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시장선거와 "도가니" 그리고, 좌파작가 "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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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소강절 작성일11-10-03 21:40 조회1,489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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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생각이 그런데 발동하는 걸까? .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사기 야망이 거대하게 작용하면서 세계의 지배영역을 겁없이 거침없이 이 나라와 세계를 악마의 웃음으로 가지고 놀았듯 그에 대면 빙산의 노출일각도 안되는 그 열성 제자들의 순진한 대한민국 사기치기는 일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낌새를 눈치챈, 가늠이 되어지는 분들도 계실지 모른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 바닥에는 친북좌파들이 장악하고 있슴을 그 누구도 의심치 않는 한국 문학계와 영화계에 좌우익 이념이 쳠예한 대립양상을 보일 때마다 한마디씩 칼끝을 보이던 공지영이라는 좌파성향의 작가의 작품, "도가니"가 군림하고 있는 작금의 격동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그 파란의 최대 흥행 화제 이슈 "도가니"의 좌파작가 "공지영"이 오늘 대한민국 존망의 갈림의 첫 시작점인 서울시장 야권경선에 친북좌파 후보 박원순을 지지한다며 나타나 인증샷을 찍고 나란히 섰다.
"도가니"의 작가 공지영이 바람을 잡았으니 백지 두뇌의 가슴으로 사회와 국가를 씹어대는 순수에 환장한 젊은 사람들이 오죽 마음이 절절히 동했겠는가...
당연히 그들은 시간을 내서 투표장에 나와 박원순을 투표했을 것이다.
"도가니"... "도가니"란 것이 어쩌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땅을 치고 나중에 후회할 악몽의 도가니로 대한민국을 몰아넣고 있다는 생각과 믿음은 왜 이리 내 머리에 굳어져 가는가...!
언론의 "도가니" 부채질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어 보이지 않는가? 도대체가 끝이 없다..
좌파작가가 좌파의 고장 어둠을 노출시켰다는 것에 놀랄 일이 아니였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냉정하고 차가운 이념의 두뇌가 작동해야 하는 절실의 때라고 생각한다.
좌파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술수와 계략으로 만족하는 한잔 와인 샷을 결국에 나누려 한다는 것쯤은 사람들이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전라도와 광주는 어쩌면 이제 단물 쓴물 다 빨려가며 긴 역사를 비롯해 김대중과 노무현 영역의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국가와 사회를 향한 반발과 친북좌파를 위한 순진하고 미련한 헌신, 희생의 처절한 삶을 살았던 마지막에 이르렀고 철저히 버림받아 배신당하는 시작에 처한 지경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광주 사람이 투덜대며 "적당히 해두시지들 왜 그러세요. 우리가 댁들한테 그동안 공들인게 얼만데요..." 해봤댔자 김일성이가 박헌영 헌신짝 내팽개치며 죽이듯 어느 개그의 대사처럼 "자식들이 말이 많아, 그냥 찌그러져~~" 하면 바보같은 광주 바보들은 억울해도 어쩔 수 없이 "깨갱~..."할 것 아니냐는 생각인 것이다.
"도가니"로 인해 5.18의 성지라는 악마의 도시 광주가, 그와 똑같은 악마와 이들의 선동으로 모여든 무뇌아들에게 완전히 공개된 채로 처형되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토사구팽... 광주의 영상 분위기와 문성근의 얼굴, 노무현의 정체를 생각하면 그 생각에 일그러지는 나의 얼굴을 느낀다.
친북좌파, 그들의 근저에 피와 눈물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가?
"도가니"는 지금 공지영이 내년 총선에 출마해도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을 누구든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파급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의 계략이 신의 두뇌와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라.
왜 이처럼 그런 허무맹랑해 보이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는 이렇게 확신처럼 새겨지는 것일까?
공지영이가 좌파작가가 아니고, 박원순 지지자가 아니였다면 걱정도 없다.
