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위안부가 나이팅게일보다 더 고고하다 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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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10-24 05:31 조회4,1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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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위안부가 나이팅게일보다 더 고고하다 말해야
(사진 생략)
한국에서는 일본군위안부라는 주제가 성역이다. 위안부 출신 여성에 대해서는 깍듯이 ‘위안부할머니’라 불러야 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은 양반집 가정에서 곱게 자라던 규수였다고 말해야 한다. 반듯한 규수들이 야수 같은 일본헌병들에 연행당해 겁에 질려 질질 끌려갔다고 말해야 한다. 일본군 위안소에서는 매일 같이 수십 명씩 달려드는 야수 같은 일본군으로부터 성폭행 당하느라 녹초가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학대당하고 조롱당하고 화대도 받지 못한 성노예였다고 말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금수만도 못한 쪽발이 야만인들이라고 말해야 한다. 조선의 처녀들이 자발적으로 가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말하면 쇠고랑을 차야 한다.
위안부의 권익과 명예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역시 성역화 된 존재다. 정신대와 위안부는 성격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런데도 일부 좌익성향의 여성들이 1990년 11월 16일 일본군 위안부의 명예와 여성인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위안부를 정신대로 착각하고 지은 이름이다. 이 단체의 명칭은 ‘위안부문제대책협의회’라 정했어야 했다. 이 단체의 여인들은 엉터리로 지은 이 단체명을 국내외에 크게 내걸고 근 30년 동안 국가이익과 상충되는 불온한 활동을 해왔다. 그리고 이 단체는 한국사회에서 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사실상 배타적으로 독점해 왔다. 위안부에 대해 자기들 뜻에 맞지 않는 말을 한 사람이면 언론인이든 학자든 상관없이 즉시 나서서 반격하고 소송을 해왔다.
정대협은 2018년 7월 16일, 비교적 조용하게 단체 이름을 ‘정의기억연대’로 바꾸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1년 이상이 지나도록 새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단체의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정대협이라는 이름이 악명(Notorious)을 떨쳤기 때문일 것이다. 정대협은 많은 국민들로부터 ‘위안부를 앵벌이삼아 반일-반미-반국가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고 이때마다 정대협은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해 소송을 제기했다. 지금 현재 한국의 사법부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판사들은 대부분 좌익이다. 많은 판사들이 좌익 실세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정대협이 걸면 다 걸린다‘는 유행어가 회자돼 왔다. 이러한 악명 때문에 정대협 간부들은 그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기가 창피했을 것이다. 그래서 듣기에도 애매하고, 위안부와 별 상관성이 없는 ’정의기억연대‘로 바꾸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대협이라는 풀 네임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체명은 정신대를 위안부로 착각하고 지은 이름이다.
위안부라는 명칭은 반일 반국가 활동의 도구로 이용당해
‘위안부’라는 존재는 이 땅의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위안부를 앞세워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대협’ 역시 같은 존재다. 이 두 개의 존재가 신성불가침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두 존재가 한국에 반일정서를 유지-확장하는 데 결정적인 주역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정대협이 위안부라는 존재를 이용하여 반일감정을 선동해오고 있다는 뜻이다. 정대협은 북한 및 간첩출신들과 많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으며, 남한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좌익세력으로부터 적극적인 비호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정대협의 영향력으로 인해 한국사회는 위안부를 감히 매춘부 클래스로 분류하는 것조차 금지돼 있다. 지난 9월 19일 연세대 류석춘 교수는 강단에서 50명 정도의 학생들에게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 이라는 표현을 했다가 마녀사냥을 당해 강단에서 퇴출됨과 동시에 정대협을 위시한 사회단체들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같은 취지의 연구결과를 “반일종족주의”라는 두꺼운 책을 통해 발표한 전 서울대 교수 이영훈도 집단 마녀사냥과 함께 소송을 당했다. 인터넷 신문인 ‘미디어 워치’ 간부들, 주옥순 엄마방송 대표, 조우석 전 KBS 이사 등 실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취지의 표현으로 인해 소송을 당했다. 물론 저자는 더 많이 당했다. 이처럼 광주5.18과 위안부와 정대협은 누구도 비판해서는 안 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돼 있는 것이다.
