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 256] 일본에 없는 더러운 갑질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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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6-26 07:38 조회5,8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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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 256]
일본에 없는 더러운 갑질문화
갑질은 조선문화의 유산
갑질은 조선문화가 남긴 더러운 유산이다. 기록을 보나 사극을 보나 조선인은 조그만 권한만 있어도 눈을 부라리며 갑질을 한다. 얼마 전 축협조합장 관련 여성이 남자 직원들을 폭행하던 모습, 대한항공 딸이 기내에서 부렸다는 갑질 등은 빙산의 일각이다. 직장은 대개 주차관리를 타업체에 위임한다. 주차장 관리원이 그보다 많이 배우고, 그보다 몇 배 더 높은 연봉을 받는 여성 운전자에게 꼬라지를 부리고 몽니를 부린다. 미8군 검문소에 고용된 한국인이 한국인 출입자에게만 위세를 부린다.
일본에 갑질문화가 없는 이유.
이 더러운 갑질문화는 일본에는 없다. 군벌에 의한 군국주의가 있는 반면 일본 사회 문화는 기업이 주도해 왔다. 조선은 사농공상이라는 그릇된 시각으로 인해 산업을 발아조차 되지 못하게 천대하고 탄압했지만 일본은 산업화를 매우 중시했다. 1840년 태어난 시부사와 에이치가 모든 일본기업에 '공자의 도덕율'을 강론했다. 주판은 오로지 도덕율 아래서만 두라고 했다. 여기에 1945년 직후부터 태동한 품질관리 문화가 일본 정신을 형성했다. 제품을 만드는 사람의 기분이 상하면 일본이 세계적인 품질을 만들 수 없다. 사람들은 연쇄적인 인간 접촉에 의해 기분이 전염된다. 한 사람의 기분이 상하면 여러 사람의 기분이 상하고, 이는 박테리아 번식 속도로 전염되어 일본의 품질이 저하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일본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깍듯하게 지키고, 이웃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훈육된다. 여기에 어떻게 갑질문화가 번식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일본을 무조건 욕하는 사람들이 갑질을 하고 있다. 대통령도 갑질, 한동훈도 갑질이 몸에 배어 있다. 이는 국민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중대한 이슈다.
검사출신 거목들의 갑질
자유민주주의 법을 지키게 하는 '공정한 관리자' 검사, 한과 윤은 이 분야에서 뼈가 굵고 출세했다. 한 사람은 법무장관, 또 한 사람은 대통령까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행위는 갑질이다. 갑질은 독재 영역에 속한다. 검사 생활이 독재 생활이 아닌가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 싹튼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20대 전후의 젊은 시절, 누구나 독서를 즐기고, 낭만을 꿈꾸고, 멋을 생각한다. 가슴에 험한 가시나무를 심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을 심는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사법고시 공부를 한 사람들이 검사다. 법은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성악설은 사람을 악으로 규정한다. 사람은 모두 악을 숨기고 착한 척 연기를 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소에 성공하는 것을 출세를 위한 성과쌓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검사들 사회에서는 "출산하는 것만 못할 뿐, 검사가 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이 돌 정도로 안하무인적 자세를 길러왔을 것이라는 가설도 선다. 여기까지는 가설(Assumption)이다. 그런데 이 가설을 사실로 증명해준 사람이 검찰의 두 거목, 한동훈과 윤 대통령이다.
한동훈의 갑질
한동훈의 갑질은 '허식' 인천시 시의회 의장에 대한 갑질이다. 허식 의장이 '5.18 진실'들이 32개나 담긴 호외 '특별판'을 이웃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사실 하나를 전해 듣고. "극우가 설 자리가 없게 하겠다"는 독재의 말로 한 중진 정치인의 목을 잘랐다. '허식'은 의회 의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당원권도 박탈되었다. 네로가 따로 없고 김정은의 고사포가 따로 없었다. 여기에 더해 허식을 고발까지 했다. ‘극우’의 설 자리를 철저히 파괴하자는 당권자의 조치였다. 그런데 고발장을 접수한 경찰이 5개월 만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일선 경찰의 판단에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 자유공간에서의 행위를 놓고, 국힘당 수장인 한동훈이 독재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일선 경찰의 눈에도 정당하게 비치는 행위를 놓고, 검사로 성장하여 법무장관까지 했던 사람이 ‘극우’라 손가락질하고 설 자리가 없게하라 명령한 이 사건은 그냥 흘러내리고 지나칠 내용이 아니다. 많은 분석이 필요한 사건이다.
