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제115화 레임덕 넘어 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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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9-25 22:13 조회4,7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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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 제115화 레임덕 넘어 퇴물
https://www.youtube.com/watch?v=5Ah0BlDsA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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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레임덕 넘어 퇴물
9월 24일 문제인 유엔총회 기조연설 내용
1) 판문점과 개성을 잇는 지역을 평화협력 지구로 지정해 남과 북, 국제사회가 함께 한반도 번영을 설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내겠다
2) 남북 경제협력이 평화 굳건히 할 것
3) 2032년 하계올림픽 남북 공동 유치 의사를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에게 전달.
4) 트럼프의 문재인에 대한 평가 – 못 말리는 세작
추정되는 트럼프의 계획
1) 문재인에 바가지 씌워 대선 점수 확보할 것
2) 서명을 득한 후 문재인의 반역행위에 대해 책임 물을 것
3) 문재인 파괴는 김정은 파괴를 위한 주춧돌
추정되는 조국과 문재인의 국내 운명
1) 조국은 감옥행 가능성 매우 농후-조국이 이기면 윤석열 숙청
2) 조국만 잡고 문재인 살면 문재인이 윤석열 숙청
3) 전쟁은 윤석열과 문재인과의 결투
4) 민주당 붕괴가 문재인 운명 가속화
마루노우치(도쿄 도 지요다 구에 있는 비즈니스 거리이자 상업 지구).
https://www.youtube.com/watch?v=Qndcio-NjYY
100년전 일본의 역(정거장) 모습
https://www.youtube.com/watch?v=oQEBzwx9k7Y
1930년대 동경
https://www.youtube.com/watch?v=95W1-SkOzt0
明治33年 동경의 풍경(1901)
https://www.youtube.com/watch?v=-izCFtIO42Y
明治25年頃 東京の風景(1893)
https://www.youtube.com/watch?v=n3RAQF04NhE
1940年末日本東京街景
https://www.youtube.com/watch?v=FVM6KCaioQ4
大正7年 東京の風景 ~1918 Tokyo Japan~
https://www.youtube.com/watch?v=PxFwDaR8lT8
동시대의 조선-일본 비교
https://www.youtube.com/watch?v=hGUXiyW6BAk
02-595-2563
https://www.youtube.com/watch?v=95W1-SkOzt0
https://www.youtube.com/watch?v=FVM6KCaioQ4
부산
https://www.youtube.com/watch?v=KCS0fWugydg
https://www.youtube.com/watch?v=KCS0fWugydg
https://www.youtube.com/watch?v=j3nSiadhH-k
왜구에 대한 상식
위키백과에 의하면 고려조는 서기 918년부터 이성계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존속해 왔다. 고려말기인 1223년부터 1292년까지 169년 동안 왜구로부터 529회의 침략이 있었다. 왜구의 규모는 100~500척 규모의 선단을 이루어 고려의 군사력이 미치지 못하는 변방들을 들락거렸다. 조선왕조시록에도 312건의 왜구 침입이 기록돼 있다. 이들 왜구들은 변방에 현지처를 두고 일본으로부터 물자들을 가져다 지역민들에 나누어주면서 인심을 얻었고, 조세를 걷어 한성으로 올라가는 쌀과 물자를 노략하는 일종의 해적 같은 존재였다.
특히 이조시대에는 왜구들에 대한 통제력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고려의 공직자들과 그 수족들 기족 모두가 조선의 노예가 되었다. 노예는 이름도 없고 성도 없었으며 당나귀나 소처럼 숫자로만 표현됐다. 당나귀 가격의 30%나 50% 값에 거래되었고, 공을 세운 공신에게 하사하는 상품이었다. 이런 노예숫자가 조선인의 90%가 넘었다. 양반만 사람이었고 노예는 부려먹고 수탈해 먹는 대상이었다. 여자노예는 남자노예의 또 다른 노예였고, 양반이 여자 노예를 통해 아이들을 낳으면 그 아이들 역시 노예가 되었다. 따라서 양반은 어미도 임신을 시키고 자기가 낳은 딸 노예도 임신시키는 근친상간의 짐승 같은 존재였다. 노예들은 양반 전체에 대해 적개심을 가졌고, 양반은 노예 뜯어먹는 재미에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없었고, 국가라는 것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 나라를 지키려면 수많은 장정들이 무기를 가지고 훈련을 해야 하는데 조선에는 훈련도 철제 무기도 없었다. 임진란 때만 해도 무기라 해야 호미로 만든 칼 정도였고, 동원된 노비들은 조총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다.
