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숙에 대한 신문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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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08-13 12:45 조회90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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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숙에 대한 신문 사항
<가족사 대강>
1-1. 증인은 1941년 함북 청진에서 출생해 평양으로 가서 1964년에 대학을 나왔고 거기에서 결혼해 4형제를 생산했으며, 장남은 1965년생이고 나머지 형제는 세 살 터울로 낳았으며, 남편은 1978년 증인이 37세 되던 해에 작고하였지요?
1-2. 증인은 북한에서 중상류층으로 살며 4형제를 키우다가, 장남이 1990년 25세 되던 해에 남한으로 귀순하는 바람에, 반역자 가족으로 몰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나 나온다는 온성 지역 ‘동포탄광’으로 추방되었지요?
1-3. 증인 가족은 당시 22세였던 차남의 기적적인 활약으로 ‘동포탄광’을 벗어나 온성의 탄광마을에서 남들의 부러움을 받고 살았는데, 이웃의 도움으로 남한에 있는 장남과 연결이 닿아 탈북을 하였지요?
1-4 당시 두 아들이 국경경비대 중대장, 초소장들과 인간관계를 돈독히 쌓은 덕분에, 그들이 경비문을 열어 주어서 1997년 8월, 차남과 며느리, 손자를 남겨두고 세 식구가 ‘두만강변 ’도문(투먼)으로 탈북해 귀순하였지요?
1-5. 2016.7.31.유튜브 [모란봉클럽 최고 토목설계사 장인숙의 성공 비결!]에서 증인은 “1등이다 하면 증인이고, 최고의 상이다 하면 다 증인 것이었다. 인민학교부터 대학까지 1등과 최고 표창을 독차지하였다.” 말씀하셨네요?
<증인 본인 관련 사항>
2. 증인은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를 어디서 나왔나요?
3. 증인은 청진에서 몇 살 때 무슨 계기로 그 어렵다는 평양시민권을 받으셨나요?
4. 결혼하신 해가 언제였으며 장남이 1965년생이니까 결혼은 1964년 이전에 했겠네요?
5-1. (증55, 1쪽) 증인은 귀순한 지 4년째인 2001년 LA중앙일보에서 1964년에 ‘평양운수대학’의 ‘교량터널과’를 졸업하여 ‘토목설계사’가 되었고, 1969년부터 1990년까지 21년 동안 ‘평양도시계획설계사업소’에 배치되어 토목설계사로 일했다고 하였는데 맞지요?
5-2 (증 60, 1쪽) 증인은 2004년 RFA자유아시아방송 인터뷰 제 1쪽에서도 주로 ‘다리’를 설계했다 했고, 제2쪽에서는 탈북자들 중 토목기사는 오로지 증인 한 사람뿐이라고 강조하셨네요?
5-3. 이상을 보면 증인은 평양운수대학을 나왔고, 학과는 ‘교량터널과’, 자격증은 ‘토목설계사’를 취득하였네요?
6. (증57,1쪽) 그런데 그후 10년만인 2014년, 건축사 신문에서, 증인은 ‘평양 김책공업대’ ‘운수공학부’를 졸업했고,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2급 건축기사’ 자격증을 땄다고 하셨네요. 같은 시기에 대학도 2개, 전공도 2개, 자격증도 2개를 취득한 것으로 설명하셨는데, 왜 말이 할 때마다 다른가요?
7. 증인이 전공했다는 ‘운수공학’은 설계(토목) 분야가 아닌데요, 운수는 영어로 transportation, 철도운수, 자동차운수, 수상운수, 항공운수 등 물류 수단을 다루는 학문이던데요?
8. 인터넷에는 증인이 다녔다는 ‘평양운수대학’도 ‘평양김책공업대학’도 존재하지 않던데 증인이 다닌 학교명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9-1. (증62)(필요시 질문) 위키백과에 정리된 ‘김책공업종합대학’의 연혁을 보면 1948년 ‘평양공업대’로 설립되었고, 1951년 ‘김책공업대’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56년에는 8개 단과대학으로 분리되었다가, 1988년에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체제가 변경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바, 증인이 졸업했다는 1964년에는 8개 단과대학 시절이었고, 그 단과 대학들 중에는 ‘김책공업대’가 없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9-2. ‘김책공업대학’은 1951년~56년 사이에 있었던 대학이었는데 이미 8년 전에 없어진 이 학교를 1964년에 졸업했다는 것인가요?
