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삼각경제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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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10-20 10:37 조회4,2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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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일 삼각경제의 건설
(사진 생략)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체결
한일회담은 1951년 10월, 6.25전쟁이 한창일 때 시작됐다. 13년 8개월 동안 무려 1,500여 회의 크고 작은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나서야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을 출산시킬 수 있었다.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2억 달러 그리고 상업차관 3억 달러로 합의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이 꾸준히 제기해오던 ‘귀속재산’(23억 달러) 반환에 대한 청구를 바로 이 시점에서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무상으로 받은 것은 달랑 3억 달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23억 달러어치의 재산에 대해 더 이상 일본이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내용도 있는 것이다.
이 순간 저자는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이혼소송 사건을 떠올린다. 이런 사건들에서 능히 상정할 수 있는 케이스가 있다. 이름도 없고 돈도 없는 남자가 어쩌다 대재벌의 딸의 눈에 들어 결혼을 했다. 그런데 살다보니 남녀 사이에는 문화가 다르고 격이 달라 이혼을 하게 됐다. 그런데 남자가 소송을 걸었다. 함께 살았으니 재산을 듬뿍 나누어 달라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만일 그 남자가 문명인이었다면, 그렇게 했을까?
“그래요, 이혼 합시다. 이제까지 부족한 나를 선택해주어서 고마웠소. 한때나마 당신같이 훌륭한 여인을 만나 과분한 사랑을 했고, 한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데 대해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오. 그동안 부족했던 점에 대해 미안하오.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이 더 행복 했을 텐데요. 당신 덕에 난 상류사회를 접하게 됐고, 그래서 개화가 많이 됐소. 고맙소”
저자는 이것이 문명인이 보여야 할 진면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남자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조선인이었다. “야, 이 여자야, 나 순순히 못 몰러서, 내 청춘 물어내, 나 그동안 네 그늘에서 열등의식으로 살았어, 억울해, 네 돈 1,000억이지? 500억 내놔. 그리고 너는 내 영원한 웬수야”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건드려서는 안 될 골치 아픈 종자를 건드렸다 후회할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 상상의 사건이 오늘의 한일갈등을 쉽게 설명하는 패러디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 동안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자금(무상+유상=5억 달러)을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대해 ‘청구권자금백서’를 발간했다. 광공업(포항제철, 중소기업, 산업기계, 원자재도입) 분야에 55.6%인 2억7800억 달러, 사회간접자본(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 철도개량, 건설장비, 해운, 송배전, 상수도, 시외전화, 준설사업 등)에 그 18%인 9천만 달러, 농림수산업(농업용수, 농기계, 산림사업, 어선)에 그 13.2%인 6,600만 달러(13.2%)가 투입됐고, 과학기술(학교 실험자재, 해양실습선, 연구시설)에 그 4%인 2,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나머지 9.2%는 잡다한 항목들로 구성돼 있어 생략한다. 불과 5억 달러, 20년 전에 받은 23억 달러에 비하면 아주 적은 액수다. 하지만 이 5억 달러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는 없었다.
상업차관의 경우,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일본자금을 도입했지만 경영능력의 부족으로 원리금을 갚지 못하는 현상들이 발생했다. 이에 정부와 거래은행들이 해당 기업들이 갚지 못한 원리금을 대신 갚아주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정부와 은행은 국가에 폐를 끼친 이런 부실기업들의 경영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IMF 외환위기 시절 김대중이 공적자금을 제공해 준 대신, 빅딜과 워크아웃을 강요했던 사실들과 같은 맥락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한국기업들은 도둑놈 심보를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런 기업들이 없으면 일자라도 없고 세금도 걷히지 않는다.
그래서 박정희는 이런 기업이라도 살려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1972년 8월 3일, 상상을 뛰어넘는 긴급조치를 단행했다. 이른바 ‘8.3긴급경제조치’였다. 신용이 부족하여 은행을 상대할 수 없는 기업들이 지하 고리사채업자들로부터 자금을 빌려 썼다. 경영실력도 미천한 데다 고액의 이자를 갚자니 줄줄이 도산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정부는 기업들이 무더기로 살처분되는 이런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 없었다. 이에 박정희는 고리사채에 대한 원리금상환을 강제로 동결시켰다. 지하의 고리사체업자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이는 기업을 살리기 위한 박정희의 고육지책이었다.
8.3긴급경제조치 (1972년 8월 3일)
하지만 이 조치는 어디까지나 언 발에 오줌을 누는 식의 임시변통에 불과했다. 정부는 근원적인 대안을 생각해 내야 했다. 기업으로 하여금 외자(차관)를 도입케 하는 방법을 정지시키고, 외국기업이 직접 한국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외국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수십 개 지역에 공단을 조성하고, 수출자유지역을 설치하고, 수출확대 분위기를 조성하고, 경공업체제를 중화학공업 체제로 전환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아울러 박정희 정부는 국산화에 열을 올렸다. 국산화는 말이 국산화이지 조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까운 나라 일본으로부터 소재, 부품, 장치, 기술을 수입하고 그것들을 조립하여 미국이 열어주는 넓은 시장에 내다 파는 통과경제 체제를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조립생산 기반을 조성하는 데에도 수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필요로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외국에 나가 활동하는 한국의 두뇌들을 유치하여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해주고, 자주 만나 대화하며 업체에 대한 기술 지도를 열심히 해달라고 격려했다. 유치된 과학자 기술자들은 선진국에서 받는 높은 대우를 포기하고 고국의 산업화에 헌신했다. 과로로 숨진 학자들이 여러 명 있었다.
