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1954년부터 10만 감군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남한은 이를 한낱 선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축해 왔다, 그의 제의에 진실성이 있든 없든 남한이 이를 일축해 온 것에는 문제가 있었다. 북한은 이 거절을 남한의 확고부동한 군비 경쟁 의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비 경쟁은 경제력이 좌우한다. 지금은 설사 인민군이 우세하다 해도 시간이 갈수록 그들은 한국군에 비해 열세해진다. 따라서 북한은 군비경쟁에서 이미 비전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북한의 선택은 자연 값싸고 공갈 효과가 최고인 화생무기와 핵무기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한에는 율곡 계획에 의해, 매년 50억 달러어치의 신무기가 쌓이고 있다. 반면 북한에는 단 한대의 전투기를 구매할 수 있는 달러가 없다. 이러한 추세가 10년간 계속돼 보라. 남한에는 500억 달러어치의 신무기가 쌓이는 반면 지금 북한이 가지고 있는 신형무기는 고철로 변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 10년 후에, 북한이 재래식 무기 경쟁에서 두손들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군사 안보 제일주의로 살아 온 북한이 어찌 이러한 지경을 앉아서 당하겠는가.
핵무기 한 개만 있으면 남한에 수천억 달러의 무기가 쌓인다 해도 문제가 아니다. 재래식 무기는 아무리 많아 봤자 핵무기 하나만 못하기 때문이다. 핵무기는 한 개만 가져도 전쟁을 100퍼센트 억제할 수 있지만, 재래식 무기는 아무리 많아 봐야 불완전한 억제력에 불과할 뿐이다. 재래식 무기는 상대방이 평가하기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아랍권의 군사력은 이스라엘의 20 배나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제나 아랍권을 공격했고, 언제나 이겼다. 아랍권의 군사력이 아무리 우세해도 이스라엘은 이를 우습게 여겼다. 북한 역시 우리의 군사력을 우습게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억제력 없는 군사력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은 언제든지 남한을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남한 인구를 세 번씩이나 죽일 수 있는 엄청난 화학무기와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이상, 남한이 지금 사 재고 있는 재래 무기는 아무리 더 많이 사 잰다 해도 의미 없는 일이다. 우리는 하루 빨리 군비경쟁의 무모성을 깨달아야 한다. 북한과 세계를 향해 상호 군축을 제의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한국군은 앞으로 영원히 북한으로부터 위협받고 미국에게는 매달려 사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남한의 안보 정책은 북한이 화생무기 및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때와 아닐 때에 따라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지금의 전력 증강 방향은 북한이 핵무기와 화생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설정된 것이다. 안보는 단 1퍼센트의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군은 늘 말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한의 안보정책은 과거와 비교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남한 단독으로는 이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을 갖출 수 없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한의 핵무기는 고사하고 화생무기 앞에서도 이미 벌거벗은 몸이 돼버렸다. 북한이 화생무기를 사용하면 우리는 방어 전략을 바꾸고 바뀐 전략에 따라 방어 진지를 바꿔야 한다. 휴전선에 오밀조밀 결집돼 있는 진지를 포기하고 이를 다시 넓은 공간에 걸쳐 분산 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진지를 구축하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다. 화생물질이 살포될 경우를 대비해 화생전 방어 장비도 갖춰야 한다. 여기에는 더 많은 돈이 소요된다.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화생전의 경우 방어 수단이 공격 수단보다 훨씬 더 비싸다. 북한이 적은 돈을 가지고 공격수단을 마련하고 있는데 반해 남한은 엄청난 돈을 들여 겨우 방어 수단만 마련한다면 무기 경쟁에서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에 와서 화생전을 위한 공격수단을 마련할 수는 없다. 이미 국제 화학 무기 금지 협정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의 화생방 공격에 대해서는 거의 대책이 없다. 군인들도 대책이 없지만 서울 시민도 대책이 없다. 서울에 화학 무기가 떨어지면 대책이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화생무기와 핵무기 공격에 대해서는 미국의 핵우산을 제공 받을 수밖에 없다. 화생무기만을 가지고도 남한은 북한에 이미 인질이 돼 있다. 특히 서울은 더욱더 그렇다. 화생무기에 의해 인질로 잡힐 때까지는 잠자코 있다가 여기에 북한이 핵무기 하나를 더 보탠다고 아우성치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일이다. 그래서 북한의 핵무기는 이미 남한에게는 군사적 위협이 아니다. 남한의 굴복시키는 데에는 화생무기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무기는 미국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더 많이 띠고 있다. 미국은, 싫으나 좋으나 국제 경찰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미국에 반감을 가질 수 있는 국가나 테러 집단은 세계 도처에 얼마든지 있다. 미국의 재산과 인력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반미감정을 가진 테러 집단이나 테러 국가들에게까지 핵무기가 확산돼 보라.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미국인들은 하루도 마음 편하게 보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핵무기 확산은 미국의 안보에 가장 예민한 문제이다. 핵 확산은 바로 미국의 가장 큰 약점인 것이다.
