양 동안 경찰서를 지휘하여 국과수에 장진성의 광주 현장 얼굴과 2016년 당시의 장진성 얼굴에 대한 감정을 의뢰하라고 했다. 국과수의 감정은 생사람 잡는 '감정'이었다. 국과수 법공학부 디지털 분석과 문기웅의 감정서 내용은 이러했다. "광주 사진은 해상도와 계조(Gradation)가 낮아 판독에 제약이 있고, 두 사진의 촬영 시기가 30년이 지났기 때문에 판독에 무리가 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체형이 다 나타나 있어야지 얼굴만으로는 감정이 어렵다. 얼굴형은 비슷해 보이고 턱도 비슷해 보이지만 아랫입술, 코끝, 눈썹의 가장자리는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런 감정이라면 거리를 막고 누구에게 물어도 얻을 수 있는 감정이다. 이영남 검사는 이를 근거로 하여 노담의 분석을 전면 거부한 반면 아무런 분석도 내놓지 않고, 흔들리고 일그러진 사진만 내놓은 광주인들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여 공소장을 썼다.
검사나 판사는 다툼의 당사자 모두에 똑같은 요구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고소인들에게는 아무런 근거도 요구하지 않고, 피고인에게만 더 많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았다. 국과수 감정인 문기웅 감정사는 몸 전체 사진이 없으면 얼굴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광주 고소인들 역시 전 몸체 사진을 제출하지 않았다. 몸체가 있어야 얼굴 분석이 가능하다는 국과수의 문기웅 감정관! 생사람 잡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문기웅 말고는 얼굴인식을 몸체로 해야한다는 전문가는 없다.
노담은 어째서 제00 광수가 북한 얼굴이고, 어째서 제00 광수가 고소인 얼굴이 될 수 없는지를 8쪽에 걸쳐 영상분석 교과서에 따라 근거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검사는 고소인에도 왜 고소인이 제00 광수인지 그 근거를 영상분석을 통해 제시하라 요구해야 한다. 하지만 검사는 노담의 분석은 무조건 아니라 하고 고소인들에게는 얼굴의 어느 부분이 어째서 같은지에 대한 분석 근거를 제시하라 요구하지 않았다. 이는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비대칭적 편파적 직권남용일 것이다. 과연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의 감정서 내용은 안면인식 기술을 담은 내용인가? 아니다. 2023년 4월 12일 자 조선일보에는 보안업체 에스원이 칠흑의 밤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히는 확률이 99%인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는 보도가 실렸다. 2023년 5월 11일 동아일보는 신한은행이 5월 10일부터 통장과 카드 없이도 얼굴만으로 출금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사를 냈다. 2017년 7월 13일 KBS는 25년 전에 탈옥한 범인이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냈다. 25년 전의 얼굴 사진이라면 이영남 검사에게는 신뢰할 수 없는 사진일 것이다. 2020년 5월 19일 뉴스1에는 중국에서 32년 전에 잃어버린 2살 반 아기를 34살에 부모를 찾아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2023년 3월 23일 NBN TV는 어려서 실종된 아기 176명을 부모에게 찾아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은 몸체가 다 찍힌 사진이 있어야 얼굴인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몸체로 안면인식을 한다는 이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문기웅도 생사람 잡는 사람이고, 김영남 검사도 생사람 잡는 사람이다. 칠흑 밤에 마스크를 쓴 사람도 누군지 아는 것이 안면분석 시대인데, 무슨 해상도가 그리 필요하고 계조가 필요한가? 안면인식에 사용되는 로직(logic)은 부위별 특징과 부위와 부위를 연결한 직선의 길이와 선 간의 각도들이다. 검찰은 이렇게 주장한다. "수십 년 전 사진은 화질이 조악할 수밖에 없고 이후의 사진들은 고화질 사진이다. 이 두 개를 비교 분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화질 사진에는 땀구멍과 솜털이 보이지만 그것도 종이 위로 옮기면 저화질이 된다. 영상 비교 분석에는 부위의 특징과 부위의 위치가 가장 중요한 판단의 기준이 된다. 특징과 위치만 확인할 수 있으면 안면 비교 분석은 가능하다. 검사와 국과수는 에스원이 칠흑 속에서 얼굴을 인식했다는 보도를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담은 어떤 방법으로 광수를 찾았나?