그러나, 공지영은 만인이 다 아는 베스트셀러 좌파작가이고 박원순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선거 지원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좌파의 숙주 광주를 도축하는 "도가니"를 터뜨렸고 그 인기몰이로 오늘 야권경선에서 안철수가 키워준 박원순을 500년 역사 수도 서울의 빨갱이 수장으로 만들겠다며 머리를 쓰며 나선 것이다.
그들의 행보에 시나리오적인 계산, 소설적 상상력을 한 번 발휘해보면 신의 두뇌와 영역에 접근, 도전하는 대한민국 친북 좌파들의 놀라운 계략과 간계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친북좌파들은 지금 마치 신처럼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하려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지구를 가정해 보자.
우리 대한민국은 지금 수백개의 다양한 역할을 하는 좌파 인공위성들로부터 계략과 술수로 제작되어 전파되고 통신돼서 국민에게 전달되는 최후 발악의, 응집력 최고의 생산물과 작품에 집단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한 작품인 "도가니"의 파급력은 실로 파괴적이고 선동적이고 세뇌적이라는 점도 얘기해둔다.
그리고, 그 인공위성들은 그 궤도에서 그 역할의 각기 자신있는 능력을 분담해서, 앞서 말한 것처럼 신의 두뇌와 영역에 접근하고 도전하는 시나리오 구상 작업과 실행으로 이 나라를 들끓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의 친북좌파 지성인으로서의 "공지영"은 개국일등공신의 반열 수준인 것 같다..
앞으로 누가 그리고 뭐가 또 튀어나올지는 모른다. 그리고, 전라도와 광주가 어떻게 토사구팽 될지 모른다. 혹, 아니면 개국일등공신같은 공지영과 도가니를 내년 총선, 대선까지 싱싱하게 우려먹을지도 모른다.
시체장사는 너무 식상해서 수를 생각해낸 것이, 언론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 "도가니" 펑튀기가 아니였을까?
전라도 광주가 되게 한 방 맞았다 하고 통쾌함으로 기뻐하고 자위하는 보수우익을 공지영은 이미 꿰뚫어보며 미친 년처럼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장충체육관에서 자신의 글 나부랭이 파급력 한 방에 넉아웃되는 대한민국을 보며 그 "공지영"이라는 여자는 만족감에 힘이 솟았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들은 죽으나 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꼼수와 계략에 밤잠을 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 주문은 저리 가라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댓글목록
애국호랑이님의 댓글
애국호랑이 작성일이거 대긍모에도 올려주세요! 제 블로그에 스크랩해가게요! 좋은 글입니다.
도사님의 댓글
도사 작성일
소강절님
빨갱이들을
너무나 절확하게 보셨습니다.
걱정이 아니라 큰일 터졌습니다.
경기병님의 댓글
경기병 작성일
공지영의 “도가니”를 보는 불편
안형식 논설위원기사작성: 2011.09.27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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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주지 못하는 인문학은 “독”
16세기의 르네상스를 거쳐 18세기는 과학이 우세한 과학의 시대로 19세기는 철학이 우세한 인문학의 시대로 갈음된다. 19세기 철학의 중심 주제는 “인간의 행복”이었다.
임마뉴엘 칸트(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최고의 선을 찾기 위해 이성에서 또 그 위의 이성을 추구하여 올라가서 보니 결국 최고의 선은 “행복”에 도달하며 이 행복은 신의 영역에 속한 선물이라고 정의했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칸트의 이론을 맞받아치며 “자살이 최고의 선이다”라고 주장하여 반골의 면면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19세기 철학의 귀재로 불렸던 키에르케골(1813~1855)은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정체를 절망으로 정의하여 우울증과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행복의 반대개념으로 정립했다.
