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신 국방장관, 확실한 좌익이다(좌익인물제3호)
김동신 국방장관의 좌익행동(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인물 제3호)
1. 현 국방장관은 6.25때 군에 간첩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호국영령들의 넋을 모독하 는 행위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지금도 군에는 간첩이 없다고 공언합니다. 간첩을 잡지 말라 는 뜻입니다(조선/동아일보 2002.5.7). 아래는 국군기무사령부의 간첩검거실적입니다. 이런 실적이 있는데도 군에 간첩이 없다 고 말하는 것은 기무사더러 간첩을 잡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입니다. 1) 군 주요 보직자 포섭, 지하당 구축 및 군사기밀 탐지 간첩('74.9.검거) 2) 군인가족을 통해 군 장성 포섭을 기도한 간첩('77.4.검거) 3) 고교생이 사관학교 장교로 침투한 간첩('86.8.검거) 4) 해군간부인 형을 통한 군사기밀 탐지 간첩사건('84.7.검거)
전 외무부 장관 최덕신, 해군 참모차장 이용운이 간첩이었습니다. 최덕신은 정전위 한국측 대표였으며 육사교장이었습니다.
김동신은 6.255때에도 군내에 간첩이 없다고 단언하지만 "6.25 전사를 다시 읽는 분들은 한 결같이 빨갱이들이 한국군의 작전계획을 짜고 작전을 지휘했다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는 말 을 합니다.
"군번 1번의 외길 인생 이형근 회고록"(중앙일보사) 제55족-57쪽에 군수뇌부에 숨어있는 간첩을 의심하는 10대 불가사이가 기록돼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6.25전쟁 전후에 나타난 10대 불가사이를 지적함으로써 향후 국가방위를 위 한 교훈으로 삼고 싶다. 그것은 군사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다. 나는 6.25 초전의 전후 사정을 종합 판단할 때 군 내외에서 좌익분자들이 긴밀하게 합작, 국군의 작전을 오도했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통적(通敵) 분자가 과연 누구냐? 나로서는 수상하다 고 느껴온 사람이 있지만 심증만 갖고 꼭 집어 거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들 가운데는 죽은 사람도 있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누군가가 확증을 제 시할 것으로 믿으며 바로 이런 증언이야말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도 긴요한 일이라 믿 는다. 풀려야 할 가칭 10대 미스터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선 부대의 적정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 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모두가 지형과 병사에 익숙 치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 았다
셋째,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다. 6.13-6.20일에 걸친 전후방부대 이동 역시 가장 부적 절한 조치였다.
넷째, 북6.11부터 발령됐던 비상경계령이 6.24일 0시에 해제됐다.
다섯째,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육본은 비상경계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1(50%)에게 휴 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여섯째, 육군 장교클럽 댄스 파티다. 장교들은 6.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다.
일곱째, 적의 남침 직후 우리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여덟째, 적의 공세로 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6.25-27일 우리 방송 은 국군이 반격, 북진중이라고 허위방송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아홉째, 한강의 조기 폭파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서둘러 폭파했다.
열번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이다. 최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9.21일 비밀리에 처형됐다.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김동신은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의 회고록을 "호국영령들의 넋을 모 독하는 글"이라고 말했습니다.
2. 기무사가 1년여에 걸쳐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실상'이라는 자료를 작성했습니다. 군내 좌 익 세력이 1,000명이 넘고, 청와대와 권력 핵심부까지 김정일 추종세력이 있다는 등의 내용 이 포함돼 있습니다(강창성 의원 국정감사). 조성태 장관은 이 보고서를 전군 지휘관들에게 배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김동신 장관은 그 자료를 작성한 기무사 대공처장(염준장) 을 해외출장 중인 2001.6.30일에 갑자기 전역시켰습니다"(월간조선 2001.8월호 심층취재 특 종). 일용직도 아닌 장군, 더구나 간첩 잡는 일에 열심이었던 장군을 비상시기도 아닌데 해 외출장 중에 갑자기 전역시킨 일은 분명한 좌익행위입니다.
3. 김동신이 합참 작전본부장(전대간첩본부장)이었을 때 그는 적을 가둔 포위망을 풀게 해서 3명의 적을 포위망에서 풀어주었습니다. 풀려난 간첩은 수명의 민간인을 죽이고 표일병을 죽이고 기무사 대령을 사살한 후 달아났습니다. 작전 상황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신문에 발 표하고 TV등에 생방송 했습니다. 세계에서 이런 예는 없습니다. 알아서 빠져나가라는 것 이었습니다.
