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반공청년투사 작성일11-09-12 15:48 조회1,784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1980년 5월 중순 갑자기 등장한 “전두환 물러나라” 구호의 발원지는 김대중 그룹이었다.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명의의1980년 5월 7일자 성명서 ‘민주화 촉진 국민선언’의 7개항의 선언 중 제3항은 김대중 그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 퇴진을 요구하는 이유 두 가지를 이렇게 제시한다: “김재규씨의 재판에 대한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중앙정보부장직을 불법으로 겸직하여 노골적인 정치개입을 일삼음으로써 신성한 국군 전체의 명예와 긍지를 실추시키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 673). 그러나, 국가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의 책임을 위임하지 않았던가?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만 충실하게 수행한 것이 어째서 정치 개입이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직을 겸직한 적도 없다. 단지, 4월 중순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에 갓 임명 받았을 뿐이었다.
5월 19일의 시위 장면을 보여주는 광주사태 영상물은 유언비어를 외치며 학생들과 청년들을 선동하는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색 양복을 걸치고, 앞머리 숱이 적은 이 아저씨는 "전라도 새끼들 한 일만 명 다 죽여버린다고 그랬다고" 이 소리를 고장난 레코드판 모양 또 외치고 외치며 시위를 선동한다. 유언비어로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시위를 선동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 유언비어는 그날 오후에는 “경상도 군인”이란 단어가 추가되어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싹쓸이하러 왔다" 유언비어로 뻥튀기되더니, 그 다음날 20일에는 “전두환”이란 이름이 덧붙어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에게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유언비어로 뻥튀기기 되었다. 1980년 4월부터 조선대학교 학생회는 학생회라는 명칭 대신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하위조직 명칭, 즉 ‘민주투쟁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그 날로 "전두환의 광주 살륙작전"이라는 제목의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여 그 다음날부터 전국에 유포하였다.
그런데 이 허무맹랑한 유인물 내용은 유언비어였는가 확인된 사실이었는가? 만약 확인된 사실이었다면 보안사령관으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은 경상도 군인들이 있었을 것이요, 그런 경상도 군인들이 실제로 있었음을 확인하고5・18측이 퍼뜨린 소문이었다면 그 경상도 군인 이름들을 여태껏 5・18측이 제시하지 못할 리 없다. 이렇듯 그런 명령을 받은 경상도 군인들이 없었는데도5・18측이 그런 소문을 퍼뜨렸던 것일진대 이것은 명백한 허위사실 유포이다. 도대체 김영진의 도덕적 잣대는 무엇이기에 이런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는가?
전두환의 본적지는 전남 화순이다. 전두환의 할아버지 대에 전남 화순에서 경남 합천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이주했다. 전두환의 아버지 전상환 선생이 만주에 독립운동하러 떠난 것이 화근이 됐다. 그리고 전두환의 모친 역시 본관이 전라도 광주이다. 전두환 정부 시절 국무총리 2명이 모두 전라도 출신이었고, 전두환을 평생 어른으로 받드는 장세동 역시 전라도 사람이다. 보안사령관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도 군대 행정상 불가능하거니와, 부계와 모계 모두 전라도 사람인 전두환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A.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던 광주시민군
5월 19일부터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는 음모의 사전 포석으로서 광주운동권은 5월 16일5・16 화형식을 대규모로 개최하였으며, 횃불은 화형식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19일부터 시작하기로 예정된 내란 음모를 총지휘하던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은 서울에서 19일부터 대학가 대자보 등으로 전두환 관련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전두환 물러나라’는 구호를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광주에서 사흘 빨리 5・16 화형식 때 그 구호가 사용되었다. 5・16 화형식을 구경하던 당시 44세의 광주시민 박석연은 전두환이 누군지 몰라 “전두환이가 누구인데 물러나라고 하는 것인지”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980년 5월에는 화정동에 '국제전업' 회사를 운영하며 동구청 뒤쪽의 공사를 맡아 하고 있었다. 시내에 일이 있던 나는 당시 시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쉽게 알 수 있었다. 5월 16일 대학생들과 시민, 여러 교수들까지 도청 분수대에서 시국에 관한 집회를 열고 횃불시위를 했다. 나는 구경을 했는데, 시위대에서 자주 외친 구호는 '전두환이 물러나라'였다. 전두환이가 누구인데 물러나라고 하는 것인지 몰라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젊은 군인인데 대권을 잡으려고 한다"고 했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날의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박석연 1989).
