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Y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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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8-07 07:46 조회4,1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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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 이야기
협동이나 단결을 강조하는 경영자는 사원들의 지혜를 결집시키지 못하는 사람이다. 단결과 협동이 자동적으로 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되는 것이다. 협동과 단결을 유도하려면 가장 먼저 조직이 달성해야 할 목표부터 내놓아야 한다. 목표가 없거나 애매하면 수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성과가 있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을 유치해 놓고 이들에게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 “무엇이든 훌륭한 것을 발명해 주시오”라고 부탁한다면 그들은 아무 것도 발명해 내지 못한다.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SONY가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기업이 된 것은 경영진이 늘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SONY 최초의 목표는 한 번도 구경해본 적이 없는 녹음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아키오 모리타, 그는 물리 학도로 태평양 전쟁 때 일본 해군이 추진하고 있던 열추적 유도탄 연구에 동원됐고, 거기에서 그의 연배인 이부카 마사루 씨를 만났다. 그의 집안은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는 대부호였고,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야 할 맞아들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와 이부카씨는 헤어지기 싫었다. 두 사람은 그의 부친을 찾아갔다. 예상과는 달리 부친은 선뜻 자식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 모임을 "미지의 개척자"(Seeker of the Unknown)라고 명명했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에 책상 하나를 갖다놓고 생전 보지도 못한 녹음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들은 가느다란 철사에 음을 녹음시키는 데까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녹음된 것을 편집하려면 철사를 잘라내고 때워야 하는데 그 때우는 부위에서 음이 파괴됐다.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바로 그때 맥아더 사령부에서 확성기 음이 퍼져 나왔다. 그것이 분명 녹음기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사령부로 달려갔다. 창문을 통해 녹음기를 생전 처음 보게 되었다. 그는 미군 장교를 졸라 그 녹음기를 몇 시간 빌릴 수 있었다. 철사가 아니라 테이프에 녹음이 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그 테이프를 질긴 종이라고 불렀다. 질긴 종이를 만드는 회사를 수소문해 봤지만 일본에서 그런 테이프를 만드는 공장이 없었다. 두꺼운 마분지를 길게 오려서 거기에 자석가루를 칠했다. 녹음기는 만들어졌지만 덩치가 크고 조잡하여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참으로 미련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모한 노력은 기술에 대한 소화력을 길러주었다.
그들의 두 번째 목표는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만드는 일이었다. 라디오를 가장 먼저 만든 회사는 미국 TI사였다. TI사가 만들어낸 라디오는 진공관식 라디오로, 넓은 응접실 한 모퉁이를 장식하는 커다란 가구로 취급되고 있었다. 퇴근해 오면 벽난로 앞에서 포도주 마시면서 쿵쾅 쿵쾅 듣는 소리가 바로 미국인들이 즐기는 라디오 소리였다. 이런 개념에 젖어온 미국 기업들은 트랜지스터를 먼저 만들어 내고도 그것으로 소형 라디오를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트랜지스터는 1948년에 미국 벨연구소에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여 소형 라디오를 만든 이는 모리타 씨였다. 1955년이었다. 그는 이 라디오를 팔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세계적인 새로운 제품은 대부분 미국에서 발명되었고 생산되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미국 밖에서 만들어진 상품을 매우 경시했다. SONY의 라디오 역시 미국의 유통망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에 문제 있는 곳엔 반드시 해결책이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3일 만에 아이디어를 찾아냈다. 유통망을 통하지 않고도 고객에게 상품의 존재를 알리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이 신문광고의 효시였다.
브로바사가 20만개의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주문해 왔다. 라디오에 브로바 이름을 새겨달라는 조건이었다. 이 20만개의 주문은 소니사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요 엄청난 횡재였다. 모리타씨는 본사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본사에서는 즉시 주문을 수락하라고 했다. 하지만 모리타씨는 하루 밤을 꼬박 새워 이를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눈이 둥그레진 브로바사 중역이 말했다. “브로바사는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소니사 제품에 브로바 로고를 넣는 것이 얼마나 횡재인지 아십니까?” 이에 맞서 모리타씨가 당당히 말했다. “브로바사도 50년 전에는 우리 소니사와 같은 처지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브로바사가 50년만에 오늘과 같은 기업을 일으켰다면 앞으로 50년 후에 우리 소니사도 브로바사 만큼 키울 수 있을 것입니다. 소니사 제품은 소니의 이름으로만 팔릴 것입니다.” 결국 모리타씨는 장래의 이미지를 위해 엄청난 액수의 단기 이익을 포기했다. 그 후 40년이 지나 이 두개 회사의 프로필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아키오 모리타 회장은 시장을 보는데 남다른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기술을 볼 때마다 그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내는 데에도 남다른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시장과 기술에 대한 비전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훌륭한 목표를 창출해 낼 수 없다. 소니사의 그 다음 목표는 워크맨이었다. 모리타 회장은 라디오에서 스피커를 떼어내는 대신에 증폭 기능을 정교화 시키고 지푸라기처럼 가벼운 헤드폰을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도 클래식 음악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상품에 대해 착상했다. 소니사의 누구도 그것이 시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리타 회장은 그의 퇴진을 조건으로 내걸고 워크맨 개발을 강행했다. 어느 날 그는 시제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테이프를 바꿔가며 클래식 음악을 즐겼다. 시제품은 그만큼 훌륭했다.