칸트 이후 행복이 지상 최대의 선이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지고지순한 이성의 결과물로 정의된 이후, 모든 인문학은 행복을 인간의 기본 권리이자 자유자의 조건으로 지정했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행복할 권리가 있는 존재이며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나 행복감을 박탈하는 모든 요소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케골이 정의한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 지목된 절망은 공공의 적이 되었다.
이제 와서 19세기 문학의 목적을 새삼스레 뒤적이는 것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이어 공지영의 도가니 등의 문제 작품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 비틀어진 시각에서는 비틀어진 작품이 나올 뿐
1980년대의 문학적 트랜드는 문제작이었다. 모든 작가들의 로망이 문제작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름도 내고 돈도 버는 것이 목표였다. 이 목표에 달성한 작품은 김홍신의 인간시장과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들 수 있다. 김홍신의 인간시장은 당대의 부조리를 척결하는 현대판 홍길동인 장총찬이 주인공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과 싸우는 빨치산 박현채가 주인공이었다.
인간시장의 장총찬은 사회의 권력 핵심들과 권력에 부침하여 부조리를 일삼는 악덕기업가들을 청소하는 역할로 대리만족을 주었다. 한국판 현대 무협지로 불리면서 수개월에 1권씩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이를 보기 위해 줄을 서는 독자들로 인해 동네 서점까지 호황을 누렸다. 인간시장이 나오는 동안 인간시장의 독자들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지식층들이 읽어야 하는 비하인드 스토리의 역사물로 인식되면서 고졸이상의 학력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까지 선전되었다. 밀리언셀러로 등극한 태백산맥의 이면에는 좌파 성향자들의 추천서가 포도송이처럼 매달렸고 언론들마저 앞다투어 칭찬 일변도의 글을 써냈다. 태백산맥을 잃은 독자들은 육이오의 참극과 미군정의 악랄한 통치 그리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으로 묘사된 목적있는 빨치산 추앙소설로 인해 절망감과 분노로 가득 차며 불행해졌다. 이러한 분노감은 기성세대를 부르주아로 매도하게 만들었고 희생이 있더라도 개혁적인 차원에서 혁명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이어졌다.
두 작가는 나이도 엇비슷하며 시대적 환경도 비슷하다. 참고로 김홍신 작가는 1947년생이며 조정래 작가는 1943년생이다. 같은 시기의 문화적 환경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의 시각은 엄청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조정래 작가는 칼 막스적 비판의 시각으로 작품을 썼고 김홍신 작가는 만하임적 비평의 시각으로 작품을 썼다는 점이 다르다. 그 결과 조정래 작가의 작품에서는 죽창에 찔린 피비린내가 풍겨나고, 김홍신 작가의 글에서는 반성하고 인성을 회복하는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되어 독자에게 행복감을 선사했다.
어이없게도 독자들에게 분노감과 불행한 마음을 끼치며 기성세대를 부르주아로 몰아 죽창으로 줴질렀던 조정래는 부자가 되어 부르주아의 반열에 서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글로 돈을 번 부르주아는 존경을 받아야 하고, 사업으로 돈을 번 부르주아는 노동자를 착취한 악덕사업가로 멸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더냐?
2. 유려하고 화려한 문장은 독버섯의 화려함
민망하게도 조정래의 영향을 받은 분단문학가들에게서 조정래를 본 딴 작품들을 보게 되는데 공지영 작가도 그러하다. 민망하다는 말은 과거 조용기 목사의 억양과 어조를 그대로 흉내 낸 1980년대의 순복음교회 목사들의 민망함이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설교를 들어서는 누가 조용기 목사인지 도무지 구별을 할 수 없었던 그 민망함이 조 작가의 글과 공 작가의 글에서 볼 수 있으니 민망하다.
이들은 역사의 치부나 종교의 치부를 건드려서 독자에게는 불행한 마음이 들게 하는 一團이다. 끼리끼리의 평론을 통해서 문제작이니 뭐니 하는 도배로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돈을 챙기는 전혀 순수하지 못한 문제 작가들이다.
