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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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ufrhd 작성일24-01-21 19:54 조회7,056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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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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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남긴 유산은 교육받은 인재였다.
국부 이승만이 하와이에 한동안 정착하게 된 것은 사탕수수 노동자 이민으로 인한 한인학교 때문이었다. 국부 이승만은 한인학교를 시작하며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남녀공학의 학교를 세웠다. 1914년 미국 하와이에 한국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고 기숙사까지 갖추었다. 한반도에 남녀공학 학교가 설립 된 것이 해방 후에 가능했다.
국부 이승만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전쟁을 중에도 학교 수업은 멈추지 못하게 했다. 국부 이승만은 교육은 부모도 간섭할 수 없는 국민의 권리로 규정했다. 그 찢어지게 가난한 시대에도 정부예산의 20%가 교육예산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인재는 6.25 전란 중에도 징집을 하지 못하게 했다. 국부 이승만 재임 기간 중 70%를 훨씬 상회하는 문맹율을 22%(남성 11%, 여성 33%)로 낮춰 사실상 문맹을 퇴치했다. 또한 2만명의 인재를 선발하여 국비로, 미국돈으로 미국에 유학을 시켰다. 그 절반이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한 군 장교였다. 국부 이승만이 퇴임할 때 대한민국의 대학생 숫자가 영국과 똑 같아 졌다. 대한민국의 경제기적의 원인 중 하나는 우수한 인재이다. 산업화 시대 국부 이승만이 남긴 인재가 중추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국부 이승만은 자유, 시장경제, 민주주를 남겨 주었다. 국부 이승만은 1949년 ”산업부흥5개년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전쟁으로 인해 좌절 되었다. 잿더미가 된 전후시대는 미국의 모가지를 또 비틀어 돈을 뜯어냈다. 1인당 소득이 40달러이던 시절 236명의 젊은 과학도를 1인당 6,000달러를 들여 미국으로 원자력 해외연수를 보냈다. 1956년 국부 이승만은 원자력 연구소를 세우고 연수에서 돌아온 그들에게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지시하여 트리가마크 2 건설을 했다.
국부 이승만의 두뇌는 슈퍼컴퓨터급인데 원전을 없애려 한 문재인은 286급이다. 사람의 두뇌는 시대와 문명의 진보와 관계가 없는 것이 입증 된다. 1958년에는 거대한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착수했고, 호남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 인천판유리공장을 세워 중화학공업 발전의 토대를 놓았다. 강원도의 석탄 수송을 위해 철도의 보수와 함백선, 영월선, 영암선신설에 집중했다. 그 모든 재원은 국부 이승만 개인적인 역량으로 미국으로부터 갈취한 돈이었다.
국부 이승만 그는 대한민국의 선지자였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당신이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대한민국 국부는 이승만이다, 좌빨들은 아니 우파라는 작자들까지 국부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대하여 게거품 문다. 한마디로 웃기는 개소리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익희씨가 기차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단독출마가 되어 무조건 대통령에 당선 되어 있었다. 부정선거를 지시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기붕이 벌린 부정선거를 두고 국부 이승만이 부정선거의 원흉이라며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운다. 물론, 국정 책임자 대통령으로서 아랫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은 있다. 그래서 하야했다. 이제는 부정선거에 대한 굴레를 벗겨 드려야 옳은 것 아닌가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확하게 민주주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우리는 자유 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제도처럼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는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합시다“ 장준하는 자신이 발행하는 사상계에 콜론 보고서를 올렸다. "한국에는 민주주의의 껍질만 남은 것도 기적이다.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부적당한 것 같다. 차라리 인자한 전제정치가 타당할는지 모른다. "젊은, 교육을 받은 계급이 그들의 재능과 힘을.충분히 발휘할 곳을 찾지 못하여 지식 프롤레타리아트로 발전해갈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가난해 지고, 또 양심이란 것을 지키는 사람은 전부 소외되거나 배척되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만이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불원 한국 사회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가난한 국가의 유능한 자제가 일반 대학에 들어가는 수는 학자금 부족으로 인해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그들에게 어떠한 고등교육의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보통 군부 학교를 통해서이다. 이리하여 하층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다수 생기며, 특권적 관리 정치가에 분노를 갖게 된다. 