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문: 중국에 처녀 바친 기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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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11-03 12:08 조회5,2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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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迎恩門)
영은문(迎恩門)은 조선왕조 초엽부터 중국(명나라, 청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1896년, 독립협회가 이 문을 헐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 워낙 높고 불안정하여 끈으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 보인다. 지금은 다 헐리고 주춧돌만 2개 남아있는 데 그것이 문화재 사적 제33호로 지정돼 있다. 환향녀의 역사를 보존한 사적인 것이다.
당시 중국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청와대나 서남종족의 행패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중국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은 처녀였다. 노예신분보다는 벼슬아치의 딸들을 더 선호했다. 태종 8년(1408)이었다. 중국으로 보낼 처녀를 뽑는 자리에 평성군 조견의 딸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입을 실룩거렸다. 이조참의 김천석의 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미친 척 했고,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절름발이처럼 절룩거렸다. 이에 화가 난 중국 사신 황엄은 아버지들을 귀양 보내고 파직시켰다.
이렇게 선발된 처녀들은 영은문에서 가족을 생이별했다. 영은문 주위는 울음바다가 됐다. 조선 왕이 영은문 앞에까지 나와 처녀를 잔뜩 데려가는 중국사신을 환송했다. 이 영은문을 놓고 중국은 조선이 동방예의지국이라 했다. 청일전쟁(1894~95)이 끝난 1896년(고종32년) 영은문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독립문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 주춧돌은 '조선이 동방예의지국' 이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사적 제33호로 고이 보존돼 있다. 그 사적 33호는 문재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적일 수 있을 것이다.
사적 33호는 '화냥년'의 기념탑
끌려갔던 조선 여인들 중 일부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여성이라는 의미로 '환향녀(還鄕女)' 라 했다. 하지만 돌아온 이들은 고향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당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강제로 끌려간 여인들은 일본군위안부가 아니라 환향녀들이다. 당시의 국가가 정말로 위해 주어야 하는 여인들이 환향녀들이었다. 그런데 조선인들은 이들을 화냥년이라 멸시했다. 바람난 년이라는 뜻이다. 중국이 만들어 낸 화냥년과 빨갱이들이 만들어낸 '거룩한 일본위안부', 이 두 개의 사실을 앞에 놓고 생각해보자. 빨갱이들이 중국의 강시떼라는 사실이 드러나 보일 것이다.
헐리고 남은 영은문 주초(주춧돌)가 사적 33호로 지정
출처: https://godemn.tistory.com/219 [The one]
2019.11.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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