독사의 무늬가 호화스럽고 독버섯의 색깔이 화려한 것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는 경고이다. 마찬가지로 현란한 글재주와 화려한 문장력을 인정받은 작가라면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다는 뜻과 같다. 작가가 자신의 비상한 재주를 한풀이나 이데올로기 전파에 쓴다면 독자들은 그 독에 치명적인 내상을 입게 되어 있다.
공 작가를 아끼는 독자들은 공 작가의 화려하고 유려한 문장력을 아끼고 있다. 공 작가가 문단에 등장하면서 내놓은 자신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심금을 울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냈다는 점도 그렇고 자신의 치부를 과감히 공개했다는 점에서도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 냈다. 그런데 그것뿐이다.
한 마디로 사람이 변했다. 아니면 원래가 그러한 사람인데, 그의 현란한 글재주와 화려한 문장력에 가려 못 보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예전의 겸손하고 지적이며 아까웠던 공지영이라는 이름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이력도 붙고 불러주는 곳이 많아져서 그런지 자신을 대단히 중요한 사람으로 포장하고 있다.
얼마 전 티브이에서는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도사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그 모습이 과거 지리산의 빨치산들에게 먹을 것을 실어 날랐던 아녀자의 모습과 일반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김일성의 놀이터였고 금강산은 독립운동을 구상한 영산으로 선전되었고 지리산은 빨치산의 발원지이며 한라산은 제주사태의 저항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영산이라는 별명은 김일성 부자와 추종세력들이 붙인 별명일 뿐이다. 어찌 영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들의 부모와 친척들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던가.
독사는 사람을 봐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똬리를 틀고 공격 자세를 취한다. 똬리를 트는 이유는 자신의 몸을 용수철처럼 만들어 순간적으로 높거나 길게 공격하기 위함이다.
작가가 손을 대면 안 되는 몇 가지가 있다. 역사의 치부, 종교의 치부, 장애인과 노인의 성 문제가 그것이다. 역사의 치부나 종교의 치부에 손을 대는 자는 반골이요 장애인이나 노인의 성 문제에 손을 대는 자는 추한 자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해결할 수도 없고 파면 팔수록 불행의 냄새와 구린 냄새를 풍기는 주제들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작가는 사실만을 취급하는 기자가 아니다. 르포 작가라고 해도 사실만을 취급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필을 들었을 때에는 감동을 주고 행복감을 끼치는 명작을 남기겠다는 각오로 글을 써야 한다.
독사가 똬리를 틀며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이웃이나 민족을 향해 죽창을 꼬나쥘 수 있는 반골들이 역사의 치부나 종교의 치부를 건드려 그것으로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명함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이 반골들은 자신의 반공성향을 감추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들먹인다. 레닌 광장에서 쇠사슬에 묶여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레니의 부러진 목이 공산주의의 멸망을 증명한다. 레닌의 종말은 곧 이데올로기의 종말이다.
죽은 레닌의 사상을 붙잡고 정의의 사도로 변신한 박노자나 김일성을 아리랑의 김산으로 둔갑시킨 한홍구나 육이오를 남침으로 주장한 강정구나 조정래 등이 교수로 대접을 받으며 살아 갈 수 있는 배경은 잘 못된 헌법에 있다. 정치꾼들의 입맛에 따라 재단된 대한민국의 헌법이 이들을 종교의 자유, 사상과 집회의 자유라는 보호막을 제공하며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반골들은 자신이 반골임을 감추기 위해 무슨 대단한 철학이 있는 것처럼 이데올로기를 말하며 사상의 자유를 방패막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약자를 대변하는 정의자로 변장을 하고 약자의 죽음을 들춰내며 정의를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고 위로를 하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명성과 스포트라이트를 추구하며 부자를 꿈꾼다. 언제쯤이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빨치산이니 빨갱이니 하는 반골들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