'전두환이 물러나라'는 구호를 자주 외쳤으나 사람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다. 박석연의 질문에 간혹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그 대답은 전두환이 젊은 군인이라는 것이었다. 4년제 육사 학번으로는 1기 졸업생인 전두환이 젊은 군인이었는가? 김대중이 그때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는가?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고작 ‘젊은 군인’이라는 짧은 대답이었다. 즉, 전두환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는 이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전남도청 앞의 그 대규모 시위장소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두환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전두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재봉사 시민군 장선호는 광주사태 당시 자신은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내 나이 12세 때 특수농작물을 재배, 판매하시던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버렸다. 그 때문에 생활 형편이 극도로 곤란해져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1974년부터 충장로 2가 남성의상실 등지에서 재봉사 기능을 배웠다. 그 당시 나는 정치의식이 전혀 없었다. 당시 학생과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물러가라던 신현확과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5월 18일 낮 12시에 광주예식장에서 형님(장상호)의 결혼식이 있었다. 학동 집에서 예식장까지 걸어오는데 광주우체국 앞에서 학생 수십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형님의 결혼식이 시작되었을 때는 가톨릭센터 앞에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대 결혼식장 안이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장선호 1988).
장선화가 “신현확과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다”며 신현확 이름을 앞세우는 이유는 5월 내내 시위 구호가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였기 때문이다.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는 5월 16일에야 비로서 추가되었다.) 정보화시대인 오늘날에도 총리 이름을 모르는 국민들이 있듯이 당시에도 신현확이 총리라는 것을 까맣케 모른채 시위대가 “신현확 물러가라”를 외쳤었다. 16일에 비로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등장하였으나,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다음 제일 나중에 외쳐진 구호였다.
임낙평은 5월 19일 밤 들불 야학팀이 제작한 전단에는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의 주장이 그대로 실렸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전두환 일파는 민족 반역의 살인극을 중단하고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나가자.’ 이러한 윤상원의 생생한 목소리가 문자화되어 시가지 투쟁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임낙평 1989, 100). 그러나 아직 국민이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그 시절 대다수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윤한봉의 형으로서 광주사태 당시 대동고 운동권 교사였으며 2008년에 5·18기념재단 이사장이었던 윤광장도 그의 광주사태 증언록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긍정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동안 학생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들었다. 그 밖에도 당시 일반인들은 잘 모르고 있던 전두환씨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힘의 논리'에 의해 어느 특정인에게 힘이 집중될지도 모른다는 정세도 이야기해 주었다” (윤광장 1989).
그런데, 일반인들은 전두환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이름 석 자를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그 시절 누구보다도 정치시사에 해박하였고, 누구보다도 정치시사 강연을 많이 했었던 재야 지식인 김동길 교수조차도 1980년 6월 이전에는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주는 유일한 학생 시위대는 윤광장과 박석무 등 운동권 교사들이 포진해 있던 대동고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위의 윤광장의 증언이 밝히듯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시위의 주역, 시민군 주축으로 하이라이트 되는 대동고 학생들조차 1980년 5월 초에야 당시 김대중 측근 세력이었던 운동권 교사가 세뇌시키는 말을 통해 비로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당시 운동권 교사들과 학생들이 많이 있었으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광주사태의 주역, 시민군 주축세력으로 하이라이트 되는 대동고 학생들조차 1980년 5월 초에야 비로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게 되었던 것이다.