<장남 정현 관련, 1965년 생>
10-1. (증57, 3쪽) 증인은 2014년 건축사 신문에서 장남 정현씨가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한 후 1학년 때 소련으로 유학을 갔다고 했지요?
10-2. 장남은 김책공업종합대학에 몇 살 때 갔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장 위 대학에 입학했나요?
11-1. 장남은 소련 어느 지역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유학했나요?
11-2. 장남은 1990년 귀순할 때 위 대학의 몇 학년이었나요?
12-1. 장남은 1990년에 귀순한 후 1997년까지 남한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12-2. 그는 증인 가족의 탈북자금을 언제 얼마를 누구를 통해 보냈으며, 그 돈은 남한에서 어떻게 마련했다고 하였나요?
<차남 정광 관련, 1968년생>
13-1. (증57, 3쪽) 증인은 위 건축사 신문에서, 차남 정광은 ‘인민무력부 기술종합대학교’를 다니다가 곧바로 유학을 갔다고 했는데, 이 대학은 육군 또는 공군 중 어느 군 소속인가요?
13-2 차남은 198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기술종합대학에 입학했나요? 본인이 희망해서 그 학교에 갔나요?
13-3. 기술종합대학은 몇 년 코스인가요?
14-1. 차남은 독일공군대학에 몇 년도에, 몇 살 때 입학했나요?
14-2. 독일공군대학은 몇 년 코스인가요?
15. 독일 공군 대학은 공군장교가 가는 대학인데 차남은 언제 공군장교가 되었나요?
16. (증57, 3쪽) 증인은 위 건축사 신문에서, ‘북한이 1980년대 후반 동독, 폴란드 등 동구권 유학생들을 전원 복귀시켰다고 했는데 차남 정광씨는 몇 년도에 복귀했나요?
17. 차남은 동독에서 소환되어 어디에서 무슨 신분으로 있다가 ’동포탄광‘으로 보내졌나요?
18. (증54, 2쪽) 증인은 1997년 MBC뉴스데스크 인터뷰에서 차남의 아들(손자)이 있다고 하셨는데, 차남은 언제, 어디서 결혼했나요? 처가는 어디에 있는가요?
<1990. 12. 추방 당시의 가족사항>
19-1. 장남 졍현이 귀순한 사실을 증인은 언제 알았나요?
19-2. (증59, 1쪽) 증인은 1997년 인터뷰에서는 1993년 여름 정현씨가 TV에 나온 것을 보고 알았다고 했네요. ’반역자 가족‘으로 낙인찍힌 신분이었는데, TV는 어디서 났나요? TV는 흑백이었나요? 컬러였나요?
20. (증57, 3쪽) 증인은 위 건축사신문 인터뷰에서 “장남이 귀순하니 가족들이 순식간에 반역자 가족이 되었다. 가족들은 24시간 내에 평양 추방 조치가 내려졌고, 트럭에 실려 함경북도 온성 ’동포탄광‘으로 보내졌다.”고 말하였네요?
21. 장남의 귀순 시기가 1990.8. 인데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그해 12월말에야 뒤늦게 추방조치가 취해질 정도로 북한 보위부의 행정이 느린가요?
22-1. (증58, 1쪽) 1990년말 시점에서, 증인의 차남 정광은 22세, 3남 정용은 19세, 4남 정남은 16세였네요?
22-2 (증58,1쪽) 증인은 1997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19세인 3남은 ’경성비행군관학교‘에 다녔고, 16세인 4남은 ’평양보통강제1고등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하였는데, 3남은 경성비행군관학교에 몇 학년까지 다녔나요?(주: 3남은 1990년에 19세)
22-3. 경성비행군관학교는 몇 년제인가요?
23. (증63) 탈북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북한에서는 17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거의 예외없이 곧바로 하전사(병사)로 입대해야 하고, 일단 입대 후에는 당이 지정하는 대로 군관학교에 가게 되는데, 군관학교 생도는 하전사 생활 2-5년을 한 사람 중에서 선발되고, 2년 과정의 군관학교를 졸업하면 소위로 임관되며, 5년 과정을 이수하면 중위가 된다고 하는데, 19세였던 3남 정용은 1990년 하전사 신분일 수밖에 없는데 군관학교 생도가 돼 있었다니 이해되지 않는데요?
