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생명은 존중돼야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이 말은 피부에 와 닿는 말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살면서 나는 생명과 인권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별로 받아 본 적이 없다. 바닷가를 지나다가 차를 세우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이다 보면 다람쥐들이 나와 사람들 손 끝에 코를 갖다 대고 먹을 것을 구한다.
손바닥에 먹이를 놓아주면 손처럼 생긴 두 개의 앞다리로 먹이를 움켜쥐고 사람처럼 일어서서 앙징맞게 먹는다. 어쩌다 한국 아이들이 이런 곳에 들리면 주위로부터 눈총을 받는다. 다른 생명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지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커다란 모션, 빠른 모션을 쓰면 다람쥐가 놀랜다. 소리를 내도 그렇다.
몬터레이 반도에 이 지역 주민들이 자랑으로 삼고 있는 매우 훌륭한 병원이 있다. 복도에는 물론 구석진 곳에서도 티끌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화장실이나 부엌에서는 윤이 반짝이며, 정결한 유니폼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오는 손님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국적이 어디든 신분이 어떻든 관심조차 없다. 장군이 식당에서 병사틈에 끼어 줄을 서듯 누구나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보호자라는 개념은 미국에 없다. 일단 입원하면 모든 시중은 간호원이 든다. 하다 못해 누워 있던 환자의 요청으로 침대를 일으켜 세워줘도 주의를 받는다.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허용돼 있지 않다. 간호원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허락 없이 환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도 안 된다.
한국인들의 느슨한 자세에 비하면 미국의 의사나 간호원은 혹사에 가깝도록 뛰어 다닌다. 그러면서도 환자에겐 언제나 극진하고 상냥하다. 자세에 점수를 먹인다면 하나는 100점이고 다른 하나는 10점이나 될 듯 싶다.
환자에 대한 배려는 시민정신이다. 병원에서 사이렌 소리가 나면 모든 사람들이 놀란 토끼 눈을 해 가지고 벽 쪽으로 몸을 붙인다. 모든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정지하여 엘리베이터를 비워준다. 도로에서는 모든 차량이 옆으로 붙어 기어간다.
나의 꼬마 아들이 한국에서 청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옆에서 작은 소리로 부르면 못 들은 척 했다. 서울대병원을 비롯해 유명하다는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들은 한결같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손목 시계를 좌우로 이동시키면서 소리나는 쪽의 손을 들어 보라 했다. 센스가 빠른 꼬마는 잘 알아 맞췄다. 나는 미국에서 논문을 귀국 3개월 전에 마쳤다. 귀국하기 전에 녀석을 육군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사가 녀석의 환심을 사려고 온갖 비위를 맞춰가면서 청력 테스트 실로 데려갔다.
한번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청력을 테스트했고, 또 한번은 귓부리 뒤에 있는 뼈에 부착해서 체크했다. 시험결과를 보고 난 병사는 꼬마가 청력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했더니, 귀의 내부 시스템엔 이상이 없는데, 외부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내로라 하는 의사들이 이 병사보다 못했다. 테스트 결과를 살펴본 육군병원 의사는 오클랜드에 위치한 해군병원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병원규모를 보면 육군 병원이 컸지만 해군병원은 소수의 어려운 환자들만 취급했다. 병원에도 계급이 있었다.
해군병원 소령 군의관이 만면에 미소를 띄우면서 입원실로 들어왔다. 귀의 구조가 자세하게 그려진 큰 그림을 가지고 병의 성격, 수술 절차, 위험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아들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의사는 이 말을 경건한 자세로 듣고는 무겁게 대답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튿날 수술을 했다. 일주일 후에 체크해보니 수술이 실패로 판정됐다. 다른 의사가 또 수술을 했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이 두 의사가 내게 다가와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다.