북한이 외교적 고립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관문을 먼저 통과해야 한다.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미국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북한의 핵은 바로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무기이다. 핵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미국은 북한을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도발하면 미국 핵무기에 의해 무자비하게 멸망돼야 할 테러 집단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의 북한은 어떻게 변화해 있는가. 핵무기 하나를 가지고 미국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다니지 않는가.
북한은 이제 미국으로부터 군사적 안보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미국이 이미 북한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수밖에 없을 만큼 충분한 약점을 잡혔기 때문이다. 첫째, 서투르면 북한은 핵 확산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이는 미국에게 엄청난 고통을 강요할 것이다. 둘째, 서투르면 북한은 미국의 약점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면 미국은 당장 국제 사회에서 매장될 수 있다.
만일 북한이 핵무기 보유 사실을 공표해 보라. 남한은 물론 일본에서 아우성 소리가 날 것이다. 핵무기는 걷잡을 수 없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는 미국에게는 엄청난 악몽이다. 따라서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북한이 그 보유 사실을 숨겨 주기를 바라야 한다.
이는 미국과 북한이 핵무기에 관한 한 한 배를 탔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과 북한이 이렇게 한 배를 타 왔다는 사실을 세계에 공표해 보라.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약점은 부메랑 효과에 의해 북한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북한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미국은 북한이 미국의 약점을 위협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북한을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기 전까지 미국은 북한을 몰아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핵무기를 일단 보유하게 되면, 사정은 다르다. 핵보유국은 몰아칠 대상이 아니라 포용의 대상이다. 1994년 6월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북한과 일전을 각오했다.
그러나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고부터는 미국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바로 핵무기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위대하고 노회한 김일성’이 미국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지금까지 그 엄청난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북한을 포용해 온 것이다. 북한에 핵무기가 없다면 그 콧대 높은 미국이 무엇 때문에 상대하기조차 역겨워했던 북한에게 그토록 질질 끌려 다녔겠는가.
핵무기는 북한 정권의 체제유지를 위해서도 매우 훌륭한 무기다. 핵무기는 북한 주민의 자존심을 북돋워 줄 수 있다. 이는 날로 퇴보하는 생활고로부터 주민이 느끼는 불만을 달래는 데 매우 훌륭한 약효를 갖는다. 북한 주민이 희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민족무기’를 위한 것이었다고 미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개방을 하지 않으면서도 체제 유지에 필요한 돈을 벌어야 한다. 가장 손쉽게 외화를 벌 수 있는 방법은 핵무기였다. 따라서 핵무기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북한이 지금 안고 있는 경제, 안보, 체제 유지하는 세 가지 문제를 상당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는 북한에게 만병통치약 인 것이다. 이러한 핵무기를 북한이 왜 포기하려 했겠는가.
미국과 북한이 여기까지 와 있는데 우리 정부는 그 동안 무엇을 했는가. 한마디로 미국에 놀아났다. “북한이 한 개가 아니라 반 개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용납할 수 없다.” 또는 “북한이 핵무기를 누구에게 쓰려고 개발하겠느냐?” “우리는 어떠한값을 치르고서라도 이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이는 미국이 북한을 몰아칠 때 미국의 힘에 고무된 김영삼 대통령이 했던 말들이다. 핵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힘을 빌어 전쟁이라도 하겠다고 북한에 대해 으름장을 놓았다. 미국과 북한이 이를 보고 얼마나 속으로 비웃었겠는가.
미국은 북한 핵 개발에 응징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남한 당국은 미국이 선택하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생각했다. 남한 국민이 미국의 위해 싸워 죽겠다는 것이었다. 남한 당국은 국민에게 15일분의 생활 물자를 비축해 두도록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1994년 5월과 6월에는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다. 생각해 보면 현 정부가 국가의 운명을 얼마나 함부로 여겼는가. 위기 관리 능력조차 없는 정부가 무슨 수로 전쟁을 지도할 것인가. 미국이 하라는 대로만 하다가 국가가 멸망하지 않을까 심히 불안한 것이다.
그 후 카터의 김일성 방문으로 그러한 일촉즉발의 위기는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일단 고비는 넘겼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음미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자초한 위기를 카터라는 전직 미국 대통령 한 사람이 막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카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전쟁이 시스템에 의해 발생하고 시스템에 의해 예방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무능에 의해 발생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역량에 의해 방지되기도 하는 이 사실을 우리는 두고두고 뼈저리게 음미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이 하루 빨리 형성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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