임진왜란의 진상
임진왜란은 선조로 대표된다. 선조시대를 그린 기록 중 장비록은 드라마를 통해 극히 일부라도 알려졌지만 그와 쌍벽을 이룬다는 ‘쇄미록’은 아직도 일반에게는 묻혀져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동안 피난길에 올라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면서 9년 3개월간의 일상을 기록했다. 이 피란일기가 쇄미록이며 총 7책으로 구성돼 있다. 1594년 4월 3일 작성한 일기에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폐해진 사회상이 묘사돼 있다. “그윽히 들으니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가지고 씹어 먹는다 하기에 항상 상서롭지 못하다고 했더니, 이제 다시 들으니 서울근처에서 전일에는 비록 한 두 되의 쌀을 가진 자라도 죽이고 빼앗는데, 근일에는 사람이 혼자 가면 쫓아가서라도 죽여 놓고 먹는다.”
선조실록 25년 5월 4일 기록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왜군이 쳐들어왔는데, 아랫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줘서 걱정이다. 아예 대놓고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들도 적지 않았으니 당시 선조는 윤두수(원균 편)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왜군의 절반이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선조는 “내부(內附·요동에 가서 붙는 것) 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거듭하여 만주로 도망갈 의사를 밝혔으니 유성룡이 극구 말렸다는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의병장 강항이 쓴 "간양록"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적선 6,7척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각 배에는 조선인과 왜병이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1607년, 1617년, 1624년에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겠다는 취지로 '쇄환사(刷還使)'를 파견했다. 쇄환사는 6,000명 가량을 조선땅으로 데리고 돌아왔으나, 이는 전체 포로 숫자의 10%도 안 되는 숫자였다. 조선인들 스스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던 것도 커다란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 20년이 지나 이미 일본 땅에서 정착해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는 오히려 거부감만 들었던 것이다.”
1617년(광해군 7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부상록'이라는 문서를 통해 놀라움을 전했다. "돌아가자고 하면 얼른 따라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당최 나서려 하질 않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중에서 양반의 수는 10% 남짓으로 적었고 나머지는 조선으로 돌아가도 다시 천대받는 노비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당시 일본 통신사로 간 강홍중의 '동사록'에서도 나온다. "일본에 붙잡혀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맨손으로 왔지만, 십년 가까이 지내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생활이 편해져서 좀처럼 돌아가려는 이들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 가서 끌려간 도자기공들에게 조선으로 귀향을 설득하지만 대부분의 도공들은 귀환을 거부했다. 조선사회는 소위 말하는 "사농공상" 이라고 하여 도자기 생산을 포함한 모든 공업 장인들을 하대했다. 하지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 장인들은 막부의 지원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봐야 자신들을 하대하는 양반들을 위해 도자기를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조선으로의 귀향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은 도자기 문화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일본은 아리타 자기를 포함한 자기 산업으로 서양국가와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조선은 발전을 저해하는 문화를 가진 미개한 원시부족이었다. 중국에 물질도 바치고 여자들도 바치는 조공의 부족국이었다. 일본을 향해 왕실만 보존시켜 준다면 조선 땅 모두를 가져가도 좋다고 한 순종이나, 임진왜란 때 중국으로 피난 가겠다고 유성룡에 떼를 썼던 선조를 보자. 조선의 왕들은 부족의 추장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침략한 일본군은 조선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며 환심을 사고 있었다. 반면 조선의 백성들은 그들을 버리고 뺑소니를 친 왕과 조정에 분노했다.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자,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궁궐을 불태운 존재는 일본군이 아니라, 분노한 조선백성이었다. 평소 사람취급도 안 해주고 착취나 일삼는 양반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노예들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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