"물론 최선을 다 했습니다만 우리들의 실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동부에서 참으로 훌륭한 의사가 왔으니 또 한번 더 맡겨 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의사가 진료실로 들어오자 다른 남녀 의사들이 마치 여왕을 모시듯이 줄줄이 뒤따랐다. 선임 의사가 현미경을 환부에 고정시켜놓고는 다른 의사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자, 들 보시오. 이게 바로 retraction attics의 정의(definition)이오".
두 사람이 동시에 양쪽에서 환부를 볼 수 있었다. 의사들은 돌아가며 환부를 관찰했다.
"이 아이의 귀속에 세포 가루가 쌓이고 있소. 많이 쌓이면 신경을 눌러서 안면 근육이 마비됩니다. 물론 이 아이의 귀속에는 물이 고이고 있소. 그 물이 청력을 상실케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오. 하지만 단순히 귀속에 가느다란 파이프를 꽂아 물을 뽑아낸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오. 이 아이의 병은 심각하오. 아이를 한국으로 돌려보낼 순 없소. 나는 한국의사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소. 내가 수술을 해야 하오".
가장 빨리 날짜를 잡아도 한달 후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한달 후에 귀국을 해야만 했다. 아이 수술 때문에 귀국을 연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첫 번째 수술 의사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의사님. 이 애 아버지는 군인이라 한달 후에 귀국해야 합니다"
선임 의사가 말했다.
"나는 이 애의 아버지 사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애의 병을 내가 아는 이상 그냥은 보낼 수 없습니다. 이 아이를 한국 의사에게 맡길 순 없습니다".
난처해진 첫 번째 수술의가 내 어깨를 짚었다.
"지 선생님, 이 꼬마를 내게 맡겨놓고 가십시오. 제가 후속 조치까지 완료하여 김포공항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이 아이 또래의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잘 어울려 놀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임의사가 수간호원에게 수술 스케쥴을 보자고 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사정을 점검하더니 어느 환자와 수술 차례를 바꿨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이 아이를 수술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고, 첫 수술의가 내게 축하 악수를 청했다. 다음날 아침, 수술실로 들어가는 꼬마 녀석이 불안 해 했다. 의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의사와 똑같이 수술의를 입고 신발을 신고 입 마개를 하고 모자를 쓴 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아빠, 나 수술할 때 아빠가 같이 있어줄 거지?"
"그럼, 아빠가 이렇게 손잡고 지켜줄게. 걱정 마"
의사가 고깔 콘 같이 생긴 하얀 플라스틱을 녀석의 코에 댔다. 녀석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의사가 말했다.
"He is gone"
수술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자동 유리문밖에 의자를 놓아주었다. 수술대를 지키던 여의사가 간간이 내 쪽으로 다가와 유리문을 통해 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지어 보이며 윙크를 해주었다. 수술이 잘 진행돼 간다는 신호였다. 환자의 아버지까지 극진히 배려하는 이들에서 천사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밤이 되자 나는 아이 옆을 떠나야 했다. 간호사들이 염려 말고 숙소에 가서 편히 쉬라고 했지만 영어가 서툰 아이를 그냥 남겨둘 수 없었다. 나는 쪽지에 글을 썼다.
아이가 밤에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서 좌측에 쓰고, 오른 쪽에는 영어로 번역을 해 놓았다. 녀석이 왼쪽에서 필요로 하는 걸 찾아 그 번호만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간호원이 오른쪽에서 영어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녀석에게 사용법을 교육(?)시켜놓은 후에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튿날, 회복실에 갔더니 간호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원더풀을 연발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느냐는 것이다.
의사들과 간호원들, 환자에겐 해맑은 웃음을 선사해도 그들 자신은 혹사당한다고 할만큼 하루 종일 엄청난 일을 했다. 특히 의사들은 수술실, 진료 실, 세미나 실을 뛰어다녔다. 걸어 다니는 모습은 별로 볼 수 없었다.
세미나 실에는 세미나가 담긴 비디오 테이프가 준비돼 있어 틈나는 대로 찾아가 보았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기 위해서다.
