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보수 되기 <1> – 지역 차별하지 맙시다
① 호남사람들은 왜 좌파를 찍을까
지난해(2023년) 여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딸아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전라도 광주’라고 하는 데 이거 멸시의 뜻이 있는 거 아니야? ‘경상도 부산’, ‘경상도 대구’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거든. 광주도 광역시인데 유독 그 앞에는 전라도를 붙이네”. 이렇게 대답해 줬습니다. “네 말대로 멸시의 뜻도 있을 것이고 또 일부는 경기도 광주하고 구별하기 위한 것도 있겠지. 전자의 비율이 높을 것 같기는 해.”
딸아이에게 질문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지난해 8월이었습니다. 중앙일보 인터넷판에 김은경 당시 민주당 혁신위원장을 비판하는 기사가 올라왔더군요. 김 위원장이 100억대 강남 2주택 소유자라면서 그 위선을 비난하는 취지의 기사였어요. 그런데 기사 말미에 이런 내용을 붙여 놓았더군요. ‘김 위원장은 1965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서울 성동구의 무학여고, 한국외대를 졸업한 후 독일 만하임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사에 달린 댓글이 가관이었습니다. “졸라도였구만…의.”, “전북 전주 출신이었구나. 그러니까 저 여자의 모든 게 다 이해됨”, “좌파구리 홍어애탕”.... 이 보다 더 심한 호남혐오 표현이 있었는데 복사해서 붙이기를 하려고 보니 ‘클린봇이 부적절한 표현을 감지한 댓글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삭제돼 버렸더군요.
비슷한 시기에 박영수 전 특검이 구속됐습니다. 대장동 일당을 돕고 뇌물을 챙겼다는 이유였지요. 어떤 신문사나 방송사도 그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말미에 그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내용을 쓰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주도에 대한 혐오 댓글도 없었고요. 딸 입시비리로 국민적 지탄을 받은 조국 전 장관에 관한 기사에서도 그가 ‘경상도 부산’ 출신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없고 영남 혐오 댓글 역시 본 기억이 없습니다. 추미애 민주당 전 대표에 관한 기사에서도 그가 ‘경상도 대구’ 출생이라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요.
저는 광주광역시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다녔습니다. 대학생 시절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본인이 ‘경상도 부산’에서 태어났는데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아기를 보러 자기 집에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여 엄마 아빠가 전라도 아이가!” 했답니다. 조금 전까지 아기 귀엽다고 하던 아주머니들이 얼굴이 싹 변하더니 나가 버렸다고 하네요. 그 교수님도 당신의 어머니에게 들은 얘기였을 텐데요. 진짜 그랬을까요? 과장이나 거짓말 아니었을까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을 ‘경상도 대구’에서 다녔습니다. 그때 이사를 몇 번 다녔는데 그 이유가 참 기가 막힙니다. 제 아버지가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했던 거였어요. 대구에서만 그랬던 게 아닙니다. 강원도, 서울, 충청도, 제주도에서도 살았었는데 강원도를 빼고 모든 곳에서 차별과 멸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충청도 사람인 제 어머니는 그 지경을 겪으면서 자식만은 전라도 사람 만들지 않겠다며 본적을 강원도로 바꾸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홍글씨가 어디 가겠습니까? 견디다 못해 결국 광주로 이사를 왔지요. 그 때가 1980년 4월이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들 아시지요?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덟 살 때 여수에서 살고 있었는데, 여순 14연대 반란이 일어났다. 그때 학교 운동장에서 군인이 좌익 한 명을 사살하는 것을 봤는데 쏘고 나서 꿈틀거리면 또 쏘고 다시 쏘고 계속 쏴서 죽였다. 광주로 이사 온 뒤 5·18 때 금남로에서 진압군인이 어떤 청년을 잡아 뒤통수를 곤봉으로 때렸는데 개구리처럼 쭉 뻗어버리더라.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는데 군용트럭 짐칸에 던져올리고는 어딘가로 가버리더라.” 1905년생인 제 할아버지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순 14연대 반란이 진압된 다음에 온 마을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줄 세웠다. 부역자를 색출했는데 손가락 하나만 저쪽으로 움직이면 바로 끌고 가서 총살했다. 그 때 네 큰아버지의 동창들도 몇 명 죽었는데 나와 네 큰아버지는 죄 없다고 안심한 게 아니었다. 정말 무서웠다.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웠다.”
