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이재명> 4. 이재명에 대항한 이재선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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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바람 작성일22-01-31 01:07 조회2,2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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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이재명> 4. 이재명에 대항한 이재선의 최후
어머니 집에서 형제간에 소란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재선은 마무리를 잘했다. 어머니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와 "아들아 잘 가거라" 따뜻한 인사까지 해주며 이재선을 배웅해 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재선은 법원으로부터 한 통의 통지서를 받았다. 어머니 명의로 신청된 '100m 접근금지 가처분' 통지서였다. 당연히 이재명의 입김이 반영된 조치였다.
어머니 집에서 벌어진 소란으로 이재명은 형수 욕설에 대한 변명거리를 얻었다. 이재명은 "이재선이 어머니에게 험한 말로 살해 협박을 하고 폭행했기 때문에" 형수 욕설이 나왔다고 국민 앞에 변명을 했다. 게다가 이재명은 그 일을 빌미로 이재선을 '존속 폭행'으로 고소까지 하고, 거기다가 어머니에게 접근 금지까지 시켜버렸다. 그러나 실상은 어머니에 대한 '존속 폭행'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어머니 집에서 벌어진 소란으로 이재선과 박인복은 검찰에 출두하여 조사를 받았다. 사건 담당자는 "별것도 아닌 것을 문제 삼아 사건화 하였다"고 의아해했다. 이종혁 검사는 "사건은 별거 아닌데 현직 성남시장이 관련된 일이라 주위에서 관심이 많은데 회계사님이 낚이신 거 같습니다"라고 귀뜀을 해줬다. 이재명 측에서는 이 사건을 빌미로 이재선을 정신병자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이재선은 감지했다.
검찰에서도 이재선에게 정심 감정을 받아올 것을 요구했다. 이재선은 정신감정 검사를 받았다. "유의미한 정신과적 장애 및 정서적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 상태로 판단 된다"는 결과가 나왔고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에서는 사건의 원만한 처리를 위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어머니의 서류를 받아오라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했다. 이재선 부부는 접근금지 처분이 내려져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자 이재선의 딸 이주영이 할머니를 만나겠다고 자원했다. 이주영은 친척 한 분과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나 할머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부탁을 거절했다. 몇 번이고 사정을 하자 할머니는 이재명에게 전화했다. 그러자 이재명은 이주영과 같이 있는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주영을 데리고 나가라"고 화를 냈다. 그리고 전화가 끝나기도 전에 성남시 공무원 2명이 들이닥쳤다. 이재명이 긴급출동시킨 공무원들이었다. 혹시나 어머니가 처벌불원서를 써 줄까 봐 이재명은 그걸 막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이주영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재선이 정신적 압박에 시달린 것은 이때쯤부터였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형제들과 공무원들,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들의 협공 앞에서 홀로 무력한 자기를 발견하고 비관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조직적으로 자기를 음해하는 인터넷 댓글을 보며 억울하고 또 억울해 하며, 이재선은 잠 못 드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13년 3월 심신이 지쳐있던 이재선은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12주 이상의 중상을 입은 대형사고였다.
이재명은 이 사고에 대해 또 이재선을 음해했다. "결국 자살 교통사고 내시고 돌아가셨어요" 이재선은 비관과 절망에 빠졌지만 자살할 마음은 없었다. 이 사고로 재활 치료를 받고 거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2014년 8월쯤이었다. 어느 정도 완치 되자 이재선은 가족여행을 다녀왔고, 이때쯤에 일절 연락이 없었던 이재명으로부터 또다시 욕설 문자폭탄들이 날라 들었다.
친동생 재옥이가 사망했는데 장례식에도 참석 안 했다는 욕설이었다. 물론 이재선은 일체의 연락을 받지 못했기에 참석을 할 수 없었다. 이재명은 동생 사망 소식을 알려주지도 않았다가 나중에야 생트집을 잡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동생의 죽음마저 이재선을 정신병자로 모는 데 이용했다. 이런 트윗을 했다. "정신질환 형님이 어머니 때릴 때 무차별 폭행당해 피범벅이 되었던 얼굴, 죽은 후 관속에 누워 차갑게 식은 핏기없는 얼굴이 자주 꿈에 나타납니다. 가족 파괴한 국정원과 새누리당을 어찌 용서하겠습니까?" 이 정도면 정신병자는 이재명이 아닌가.