24. 증인의 아들 중 고등중학교를 17세에 졸업하고 그해에 곧바로 하전사로 입대한 아들이 누구누구인가요?
25. (증58,1쪽) 증인은 1997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4남이 ‘평양보통강제1고등중학교’를 다녔다고 했고, 그후 7년 후인 2004년 RFA인터뷰(증60,1쪽)에서는 막내가 혁명가 집안에만 할당되는 ‘만경대 혁명학원’(고등중학교)에 다녔다고 하였는데, 왜 그가 다닌 고등중학교가 두 개인가요?
26. (증58,1쪽) 증인은 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는 3남 정용이 1990년말 현재 ‘경성비행군관학교’ 4학년이었다 하였는데 당시 3남의 나이 19세였고, 19세이면 하전사 3년차였을 텐데 비행 군관학고 4학년이었다는 것인가요?
<동포 탄광 호송 과정>
27-1. (증57,3쪽) 증인은 위 건축사 신문에서 ‘트럭에 실려’ 온성 ‘동포탄광’으로 호송됐는데 그곳은 반역자 가족이 가는 곳이라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무서운 곳이라고 했지요?
27-2. 증인 가족은 12월 며칠에 출발해 며칠에 온성에 도착했나요? 당시 평양과 동포탄광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나요?
28-1. 그 트럭에는 밖을 내다볼 수도 없도록, 뛰어내릴 수도 없도록 두꺼운 포장이 쳐져 있었지요?
28-2. 당시 증인 가족에게는 수갑과 포승줄은 채워져 있었나요?
28-3. 당시 그 트럭에는 증인과 3형제가 함께 탔고 갔나요?
29. 증인 가족은 며칠 동안 달렸는지,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의 충격에 몸이 떴다 내렸다 할 때 척추에 엄청난 무리가 갔을 텐데 어떠했나요?
30-1. 호송 도중의 끼니는 어떻게 해결했나요?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렸는가요? 영하 20~30도는 되었을 텐데 여러 날 동안 그 엄청난 추위는 어떻게 견뎠는가요?
30-2. 평양에서 온성까지 트럭으로 호송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차로 가다가도 20~30일이 걸려 굶어죽고, 얼어죽는 판인데, 도로 사정과 적설 사정을 감안하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까요?
31-1. (증57, 3쪽) 증인은 위 건축사 신문에서 온성에 도착해서 ‘동포탄광’에 투입해야 할 찰나에 차남 정광씨(22세)가 기적을 만들어서 탄광에는 투입되지 않고, 증인은 설계사 사무소에서 일하게 되었고, 가족은 일반 마을에서 살게 되었다고 하였지요?
31-2. 차남이 다니던 ‘인민무력부 기술종합대학’ 선배가 북부탄광청 부청국장을 하고 있어서 찾아가 사정했더니 부청국장이 위와 같이 파격적인 조치를 취해 주었다는 것이지요?
32. 증인의 말에 의하면 부청국장은 청진에 있을 것이었고, 증인 가족은 온성에 있었는데, 증인 가족을 호송한 보위부가 아무런 감시나 제재 없이 방치해서 차남이 여행증도 없이 자유롭게 3개 군계를 넘어 청진에까지 갔다는 것인가요(완전 자유)?
33-1. 반역자 가족은 노동당 중앙당에서 직접 관리하는 사항인데 일개 지방 탄광청 부청국장이 감히 이런 파격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었나요?
33-2. 더구나 북한은 5호 담당 감시체계 속에서 자신이 밀고되어 처형될 수도 있는 이런 위험한 일을 부청국장이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인가요?
34-1. 이때 차남의 나이는 불과 22세, 부청국장이 대학 선배라면 아무리 많아도 25세였을 텐데, 이 나이에 부청국장으로 출세할 수 있었나요?
34-2. 부청국장도 고등중학교를 17세에 졸업했을 텐데 병사 생활을 하지 않고 25세 이전에 벼락출세를 했다는 것인가요?