지난번 대선에서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된 다음에 제가 사는 마을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워매, 인자 전라도 사람 다 죽여 불면 워짜꼬 이.”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저 할머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쩜 저렇게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호남인으로서 죽음의 공포를 느꼈던 게 내 아버지, 할아버지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었구나. 이곳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공유되고 있는 두려움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라도 사람에게 정치문제는 단순한 이념이나 이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 문제로 해석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호남의 기독교 인구 비율이 유독 높은 것이 이해가 됩니다(호남 22%, 경북 14%, 경남 9%, 2023년, 한목협, 개신교 기준). 죽음과 차별이라는 엄중한 공포 속에서 핍박받는 자와 함께 하겠다 약속하신 기독교의 신께 살려주시기를,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겠지요. 동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여전히 높은 것도 이해가 됩니다. 김대중이라는 인물의 실체와 상관없이 차별과 멸시를 극복해 줄 ‘선생님’으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호남을 혐오하는 레토릭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전라도에 가면 집집마다 김대중 사진이 다 걸려있다’ 이거 호남을 북한 같은 곳으로 이미지화하려는 건데요. 전라도 사람 집에 김대중 사진이 걸려 있는 경우는 없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쪽에 가보면 과거 그가 선거 운동하고 다닐 때 악수했던 사진, 같이 서서 포즈 잡고 찍은 사진을 붙여 놓은 집이 있기는 합니다. 소수 그런 집이 있다고 해서 그게 뭐가 문제인가요? 집에 불나면 그 사진부터 들고 뛰기라도 한답니까? 구미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 걸어놓은 집이 한 군데도 없습니까?
호남을 차별하고 멸시하는 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일종의 유교적 인종주의입니다. ‘전라도는 형님보고 자네라카제?’ 이런 식이지요. ‘자네’라는 용어가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가에서 부인이 남편을 부를 때 쓰던 호칭이었다는 것을 모른 채 멸시의 근거로 사용하는 무식한 사람들에게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념 차원입니다. 왜 호남은 좌파를 지지하고 숙주(宿主)가 되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엄청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지난번 대선에서 보수당이 25만 표 차로 신승을 거둘 때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게 호남지역 유권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시기를 권합니다.(광주전남북 보수당 지지율 및 득표수, 19대 대선 2.4%, 8만5천 표 → 20대 12.8%, 44만7천 표)
② 보수 집권 가능성과 호남 유권자의 선택
이번(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 175석, 국민의힘 108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와 진보당이 각 1석을 차지했습니다. 이념적으로 보면 좌파가 189석, 우파가 111석이지요. 이것을 다시 反윤석열 대 親윤석열로 나눠보면 192석 대 108석이 됩니다. 우파의 참패인 동시에 윤석열 정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을 이념지형으로 해석해보면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한 보수세력이 침몰 위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경상도 부산’에서 당선된 여당의 한 당선자는 “4년 전보다 의석은 5석이 늘었고 득표율 격차는 5.4%로 줄었다(민주당 50.5%, 국민의힘 45.1%). 3%만 가져오면 다음 대선에서 이긴다”고 했다지요. 그런데 비례대표 득표율에서 14% 차이로 졌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네요(민주+조국 51%, 국민의미래 37%). 개혁신당과 자유통일당을 합치면 비례에서도 6% 정도 차이니까 지역구에서 차이와 비슷하다는 건가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신가요? 이준석과 의사들을 그렇게 핍박해 놓고서 개혁신당 지지자가 우리 편이 될 것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미래통합당(現국민의힘)이 야당일 때 치른 총선과 집권 여당이 된 다음에 치른 선거를 단순 비교하면서 의석과 득표율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낙관하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이런 정치인들을 보면서 ‘영남 국회의원들은 대선 결과에 관심 없다. 자기들 국회의원 자리만 유지하면 그만이다’라는 어느 정치평론가의 말이 맞구나 싶네요. 하물며 그들이 보수의 미래를 진심으로 고민할 가능성은 더욱 낮겠지요. 보수세력이 침몰 위기에서 벗어나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현 대통령과 영남지역 여당 의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수세력 중에서 호남지역을 보수집권의 장애물로 여기고 어차피 저 지역은 포기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2000년대 이후 치러진 다섯 번의 대선에서 보수당이 세 번을 이겼는데, 이명박 후보처럼 압도적으로 이긴 경우(22.5% 격차) 호남 표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좌우의 득표 차가 적어질수록 호남의 보수 지지표가 중요해집니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108만 표 차이로 승리할 때 호남(광주전남북)에서 33만6천 표를 얻었습니다. 무시할 수 없는 기여였지요. 지난번 20대 대선에서는 윤석열 후보가 0.73%, 24만7천 표 차이로 이겼는데 호남에서 44만7천 표를 얻었습니다. 이건 무시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결정적인 승리 요인 중 하나였지요.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추세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수가 승리할 때 좌파에 대해서 거두는 득표율 차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명박 후보는 22.5% 차이, 박근혜 후보는 3.5% 차이, 윤석열 후보는 0.7% 차이로 이겼습니다. 이거 우연일까요?
