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3월에 제2땅굴을 찾아낸 집념의 사나이는 정명환 소장이다.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이 상신 되었으나 상관들의 질투로 5.16민족상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현재 그는 80을 바라보는 고령이지만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연천과 화성의 땅굴이 속히 절개되어 국민을 안심시켜주도록 당국에 호소하면서 "남굴사"(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란 조직을 지난 3월 중순에 결성했다.
다수의 사회 지도층 인사를 비롯하여 예비역 고급장교들과 박사학위를 가진 전문분야별 학자들 그리고 기술자 및 탐사전문가들 50여명으로 구성된 사명감 있는 일꾼들과 함께 그 책임자로서 상반기내에 민간 성금으로 공사비용이 모아지는 대로 절개작업에 임할 결의를 굳히고 있다.
이하는 1993년 12월호의 NEW WORLD란 월간지에 실렸던 그의 수기중 한 부분이다.
1977년 내가 5.16민족상을 받았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한 말씀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 수상식이 끝난 후 다과회에서 대통령이 일부러 내게 다가와 "정장군이 땅굴을 찾지 못했으면 우리가 한번 당할 뻔했지"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은 그 후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제2땅굴이 발견된 것은 1975년 3월이다. 당시 박대통령은 "1975년 11월에 전쟁이 날뻔했다. 이 놈들이 한 바탕 쳐 내려올 징후를 보였다"라고 말했다.
다음과 같은 박대통령과의 대화가 오고 갔다." 각하, 북한이 스웨덴으로부터 자동굴착기(BTM)5대를 구입해 갔다는 정보가 육본에 의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내 말을 들은 박대통령은 깜짝 놀란 듯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러면 북한이 앞으로 장거리 땅굴을 팔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네, 공법을 달리하면 가능합니다. 직경 2m짜리 자동굴착기는 하루에 30m를, 직경 5m짜리는 60m를 팔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동굴착기를 사용한다면 서울까지도 얼마든지 파 내려올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 북한은 스웨덴제 최신형 자동굴착기 300여대를 보유한 것으로 외신이 전하고 있으며 일부 탈북자의 증언에서도 밝혀진바 있다. 우리 나라의 진로건설 등 일부 건설회사가 이 자동굴착기로서 지하철공사를 한 바 있으며 국내엔 겨우 10여대가 있을 뿐이다.
지난 4월 3일 용사의 집에서 제2차 모임을 가진 "남굴사" 회의시에 자동굴착기모형을 갖다놓고서 기계적 성능과 작업능력을 평가한바 있다.
땅굴 작전은 사소한 나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사단장으로 부임한 3일째 되는 날, 전방을 순시하면서 갑자기 만약 적이 땅굴을 파고 공격해온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후 나는 땅굴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고 자나깨나 이 생각만 하게 되었다.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가 한다. 나는 특별한 징후도 없이 제로시계에서 땅굴을 찾기로 결심했다. 지금처럼 정밀장비나 전문인력이 있은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나의 신념과 병사들의 노고가 유일한 도구일 뿐이다.
적진지에서는 수시로 폭파음이 들렸으나, 최초의 3개월간은 아무런 징후도 발견 못하였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비웃었고, 혹자는 진급병환자라고 힐난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1973년 11월 20일 최초로 전방 청음초에서 이상한 지하음을 청취하기 시작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로 제시할만한 것은 되지 못하였다. 주야로 땅속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굴착음의 시간대별 청취기록을 유지 분석하면서 결정적인 징후를 확증하기 위해 신경을 쓰면서 초소근무를 강화하였다.
이로부터 4개월 후에 철원지역엔 땅굴이 없으니 병력을 철수하란 상급부대로부터의 명령을 받았을 때 참으로 참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장 감각이 없는 상급부대의 탁상공론에 의한 부정적 단정은 같은 행태인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나름대로 땅굴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바, "병력을 철수 시키려면 나를 면직시켜라"고 상급부대에 대항하면서 땅굴징후포착에 정성과 노력을 가일층 경주하였다.
나는 담대하게 지휘관으로서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전제하에 1973년 12월 3일, 아무 것도 건드리지 말라는 군단장의 지시를 어기고 땅굴출구예상지점을 중심으로 그 일대를 사계 청소를 하고자 불을 질렀다.
수목이 울창하면 땅굴을 파고 나와도 쉽게 발견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북한군이 암반을 뚫고 내려온 다음 지상으로 돌출할 지표면가까이에 출구굴착을 진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난 몇 달 동안의 청음과 땅김 올라오는 현장 목격 등으로 굳혔던 것이다.
상당한 불꽃과 연기가 전방방어지역을 뒤덮었던지라, 북한지역에서도 그 위치와 현상을 관측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불이 끄진 다음 2일만에 땅속의 굴착음이 딱 그쳐버렸다. 적은 눈치를 차리고 굴착작업을 일시 유보한 상태였다.
전사단 장병들은 땅굴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굴착음의 재개를 숨을 죽이고서 청취하는데 정성을 쏟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드디어 8개월이 가까워온 1974년 7월 25일 새벽, 요란한 굴착음이 바위틈으로부터 다시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굴착재개작업이 착수 된 것이 확실시 되었다. 기간중의 청음 및 관찰기록을 첨부한 땅굴징후상보가 대통령에게까지 지체없이 보고되었다 .대통령의 최종결단으로 절개확인작업이 시작되기까지는 시일이 소요되었다.
1974년 12월 20일 절개공사가 착수되어 1975년 2월 20일 오늘의 제2땅굴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실제로 현대건설이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역갱도를 관통시킨 것은 같은 해 3월 19일이었으니, 사단장이 땅굴의 최초 징후를 발견한 후 1년 3개월만에 거둔 쾌거였다.
당시 농업진흥공사의 우물 파는 기계 10대를 들여와 영하 20도의 혹한 하에서 시추공을 뚫었는데, 24시간 돌려도 6m밖에 팔 수 없었다. 그리고 땅굴 내 잔적 소탕작전을 하면서 장교 1명이 중상을 입고 사병 8명이 적이 설치한 지뢰와 가스로 말미암아 사망하는 사고도 겪어야 했다.
2001.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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