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제116화 세종과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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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9-26 22:04 조회4,8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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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 제116화 세종과 유키치
https://www.youtube.com/watch?v=qs9pYE5Ob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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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세종과 유키치
훈민정음에서 한글로의 변화과정
지금 한국인 모두가 사용하는 문자 <한글> 누가 만들었나?
1443년 세종시대에 최초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지금의 <한글>과 너무도 차이가 많다. 훈민정음이 오늘날 한글로 변화되기까지의 과정을 조사해 본다.
1443년 최초의 훈민정음
낭독
https://www.youtube.com/watch?v=NaZLu9D2BI8
한글 띄어쓰기 주도한 영국 목사 존 로스(John Ross)
한글, 한자 등 동양 문자는 원래 띄어쓰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 말까지 글쓰기에는 띄어쓰기가 없었고 오른쪽 위부터 아래로 쓰는 세로쓰기 방식이었다. 그럼 띄어쓰기는 언제 처음 나왔을까?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는 1877년 영국 목사 존 로스(John Ross)가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그가 외국인을 위해 편찬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에서 처음으로 띄어쓰기가 나타났다.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면 한글 문장이 먼저 나오고 그 아래 발음과 해당하는 영어 단어를 차례대로 대응시켜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영어식으로 자연스레 띄어쓰기를 한 점이 눈에 띈다.
후쿠자와 유키치
福沢諭吉/福澤諭吉(복택유길, Yukichi Fukuzawa)
(1835~1901).
일본의 계몽운동가, 철학자, 교육가. 산케이신문의 전신인 ‘지지신보’ 창립자. 오늘의 게이오 대학 전신인 ‘게이오 의숙’을 세웠고, 메이지 유신기 일본지식인들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막부정치 대신 서구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창한 개혁주의자.
그보다 6살 아래인 이토 히로부미의 정신적 스승. 일본에서는 일본이 '가지 않은 길'을 안내한 자유주의자로 칭송받았고,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 구한말 개화파들로부터 추종을 받았다. 1984년 11월 1일부터 현재까지 엔화 1만 엔 권에 초상이 실려 왔다. 세뱃돈으로 유키치 세 장, 하는 식으로 1만 엔 지폐를 대신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다. 2024년 발행될 예정인 미래의 10,000엔 지폐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교체되기로 결정돼 있다. 40년 만에 바뀐 것이다.
1882년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생이 파견되었다. 유키치는 조선인 유학생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을 자주 만나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들이 귀국한 뒤에도 유키치는 꾸준히 연락을 유지했다. 독립신문 등 신문과 언론에 종사하던 윤치호에 대해서는 언론 경영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유길준에게는 [문자지교]라는 그의 저술 물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하게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혹독한 형벌과 연좌제를 보고 유키치는 비분강개하여 당일 하루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그는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했다. 이어 조선독립당의 처형(朝鮮独立党の処刑)이라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규탄했다. 그리고 일본이 주축으로 아시아를 이끌어야한다는 탈아입구론(脱亜入欧,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을 제창했다. 그의 이 지침은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실현된 것이 1910년의 한일병합이었다 한다.
탈아입구론 (1885) 원문 해석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는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도쿠가와 막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한국과 중국)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 열강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중국, 한국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본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時事新報』1885(明治18)年3月16日
일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다.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나쁜 친구이므로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내용이며, 더욱 요약하면 "동양은 후진적인 것, 이제 우리는 서양문명을 따라서 근대 문명인이 되자"는 강론이었다.
유키치는 또한 한성주보, 한성순보등 조선 최초의 신문사가 건립될 때 한글 활자의 제작과 신문사 설립을 위해 많은 자금이 제공되도록 노력했다.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쓴 유길준이 [서유견문]
유길준 (1856~1914)
구한말 개화지식인 근대 지식인 1호,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 현대적인 한글 보급자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의 효시는 1895년 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Bma7enjj70
유길준은 일본에 유학하여 유키치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유키치의 지도로 국한문혼용체로 쓰인 서유기를 이 세상 처음으로 냈다. 일본의 한자/가나 혼용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대왕과 후쿠자와 유키치
훈민정음은 당시 조선인의 언어를 표현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떼어 쓰기도 안 됐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을 영국의 목사와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던 학자 유키치에 의해 실용화되었다. 실용화의 효시가 유길준이 유키치의 학습을 받아 1895년 세상에 내놓은 [서유견문]이었다. 우리에게 지금 사용하고 있는 표현문자를 만들어 준 사람은 조선 사람이 아니라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다. 한 연구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현재 사용 중인 한자어의 70%, 우리가 쓰는 한국어 전체의 50%가 이 사람 책상 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나머지는 유키치 제자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http://www.pcnt.kr/sub_read.html?uid=14380
훈민정음은 [세종], 한글의 아버지는 [후쿠자와 유키치]
조선시대에 언문이다, 암클이다 천시 받던 훈민정음은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한글로 태어났고, 주시경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다. 이 엄연한 사실은 그 동안 반일적인 사회적 정서에 묻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조선인들과 그 후예들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존재였음을 우리는 늦게라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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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기업들의 뿌리
‘쇼와 기린맥주’는 당시 관리인이었던 박두병에게 불하되어 두산그룹의 계열사인 ‘OB맥주’가 되었다. ‘삿포로 맥주’는 명성황후의 인척인 민덕기에게 불하되어 ‘조선맥주’가 되었다(1998년에 하이트맥주로 상호변경). ‘조선유지 인천공장 조선화약공판’은 직원이었다가 관리인이 된 김종희에게 불하되어 ‘한화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선경직물’은 공장의 생산관리 책임자이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어 ‘SK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SK그룹은 1939년 조선의 일본인 포목상이 만든 조선에서 만주로 직물매매 하던 선만주단(鮮滿紬緞)과 일본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만든 선경직물로부터 시작됐다. ‘선경’이란 이름은 선만주단의 ’鮮‘과 교토직물의 ’京‘를 합쳐서 지은 것이다.
