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 8조 분석 (전라도 판사 황정수가 일깨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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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thfinder12 작성일22-09-02 00:20 조회2,20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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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를 통하여 전라도 지방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훈요 8조 : "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였으니 인심도 역시 그러하다. (중략) 비록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자리를 주어 일하지 못하게 하라."]
성호 이익은 “전라 충청 지방은 거칠어서 기술은 넉넉해도 유교문화는 찾아볼 수 없다”고 평했고,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팔도인심론’에서 “전라도 사람은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고 간사하므로 그른 일에 마음이 움직이기 쉽다”고 했다. 일제시대 조선에 머물렀던 소련 여성 꼬브악 샤브쉬나도 <전라도 사람은 교활한 암여우라고 비유한 이야기를 조선인 학자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참모인 두사충의 사위 나학천이란 사람이 조선에 귀화하여 "나학천비결(羅鶴天秘訣)"이란 책을 써서 조선 팔도의 인물평을 하였는데 전라도에 대해서는 "사교경예(詐巧輕藝) / 속임이 많고 교활하고 가벼우나 예술성이 있다." 라 하였다. [ https://bit.ly/3Txd3Jk ]
1920년대,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박사가 조작설 주장
그런데 전라도인들에게는 고맙게도(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훈요십조 8조가 조작됐다고 주장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는 일본인 학자인 이마니시 류 박사였다.
그는 태조 왕건이 전라도 사람을 중용하였고, 제2왕비 장화왕후 오씨와 그 아들 혜종(고려 2대 왕)이 즉위한 점 등을 들어 8조가 조작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거란의 침입(1010) 이후 개경이 불타자, 왕조 내에서 전해지는 비밀훈계인 '훈요십조'를 신하인 최항의 집에서 신라계인 최제안이 발견한 점도 의심가는 점으로 들었다.
그러나 최항은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7명의 임금의 실록을 편찬하는 책임자였다는 점이 있고, 더 중요한 것은 목종 시대에 '강조의 난'이 일어나, 목종이 피난을 갔을 때 최항에게 맡겼을 거라는 추측이다. (목종은 결국 강조에게 피살되었기 때문)
[* 강조의 난과 궁중비전(宮中秘傳), 목종에 대한 자세한 내용 :
]
거란의 침입으로 7대 실록이 불타자, 최제안이 실록을 재편찬하기 위해서 최항의 집에서 자료를 찾던 중 훈요십조를 발견한 것이다.
또 반론하는 측에서는 태조가 영암인 최지몽, 승주인 박영규와 같은 후백제 지역의 사람들을 기용한 것은 건국 초기의 시점이므로 특이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태조는 각 지방의 호족을 위무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미 태조의 집안 사람이 된 왕후와 자녀, 그리고 개국 공신등은 예외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훈요십조를 전달받은 박술희는 호남 사람이 아니고, 충남 당진 사람이었다.
또한 전라도인들은 공주강 밖이라는 말을 공주강 북쪽으로 해석해 자신들의 지역이 아닌 청주 부근의 궁예 잔당으로 보기도 하는데, 차현 이남, 공주강 외라고 했으니 방향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또한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대결할 때 나주, 목포, 영암 등의 호족과 협력하였는데, 그것은 후백제의 견휜에 비하여 약세에 처해 있던 태조가 전략적으로 그 지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한 것일 뿐 그의 본심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주류 학계의 의견이다. (태조는 물론 나중에 견훤 본인도 받아들였다)
역사 문제 연구소의 이이화 고문은 강연에서, 『신라는 삼국통일 초기단계에서 전략적으로 백제유민을 우대했으나 고구려 복속을 거쳐 당나라를 몰아내면서 이룬 통일의 순간부터 백제인들을 푸대접했다』[조선일보 1997.09.18]고 말한 바 있는데, 태조 왕건 또한 비슷한 전략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이이화 고문은 또한 고려중기 이후 문벌귀족 등장으로 호남 차별은 누그러졌다가 조선 선조때인 1589년 정여립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대동계를 만들어 반역을 도모하면서 다시 노골화됐다고 했다.
이어서 이 고문은 『호남의 차별정책은 박정희정권의 전략적인 지역감정 유발로 현대로 파고들어왔다』고 말했다. [* 그러나 손충무 선생 저서에 따르면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강하게 유발해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서 시작된 게 아닌가 한다. ]
* 참고자료
{훈요십조 8조 전문: 차현(車峴 : 車嶺) 이남, 공주강(公州江 : 錦江) 외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그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官奴婢)나 진·역(津驛)의 잡역(雜役)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宮院)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호남차별은 삼국통일 직후부터 시작" 조선일보 1997.09.18
* 이용주의 한국사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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