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이유 중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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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11-15 19:44 조회6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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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이유 중에서 [3]
1. 이 사건 도서의 프로필
이 사건 도서의 책명은 [북조선 아리랑 무등산의 진달래 475송이]입니다. 북한에서는 등교 시에 구슬픈 노래를 확성기로 틀어주는데 노래 곡명이 [무등산의 진달래]이며 이 노래는 북한의 아들들이 “동강난 조국 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떼죽음) 당해 조국의 부모형제를 못 잊어 한 나머지 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난다”는 테마어로 작사된 노래이며 이 노래의 1,2절이 이 도서 뒷장과 제320쪽에 기재돼 있습니다. 통일을 위해 북한군이 광주에 와서 억세게 싸우다 떼죽음을 당해 억울하고 슬프다는 가사입니다.
475송이는 1980년 북한이 제작한 5.18기록영화와 노동당 출판사 등이 발행한 2권의 대남공작 역사책 그리고 1980.6.6. 일본에서 카톨릭정의평화협의회가 발표한 [찢어진 깃폭]에 한결같이 테마 숫자로 부각돼 있습니다(이 사건 도서 29-31쪽) 475명이라는 숫자는 이 4개의 출처에 표현돼 있는 ”하루 사이에 475명의 시체를 도청에 전시했다“는 기록에서 따온 숫자로 이 구체적 내용은 이 사건 도서 29-31쪽에 출처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피고는 전두환 내란 사건 수사기록 18만 쪽을 전두환 측 변호인단으로부터 빌려다 6년에 걸쳐 분석하여 2008년.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제목으로 1,762쪽 4부작을 발행하였고, 5.18단체로부터 고소를 당한 바 있습니다 . 이에 안양지원에서 ”이 책은 명예훼손 용도로 쓴 것이 아니라 역사를 조명하기 위해 쓴 책으로 보인다“는 취지와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 판례에 의해 5월 단체는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요지의 판결을 받은 바 있습니다(을2호-1,2,3). 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재판장 이현종 판사님의 배려로 북한자료센터에 보관돼있는 비밀 북한문헌들까지 열람복사하여 5.18과 북한과의 연계성을 추적하였습니다. 이 4개 출처에 명시돼 있는 475구가 바로 ”억세게 싸우다 무리 단위로 죽음을 당했다“는 노래 가사와 연결되었습니다. 북한에서 불리는 [무등산의 진달래]의 존재는 탈북자들에 의해 인터넷에도 널리 전파돼 있고, 을92 보도에도 확인돼 있습니다. 2015.7.4.경 당시 동아일보와 채널A는 북한 3성장군 박승원 상장이 귀순했다고 대대적으로 기사를 날렸습니다 박승원 상장이 바로 [무등산의 진달래] 곡을 제작하는 데 관여했다는 기사입니다.(을92)
북한 특수군 숫자가 600명이라는 증거 4개는 이 사건 도서 257-259쪽에 기재돼 있습니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이 기관 차원에[서 공식확인했다는 숫자가 490명입니다. 600명 중 490명이 교도소 야간공격 과정에서 사살됐다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권영해의 증언을 요약합니다. ”5.18은 통일 차원에서 북이 주도한 군사작전이었고, 그 과정에서 북한군 위관급 특수부대원 490명이 광주에서 사망했는데 그 명단까지 확보했다고 하였고, 그 명단은 시중에 활자화되어 공개되었다.“ 이 명단 일부를 복사하여 을91로 제출합니다. 북한의 문헌들과 기록영화에는 475명이 하루에 때죽음 당했다고 했는데, 권영해는 490명이 사살됐고, 사망일을 모두 1980.6.19.로 기록해놓았다고 하였습니다(을69,70). 피고는 475명과 490명 사이의 15명이 차이 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15명은 광주에서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북으로 철수했지만 한 사람씩 사망하였고, 마지막 15번째 되는 사람이 사망한 날이 6월 19일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피고는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대위 시절에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4년 동안 게릴라전투를 했고, 중앙정보부에서 정규교육까지 받고 중정 수뇌부에서 근무한 바 있습니다. 군사 부문과 대북 분야에 대해 비교적 촉이 빠른 데다 1975-1980년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와 응용수학박사 학위를 받는 과정에서 분석의 직관력과 투시력을 훈련한 사람입니다. 당시의 490명이 죽었다면 어디에서 죽었는가에 대해 추적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여 2,700여 명의 수용인을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라는 김일성의 무전을 받은 특수군 600명이 무리하게 3공수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교도소를 야간공격하다가 사살됐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후의 보도들에 촉을 세웠습니다. 한겨레신문은 광주에서 계엄군이 사용한 실탄은 548,548발(을98), 계엄군에 실탄이 배급된 날이 1980.5.21.17:00시였습니다. 군 상황일지를 보면,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렇게 대량으로 실탄을 사용할 상황이 없었습니다.