필자가 이를 법정에서 문제삼자 김동신은 강릉 간첩 포위작전을 매우 성공적인 작전이라 고 주장합니다. 25명 중 25명 모두를 사살 및 생포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작전은 996.9.18-11.07까지 51일만에 종결되었습니다. 무장간첩은 26명이었고, 사살/생포는 25명, 1명 을 놓쳤습니다. 이는 국방부가 당시에 발표했던 공식 기록입니다. 13명 사살, 11명 자살, 1명 생포 1명 도주였습니다. 반면 우리측 피해도 많았습니다, 대령 및 대위 2명. 하사관 1명, 사 병 4명이 사망했고, 17명이 부상했습니다. 민간인 사망자도 여러 명 있었습니다.
군 작전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포위망을 풀어준 데 대한 것이었습니다.
1) 조선일보(1996. 10:10): * 10월 초 군은 돌연 함참 지시(당시 김동신 작전본부장)로 포위망을 풀고 수색병력을 훨 씬 북쪽으로 재배치했습니다. 그래서 강릉 일원의 포위망이 풀렸습니다. 10월9일 민간인 3명이 강릉 일원 즉 포위망이 쳐져있던 지역에서 사살되었습니다. 3명의 간첩이 들어 있었던 포위망을 풀어준 것입니다.
2) 중앙일보(1996. 11-11): * 작전은 함참의 지휘로 이뤄졌다 * 작전실패의 쟁점은 강릉 칠성산 일대의 포위망 해체건이다. 군은 잔당일 10월2일 포위 망 내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북쪽으로 빼냈다. 잔당들에게 도주로를 열어준 셈이다. * 잔당 2명이 남긴 수첩에는 포위망을 푸는 틈을 이용하여 칠성산을 벗어나 오대산에서 민간인 3명을 사살했다.
3) 동아일보(1996. 11-8): *10월3일 이후 잔당은 학교에서도 잤다. 용평 스키장, 민가침입, 3군단 사령부 찰영했다. 포위망이 풀려 가능했던 일이다.
4) 중앙일보(1996. 11-8): * 무장공비 2명에서 나온 수첩은 한국군의 소탕작전이 얼마나 엉성하고 착오투성이었는 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49일간의 이들의 도주행각을 보면 26명 중 25명이를 소탕한 게 우연이었을 뿐, 작전이 주효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해 해주고 있다. 5) 조선일보(1996. 12.09): * 국방위가 "합참이 일선부대에 작전실패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 여야 의원이 특검 보고를 듣고 "침투조 안내조장인 유림을 생포할 수 있었음에도 사살하 게 된 경위와 표종욱 일병의 수색작업에 대한 해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 우리 군 포대장이 안내조장인 간첩 유림과 2m 지점에서 5분간이나 대화했다면 간첩이 권총을 배들 의사가 없었다는 것"인데 왜 사살했느냐?
4. "김동신 국방장관은 지난 8월 11일 국방부 국.실장 회의를 주재하면서, 앞으로 군에서 북 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를 호칭하거나 표기할 경우 반드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통일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바로 김동신 장관이 '북괴'라는 용어를 군으로부터 완전히 폐기처 분한 주역인 것입니다"(한겨레 2001.8.13). 이런 장관 밑에서 군의 그 누가 감히 '북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군의 총수가 김정일을 대통령 이상의 극진한 존칭으로 부르라 고 명령하는데 그 어느 군인이 김정일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5. 2001.6. 2일 11:43분에 14,000톤급의 초 맘모스급 청진2호가 울산 앞 바다에서 발견됐고 이어서 7,000톤급과 4,000톤급이 제주해협을 유린하고 있을때 김동신 장관은 4시30분부터 골 프를 쳤습니다(중앙일보 5면 2001.6.23). 해군에는 이미 무력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현장지휘관에게는 "UN사 자동교전규칙이 주어져 있습니다. 적이 나타나면 위에 보고하지 않고서도 선조치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군 현지 지휘관이 자 동교전규칙을 적용하지 않고 31시간동안 적함에 농락 당했습니다. 대응을 하지 말고 정중히 모시라는 명령이 없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작전은 군이 독자적으로 수행한 게 아니라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수행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2001.7.12일 군 2성 장군에 의해 드러났습니다. 이는 곧 군에게 50년간 부여해왔던 자동교전규칙(SOP; Standing Operation Procedure)을 박탈당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전쟁을 일일이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해서 한다면 그 전쟁은 초장에 집니다. 전쟁은 시간과 의 전쟁입니다. 작전 예규라는 것은 그런 개념에 따라 위에 보고하지도 말고 눈감고 따르라 는 자동교전 절차입니다. 이런 현장 작전권을 대통령이 빼앗아 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시해 야 할 위험한 "대통령의 월권"입니다. 다음은 2001.6.14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필자의 글입니 다.