공론의 장에 서는 사람은 위안부라는 주제에 대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위안부할머니들은 꽃잎 같은 청춘을 야수와 같은 일본군병들에게 짓밟힌 가련한 존재였다’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울먹이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위안부가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위안부가 일본군 병사에 성을 제공한 것은 오로지 강제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성스러운 여인들에 옷을 벗고 달려든 일본군 병사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한 귀축 같은 존재였다고 말해야 한다. 위안부는 나무 등걸이었고, 그래서 제발 살려 달라 소리치고 호소했는데 일본 놈들이 짐승처럼 달려들어 온몸을 걸레처럼 찢어놓았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한다. 이제까지 한국의 유수한 남녀들이 이렇게 연기하면서 존경받는 지식인으로 우뚝 서고자 했다. 위안부들이 받았던 고통은 조선 사람들 전체가 받는 고통이었고, 위안부야 말로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진 거룩한 나이팅게일이었다고 울면서 웅변해야 했다. 누가 이렇게 더럽고 유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는가? 두 말할 나위 없이 지금 남한을 독점한 종북주의자들이다.
1940년을 전후해 위안부를 모집하는 신문광고가 여럿 발견된다. 빨갱이들 주장대로 ‘강제로 잡아간 것’이 아니라 신문광고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모집해 간 것이다. 신문광고를 보고 간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이다. 자발적으로 간 여성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대협에 협조하는 수많은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된 과정을 증언했다. 자발적으로도 갔고, 부모에 팔려서도 갔고, 인신매매단에 속아서도 갔다. 적어도 이 증언들은 모든 위안부가 다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력히 증명한다.
재기 넘친 위안부 문옥주
빨갱이들은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숫자가 20만 명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위안부는 1937년 일중전쟁으로부터 시작되어 8년 동안만 존재했으며, 1945년 8월 15일까지 많아야 연 인원 3,500 명 정도라고 한다. 일본군위안부 중, 숫자가 가장 많은 존재는 일본여성이었고, 그 다음이 중국여성, 또 그 다음으로는 조선여성을 포함한 10개국에 이르는 피점령국 여성들의 순이라 한다. 그런데 빨갱이들은 일본군위안부는 오로지 조선여성으로만 채워져 있고 그 숫자가 20만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무관심한 한국인들은 이 거짓말을 사실로 믿는다.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위안부에 대한 키워드는 1) 강제연행, 2) 무리한 성폭행 3) 조롱과 학대 4) 대가없는 착취 등이다. 그러나 연구들에 의하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위안부 중 유명한 한 사람인 문옥주의 경우를 보자. 그녀는 일본과 한국에서 일종의 자서전을 냈다. 1996년에는 일본어판을 냈고, 2005년에는 한국어판을 냈다. 제목은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아래는 그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문옥주는 1924년 대구 대명동에서 출생하여 12세에 일본으로 팔려가 17세가 될 때까지 요정 등에서 심부름을 했다. 당시 일본은 기율이 엄격해 17세 미만의 여아들을 성접대 현장에 내보내는 것을 금했다. 17세가 되어서야 문옥주는 비로소 ‘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받고 버마 유곽으로 갈 수 있었다. 기생이 되려면 ‘권번’ 즉 기생협회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1942년 7월 그녀는 대구여성 일행 20명 중의 일원으로 부산-사이공-싱가포르를 거쳐 버마의 랑군에 갔고, 랑군 주재 일본군 방패사단 장병들의 파트너 개념으로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상냥하고 남을 잘 배려하고 노래를 잘해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가족을 떠나 언제 죽을지 몰라 슬퍼하는 일본군 병사들을 매우 가엽게 여겨 감싸주었고, 그래서 성행위 이외에도 노래도 불러주고 친구처럼 따뜻한 언행으로 위로해 주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다가 일본군 병사 ‘야마다 이치로’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 사랑이 너무나 깊어 그와 헤어진 지 51년 후인 1993년에도 그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그녀와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대구 여성들 거의 모두가 일본 병사를 애인으로 갖고 있었고, 그 중 한 여인 ‘히토미’는 일본군 병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아이를 잉태한 채 귀국해, 대구에서 귀하게 키웠다고 한다.
문옥주는 한마디로 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노래 솜씨가 출중하고 사교적이고 배려심이 깊어 그 부대 장병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그 결과 팁을 많이 받아 악어백도 사고, 다이아몬드도 사고 화려한 레인코트도 사는 등 쇼핑을 즐겼다고 한다. 버마 위안부들은 일본군으로부터 규정돼 있는 화대를 받았고, 그 이외에도 두툼한 팁까지 받은 것이다. 특히 문옥주는 20세로부터 22세까지 불과 2년 만에 31,000엔 이상을 벌어가지고 고향인 대구에 돌아와 가세를 일으켜 세웠고, 그 돈으로 사업을 하여 22세로부터 또 다른 28년 동안 대구 화류계의 신데렐라가 되어 생을 즐겼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최소한 버마 위안부들은 나무 등걸도 아니었고, 조선인 일반의 고통을 대신한 나이팅게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녀는 일제라는 풍성한 물을 만난 생동감 넘치는 물고기였을지 모른다. 이영훈 교수 등이 저작한 ‘반일종족주의’에 의하면 방패사단의 위안소 운영에는 기율이 있었고, 화대표가 있었다.