신한은행은 어떤 논리로 얼굴로 결제를 할까? 육안으로 인식할까? 이 세상 그 누구에게라도 사진 한 장을 쥐여주고, 이 얼굴과 비슷한 얼굴을 찾으라 하면 10년이 가도 찾지 못한다. 그러나 컴퓨터는 몇 초 내에 찾아낸다. 컴퓨터가 찾아낸 얼굴은 육안에 비슷하게 보이고, 육안에 비슷하게 보이는 얼굴은 같은 사람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신한은행 데스크 앞에 고객이 앉는다. 사진기가 고객의 얼굴을 찍는다. 찍힌 얼굴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고객 얼굴 100만 명이 저장돼있는 '얼굴 DB'(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 한 사람씩 비교해서 같은 얼굴을 찾아낸다. 이렇게 찾아낸 DB 얼굴은 방금 앉은 고객 얼굴 사진과 비슷해 보인다. 은행 창구 직원은 비슷한 것까지만 확인하고 거래를 한다.
노담이 광수를 찾는 과정도 이와 똑같다. 광주 현장 사진 얼굴들 중에서 한 사람을 딴다. 그 얼굴을 북한 인물 정보 DB에 저장된 얼굴과 대조시킨다. 이렇게 해서 컴퓨터가 찾아낸 얼굴이 광수인 것이다. 그래서 현장 얼굴과 북한 얼굴이 비슷해 보이거나 빼박으로 보이는 것이다. 광주 판사, 주사파 판사들은 광주 현장 사진의 얼굴과 북한 인물의 얼굴이 비슷해 보이긴 하다고 판결문에 썼다. 그런데 무슨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구체적 수치"가 제시되지 않았다며 노담의 분석이 엉터리라 판결했다.
광주 판사 주사파 판사, ”내가 영상분석가다.“
대한민국 우리에 갇힌 모든 소들이 다 바라보고 웃을 만한 코미디 판결문이 있다. 재판부가, 인물이 촬영된 시간, 장소, 바라보는 시선, 자세, 복장, 두발 상태를 육안으로 종합하여 판단해 보니 노담의 분석을 신뢰할 수 없다. 얼굴 비교 분석은 특징과 기하학적 도면인 얼굴지문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거꾸로 알고 있는 것이다.
양심 판사 vs. 주사파 판사
나를 감옥에 보낸 사건을 1심에서 심리한 판사는 4명이다. 첫째 판사 강산은 기피신청을 했고, 네 번째 판사는 피고인을 굉장히 정중히 대하는 척했지만 2년 징역형을 때리고 광주 법원으로 영전해간 광주일고 출신 김태호이다. 세 번째 판사는 김경진.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라고 표현한 고영주 변호사에 무죄를 선고했던 판사다.
김경진 판사는 2018년 8월 16일 자 제4회 공판 준비 기일 조서에서 검찰에게 강력하게 촉구했다.
① 검사는 광주 현장 사진 속 얼굴이 어째서 고소인들의 얼굴과 동일인이라는 것인지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자료를 제출하여 입증할 것을 촉구한다.
② 피고인은 광주 현장 사진 속 얼굴이 고소인들의 얼굴이 아니라 북한군 얼굴이라고 극구 주장하는데, 검찰은 무슨 근거로 공소장에서 고소인들의 주장만 사실로 인정하였는지 그 논리적 증거를 제출할 것을 촉구한다.
5.18 때 고1중퇴자로 다방 종업원이었던 18세 박철의 경우에는 얼굴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일그러진 사진을 내놓고, ”누구나 육안만으로도 제00 광수가 나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내 얼굴 모르겠느냐“고 주장했다.
증인신문 과정에서 김경진 판사가 물었다.
판사: 이 흔들린 사진을 보고 증인의 얼굴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박철: 장발했던 사실이 저임을 입증합니다.