35. (증59, 1쪽) 증인은 1997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온성 일반 마을에 살다가 이웃사람이 제 3국에 친척이 있는데 그 친척을 이용하여 남한에 있는 장남과 서신연락을 할 수 있게 해주어서 접선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탈북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두 형제가 두만강 경비중대장과 초소장들과 친분관계를 쌓아, 그들이 경비문을 열어주어 차남 식구들만 남겨두고 3남과 4남을 데리고 1997년 8월에 귀순하였다고 말했지요?
36-1. 증인과 장남과의 연락이 처음 이루어진 시점이 언제였나요?
36-2. 위 조선일보 제2쪽, 장남 정현씨의 말로는 이 시점이 1997년 5월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두 형제가 5~8월 사이에 경비중대장, 초소장 등을 포섭했다는 것인가요? 여기에서 두 형제는 누구누구였나요?(주: 2남 29, 3남 26, 4남 23)
<차남 1968년생 정광에 대하여>
37-1. (증54, 2쪽) 증인은 1997년 귀순 당시 MBC뉴스테스크에서 북한에 손자가 있다고 하였네요?
37-2. (증58) 증인은 1997년 동아일보에서 “둘째 애는 최근에 결혼했기 때문에 처가도 있고 해서 함께 오지 못했다”라고 말했네요?
37-3. 둘째 정광이 1997년 당시 최근 결혼했다면 언제 결혼했다는 것이며 손자는 몇 년도에 출생했나요?
38-1. (증55) 증인은 2001년 6월 LA중앙일보에서 차남이 처갓집 밀고로 2년 전 총살당했다고 하였는데 2년 전이면 1999년인가요?
38-2. (증57, 4쪽) 증인은 1997년 귀순 당시에는 차남이 처가도 있고 손자도 있고 해서 북에 남았다고 했고, 2001년에는 1999년에 총살당했다고 하였으나, 2014년에는 생사를 모른다고 말을 두 번이나 바꾸었네요?
39-1. 북에서는 결혼도 당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요?
39-2. 차남 정광씨가 ‘반역자 가족’인데 북한 노동당이 결혼을 허락했다는 것인가요?
40. 증인은 온성에서 차남은 결혼 후 따로 살았나요, 아니면 며느리, 손자와 다 같이 한집에서 살았나요?
<온성에서의 생활>
41-1. 증인은 온성에서 일반 주민들이 사는 동네에서 일반 주민들과 섞여 살았나요?
41-2. 그 집은 당이 마련해 주었는가요? 방이 몇 개인 집이었나요? 그 동네는 대략 몇 가구나 살았나요?
42. (증57,3쪽) 증인은 2014년 위 건축사신문에서 온성에서 설계사로 일했다고 했고, (증54,2쪽) 1997년 MBC보도에서는 4남 막내가 철도선로공으로 일했다 하였으며, (증61) 2000년 NK조선에서는 3남은 닭똥치우는 노동을 했다고 했지요? 이때 3남 정용은 19세, 4남은 16세였는데, 그러면 당시 22세였던 2남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43. 증인이 온성에 압송돼 갈 때 TV 등 세간들을 싣고 갔나요? 현금을 많이 가져 갔나요? 갖고 간 TV는 흑백이었나요? 또는 컬러였나요?
44. (증33,7쪽) 정남씨는 2019.11.24. 배나TV에 주빈으로 출연하여 한 시간 넘게 증인 가족의 탈북 과정을 소상하게 밝혔는데, 당시 45새였던 막내 정남씨가 위 TV에서 밝힌 내용이라면 신뢰할 수 있지요?
45. (증33,7쪽) 정남씨는 “평양에서 온성으로 추방된 날이 1990년 12월 27일이었다.”고 하였는데 맞는가요?
46-1. (증33,8쪽) 정남씨는 위 TV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평양철도대학’에 입학한 후 반 학기 다니다가 1990년 12월 추방됐다”고 했는데 맞는가요?
46-2. 북에서는 17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1989년이면 15살인데 15살에 곧바로 철도대학에 입학해서 1학년이 되었다는 것인가요?
47-1. (증33, 11쪽) “12월 27일 하룻밤 사이에 눈이 50cm 쌓였다. 우리를 태운 기차는 12월 31일 오후 2시, 3일 만에 온성에 도착했다.”라고 말하였는데 맞는가요?