일본자금에 의존한 대표적인 투자사업
1) 포항종합제철공장 건설: 종합제철공장은 ‘산업의 핵’이다. 이것을 갖는 것은 당시 국가의 로망이었다. 이를 위해 외자조달처를 확보하느라 백방 노력했지만 엽전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에 투자를 결심할 나라는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들이 투자전망이 어둡다는 이유로 참여를 기피했다. 결국 일본만이 답이었다. 청구권자금 1억 2천만 달러를 투입하여 103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기로 일본과 합의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은 그냥 박정희에게 마음대로 알아서 쓰라고 내 준 돈이 아니었다. 그 돈이 조선백성에 반드시 도움이 되도록 감시하고 통제했다. 그래서 일본은 합의만 해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기술을 지원했고, 소재와 부품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그 결과 1973년 7월, 100만 톤 이상의 규모를 갖는 제철공장을 비로소 갖게 됐다.
포항제철을 그토록 탐내던 중국 등소평의 일화가 있다. 1978년 8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등소평이 동경 부근의 ‘기미쓰’라는 제철 공장 하나를 찾았다. 일본 철강의 총회장 이나야마 회장이 그를 안내했다. 등소평은 일본이 중국에 경제지원을 한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며 마지막으로 “포항제철과 똑같은 공장을 중국에도 세워줄 수 없겠는가?”라는 간청이었다. 이에 이나야마 회장이 답했다. “포항제철은 돈 기술로만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박태준이라는 특출한 인물이 이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는 아직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습니다.” 중국은 1992년 10월 박태준을 초대했다. 요청을 받자 박태준은 기꺼이 중국에 갔다. 국빈급 환대를 받은 그는 중국에 포항제철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 해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김영삼이 부탁한 선거대책본부장을 박태준이 거절했기 때문에 김영삼이 박태준을 감옥에 잡아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2) 경부고속도로 건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지휘하던 박정희는 경제성장으로 인해 늘어나는 물동량을 생각했다. 그 대안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었다. 1967년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세운 후 소요자금 조달에 나섰다. 세계은행(IBRD) 등 국제기구를 접촉해보았지만 실패했다. 미국을 위시한 다른 선진국들도 등을 돌렸다. 이 역시 일본만이 답이었다. 청구권자금 690만 달러를 투입하는 데 일본의 동의를 끌어냈다. 공사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해 불철주야로 진행됐다. 1968년 12월에 우선 서울과 수원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었고, 이어서 서울과 대전 사이가 뚫렸다. 그리고 1970년 6월 27일 밤 11시, 당제터널 남쪽 공구에서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대의 난공사요 마의 구간으로 불리던 당제터널 공사가 완료됨으로써, 명실 공히 428km에 이르는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완전 개통됐다. 소백산맥을 뚫는 당제터널 공사는 수많은 낙반사고와 용수 분출로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결국 경부고속도로 428km는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2년 5개월 만인 1970년 6월 27일에 준공됐다.
다시 한 번 회고해 보자. 당시에는 고속도로를 건설할 자본도 없었고, 기술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공사를 하지 못하게 공사바닥에 드러누웠고, 자금지원 요청을 거부했던 세계은행까지도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최단 시일 내에 완공됐다. 추풍령에 있는 고속도로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재원과 우리나라 기술과 우리나라 사람의 힘으로 세계 고속도로 건설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길.” 2년 5개월 만에 경부고속도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역사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것은 피와 땀과 열정이었다. 연인원 892만 8천명이 동원되었고 총 공사비는 429억 7천만 원이었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개통식 세 시간 전까지도 도로 도색작업을 하는 치열한 속도전이 이어졌다. 경부고속도 건설은 '전투'였다. 총 77명이 순직했다. 그 77명을 기리기 위해 매년 7월 7일에는 위령제가 열린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3) 소양강다목적댐 건설: 이 소양강댐 건설 역시 박정희의 로망이었다. 이 역시 오로지 일본 자금만이 답이었다. 이 공사는 1967년 4월 ~ 1973년 10월까지 6년 이상에 걸쳐 건설된 대규모 토목사업이었다. 여기에는 일본 청구권 유상지금 2,150만 달러가 투입됐다. 담수량 29억 톤, 아시아에서는 최대 규모이고 세계에서는 4번째로 큰 댐이다. 수력발전 용량은 20만KW. 여기에서 개발된 기술은 그 후 건설되는 충주댐(27.5억 톤), 안동댐, 대청댐, 평화의 댐(26.3억 톤) 등에도 적용되어 한국은 일약 댐건설 선진 기술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2019.10.2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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