문옥주는 그가 손에 쥔 31,000엔과 다이어 반지 악어백 등의 사치품 말고도 일본 본토 우체국에 50,108 엔에 해당하는 저축을 따로 했다. 그녀가 이 돈을 인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대와 팁을 합한 금액이 80,000여 엔이었던 것으로 집계된다.
위안소 준수사항
1) 이용 시 연대본부가 발생한 허가증을 영업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2) 위안소 내에서는 음식을 들일 수 없다.
3) 위안부 및 영업자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4) 이용시간을 엄수하고 타인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5) 영업자 기타 위안부 여급 등에 대한 일체의 대차 관계를 엄금한다.
6) 위안부들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한다
이용시간과 요금
1) 병은 10시부터 17시까지, 30분에 1원, 1시간에 2원.
2) 하사관은 17시부터 22시까지, 30분에 1원 20전, 1시간에 2원 40전
3) 준사관 이상은 22시부터, 1시간 3원, 24시 이후는 10원.
4) 사쿠(콘돔)는 영업자가 부담한다.
5) 황군 이외의 자는 접객을 금한다.
6) 영업자는 매월 초 5일까지 위안부별 영업 상황을 보고한다.
일본군 당국은 위안부와 일본군병을 보호하기 위해 위안부들에 대한 건강검진을 했다. 이는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과학적 행정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각 여성의 이름을 대외적으로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누구는 월경이라 접촉을 금하고 누구는 임질병이 걸려 접촉하면 안 된다는 등의 구체적 내용을 각 위안소에 통보해주었다. 이를 놓고 비난하면 그 비난 자들은 오로지 비난을 위해 태어난 종족들일 것이다.
문옥주는 하루에 30~40원을, 때로는 그 2배를 넘는 70~80원을 벌기도 했다. 이는 당시 위안부들이 요금표대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넉넉한 팁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대구 화류계의 프리마돈나가 된 그녀는 차례로 남성들과 동거를 하기도 하고 복잡한 인연으로 재산을 탕진한 상태에 있다가 정대협 측의 강력한 권유로 위안부 등록을 하게 되었다한다. 그가 그녀의 과거를 공개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와 인연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창피하다며 그녀로부터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한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에는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소정희 교수의 논문이 실렸고, 여기에 문필기, 이득남, 이상옥, 김옥실, 배족간, 송신도의 증언들이 소개돼 있다. 이 6명의 위안부들은 견디기 어려운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하여 신여성의 꿈을 선동하는 브로커들에 속아 위안부로 간 케이스에 해당한다. 아래 신문에는 돈에 눈이 먼 아버지가 1,300원 받고 딸을 위안부로 팔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조시대의 아버지는 딸을 노예로 생각했기에 딸을 죽이는 일도 다반사, 인신매매 단을 통해 중국이나 일본에 팔아넘기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프랑스 선교사 ‘샤를 들레’가 말했다 “조선의 굶주린 주민들은 중국의 밀수업자들에게 자신들의 어린 딸들을 한사람 당 쌀 한말에 팔았다.”
1) 문필기: 정대협이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고, 1992년 6월에 위안부로 공식 등록했다. 그녀는 1925년, 2남 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 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일을 할 때마다 밥을 지어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상옥: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키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 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케이스였다.
3) 이득남: 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떨어진 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 새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버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 공장으로 뛰쳐나갔다. 거기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이 위안부는 1922년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일제하 여성의 삶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2부(2006)에는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가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오사카산업대학 후지나가다케시 교수, 미 시카고대학 최경희 교수,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 교수, 이 3인의 글이 방대한 분량의 논문으로 실려 있다. 이 세 편의 논문을 보면 빨갱이들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가를 낱낱이 알 수 있다. 아울러 논문이 인용한 근거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들의 조사가 매우 많은 반면 한국인들의 조사가 매우 빈약하다. 국내학자들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정대협은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수많은 국제인들에게 망신스러운 결과만 초래했다는 게 이들 자료에 시사돼 있다.
식민통치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됨에 따라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신문에 연재되었다.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들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청춘남녀의 로망인 연애과정을 아름답게 그려낸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도 나왔다.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가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잇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그 중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는 경로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열려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가정의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은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단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다.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위안부를 모집하는 광고들이 자주 있었다. 강제로 체포해간 것이 아니라 광고를 내서 희망자들을 모집해 간 것이다. 위안부들 중에는 아버지에 의해 팔려온 이들도 꽤 있었다.
2019.10.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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