시민군 문장우는 1989년 5월의 그의 증언록에서 21일 아침에 시위대 버스 옆면에 빨간 색으로 '전두환 죽이자'는 구호가 씌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21일 아침 일찍 시내로 나왔다. 차가 없어 시내 쪽으로 한참 걸어갔다. 학동에 있는 버스종점에 다다랐을 때 유리창이 깨진 버스를 탄 시위대가 보였다. 버스 옆면에는 빨간 페인트로 '전두환 죽이자', '신현확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가 씌어 있었고, 어떤 차는 플래카드를 걸치고 있었다. 각목을 두들기고 있는 시위대와 시위차량을 보니 몹시 감격스럽고 흐뭇했다.
그러나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21일 아침부터 도청광장과 금남로 일대로 엄청난 인파의 시위군중이 다시 모여들었다. 그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고 있었는가? 아니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광주상고 야간 2학년생으로서 시민군이었던 김행주는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면서 “전두환 물러가라”고 악을 썼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계속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훌라송을 불렀다. 나는 그때 전두환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가 물러나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일이 끝날 것 같은 생각에 악을 쓰고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김행주 1989).
고등학생 시민군 김행주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면 그의 상상 속의 전두환은 누구였는가? 십중 팔구는 그의 상상 속의 전두환은 광주 공무원이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상상 속의 전두환은 실제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가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그것은 전두환 연구 권위자의 외침이 아니라, 무지에서 우러나오는 외침, 잘못된 인식에서 출발하는 외침, 선동에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외침이었다.
당시 용접공으로서 21일에 남평지서 무기고 무기 탈취에 동원되었던 시민군 최인영은 남평에서 입으로는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지만 머리 속에서는 전두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탄 가스차는 다른 차와는 달리 차 윗부분에 문이 달려 있었다. 차가 한참을 달린 뒤 차문으 로 고개를 내밀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차는 이미 남평지서에 당도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다. 남평지서는 예상외로 텅 비어 있었다. 경찰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린 것 같았다. 우리를 본 남 평 주민들은 무기고를 열 수 있도록 도끼를 갖다주기도 했다. 경찰서 건물 뒤에 무기고라 씌어진 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도끼로 무기·고 문을 열고 가지런하게 세워진 카빈총 20여정과 탄알 박스 7,8개를 들고 나왔다. 카빈총 사이에는 Ml 몇 정이 끼여 있고 수류탄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 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 (최인영 1989).
그런데, 자기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인물을, 그리고 누군지 모르므로 그 어떤 이해관계도 있을 수 없는 인물을, 찢어 죽이자고 고함지르는 것은 무식한 행동이 아닐까? 여하튼 그러한 행동을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든 무식한 행동이라 부르든 분명한 것은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광주사태 당시 갓 제대군인으로서 대입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이수범은 자신은 군대에서도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제대 후에도 여전히 전두환이 누군지는커녕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때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전두환이 물러가라', '김대중이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였다. 우리의 요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시국이 불안해야 하는가에 대해 정당한 답변을 원했을 뿐이었다. 우리는 전두환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몰랐는데 항쟁이 끝나고 나니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다 (이수범 1989).
조선대학교 공업전문대 운동권으로서 시민군이 되었던 홍순희는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민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이 되면서 시험도 거부한 채 학생들은 도청으로 진출했다. 그 당시에는 도청 앞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하고 데모를 하여도 전경들이 학생들을 때리거나 붙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붸기게 되면 오히려 자기들의 방패를 들어주면서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줬다. 16일 도청 앞 광장에서 있었던 평화적인 횃불시위 때 내가 속한 조는 금남로, 양동상가, 광주천변을 거쳐 도청 앞으로 다시 모였다. 그 당시 구호 중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면 시민들이 전두환이가 도대체 누구냐고 자주 물어봤다 (홍순희 1988).
광주시민 유복동은 1980년 당시 자신은 전두환이 누군 지는커녕 신현확이 누군지도 몰랐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980년 봄에 들어와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는 중에 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대학생들은 과연 어디서 정보를 입수해서 그렇게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주도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1980년 당시 나는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고 신현확이 누군지도 몰랐다. 대학생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유복동1989).