이 지점에서 1958년생(77학번) 전후부터 1972년생(91학번) 전후까지 약 15년 내외의, 소위 586 세대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들은 젊은 시절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 정권, 민주화 과정을 겪었지요. 그 과정에서 운동권 리더들은 물론 다수의 학생과 일반인도 좌파사상을 갖게 되었거나 적어도 보수를 혐오하는 정서를 갖게 됐습니다. 이 세대의 인구수가 2022년 기준 1276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약 30% 정도입니다. 젊은 세대의 출생률이 낮고 70대 이상 노년층은 생물학적 수명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586 세대가 유권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더 높아지게 돼 있습니다. 좌파정당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향후 20~30년간 선거에서 점점 더 큰 영향력이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586 세대 중에서도 애초에 보수적이었거나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세대가 겪은 역사적 경험이 너무나 강렬했고, 또 민주화를 이뤘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좌파적 경향이 바뀌기는 쉽지 않습니다. 앞으로 특수한 계기가 없는 한 보수정당은 향후 선거에서 지거나, 이기더라도 근소한 차이로 간신히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번 총선(2024년) 지역구 투표에서 국민의힘은 호남에서 29만6천 표(득표율 10%)를 얻었습니다. 지난 대선 득표수보다 15만 표 정도를 적게 얻었습니다.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찍었던 호남 유권자 중 상당수가 보수당에 등을 돌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눈에 띄는 것이 비례대표 선거인데 조국혁신당이 민주당을 제치고 1위를 했다는 점입니다. 호남 사람들이 윤석열 정부에 대해서 심한 배신감을 느끼던 차에 이번 총선에서 가장 아프게 윤석열 대통령을 때릴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 조국혁신당이었다고 봅니다.
앞서 언급한 국민의힘 부산지역 당선자로 돌아가 보지요. 이번 총선에서 5.4% 정도로 졌으니까 앞으로 분발하면 이길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 속에는 보수가 이기더라도 매우 적은 차이로 이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전제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호남에서의 득표가 중요하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번 총선 후 국민의힘은 어떻게 했습니까? 당대표부터 시작해 주요 당직을 영남지역구 의원들이 다 해 드셨지요. 국민의힘에서 그나마 호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호남지역 유권자에게 진심 어린 메시지를 보냈던 이준석 당대표는 쫓겨나고 말았고요.
이번 정부 들어서 ‘지금 뭐 하는 짓이지?’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박민식 전 보훈부 장관이 ‘정율성’ 문제를 제기했을 때였어요. 정율성은 광주에서 태어난 음악가로 1930년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서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사람이고 6·25 전쟁 때는 북한군 협주단장으로 참여해 서울에 오기까지 했습니다. 광주시가 나서서 이런 사람을 기념하는 공원을 조성하고 음악제를 개최하는 게 부당하다는 것이지요. 아, 그래요? 그런데 말입니다. 윤이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1960년대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국제적 압력으로 출옥해 서독으로 도망간 뒤 김일성을 계속 찬양했고 90년대 친북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의장을 맡았던 사람,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이라고 했던 것을 사과하라는 요구를 끝내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오길남 일가족 월북 사건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의심받는 사람을 기념해서 국제음악제를 대규모로, 매년 개최하는 경상남도 통영시에 대해서는 왜 말씀이 없으신가요. 이거 설마 호남포위 전술로 선거를 치러보겠다는 계산은 아니었겠지요?
이런 식이다 보니 호남 사람들이 화가 나고 찍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번 총선 사전투표가 있었을 때 70대 중반 어르신이 투표를 한 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요. “찍을 데만 있으면 진짜로 딴 데 찍겄네!” 호남 사람 중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을 위시한 좌파 정당을 찍고 싶지 않아 합니다. 한심한 수준을 보여준 광주시 지역구 의원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유권자도 적지 않아요. 2017년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이 아닌 안철수를 찍은 호남 유권자가 30%에 육박하지요(광주 30.1%, 전남 30.7%, 전북 23.7%). 만약 보수정당이 당선 가능성이 있으면서 호남에 대해 진정성을 가진 후보를 세운다면 최대 30% 득표를 목표로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 주변 사람들이 맞아! 맞아! 하면서 동의하는 말이 뭔 줄 아십니까? “윤석열은 미워도 이준석은 괜찮아 보입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