하루 종일 혼자서 워크맨을 즐기자 그의 부인이 무료해 했다. 그는 부인과 함께 들을 수 있도록 잭을 하나 더 만들라고 했다. 부인과 함께 워크맨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러다가 헤드폰을 쓰고 있는 부인에게 말을 걸 필요가 생겼다. 그는 소형 마이크로폰을 설치하도록 다시 주문했다. 이제는 두 사람이 음악을 들으면서 대화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워크맨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제조 즉시 2천만대나 팔렸다.
모리타 회장의 영원한 파트너인 이부카 회장이 어느 날 미국을 다녀온 후 책상 위에 영문 포켓북을 내놓으면서 말했다. “바로 이 책만 한 사이즈의 비디오 레코더를 만듭시다.” 지금 가정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캠코더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최고 경영자는 이와 같이 끊임없이 목표를 제공해야 한다.
소니사가 자석 테이프 방식을 이용해 VTR을 만들고 있을 때 RCA는 비디오디스크 개념에 몰두하다가 수백만 달러만 날렸고, 발명의 대가였던 피터 골드마크는 필름 식 녹화기를 만들다가 빛을 보지 못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걸쳐 일본인들은 같은 상품이라도 작고 얇고 짧게 만드는 데(경박단소) 연구개발 노력을 기울였다. 이 역시 확실한 연구개발 목표였다. 이 한가지의 목표로 인해 일본은 제품의 소형화 기술에서 세계를 선도해 왔다. 모리타 회장은 아시아 10대 인물로 선정되었고, 2000년 어느 날 세상을 떠났다. 그는 기업인이었지만 일본국민들의 스승으로 칭송되었다.
그는 언제나 정당한 것만 추구했고 편법을 배척했다. 그는 그의 일생의 파트너인 이부카 회장을 깍듯이 존중해주었고, 제3대 회장 자리는 "오가"라는 프리마돈나 급 음악가 출신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오가라는 젊은 음악 학도를 끈질기게 설득하여 SONY로 데려온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다. 당시 학생이었던 오가는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의 음질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모리타씨는 그 학생의 예리한 직관을 높이 샀다.
그를 소니사로 데려오려 했지만 오가는 끄덕도 하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모리타씨는 빈에까지 그 청년을 몇 번씩이나 찾아가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오가씨는 귀국하여 무대 위에서 프리마돈나로 활동했다. 그런 그를 모리타씨는 끈질기게 설득시켜 마침내 SONY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 청년은 SONY 창설 이래 가장 빠른 승진을 거듭했다. 바로 그가 제3대 회장이 됐다. 오가 역시 "이데이 노부유키"라는 타인을 차기 회장감으로 길러 자리를 인계했다. 소니사는 대대로 가족에게 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적 상황에서 회장 자리를 타인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곧 평생 이룩한 기업을 도둑맞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게 현실이다. SONY는 물론 우리에게 너무나 잘 소개돼 있는 GE와 같은 선진유수 기업의 경우에는 그룹 내에 우수한 경영인재들이 길러지고 있지만 한국의 그룹들에서는 훌륭한 경영능력과 양심을 가진 경영인들이 좀처럼 잘 길러지지 못하는데다가 그룹에 공영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문화와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한국에서의 자본주는 이윤극대화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예하 경영진들은 경영이 아니라 편법에 의해 이윤을 극대화하려 하기 때문에 경영능력이 길러지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명박은 진위를 떠나 한국사회에서는 최고의 CEO 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은 어디까지나 그를 고용사장-고용회장으로만 활용했다. 정주영도 모리타가 될 수 없었고, 이명박도 오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 문화권에서 평생 일으켜 세운 기업을 남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죽 쒀서 개준다”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필자는 충분히 수긍하고 납득한다. 말이 좋아 전문경영인이지 한국사회에서 전문경영인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오너가 가장 훌륭한 경영인을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 경영문화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2019.8.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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