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업들이 외국업체를 대하는 대우와 내국업체를 대하는 대우는 극과 극으로 다르다. 외국기업에 지불해야 할 돈은 날짜를 어기지 않고 지정 은행에 지불한다. 그러나 한국 업체에게 지불해야 할 돈은 진을 빼고 고통을 준다.
중소업체들이 납품을 하고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불쌍한 인부에게 일당을 주지 않는 업체들이 많다. 바느질을 시켜놓고도 돈을 주지 않는 포목점들이 많다. 대부분의 서점들이 책값을 제대로 지불해주지 않는다.
서점들은 매월 지정된 날짜에만 자가 어음을 발행해 준다. 그나마 받아야 할 돈의 일부만을 어음으로 주는 것이다. 서점의 뒷골목에는 몇 푼의 돈을 받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다. 3-4개월 후에 어음의 만기가 되면 또 한 차레 줄을 서야 한다.
20여만 개의 중소업체가 등록돼 있다. 등록되지 않은 업체들도 많다. 이들은 모두 이러한 후진국적 결제문화 때문에 물질적 정신적 고통을 받으면서 생업을 영위하는 찌든 인생들이다.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인데도 구걸하는 마음으로 눈치를 본다. 생의 질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돈을 받으러 다니는 데 국민시간이 엄청나게 낭비되고 있다. 년간 20조원에 해당하는 시간과 교통비가 낭비되고 있다. 돈 받는 일이 무서워 창업을 포기한 사람들도 매우 많다. 왜 외국 기업에는 현금으로 결제해 주면서 한국인에게는 부당한 대우를 하도록 방치돼야 하는가?
이러한 관행으로 인해 경제가 파괴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민성과 사회정의까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행 때문에 지난해 하루 평균 30개 업체가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사업체의 평균수명이 겨우 6년 반이었다. KDI의 어느 한 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중소업체가 판매대금으로 받은 상업어음은 연간 125조원이라 한다. 이만큼 엄청난 신용이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9년 전에 초관리 운동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당시 60만원 봉급자가 담배 한대 피우는 시간에 회삿돈 900원이 증발되고, 커피 한잔 마시는 데 1,800원이 증발된다고 하며 허리띠를 졸라맨다. 아렇게 어렵게 절약된 시간은 후진국적 결제문화 때문에 증발되는 시간에 비하면 부스러기 시간이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자금난을 정책금융으로 해결해주겠다고 하지만 이는 중소기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러는 금융기관더러 어음을 과감하게 할인해주라고 촉구하지만 금융기관들의 한국적 관행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가장 쉬운 방법을 놓고 왜 이렇게 안 되는 방안들만 대두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미국에서의 결제는 청구서 한장만 발송하면 비대면 결제가 쉽게 이뤄진다. 30일 이내에 갚을 때에는 원금만을, 60일 이내에 갚을 때에는 2%의 가산금을, 90일 이내에 갚을 때에는 4%의 가산금을 지불하라는 조건들이 청구서에 명시돼 있다. 90일이 넘도록 갚지 않으면 수금 대행기관인 Collection Agency에 의뢰한다.
소액재판도 할 수 있다. 지방법원에는 창구 앞에 소액재판청구서가 쌓여 있다. 오다가다 들려 그 용지에다 간단한 자료를 적어내면 케이스 번호를 내준다. 잊어버리고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법원에서 편지가 날아온다. 동네에 있는 마을회관에 판사가 갈테니 언제까지 나오라는 내용이다. 회관으로 나가면 판사가 즉석에서 판정하고 명령을 내린다. 변호사를 살 필요도 없고, 서류를 만드는 일도 없다. 단 한푼의 돈도 들지 않는다. 법이 국민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수금 대행기관에 회부된 업체는 Duns & Bradstreet 등 신용조사기관에 기록된다. 어느 기업이든 멤버십만 가지면 그가 알고자 하는 업체의 신용과 프로필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연간 거래실적이 기록돼 있고, 임금 체불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신용불량 업체는 은행으로부터 돈을 얻지 못한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 수금 대행기관을 만들고, 90일 이내에 돈을 갚지 않는 업체는 은행돈을 쓸 수 없게 해야 한다. 돈을 늦게 갚을 수록 높은 이자를 지불케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지하 경제의 상당부분이 노출될 것이다. 경제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부도 업체도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창업을 하게 될 것이다. 돈 받으러 다니는 데 소요되는 연간 20조원 상당의 낭비가 없어지는 반면 이 시간에 GNP의 10%에 상응하는 또 다른 가치가 창조된다.
비대면결제 제도는 선진국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중소기업이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제도다. 어설픈 정책금융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사회간접 시설의 낙후로 인해 물류비용이 미국이나 일본보다 2배나 더 든다. 박대통령은 2만5천km의 도로를 5만km로 확장했다. 그러나 5공에서 6공에 이르는 13년간 두 사람의 대통령은 겨우 여기에 2만km를 더 보탰을 뿐이다.
그나마 돈이 드는 SOC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면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이 어마어마한 이득에 대해서는 왜 관심을 갖지 않는지 매우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푸념은 그래도 정부 내에 일부 양심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할 마음이라도 생겼다.
나는 이 말을 현 DJ 시절에 두 번식이나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에게 말해줬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해 줄 기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DJ 당원들은 조폭까지 동원해가며 펄벅의 메뚜기 떼처럼 달려들어 국가를 바닥내고 국민의 돈을 강도질 해가고 있다. 먼저 쓰고 나중에 세금으로 고혈을 짜낸다. 지금부터 태어나는 아이들은 이미 배속에서 300만원 이상의 빚 증서를 목에 걸고 태어난다. 희대의 시기꾼들이다.
2001.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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