’나가오카제과‘(永岡製菓)는 직원이던 박병규 등에게 불하되어 ’해태제과 합명회사‘가 되었다. ’오노다 시멘트 삼척공장’은 이양구에게 불하되어 ‘동양시멘트’가 되었다. ‘한국저축은행’은 정수장학회의 설립 멤버이기도 한 삼호방직의 정재호에게 불하되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신세계 백화점’이 되었다. ‘조지아 백화점’이 ‘미도파 백화점’이 되었다. ‘조선제련’이 구인회에게 불하되어 ‘락희화학(LG화학)’이 되었다. 삼척의 ‘코레카와 제철소’가 해방 후 ‘삼화제철’로 상호가 변경되어, 장경호에게 불하되어 ‘동국제강’이 되었다. ‘조선생명’이 이병철에게 불하되어 ‘삼성화재’가 되었다. ‘조선연료, 삼국석탄, 문경탄광’이 김수근에게 불하되어 ‘대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모리나가 제과와 모리나가 식품’이 해방 후에 ‘동림식품’으로 상호 변경되어 운영되다가, 1985년에 ‘제일제당’에 병합되었다.
‘토요쿠니제과’가 해방 후에 ‘풍국제과’로 상호변경되서 운영되어오다가 1956년에 동양제과(오리온)에 병합 되었다. ‘경기직물과 조선방직’이 대구에서 비누공장을 운영하던 김성곤에게 불하되어 ‘쌍용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우선’이 직원이던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대한해운’이 되었다. ‘동양방직’은 관리인이던 서정익에게 불하되었다. ‘아사히견직’은 부산공장장이었던 김지태에게 불하되어 ‘한국생사’가 되었다. ‘조선주택영단’이 ‘한국주택공사’가 되었다. ‘아사노 시멘트 경성공장’이 김인득에게 불하되어 ‘벽산그룹’이 되었다. ‘경성전기,남선전기,조선전업’이 해방 후 합병되어 ‘한국전력’이 되었다. ‘가네보방직 광주공장’이 김형남, 김용주에게 불하되어 ‘일신방직’이 되었다. ‘동림산업’이 관리인이었던 함창희에게 불하되었고, 제일제당(현CJ)이 이를 흡수했다. ‘조선미곡창고 주식회사’가 해방후 ‘한국미곡창고 주식회사’가 되고, 후에 ‘대한통운’이 되었다. ‘조선중공업주식회사’가 해방 후 ‘대한조선공사’가 되었고, 후에 한진그룹에 편입되어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조선화재 해상보험’이 ‘동양화재 해상보험’이 되었다가, 지금 ‘메리츠 화재해상보험’이 되었다. ‘쥬가이’제약은 서울사무소 관리인에게 불하되어 현 ‘중외제약’이 되었다. 이외에도 내로라하는 한국기업들은 거의가 다 일본인이 설립 운영하던 회사라고 생각하면 큰 무리가 없다.
조선인이 설립 운영하던 큰 기업은 ‘商會’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화신상회, 개성상회, 경성벽지 등이다. 조선인은 자본과 기술이 없어 회사 설립을 할 수가 없었다. 해방 후 조선 내 일본인들은 맨몸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며 야반도주했다. 이렇게 팽개치고 나간 회사들을 조선인들이 이승만 정부로부터 ‘불하’란 명목으로 헐값에 인수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인들은 당시 얼마나 속이 쓰렸겠는가?
이런 기업들을 불하받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횡재를 한 것이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일본이 청구권을 주장한 것은 조선에 건설한 사회간접자본과 이러한 기업들에 대한 것이었으며 남한에 두고 간 자산가는 총 24억 달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북조선에는 27억 달러였다 한다.
일본 1914
https://www.youtube.com/watch?v=j3nSiadhH-k
일본 1930
https://www.youtube.com/watch?v=95W1-SkOzt0
일본 1940
https://www.youtube.com/watch?v=FVM6KCaioQ4
부산 1960
https://www.youtube.com/watch?v=KCS0fWugydg
[시] ‘이 순간 날고파라’
http://www.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2&wr_id=1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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