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문서 해제로 밝혀진 6.25전쟁의 진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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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빛이비추길 작성일22-08-17 14:09 조회2,07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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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남침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은 미국
미국의 지도자들은 북한군의 남침을 사전 경보해줄 수 있는 다수의 구체적이고도 전술적이면서 야전에서 확인한 사항들을 6.25전쟁 이전의 일정 기간 동안 간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 언론은 이들 사항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같은 시기에 중국의 대만 침공에 관해서는 엄청날 정도의 비밀 및 평문 수준의 경보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것이 당시 가장 의문스런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북한군의 남침 준비 현황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북한정권의 현재 능력’이란 제목의 1950년 6월 19일 자 미 중앙정보국 판단서는 1950년 5월 15일 당시의 자료에 입각했습니다. 5월 15일을 기점으로 미 중앙정보국은 “제대로 훈련 및 무장된 북한군이 38선을 겨냥하여 남쪽으로 전개되고 있다.···최근 몇 달 동안 전차와 중형 대포들이 38선 부근으로 이동했다.”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같은 정보판단서의 존재 자체는 미 정보당국이 북한군의 능력과 부대 이동 현황을 지속적으로 관찰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1950년 4월 중순, 미 공군 특수수사대(OCI)는 “소련이 북한군에게 남침을 명령했음이 분명하다.”라고 보고했으며, 미 육군 정보당국도 1950년 5월 초순에는 “38선을 겨냥한 북한군의 점진적인 남진은···공세적 행위를 준비하기 위함일 수 있다.”라고 말했고 5월 23일에는 “언제라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6월 19일 맥아더의 극동군사령부는 “북한군 공세가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를 담은 정보 보고서를 회람시켰습니다. 맥아더를 대신하여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마태 리지웨이 대장은 이 보고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38선 이북 지역에서 방대한 규모의 부대가 이동했다. 38선 부근의 모든 북한 주민이 38선 이북 2킬로미터 너머 지역으로 철수했다. 원산과 철원 간의 모든 민간화물 운송이 중지되었다. 이 노선이 전적으로 군용화물 운송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장한 군인들과 방대한 규모의 탄약과 장비가 38선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같은 보고서를 읽은 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북한군의 공격 임박을 예상할 수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당시 미국의 주요 정보판단서들은 38선 이북에서 활동하던 첩자들이 제공해준 첩보에 입각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미국의 언론매체들은 임박했던 중국의 대만 침공에 관해서는 엄청날 정도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언론매체는 북한군의 남침 준비에 관해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이 언론의 보도와는 반대로 중국의 대만 침공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북한의 남침은 발생하였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오직 한번 1950년 5월 10일의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기자회견을 보도했습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그 기자회견에서 북한군의 남침 임박을 경고했습니다. 이 보도 또한 미 상원외교위원장 코널 리가 조성한 일대 소동으로 인해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코널리는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한국 포기를 심각히 고려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미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미국은 한국이 북한군의 남침에 취약해지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50년 봄 미국의 지도자들은 정보 문서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듯이 소련의 전쟁 물자가 북한지역으로 대거 반입되면서 남북한 전력균형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지도자들은 북한군의 남침에 대비하여 한국군의 전력을 강화시키지 않았습니다. 1950년 초반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한국에 지원해준 총금액은 오직 한국군 통신장비 구입 목적의 108$뿐이었습니다.
미국은 북한보다 열세인 한국군의 전력을 보강해달라는 한국의 요청뿐만 아니라 1950년 1월 11일부터 14일까지 한국을 방문한 필립 재섭 순회대사, 무초 초대 주한 미국대사, 주한미군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의 전력 보강 요청도 다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1월 19일 미 하원은 한국을 지원하기 위한 6천만$ 규모의 법안을 기각시켰습니다. 이는 미 하원이 1939년 이후 미 행정부의 대외정책 관련 예산을 부결시킨 최초의 경우였습니다.
그러자 무초 대사와 주한미군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는 “한반도 상황 측면에서 볼 때, 한국군에 필요한 ‘최소 소요’를 충족시키기에도 1,230만$가 턱없이 부족하다.”라며 즉각 추가 배당금을 얻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에치슨 국무장관은 어이없게도 한국의 국방비를 인플레 초래 요인으로 판단하면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군의 적정 군사력 규모를 책정해서 65,000명의 육군과 35,000명의 경찰 전력, 24,000명의 해양경비대를 합친 104,000명 수준의 병력을 무장시키고 이들에게 물자를 제공해주며 이들을 훈련시키기로 처음에는 결심했지만 5만 명 수준의 보병 전력의 무장에 필요한 무기만을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군의 방어 능력을 증진시켜 달라는 모든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군이 점차 항공력을 증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항공력은 물론이고 대공 능력 또한 제공해주지 않았고, 북한이 많은 전차 군단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에 전차는 물론이고 대전차 지뢰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포병 능력과 무기 등도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 상원외교위원장 코널리의 인터뷰 내용이 1950년 5월 5일 자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에 보도되었습니다.
기자의 “한국이 미 방어 전략에서 필수적인 부분인가?”의 질문에 코널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과 같은 모든 국가가 전략적으로 어느 정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이 미국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혹자가 일본, 오키나와 및 필리핀이 서태평양지역의 미국의 방어선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물론 이 지역에서 이 같은 방어선 부근에 있는 또 다른 영토가 미국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전적으로 필수적인 부분인 것은 아니다.”
바로 다음 날에 에치슨 국무장관이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코널리의 관점과 관련하여 논평을 요청받았는데 에치슨은 코널리의 발언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코널리의 발언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코널리의 발언 며칠 뒤 주한미국 대리대사인 드럼라이트에게 “(코널리의 발언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남침하여 한국을 접수하라는 의미의 공개적인 초대장과 다름이 없다. 미 상원외교위원장인 코널리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처럼 비이성적인 발언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드럼라이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이승만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 미국이 한국을 지원해줄 것인지에 관해 점차 확신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상원의원 코널리의 발언, 항공기를 제공해달라는 한국의 요청과 관련하여 미국이 어떠한 가시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 미국이 상호방위지원계획에서 제공해주기로 되어 있는 군사 장비와 물자를 한국에 제공해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국이 미국의 아태지역 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는 미국의 주요 인사들의 지속적인 발언과 상기 요인들이 결합되면서 한국 관리들과 민간인들이 매우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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