이것은 폭발할 우려도 있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이 타국의 예를 따라 군사 지배가 정당을 대체하는 그런 사태가 있을 수 있다 하는 의문은 정당한 것이다. 이것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가능성은 적다(보고서 내용 요약)” 윤보선-장면 정부의 민낮을 낮낮이 까발리며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한 보고서를 자신의 잡지에 올리며, 자진하여 일제의 학도병이 된 독립운동가 장준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뒤이어 팔리 보고서가 백악관에 제출된다. “1961년 2월 현재 한국과 국민들은 병든 사회(sick society)이다“정부, 언론, 교육, 교회, 기업 등 기본 기관들의 구조가 모두 부정, 부패와 사기로 관통돼있으며 실제로 한국인들은 마치 양상과 언행을 통해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꾸며대는 망상 세계에서 살고 있다. 정답은 우리는 이미 한국 정부, 그리고 아직까지는 한국 국민들의 요청과 기본 승인 아래 이미 간섭을 하고 있다”며 “우리는 주권이라는 단어의 울림에 우리 자신이 속아 넘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러나 한국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최대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우리의 조치가 한국의 주도로 비춰지도록 다루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혁명의 다음이자 미완성 단계에 초점을 둔 1961년 4월19일이 적합하다. 전국경찰국장, 국가은행들의 행장, 새로운 감사관, 재무부 수주계약담당관 등 주요 직책에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인물들을 새로 임명토록 하고 4월19일부로 포괄적인 공무원 청렴 개혁을 선포할 것을 설득해야 한다. 만일 이 같은 노력이 실패하고, 장면 정부가 무너지면 최악으로 예상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군사정변이 일 것이며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미국은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한국은 안정될 것이다” 보고서가 제출 된지 두달 만에 5.16 혁명이 일어났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하여 5.16 혁명에 대한 전적인 지지 선언을 하고 나선다. “516군사혁명을 보고 “4·19 혁명이 입헌 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 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60만 대군 중 혁명에 참여한 병력은 고작 3,600명에 불과했다. 한강대교를 사이에 두고 혁명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은 총부리를 겨누며 대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혁명군에게 준동하지 말 것을 명령한 후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혈혈단신 한강대교를 건너갔다. 대치하는 국군은 홀로 걷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발포하지 않았다. 60만 대군 전체가 혁명군이었다.
실질적 국정 운영자 장면은 혁명소식을 들고 가르멜봉쇄수녀원으로 도망가 숨었다. 미국은 도망간 장면을 향해 "겁쟁이야 너는 끝이다. 장면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지도력을 행사하지도 않는다"며 혁명불개입 선언을 했다. 윤보선은 혁명 소식을 듣고 단발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올 것이 왔구나!“ 그래도 명색이 한 국가의 대통령인데 혁명의 기운을 감지 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누대를 이을 창피함이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혁명이었고 때는 때로 오는 법이다. 올 것이 온 것 뿐이다.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박정희 대통령과 5.16 혁명세력에 분노하며 개입의 명분을 만들기 위하여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재가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실권자 장면은 도망가서 잠적했고 윤보선을 찾아갔다. 매그루더는 진압 명령서를 윤보선에게 주며 "사인만 해주면 된다"고 했다. 문학도 윤보선 답게 화답했다. "우리나라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안고 나오지 못한다.“ 5.16 혁명은 무혈혁명이다. 혁명 과정에서 단 한명의 인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동서고금 인류사를 통틀어 혁명은 혁명의 대상을 반드시 제거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제거하지 않았고 기회를 주었다. 윤보선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표차이는 고작 15만표에 불과했다. 전라도에서 몰표가 나와 간신히 신승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은 야당 당수가 되어 끊임없이 박정희 대통령의 뒷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5.16혁명을 어느놈이 군사쿠테타 또는 군사정변이라 하느냐? 그 시대 공부한 엘리트가 대한민국에 있었는가 묻고 싶다. 군 장교는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임관할 수 없었고 대부분의 장교들은 국부 이승만께서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어 유학까지 다녀온 대한민국 최고의 파워 엘리트 집단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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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희귀한 내용들도 있군요. ,,. '아이젠하워', '처칠' 등 ,, 매우 굳세게, 죽을 각오로 임하셨던 '이 승만'각하! ,,,.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