"북한 상선들과의 교신록 전문이 밝혀졌다. 두드러진 것은 6월 2일 오후 12시45분부터 6 월 3일 오전 9시30분까지 무려 21시간에 걸쳐 이뤄진 청진2호와 우리 해군 수원함과의 교신 내용이다. 이 교신 내용엔 현재 우리 군이 처해있는 처지와 심리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담함 그 자체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해군함정은 상부에 보고 하기 전에 무조건 경고·정선·검색한 후 경우에 따라 나포해야 한다. 이는 연합사 자동 교 전규칙이자, 우리 해군의 권한이다. 그러나 교신록에서 나타난 한국 해군 장교들의 말은 너 무나 위축돼 있었다. 북한 함정에 바짝 접근해야 할 해군함이 오히려 5회에 걸쳐 북 선박에 게 “우리 함정과 너무 가까이 붙어 항해하고 있으니 2km이상 떨어져 항해해 주십시오. 위 험합니다”라는 부탁을 했다. “홍도해협은 우리 영해이니 제주남방으로 돌아가시오”를 무 려 23회에 걸쳐 간구했다. 이에 대해 북 선박은 “김정일 장군이 지켜보고 계시다”, “6· 15때 결정됐고, 공화국이 그어준 항로라서 변경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잘랐다. 물론 우리 해군도 상부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겠지만, 북 선박과 교신하는 어투에 주눅이 들어있다. “…하시길 권고합니다” “안전에 문제가 있습니다” “협조바랍니다” “…지켜주시는 것 이 합리적이라 생각됩니다”, “귀선의 입장은 알겠습니다”는 등. 마치 주객이 전도된 느낌 이다. 심지어 북 선박이 우리 해군·해경함에 “도발하지 말라”고 나오는데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해경함이 북 대홍단호에 대해 “검색하게 해달라”고 사정 하는 것은 희극에 가깝다. “남측의 검색 의사를 (북측) 본사에 연락해 허락을 받아달라”고 두 번이나 사정하다, 거절당하자 “(북 선박) 선장님 권한으로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통사 정하고 있다. NLL, 흑산도해협, 제주해협을 잇는 그 넓은 영해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닌 북 한선박은 큰소리 떵떵치고, 우리 해군 함정들은 농락당하면서 저들을 안내했다. 이번에 우리 군이 보여준 사정하고 매달리는 모습은 1999년 6월 연평사태와는 너무도 딴판이어서 놀라울 정도다. 이번 교신록은 군이 본분을 잊고 눈치집단화 했다는 한 증거가 될 것 같다".
국민의 자존심을 꺾고 군을 적군 앞에 무릎 꿇게 한 용서할 수 없는 좌익행위입니다.
6. 영해를 떼어내 북한에 주자고 했습니다.
자기 부하들을 적군 앞에 무릎꿇게 한 것도 용서할 수 없는 좌익행위이지만 영해가 너무 넓어 주체할 수 없으니 일부를 떼어 북한에 내어주자는 연구를 시키다가 언론의 질타를 받 고 물러섰습니다. 이런 좌익이 우리의 국방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 겨놓고도 국민은 태연합니다.
"국방부가 북방한계선(NLL)이 서해 42.5마일, 동해 218마일이나 돼서 NLL사수가 어렵기 때문에 NLL 수역을 '절대사수구역', '경비구역', '공해권'으로 3분하여 공해권 해역에 들어 오는 상선에 대해서는 '침범'이 아닌 '통과'로 인정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조선일 보 사설 2001.6.17).
7. 주적개념과 국방백서 발간을 포기했습니다.