5.18에 대해 자기와 시각이 다른 사람을 ‘극우’라 정의하고, 자기와 다른 역사관을 가진 국민은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들겠다는 한동훈의 행위도 그냥 일과성으로 지나칠 일이 아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해 그가 법무장관으로서 취한 조치는 두 가지를 의미했다. 첫째는 이승만의 건국을 부정한 조치였고 둘째는 한라산 공비와 이를 토벌한 군경을 양쪽에 놓고, 공비 편에 섰다는 입장 천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5.18에 대해 그와 다른 시각을 표현한 황상무 수석과 도태우에까지 칼을 휘둘러 그들의 대통령의 갑질 명예와 장래를 훼손했다.
대통령의 갑질
대통령 갑질의 전형은 의료분쟁이다. 아무리 의대 정원 확대가 정의라 해도 그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적 절차가 필수다. 사람을 따르는 동물에게도 갑자기 모션을 크게 쓰면 놀래서 도망을 간다. 여인을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진심을 전달하는 인내심 있는 과정이 필수다. 하물며 의료정원 하나를 빼들고 당장 연간 2천 명씩 뽑겠다 하니 어느 의사들이 수긍을 하겠는가? 의대생을 중원시키려면 교수진도 확대해야 하고 교육재료와 설비도 늘려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도 없고, 그를 위한 계획도 없다. 의료현황에 대한 설명도 없고, 무엇이 문제라는 문제 진단도 없다.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의료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청사진도 없고, 비전도 없다. 내가 의사라 해도 반발했을 것이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이는 모양 자체, 프레임 자체가 갑질이다. 1980년대의 레이건이 그의 정책을 강하게 비난했던 반대자들을 찾아가 성심껏 설명하기를 여러 번 했다는 사례와 대조해 보자. 이 역시 검사 생활에서 생리화된 독재문화, 갑질문화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간 냄새 없이 까칠한 한동훈
내가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한동훈이 자기를 인정해준 대통령의 목을 물어뜯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이 나더러 비대위원장직을 내놓으라 했다." 이 말이 선거판에서 얼마나 위험한 말이고, 대통령 입지를 얼마나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말인지 그는 다 알았다. 대통령을 물어뜯고라도 나는 출세해야겠다는 의도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이는 인간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의리를 배반하는 것으로 인간성에 관한 문제였다. 대통령, 자기를 길러준 대통령까지 물면, 그가 물어뜯지 않을 사람이 과연 존재하겠는가? 그의 얼굴에 인간 냄새가 배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까칠한 가시만 보였다.
그가 그의 파트너로 영입한 인물은 좌익의 온상인 참여연대 출신 회계사였다. 그의 언행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마리 앙투아네트! 감히 공식적 영부인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험하게 매도했다. 그러면 한동훈은 이런 그에게 공개적으로 경고를 했어야 어른답다. 그런데 한동훈은 그를 얼싸안고 띄웠다. 무언극, 팬토마임, 대통령 부부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적대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이를 보는 국민의 마음도 한동훈 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국민 눈높이? 그는 대통령, 영부인, 허식, 황상무, 도태우 등을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국민 눈높이를 잣대로 마녀사냥을 했다. 공산주의 패거리들의 생리인 인민재판을 벌인 것이다.
한동훈 포비아!
그가 비대위원장 때 그의 참모진에 영입한 인물들은 좌익계보의 출신들, 중국공산당 간부에 연결된 수상한 사람, 정치 분야나 사회 분야에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한동훈은 국민을 향해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이력을 설명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랬다면 그는 비대위를 사조직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동훈은 총선 패배에 대해 깊이 반성하지 않은 것만 같다. 염치와 도덕을 중시하는 젠틀맨이라면 그 누가 등을 떠민다 해도 자숙하는 자세를 보여야 그나마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국힘당 당수가 되겠다고 다시 나섰다. 그런 그를 누가 과연 근사한 사람이라 생각할까? 설사 그가 대표로 선출된다 해도 그 생명이 얼마나 갈까? 그가 대표가 되면 4.3과 5.18에 대해 그와 다른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은 ‘설자리’를 잃는 것이고, 빨갱이 세력이 더욱더 활개를 칠 것이다. 그가 매우 무섭다. ‘한동훈 포비아’ 시대! 과연 열릴 것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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