47-2. 증인은 트럭으로 갔다 했는데 막내는 기차로 5일 걸려 도착했다고 서로 다른 말을 하네요?
48-1. (증33,12쪽) 정남씨는 “온성에 갔더니 동포탄광이라는 수용소는 다른 데로 이전됐고 보위부원들은 양력설 쇠느라, 우리가 타고 왔던 기차를 잡아타고 평양으로 가버렸다. 우리를 관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는데 맞나요?
48-2. 양력설은 그 다음날인데 설사 기차를 타더라도 평양까지 가려면 여러 날 걸릴 터인데, 양력설을 세려고 보위부원들이 역적의 가족을 내팽개치고 기차를 타고 사라졌다는 것인가요?
48-3. 증인 가족들은 이때 수갑도 안 차고 포승줄에도 묶어 있지 않았나요?
49-1. 증인은 ‘동포탄광’이 언제 어디로 옮겨간 것인지 알고 있나요?
49-2. 북한 보위부가 ‘동포탄광’이 온성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 사실조차 모르고 증인 가족을 ‘동포탄광’으로 압송했다는 것인가요?
50. (증33, 13쪽) 정남씨는 “둘째 형이 평양 보위 사령부 중대장이었는데, 호송되어올 때 군복을 그대로 입고 갔다, 우리를 맡은 담당관도 평양에서 군관이었던 사람이라 코드가 맞았다. 1월 3일까지 기다려줄 테니 그 안에 잘해보라 했다. 그래서 둘째 형이 청진에까지 가서 북부탄광청 부청국장을 만났다. 부청국장은 어머님의 지인이었다. 그분이 ‘동포탄광’을 지우고 ‘온성탄광’으로 바꿔줬다”고 했는데, 이 말이 맞는가요?
51. 증인 가족이 반역자 가족이었는데도 북한 보위부는 호송할 때 군복도 입게 하고, 견장도 차게 하고, 수갑과 포승줄도 채우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해 다니도록 방치했다는 것인가요?
52. 증인은 부청국장이 차남 정광의 대학 선배라고 했는데 막내는 부청국장이 ‘어머님 지인’이라고 서로 다른 진술을 했네요?
53. 온성에서 가족을 맡은 담당자가 같은 군관출신이라 코드가 맞아 3일간 기다릴 테니 방법을 모색하라고 3일 동안의 자유를 허가했다는 것인가요?
54. 나이가 많아야 25세인 부청국장의 권한이 노동당 중앙당 소관사항을 마구 바꾸어 ‘동포탄광’을 지우고 ‘온성탄광’으로 바꿔주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55. 정남씨는 동독 공군대학생이었다가 소환됐다면, 동독은 1990년 10월 3일에 망했는데, 그가 언제 육군 평양보위사령부, 여기로 말하면 수도방위사령부 대위가 되었다는 것인가요?
56-1. (증33,14쪽) 정남씨는 “온성으로 압송될 때 현금으로 1만 원을 가지고 갔다. 한국돈 1억 원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라고 했는데 맞는 말인가요?
56-2. 북한 가족에 1억원을 건네주려면, 브로커에게도 그만큼을 준다 하던데, 장남이 남한에 와 7년 만에 어떻게 그 많은 돈을 벌었나요?
57. (증33,15쪽) 정남씨는 “그 돈으로 개인집을 샀다.”고 했는데 맞는 말인가요?
58. (증33,16쪽~17쪽) “우리집이 인텔리 가족이고, 집에 김정일 선물 컬러TV놓고, 표창장 쫙 걸어놓고, 사진들 4~5장 걸어놓으니까 보위부 요원들이 어슬렁거리다가 쫄아가지고 이 집에 잘못 걸리면 안되겠구나 생각해서 집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했다.”고 했는데 맞는 말인가요?
59-1. (증33,22쪽) 정남씨는 “제가 96년도에 평양철도대학을 졸업했다. 전기공학을 전공했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맞나요?
59-2. 정남씨는 1996년에 22세였고, 당시 온성에서 철도 선로공이었다면, 어떻게 평양철도대학을 다녔다는 것인가요?