국과수 문기웅의 이론에 등장하는 해상도와 계조(gradation)는 박철이 제출한 사진에서는 따질 여지조차 없었다. 그래도 노담은 A4지 8개 면에 걸쳐 박철의 흐린 면허증 사진과 흔들린 사진을 가지고 왜 388광수가 박철의 얼굴이 될 수 없는지 정밀 분석을 했다. 눈물이 날 만큼 정성을 들여 설명했다. 얼른 보아도 388 광수는 입술이 나팔꽃처럼 튀어나와 벌어져 있고, 박철의 증명사진은 거북이 엎어놓은 것처럼 오목형으로 입버텅이 튀어나왔다. 피고인 측은 이렇게 8쪽 분량의 근거를 제시했지만, 박철은 판사가 제출하라 했는데도 무시했다. 판사의 촉구 명령을 두 가지나 받은 검사는 그 후 판사의 촉구 명령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런데도 광주일고 출신 김태호 판사는 박철의 주장이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모순이 전혀 없는 진실한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이런 판사가 바로 독자 옆에 서 있다면 독자는 어떤 충동을 느낄까? 김경진 재판장이 사건을 종결했다면 피고인은 무죄였을 것이고, 여기 감옥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광주 고소인은 알리바이 없어도 무조건 승리
광주 판사, 주사파 판사는 타 지역 국민을 무시하는 선을 넘어 조롱하고 야유하는 판결서를 썼다. 아래 판결 내용을 읽고 분노하지 않은 세계인은 없을 것이다.
① 5.18은 신성한 민주화 운동이다. 북한군은 절대 올 수 없었다. 따라서 현장 사진 속 인물들은 모두 광주시민들일 수밖에 없다.
② 광주시민이 현장 사진 속 얼굴이 자기라고 주장하면 무조건 진실한 사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③ 피고인이 고소인들의 이름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해도, 현장 사진 속 얼굴을 북한의 인물로 지칭한 것은 곧 고소인을 특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목포에 거주하는 90대 중반의 김진순도 소송에 내몰렸다. 그녀는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어두워 인터넷에 자기가 광수로 지목돼있는지조차 확인할 수도 없고 명예훼손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할머니다. 5.18 기념재단은 그 노파를 제 62광수라고 주장케 했다. 제 62광수는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에 놓인 관 앞에서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고 있었다. 김진순은 그 62광수가 자기이고 아들 이용충의 관을 잡고 있었다고 주장돼 있다. 그런데 5.18 기념재단 사이버 추모공간에서 이용충 코너에 들어가면, 이용충의 부모가 아들 이용충이 사망한 사실을 통보받은 날짜가 1980년 6월 30일이라고 기재돼있다. 경찰이 연락을 해서 경찰서에 아들 이용충의 유품과 사진이 진열돼 있으니 와서 확인하라 하여 비로소 아들이 사망한 사실을 알았다고 기록돼있다. 그런데 광주 판사와 주사파 판사들은 판결문은 글자 한 자 다르지 않게 긁어다가 똑같은 판결문을 썼다. "김진순의 주장은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모순이 없는 진실한 사실이다" 피고인에게 속 터져 병 걸려 죽으라는 뜻일 것이다.
해남의 여성 농군 80대 노파 심복례 역시 소송에 나섰다. 그녀 역시 소통이 불가한 노파였다. 그녀 역시 1980년 5월 23일 남편 김인태의 관 앞에 앉아있는 덩치가 우람한 139 광수가 자기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심복례는 키가 잘해야 150cm 되는 왜소형이다.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사이버 추모공간의 김인태 코너에는 심복례가 남편이 사망한 사실을 5월 29일 군청에서 통보받고 다음날인 5월 30일에 광주 망월동에 가서 가매장돼있는 부식한 시체를 처음 확인했다고 기록돼있다. 5월 30일에 가매장 상태에 있는 남편을 확인했는데 소송에서는 5월 23일 도청에서 남편 관을 잡고있는 사람이 자기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사실을 누차 강조하여 어필했는데도 광주법원의 광주 판사와 서울에 있는 주사파 판사들은 심복례의 주장이 "구체적이고 자세하며 모순이 없는 진실한 사실" 이라고 판결했다. 이렇게 해서 나를 2년 징역에 처하고, 광주 판사들은 3억 원의 금원을 갈취하였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속이 터져 벌써 몹쓸 병에 걸려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판사들인데, 기본이 있을텐데 이렇게 막돼먹은 인간들일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하게 사실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하늘이 돌리는 연자매의 위력을 신뢰한다. 나에게 가장 몹쓸 짓을 한 존재는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를 오래 맡았던 김양래다. 그는 내가 감옥에 온 지 5개월 만에 저세상으로 갔다. 과거에 내 눈에서 눈물을 뽑아낸 사람들 대부분이 연자매에 갈렸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그 누가 하늘의 뜻에 거역할 수 있겠는가! 나는 확신한다. 다음에 연자매에 갈려 나올 차례는 5.18일 것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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