의사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진화하는가, 또는 퇴화하는가? 한국에서는 수술을 많이 하는 게 의료 기술을 향상시키는 첩경이라고 말한다.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의사의 실력향상을 위해 실험대상이 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조직적인 시험대상이 아니라 시행착오식 대상인 것이다.
1982년. 국방연구원에 있을 때 나는 미국에서 유명한 월터리드 육군병원을 찾았다. 의사들의 실력을 어떤 식으로 향상시키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들에겐 시스템이 있었다. 병원, 연구소, 학교가 한 울타리 내에 있었다.
의사는 이 세 개의 분야를 로테이션으로 옮겨다닌다. 통상 3년마다 자리를 옮긴다. 진료 시에 가졌던 의문을 연구소에 가서 연구하고, 연구결과를 학교에서 강의하며, 정리된 실력을 가지고 환자를 진료한다. 시스템에 따라 열심히 일하면 자동적으로 실력이 배양되는 것이다.
1980년 10월. 나는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가까이 지내던 7년 선배 댁을 찾았다. 그들은 아들을 의대에 보내고 싶은데 말을 통 안 듣는다며 설득 좀 시켜달라고 심심 당부했다. 나는 그 학생을 그의 방으로 데려가 이런 저런 미국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모님이 의대를 가라 하시던?"
"지겨워 죽겠어요. 의대는 죽어도 가기 싫거든요. 우리 부모님 좀 설득해 주세요"
"그럼, 그렇게 하고 말고. 그런데 부모님은 왜 너더러 의사가 되라 하시던?"
"생활이 안정된다는 거지요. 돈을 잘 버니까요"
"야, 그렇다면 절대로 의사는 되지 마라. 세상에 할 일이 널려 있는데 하필이면 왜 하기 싫은 걸 꼭 해야만 하니? 우리 한국 부모님들, 참 문제가 많다니까!"
의외로 자기편을 들어주니까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미 해군병원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식을 의사에게 맡길 때,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니, 의사의 능력이 무한할 때 얼마나 구세주 같이 느껴지겠니, 능력 있는 의사, 참으로 성스럽게 보이더라, 그런 의사가 바로 하느님이더라".
"그런 의사가 되려면 머리도 좋아야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고, 자다가도 뛰어 나가야 할만큼 자기 생활을 포기하면서 오직 생명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해. 이러한 각오 없이 단지 안정된 직업과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의사를 선택하는 것은 범죄행위야".
"돈을 벌려고 종합병원에 출근한 월급쟁이 의사에게 환자가 밀어닥치면 얼마나 짜증나겠니? 환자에게 불친절한 의사. 짜증을 내는 간호원은 100% 다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선택했을 가야, 월급만 보이는데 환자가 사람으로 보이겠니?"
"능력이 모자라거나 희생정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직업은 다 가져도 좋으니 제발 의사만은 되지 말아야 해. 의술 공부에 혼을 빼앗길 만큼 그것을 사랑하고 희생하는 생활에서 자기 만족과 성취감을 느낄 자신이 없으면 부모님이 뭐라 하시든 절대로 의학은 하지 마라"
여러 해가 흘렀다. 그는 의사가 되어 있었다.
의사의 능력향상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의료 시스템 개선이다. 미국의 육군 연구소는 3백 마리의 양을 실험용 산에 풀어놓고 포탄을 발사했다.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즉사하기도 했다. 각 부상 부위별로 죽어 가는 시간을 측정했다.
이는 전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부상자들에게 후송 및 치료에 우선 순위를 부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에 따라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은 현장의사를 하나의 과정으로 설치하여 양성하기 시작했다.
의사가 사고 현장에 나가 될수록 많은 응급치료를 하면 그만큼 생명이 연장된다. 후송도중 의사는 병원을 선정하고, 도착하자마자 무슨 조치부터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전 명령을 내린다.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도 설치돼 있다. 환자에게 단 1초의 시간이라도 더 절약해주려는 노력인 것이다.
환자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박대 당하다가 죽어 가는 한국인의 생명과 비교해보자. 2000년도 의료 대란과 한번 비교해보자.
200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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