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여성 매춘의 발원지 상해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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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9-24 14:56 조회4,23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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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성 매춘의 발원지 상해위안부
“메이지 원년(1868년)부터 메이지 14-15년(1881-1882) 무렵까지 상해 주재 일본인 수는 10-100명이 고작이었으며 1년에 평균 5-6명씩 증가했다. 대개 남자 3분1, 여자 3분의 2였다. 여성의 6-7할은 외국인을 상대로 매춘을 했다. 이들이 일본 매춘의 선구자일지 모른다. 모리사키 가즈에 저서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15(1882)에 상해에 800명의 매춘부가 있었다고 적시했다. “일본 아가씨들이 금새 늘어난 상해에서는 영사관이 이를 국가의 수치로 간주하고 붙잡아 500-600명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래도 여전히 200명 정도는 숨어 있었다”
일본군 위안소의 원조, 상해위안소
1. 오키나와에 거주한 조선인 전 위안부의 증언을 기록한 르포르타주 등 십여 권의 책들이 일본에서 발행됐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 충격을 준 것은 1991년 8월부터 위안부들이 잇따라 자기 존재를 밝히기 시작했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한 소송을 전개한 일로부터 시작됐다. 자료상 확인된 바에 의하면 1932년 상해 위안소가 가장 먼저 나타났다. 중일전쟁 개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위안부 수가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상해 위안소는 타 지역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해 위안소 환경을 연구하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상해에는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 매춘여성(가라유키상)이 해외로 나간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1880년대부터 가라유키상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이는 공창제도의 도입을 의미했다. 공창제도의 설치 동기는 1)강간방지, 2)군의 사기앙양 3)성병예방 4)방첩이었다. 당시 상해에서의 조선인 여성 실태는 이러했다. 상해에서 조선인 여성 댄서가 출현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도 출현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창도 있었다. 이들은 신흥접객부로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했다. 이러한 여성들은 불경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1932년 3월 14자 상해 파견군 고급참모 오카베 나오자부로의 일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는 추잡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다. 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렇게 회상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 안의 창설자다. 쇼와7년(1932)의 상하이 사변 때 두 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으므로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그곳 해군을 본떠 나가시키 현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러들였다. 그 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기뻤다”
위안부의 발상지 상해에서 일본군이 개설했던 위안부는 1)군직영위안소 2)군이 감독-통제하는 군전용위안소 3)민간매춘소를 병사용으로 지정한 곳(민간, 군 공용) 4) 순수한 민간 전용 위안소(군이 다니더라도 그건 개인적인 일)였고, 제4번째 위안소는 일본군 위안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상해 주재 일본군 사령부가 공창 즉 일본군위안소 설치를 결심했던 1932년 당시, 상해의 일본인의 풍속영업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요릿집 3개소, 음식점 72, 다방 13, 해군위안소 17, 구락부 2, 무도장 1, 예기 134, 무도녀 170, 작부 166.
1936년 당시 상해에는 조선인 여성 댄서가 37명, 이들은 풍속을 혼란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카페 등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급은 48명,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밀매음을 하여 주인과 반반씩 나누었다. 이 무렵 상해에는 290명의 조선여성들이 사창가에 존재했다. 사창이란 공창으로 인정받지 못한 곳이었다. 1936년에만 해도 조선여성은 일본군이 운영하는 공창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일전쟁 중기인 1940년 무렵부터 주로 일본여성과 중국여성들이 대규모로 일본군위안부 대열에 모여들었고, 중일전쟁이 전면화 되면서 위안소가 대량으로 개설되었다. 일본군위안소는 일본군이 직접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경영자들이 일본군의 사업허가를 받고, 일본군이 정한 규칙을 준수하면서 접객영업을 하는 위안사업체들이었다. 이러한 일본군 공창 시스템에 들어온 위안소 경영자 중에는 조선인 이름이 꽤 있었다. 여기에 비로소 인신매매 단이 모집해온 20~30명 단위의 조선여성들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조선여성이 위안부의 모태인 상해의 공창 위안소에 눈에 띄게 합류한 시점은 1941년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2019.9.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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