60-1. (증33, 23쪽) 정남씨는 “우리가 평양에 있으면 어떻게 탈북을 하겠나? 김정일이 우리 가족을 매우 사랑해서 87년에는 컬러TV도 주고, 상장들도 주고, 1990년에는 탈북하기 가장 좋은 온성으로 보낸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맞는가요?
60-2. 정남씨 말을 새겨보면, 증인 가족은 김정일이 전략적으로 탈북시켜 주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어떤가요? 둘째는 인질로 잡아놓았다는 생각도 드는데 어떤가요?
61. (증33, 24쪽) 그는 ”우리집 TV 보려고 1,500세대 부락민들이 다 왔다. 인기가 좋았다.“라고 했는데, 동네가 이렇게 컸고, 이 말이 맞는가요?
62. (증33, 26~27쪽) 그는 ”둘째 형 형수가 가족의 탈북 의도를 밀고해 형이 잡혀갔고 나머지 가족도 조사를 했는데, 식구들이 친척, 친구, 주변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집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꾸며 놓고 탈북했다.”고 했는데 이 말도 맞나요?
63. 이때 탈북한 사람은 증인, 셋째, 넷째 이렇게 3인이었나요?
64. (증33,26쪽) 그런데 막내 말로는 “둘째형으로 인해 조사를 받을 때 막내는 이미 중국에 넘어가 있어서 조사는 증인과 셋째 정용씨만 받았다고 하는데 맞나요?
<도강 부분>
65. (증58) 1997년 입국 당시 증인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인민에 대해 ”북한은 국경을 4m만 벗어나면 무조건 총살하라고 지시했다.“고 하였지요? 고난의 행군은 1993년~1995년 사이였지요? 어떤 탈북자는 1995년 이전에는 아무나 강을 쉽게 건널 수 있었다고 증언하던데, 그랬었나요?
66-1. (증59,1쪽) 증인은 1997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국경 경비가 대단히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두 아들이 경비초소장도 알아두고 몇 년 전부터 쌓아온 인간관계 때문에 경비병들이 문을 열어주었다.”고 하였는데 위의 두 아들은 누구였나요?
66-2. 이들 두 아들이 감히 경비초소장을 포섭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할 나이같지는 않은데, 어떤가요?(주: 3남 26, 4남 23)
67. 증인이 강을 건너기 전 두만강변 북한쪽에는 어떤 장애물이 설치돼 있었으며 철조망과 흔적선 등이 있던가요?
68-1. 온성에서 3남은 양계장 닭똥 청소를 했고, 4남은 철도 선로공으로 험한 일을 했으며, 감시가 있었다면서 도보거리도 아닌 먼 곳에 자주 다니면서 경비중대장들과 경비 간부들을 사귀었다는 것인가요?
68-2. 증인은 도문(투먼)으로 탈북했다고 했는데 도문은 혜산과 마주보는 중국땅인데 그럼 도강은 혜산에서 출발하였겠네요?
68-3. 온성과 혜산 사이는 여러 개의 군경계선을 지나야 하는 200km 길인데 두 아들이 자주 다녔다는 것인가요? (우리의 경우 민간인이 DMZ 초소장을 만난다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데요)?
68-4. 그 경비중대장들에 대한 로비 자금은 어디서 마련했나요?
69-1. (증59, 1쪽) 위 조선일보에서 증인은 제3국에 친척이 있는 이웃의 친척이 장남의 남한 주소를 알아내서 증인과 연결시켜 주었다고 하였는데요, 이런 연결이 가능하려면 남한에서도 방송을 통해서나 연결이 됨직한 일인데 제3국에 있는 이웃의 친척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해주었다는 것인가요?
69-2. 더구나 그 이웃과 그의 친척은 공짜로 위와 같은 일을 했나요? 이웃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이런 희생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어떤가요?
70-1. (증33, 26쪽) 앞의 유튜브 방송에서 막내분은 “돈만 주면 도강은 문제없었다. 큰형이 브로커를 보내 일개 분대 구간을 중대장한테 돈 줘가지고 이 구간을 내가 스톱할 때까지 경계서지 말라” 해서 경계를 안 섰다. 8월이니까 물살은 빠르지만 물이 많지 않아 쉽게 건넜다.“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맞는 말인가요?
