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모든 여성이 양반의 대가 없는 성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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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9-24 15:04 조회9,6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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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모든 여성이 양반의 대가 없는 성노예
아래는 구한말 조선시대의 여성과 양반의 모습이다. 나이 9~10세 정도의 아이에게 기생복장을 입혀 4인의 양반들이 술시중을 받고 있다. 그 다음의 사진들은 조선여인들이 성적인 수치심 없이 가슴을 드러내놓고 생활하는 모습이다.
조선시대에는 먹을 것이 없어 아이를 낳아 여식이면 곧바로 엎어 죽였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산골 등 못사는 곳들에서는 1950년대 초에도 이런 현상들이 비일비재했다. 1392년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세운 그 시점의 조선은 9% 정도의 양반과 91% 정도의 노예-노비, 천민(백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려의 왕실과 충신들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조선왕조 500년이 계속되면서 양반의 지위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양반이 30% 정도로 늘어났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70% 이상은 노예가 되었다. 여성노예는 남성노예의 또 다른 노예였다. 1660년대를 바라본 네델란드 하멜은 세도가의 양반이 2,000~3,000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썼다. 노비신분으로 있는 모든 여자들은 양반의 재산이었고, 양반은 그의 육체적 능력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선택해 아이를 낳게 했으며 그 아이들은 모두 양반의 자식이 아니라 새끼 노예가 되었다. 양반은 어느 아이가 자기가 낳은 아이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홍길동처럼 노비 여인이 낳은 자식은 양반 아버지를 아버지라 감히 부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노비 남녀 사이에 싹트는 사랑을 양반이 다 감시할 수는 없었다. 들키는 여자에 대해서는 가혹한 고문을 하여 죽였다. 이러하기 때문에 양반은 물론 임금에도 매독이 걸리고, 그 매독이 악화되면 문둥병이 되었다. 잠시 참고의 말을 곁 드리자면 임금들의 80%가 매독과 문둥병으로 사망했다는 통설이 있다. 필자 자신이 어렸을 때 어른들이 일러주는 말이 있었다. 진달래꽃이 소복한 곳에 가면 문둥이가 숨었다가 간을 빼 먹으니까 절대로 가지 말라는 말이었다. 조선시대로부터 문둥병을 고치려면 산 사람의 간을 먹어야 한다는 신앙이 전래했던 것이다. 매독을 피하기 위해 왕실은 세자가 간택되면 곧바로 어린 소녀와 결혼을 시키지만, 왕실이라는 꽃밭에 널려 있는 아름다운 궁녀들은 다 왕의 선택 대상이었다. 왕의 눈에 들 정도의 궁녀이면 이미 다른 남자들과 접촉을 한 여인이기 때문에 매독이 걸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년 8월 20일 ~ 1692년 2월 12일)은 네델란드인으로 1653년 제주도에 표류해 그 후 1666년까지 13년 동안 주로 전남지역에 살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썼고, 이는 서구 사회의 이상한 나라 풍경으로 널리 소개됐다. “조선남자는 이미 아이를 몇 낳은 아내라도 내보내고 다른 여자를 아내로 취할 수 있다. 처첩을 몇이라도 떳떳하게 거느릴 수 있다. 자기 여인을 여종처럼 취급하다 버리면 아이들까지 내버린다. 양반들은 토지와 노예에 의해 수입을 얻는다. 개중에는 2,000~3,000명의 노예를 소유한 사람도 있다. 한 여인이 남편을 죽였다. 관아에서는 이 여인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한길 가에다가 어깨까지 파묻었다. 그 여자 옆에는 나무 톱을 놓아두었는데 이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 번씩 그녀가 죽을 때까지 목을 잘라야 한다.”
윌리엄 그리피스 (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여자들은 항상 규방에 감금되다시피 되며, 바깥주인의 허락 없이는 거리에 못나간다. 이러한 율법은 너무도 준엄해서 경우에 따라서는 아버지가 그의 딸을 죽였고, 남편이 아내를 죽였다.”
프랑스 선교사 ‘샤를 들레’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굶주린 주민들은 중국의 밀수업자들에게 자신들의 어린 딸들을 한사람 당 쌀 한말에 팔았다.”
연세대를 창설한 언더우드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않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질병, 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수줍음 때문에 눈빛은 흐릿하고 얼굴은 까칠해졌으며 상처투성이었다. 25살을 넘은 여자들에게는 도저히 아름다움을 찾을 수가 없었다. 궁중의 나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선교사 ‘알렌’은 이렇게 말했다. “평양 길을 태연히 오가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헝클어진 머리에 위통을 벗었다”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아주 비열한 관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결혼을 한 후 3일 동안은 부인과 산다. 그런 후에는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다. 자기 첩들하고만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엾은 본부인에게는 정절을 강요한다. 만약 그녀가 도망가거나 정절을 버리면 관리에게 데리고 간다. 그러면 관리는 그녀를 매질한 후 자기 종에게 줘버린다. 양반의 부인들은 평소 혼자서 집 밖으로 외출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프랑스의 선교사 ‘다블뤼의 보고서’는 이렇게 썼다. “조선인들은 당사자의 의견은 아무 상관없이 부모 마음대로 결혼을 시킨다. 그래서 도망가는 여자가 많다.”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선의 여인들은 100%가 다 아무런 대가 없이 양반을 위해 일하는 일-노예였고, 양반에 성을 바치는 성-노예였다. 문옥주를 비롯한 20명의 대구 여성들은 일본군 병사들과 사랑을 나눴다. 화대를 받고 팁까지 받아 그 돈으로 고국에 돌아와 가세를 확장시켰지만 바로 그 시간대의 조선 양반들은 조선여성을 일하는 일-노예로, 성을 바치는 성-노예로 마구 써먹으면서도 화대는커녕 학대만 일삼았다. 최근 ‘갑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외국노동자들에게는 갑질을 넘어 히스테릭한 학대까지 가하고 있다. 이런 갑질은 조선인의 DNA일 것이다. 만일 이런 갑질 DNA를 가진 조선과 일본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면 아마 일본인들은 36년 동안 씨까지 다 말랐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였고 욕한다. 제국주의의 상징인 욱일기를 증오한다. 저자는 상상해 본다. 만일 한국에, 1894~95년의 청일전쟁의 1904~05년의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중국을 포함해 동남아 국가들까지 포함해 12개의 나라를 정복한 역사가 있고, 항공모함과 전투기를 제작해 감히 미국을 상대로 4년 동안이나 자웅을 겨루는 전쟁을 했던 역사가 있다면 아마도 많은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줄곧 이러한 마초(Macho, 남성다운) 역사를 내세우면서 민족의 우월성을 노래하고 지구촌 사람들의 눈꼴을 시게 할 정도로 자랑하고 있을 것이다.
1937년 이후의 일본군 병사들로부터 대우 받던 조선위안부 여성들과 당시 조선양반들로부터 학대당한 토박이 조선여성들 그리고 가족들로부터도 짐승처럼 학대당했던 토박이 조선여성들을 비교해보자. 상냥한 위안부 여성들 그리고 이들과의 사랑에 빠졌던 일본군 병사들을 한 세트로 엮어 좌측 접시에 올리고, 무지막지한 양반들과 이들로부터 노예취급을 당했던 조선여상들을 또 한 세트로 묶어 우측 접시에 놓고 저울로 달아 보자. 어느 쪽이 문명이고 어느 쪽이 야만인가?
2019.9.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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