군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북한이 어떻게 적진의 깊숙한 후방에까지 600명을 한꺼번에 침투시킬 수 있느냐며 고개부터 흔듭니다. 이 정도의 생각을 가진 일반국민들을 이해시키려면 많은 학습을 시켜야 합니다. 1979.10.26. 직후 김일성은 마치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시해 직후 [폭풍작전]을 선포하고, 김신조급 살인 기계로 훈련된 특수군을 잠수함(11명)과 태백산맥 통로(20-30명)를 통해 광주 외곽에 잠입시켰습니다. 6개월여에 걸쳐 소규모 단위로 밀파시킨 병력이 600명이었습니다. 이 숫자는 남북한 당국이 발행한 문서에 똑같이 기재돼 있는 숫자이기도 하지만, 광주현장 사진에 나타나 있는 ‘광주 사람으로 볼 수 없는 무장괴한’들의 숫자와도 거의 일치합니다. 2020년 5월 11일 미 국무부가 한국에 이관시킨 CIA문서(550명)와도 일치합니다.
남침 사실을 극비에 붙여야 했던 북한군은 유골을 몰래 수거하여 도청으로 이동시키고, 부패하는 시체로부터 흐르는 악취 나는 액체를 차단하기 위해 하얀 비닐로 둘둘 말아 포장했습니다. 도청 안에는 이런 시체 포장 다이와 하얀 비닐이 쌓인 시체 포장 작업장이 있었으며 그 사진이 이 사건 도서 325쪽에 올려져 있습니다.
이 시체를 5월 27일 새벽에 대형트럭에 싣고 시외로 달리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전남대 5.18연구소 기록물에 있습니다. 또한 광주 여교사는 당시 광주시립공원 시체관리관이 자기 손을 거친 사체가 594구였다고 말해주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 당시 광주에서 사망한 총수는 164명이었습니다. 164+430=594입니다. 430구의 유골은 2014년 5월 13일 청주에서 발굴되었습니다. 유골 발견 시의 보도를 보면 430구의 유골은 1m 깊이의 넓은 운동장에 군사대오를 갖추어 정렬돼 있었고, 규격이 일정한 나무판(칠성판)에 시체를 올려놓고 하얀 비닐로 둘둘 감았으며, 그 비닐 위에는 군번처럼 보이는 일련번호들이 매직으로 기록돼 있다 했습니다. 이로부터의 유골의 행방이 학자적 직관에 의해 추적돼 있으며 추적 내용이 이 사건 도서의 31-34쪽과 312-329쪽에 추리소설처럼 논리적으로 전개돼 있습니다. 이런 사실 자료 모두를 기록하여 연결시킨 사람은 기록상 오로지 피고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귀하게 모음된 작품을 어째서 땅에 매몰시키려 하는지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이 저서는 405쪽입니다. 2020년 이 책이 발행된 당시까지 18년 동안 피고가 축적한 자료와 5.18관련 지식들 중 중요한 것들을 발췌하여 쓴 대한민국에서 오로지 하나뿐인 역사책입니다. 이 책은 보호돼야 할 문헌이지 불태워져야 할 불온문서가 아닙니다. 피고는 지금까지 모두 14권의 5.18역사책을 저술하였습니다(을96). 그런데 원고 단체들은 국회도서관 등 그들의 영향략이 미치는 모든 도서관에서 [지만원] 이름으로 된 책은 모두 폐기처분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분서갱유가 따로 없습니다.
2025.11.1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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