70-2. 증인 이야기로는 두 아들이 다니면서 로비를 해서 문을 열어 주었다고 했는데, 막내는 큰형 브로커가 문을 열어주었다고 했네요?
71. 막내 정남씨의 말로는 자신은 증인이 도강하기 얼마 전에 따로 중국에 와 있었다고 했는데 그때도 경비중대장이 따로 문을 열어주었는가요?
<강을 건너서>
72. (증33, 28쪽) 막내는 중국에 20일 있는 동안 빼빼 마른 상태에서 맏형이 보내준 돈으로 많이 먹어서 20일 동안 18kg나 살이 붙었다고 하는데, 맞는말인가요?
73-1. (증33, 29쪽) 막내 말로는 ”중국에서 20일 있다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더니, 거기에 큰형이 와 있더라, 가족이 모여 맥주 파티를 하고 있는데 TV에서 가족 뉴스가 이미 나오고 있더라“ 고 말하던데, 중국에서 그곳까지 브로커가 안내했나요?
73-2. 막내의 말을 들으면 목숨을 건 탈북이 아니라 호화판 탈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요?
<사진 부분>
74. 증인은 황장엽 비서가 ”5.18은 북이 주도했고, 그 책임을 남한에 전가한 사건“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사실은 알고 있는가요?
75. 증인은 북에 있을 때 5.18은 북이 주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직간접으로 들어본 적이 있나요?
76. 한국에 왔을 때 극정원 ‘탈북인 신문관’으로부터 증인이 518‘때 광주에 왔었는지, 물어본 적 있나요? 북한에 있을 때 광주에 왔었다는 특수공작 부대원을 알고 있는지, 득문한 사실이 있는지 국정원 신문관들이 물어보던가요?
77. 만일 1980년 광주 현장에 북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북한은 UN을 국제 사회에서 선전포고 없이 몰래 게릴라 전쟁을 획책한 전쟁 범죄국으로 몰릴 수 있겠지요?
78.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자신이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피하고 있고, 그들의 말로는 북에 있는 친척 친지들에 탄압이 가해질까 두려워서라고 하는데, 맞는 말인가요?
79. 증인과 증인 가족을 포함해 탈북자들 중에는 이른바 말빨이 탁월한 일부 탈북자들이 꽤 많고, 이분들은 공영방송과 유명매체 등에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고 신분을 상승시키는 발표들을 하는데, 이분들에는 북에 친척 친지가 없어서 그러는 건가요?
80. (증69 및 [518영상고발] 화보 302쪽을 제시하며) 여기에 증인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판독된, 1980.5.23. 전남도청 앞에서 질서정연한 상태로 촬영된 단체사진이 있고, 질서가 확립돼 있는 것으로 보아 통제에 의해 촬영된 사진으로 보이며, 당시 광주사람들은 무서워서 대문을 잠그고, 날아다니는 총알에 맞을까봐 더러는 이불까지 쓰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 사진은 두 사람이 ‘사망자 명단’을 들고 있는 것을 일제히 바라보는 사진으로, 기획된 촬영인 것으로 보이며, 증인의 얼굴은 여기에서 일부가 가려져 있으나 전문가는 증인의 사진이라고 판독했는데, 증인은 이를 부인하나요?
81. (장인숙 얼굴 10개를 보여주며) 여기 이 사진에서 증인 얼굴이 아닌 사진이 있는가요?
82. 노란색 동그라미 표시가 돼 있는 얼굴은 일반인의 육안으로 볼 때 다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는데, 이 5개의 얼굴 중 어느 얼굴들이 증인의 얼굴인가요? 이 사진들을 가지고 각각이 증인 얼굴이라는 걸 어떻게 제 3자에 설명할 수 있나요?
83. 노숙자담요는 얼굴A와 얼굴B. A와 C, A와 D, A와 E가 어째서 같은지 특징을 지적하면서 설명하였습니다, 전혀 논리가 없다고 생각하나요?