주적개념을 국방백서에 넣을 수 없어서 해마다 발간해 오던 국방백서 발간을 무기한 연기 하기로 발표했습니다(2002.5.24 일간지). 북한이 주적인지 아닌지는 휴전선이 말해줍니다. 국 방장관이 김정일이 무서워 북한을 주적이라고 백서에 조차 감히 표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북한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를 호칭하거나 표기할 경우 반드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 장'으로 통일하도록 지시할 만큼 김정일에 극진한 존칭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김동신 장관 이 어찌 언감생심 북한을 주적이라고 표기를 하겠습니까?
8. "2000.8.22일 김동신 장관이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갈 때에 임진각에까지 가 서 꽃다발을 건넸습니다"(민원 회신에서도 본인 인정)
9. 국방일보가 2001.3.22일자 9면에 북한의 피바다를 크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북한의 피바다를 극찬한 국방일보에 대해 기무사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기초자료 조사 에 착수하다가 군수뇌 분위기에 눌려 수사를 그만 두었습니다(주간조선 2001. 4.25). 김동신 장관의 분위기에 눌려 간첩 잡는 일이 중단된 것입니다. 앞서에서도 김동신은 군에는 에나 지금이나 간첩이 없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여론이 빗발치자 국방홍보원장이 교체됐다. 김동신 장관은 국방위에서 "문제의 기사는 예 술작품을 통해 김일성부자의 우상화에 치중하고 있는 북한의 실상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주간조선 2001. 4.25)
10. 조선일보는 "여순반란 사건에서 좌익 반란군을 정당화 및 미화시킨 영화 "애기섬" 제작 에 군이 트럭, 헬기, 소총, 군복 등을 지원했다해서, 김동신 장관을 책임지고 물러나라" 했습 니다(2조선일보 001.9.18)
11. "최근 김남국 예비역 대령이 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북풍사건'을 조작하는 데 김동신 전 총장이 관여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동신 전총장은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강 력히 부인했습니다"(조선일보 2000.6. 16).
1996년 4월이면 김동신은 중장으로 비정규전과 평시작전을 총괄하는 합참작전 본부장이었 습니다. 바로 몇 달 후인 9월에 김동신은 강릉 작전에서 무조건 포위망을 풀라해서 간첩 3 명을 풀어준 바 있습니다. 김남국 대령의 주장은 실로 엄청난 명예훼손입니다. 그런데도 그 는 김남국 대령에겐 소송을 하지 못하고 앉아서 당했습니다.
12. "한총련이 긴급수배전단 일제히 살포했습니다. 수배자 명단은 김영삼, 이회창, 조성태, 김용갑이었습니다. 조성태 전장관은 '주적개념을 유지하는 주한미군의 졸병'으로 표현됐습니 다"(월간조선 2001. 2.21). 주적개념이 확실한 조성태 장관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갈렸습니다. 그리고 임기 말 막바지에 김동신이 들어와 친북 작전을 노골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13. "주적개념을 확실히 밝힌 조성태 장관은 재임기간 내내 북으로부터 반통일 세력이라는 흑색선전을 당했지만, 김동신 장관에 대해서는 흑색선전이 별로 없습니다"(월간조선 8월호 심층취재 특종)
14. 지난 6월1일 철원에서 새로운 땅굴을 발굴하여 제보했지만 그는 조사해보지도 않고 땅 굴이 아니라고 일축했습니다(강원일보/강원도민일보. 2001. 6. 1)
한 두 개의 사건은 많은 것을 전달하지 못합니다. 많이 모여야 추세가 형성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모두 연결해 보면 김동신 국방장관은 좌익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습니다. 국방부 정책보좌관 차영구 중장이 2002.5.7일 자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에 난 광고문 "좌익정권 몰아 내야 국가가 산다"의 제8항(국방장관의 명령: 북한을 도와라?)만을 가지고도 "국방장관을 빨 갱이로 몰 수 있느냐"며 제게 소송을 걸겠다 했습니다. 그때에는 지면 때문에 6개항만 아주 간단히 나열했었습니다. 위의 내용은 지난 광고문안보다 더 기가 막힌 내용들이 추가되었습 니다. 간단하게 표현된 6개항만을 가지고도 국방부 고위간부가 "빨갱이"라는 결론을 내렸습 니다. 이로써 국방장관 김동신을 "좌익"으로 규정하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음을 공포합 니다.
200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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