이재선은 이재명의 압력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고, 거기에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외상후 스트레스도 극심했다. 여기에 여동생의 죽음으로 이재명이 보내는 모욕적 문자는 결정적 타격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이재선은 쉽게 흥분하기 시작했고 자기를 정신병원에 보내려 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명예훼손으로 사람들을 고소하는 등, 그러면서 자료를 찾는라고 밤샘을 하고 그러면서 이재선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이재선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고 갈수록 상태는 악화 되었다. 충동적인 행동이 잦아지고 낭비벽이 심해지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발음도 부정확했다. 전화에 매달리는 일이 많아졌고 합리성이 결여 된 발언들이 나왔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결국 전문의를 찾아 진료를 받았고, '양극성 정동장애, 현존 정신병적 증상이 없는 조증' 진단을 받았다. 그때 입원 치료를 했던 것이 2014년 11월 21일이었다. 이재명이가 정신병자로 몰던 때로부터 2년 6개월이 지난 후였다.
이재선은 한 달 후 퇴원할 수 있었고, 간간이 통원 치료를 받으며 2016년부터는 SNS를 하기도 했다. SNS를 하면서 자기가 입원했던 사실을 이재명이가 악용하는 사실을 알았다. 이재명은 2012년의 이재선을 정신병자로 몰아놓고서, 2014년의 입원 사실로 근거를 대는 것이었다. 파렴치한 짓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재선 부부는 2017년 2월에 이재명을 상대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이재선은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2017년 11월 세상을 떴다. 이재선의 죽음마저 이재명은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재명은 일군의 기자들을 이끌고 장례식장을 찾았고, 유족들이 조문을 거부하는 장면을 찍어 기사에 써먹었다. '"이재명 "형 이재선과 화해하고 싶다" 바람 못이뤄... 빈소서 '문전박대'' 기사의 제목과는 달리 대선 기간 동안 이재명의 형에 대한 발언에는 형과 화해하려는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재선의 임종을 앞두고 큰형수와 누나가 병문안을 왔다. 그때 이재선은 누나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누나는 가슴을 치면서 하소연했다. "내 동생이 생으로 죽는구나, 내가 없이 살아서 재명이한테 뭐라도 얻어먹을 것이 있을까 싶어서 재명이가 거짓말하는 걸 알고도 밝히지 못했어, 미안해. 용서해줘!" 이재선은 누나를 용서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세상과도 화해를 했다. 이재명은 병문안도 오지를 않았다. 대신에 이재선 부부에게 또 고소장을 보냈다.
이재선이 타계하면서 이재선의 전쟁은 끝났다. 어쩌면 이재선의 전쟁은 이재선의 거짓말로부터 촉발된 전쟁이었다. 성남시장 당시 자기를 포장하던 거짓말, 형님을 정신병자로 몰기 위한 거짓말, 이재선은 이런 거짓말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건 작은 전쟁이었다. 그러면서 이재선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한 위선과 모순을 목도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재선의 전쟁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큰 전쟁이 되었다.
이재선은 이재명의 권력에 패배했다. 그러나 이재선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폐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이재선은 수세에 몰렸지만 이재명이가 대선주자로 나서면서 이재선은 반격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 진실은 패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재명에게는 권력이 있었지만 이재선에게는 진실이 있었다. 이재선의 진실을 향한 열정 덕분에, 권력을 상대로 한 이재선의 용감한 전쟁 덕분에, 지금 국민들은 이재명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개 개인으로서 권력의 위선과 왜곡에 대항하여 싸웠던 고 이재선 씨의 용기와 정의감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유튜브를 삭제당하고, 5.18을 발언했다는 이유로 고소장을 받고, 권력의 핍박 앞에서 당당하게 싸우는 대한민국 진실의 용사들에게도 감사와 격려를 드리는 바다. 진실은 항상 승리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꼭 승리하는 법이다. 진실이라는 무기를 가진 자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고 이재선 씨의 명복을 빈다.
비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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