84. 광수화보책 [518 영상고발] 제 302쪽에는 도청 앞에 남녀노소 민간인들이 질서정연하게 통제된 상태에서 두 사람이 사망자 명단을 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기획 사진인 것 같은데, 한 장면을 한 컷에다 담을 수가 없어서 두 컷으로 나누어 담았습니다. 영상분석가 노숙자담요는 각 인물에 대해 빨간 점과 주황색 점을 찍었습니다, 주황색은 현재 북한에 있는 사람이고, 빨간 점은 탈북자들입니다. 전남도청 앞에 탈북자가 50여 명씩이나 몰려있었다는 충격적인 감정결과입니다. 이 화보책 306~307쪽에는 이들 중 8명의 얼굴을 대조시켜 놓았습니다. 각 세트마다 좌측은 광주얼굴, 우측은 탈북자 얼굴입니다. 남한에서 유명세를 탄 얼굴이라 웬만하면 금방 식별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8명의 탈북자에 대해 증인은 현재의 얼굴사진으로 누구인지 식별이 되나요? 좌측 얼굴로도 누군지 식별이 되나요?
85. 피고인의 육안으로는 306~307쪽의 좌측 얼굴만을 가지고도 어느 탈북자인지 금방 식별을 하겠는데 증인이 남한에 와서 찍은 여러 개의 사진으로는 증인을 특정하기가 어려운데 어떤가요? 이런 경우 영상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86. 아래 몇 가지 질문은 증인이 응용 두뇌가 비상한 분이고 늘 학습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여쭙는 것이니 성실히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증인은 인터넷을 검색하시지요?
87. 만일 누군가가 증인에게 [김정은, 장성택, 고사포] 이 세 개의 단어가 동시에 기재돼 있는 자료를 육안으로 찾아내라고 요구한다면 증인은 찾아낼 수 있나요?
88. 그런데 컴퓨터를 시키면 그런 자료가 몇 개 있는지, 어느 파일에 있는지 찾아 주지요?
89. 증인은 0-1-0-1 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컴퓨터가 어떤 원리로 수백- 수천억 개의 단어가 있는 자료바다에서 증인이 원하는 자료를 검색해 내는지 아시나요?
90. 검색 원리는 이해하지 못해도 컴퓨더가 찾아낸 자료는 다 맞지요?
91. 우리나라 5천만 인구 중에 가령 3천만 개의 지문이 저장돼 있는 DB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경찰이 범죄혐의자의 지문 한 개를 확보했습니다. 이 한 개의 지문이 3천만 개의 지문과 일일이 대조하여, 어느 지문과 일치하는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증인은 경찰이 육안으로 3천만 번의 대조를 해서 범인의 지문을 찾아낸다고 생각하십니까? 특수컴퓨터만이 찾아낼 수 있고, 컴퓨터가 찾아낸 결과는 일단 신뢰하게 되겠지요? 마을 주민센터(동사무소)에서도 지문으로 인감증명 떼지요?
92. 최근의 인터넷을 보면 손가락 지문의 정확도는 97%정도이지만 안면 지문의 정확도는 99.9%를 넘는다고 합니다. 증인에게 만일 얼굴 사진 하나를 드리고 비슷한 얼굴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찾아낼 수 있나요?
93. 지난 5월 11일부터 신한은행은 우리나라 최초로 통장이나 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얼굴로 결재업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창구직원이 육안으로 창구 앞에 앉아 있는 고객의 얼굴이 어느 고객의 얼굴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컴퓨터가 하겠지요? 은행의 DB에 수백만 명의 고객 얼굴이 저장돼 있고, 고객 앞에 있는 카메라가 고객의 얼굴을 찍으면, 이 얼굴이 어느 고객의 얼굴인지 컴퓨터가 얼굴 지문을 가지고 찾아내겠지요? 창구직원은 컴퓨터가 찾아준 결과를 믿는 것이지요?
94. 증인은 광주 현장사진에서 증인이라고 지목한 얼굴이 일부만 찍혀서 일부 얼굴만 가지고 얼굴 분석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95. (증66) 2023. 4.12. 조선일보에 의하면 보안업체인 에스원은 ”칠흑 속에서 마스크 쓴 사람, 누군지 99% 알아맞힌 이 기술“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는데, 혹시 읽으셨나요?
96. 이 기사 내용은 인식 수단이 특징이라 했고, 다른 기사를 보면 특징은 얼굴 지문과 얼굴 부위별 특징이라고 설명돼 있는데, 이 내용이 증인에게는 생소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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