유복동은 신현확이 당시 국무총리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도 현 대통령 이름은 알아도 현 국무총리 이름은 모르는 국민이 여러 명 있을 것이다. 1980년 봄에도 김대중의 외곽단체들이 시키는 대로 “신현확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지만 많은 학생들이 신현확이 누군지 모르고 외쳤을 뿐이었다. 시위현장의 대학생들에게조차 신임총리 신현확의 이름이 아직 귀에 생소하였을진대 생업에만 몰두해 있던 공원 유복동씨가 모르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던 국무총리 이름조차 국민이 잘 모르고 있었을진대 하물며 아직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었던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국민이 누군지 아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1979년 10.26 대통령 시해사건 때 대통령을 암살한 김재규 정보부장을 체포한 보안사령관이 바로 전두환이었다는 사실도 1988년 이후에야 국민이 알기 시작하였다. 1980년 광주사태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 시민들은 물론 대학생들조차 아직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김대중의 외곽단체들과 극렬 운동권 학생들이 5월 중순 들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는 유언비어 대자보들을 대학가 벽보에 붙여 대학가에 먼저 전두환이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도대체 왜 김대중 세력이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고 주장하는지에 대하여 학생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대중 그룹이 총동원되어 배후 조종하고 선동한 5월 15일의 시위, 일명 ‘서울역 집회’ 혹은 ‘서울역 회군’ 때 처음으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서울에서 잠깐 등장하였으나, 본래 그 구호는 19일부터 사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구호이며, 그 이전까지는 아직 학생들이 전혀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 김대중 그룹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지어내었는가? 그가 어떤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그들의 억지 주장을 근거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지어내었다. 오래 동안의 왜곡된5・18교육의 영향으로 이제는 신문기자들조차 그들의 기사에서 전두환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구데타를 일으키자 광주시민들이 그에 대한 항쟁을 한 것이었다고 보도하는 실수를 종종 저지른다. 그런 주장대로 정말로 광주시민들이 박정희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던 것인가? 아니다. 1980년 5월의 광주사태 선동 논리는 그런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당시 수피아여고 2학년 여고생은 표강님은 자신이 5월 19일에 비로서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듣게 되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서방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갔다. 책가방과 교복을 벗어던지고 골록으로 나왔다. 동네 아줌마들이 군데군데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었다. 박정희의 양아들인데 실권을 잡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함께였다” (표강님 1989, 173).
광주사태는 무장시민군 단독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광주 여성운동권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아들이라는 유언비어을 퍼뜨렸다. 그들은 전두환에 대한 최대한의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 위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오늘날 운동권의 역사 치매증의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듯이 당시 대통령이 전두환이었는가? 아니다. 8년후 1988년 광주청문회 때 비로서 처음 등장한 신조어 ‘신군부’가 그때도 있었는가? 아니다. 1980년에는 운동권이단 한번도 전두환을 신군부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그때는 신군부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운동권이 전두환을 공격하였었다. 그들은 전두환이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말하였다.
어째서 김대중 그룹이 전두환을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렀는가? 그들은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의 충신 중 충신이라는 인식을국민에게 심어주기 위해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 어째서 1988년 광주청문회 때부터 김대중 그룹은 180도 말바꾸기를 하여 전두환을 신군부라고 불렀는가? 이번에는 그들의 전략이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의 반역자였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런 말바꾸기로 국민의 인식을 혼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그룹의 두 상반된 주장, 즉 전두환은 박정희의 충신이다라는 주장과 전두환은 박정희의 반역자다라는 서로 앞뒤가 안맞는 주장이기에 이제라도5・18은 반드시 그 진실이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 1980년 5월 19일부터 비로서 학생들이 유언비어를 통해 전두환이란 이름을처음으로 듣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전두환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고 있었는가? 당시 서울의 학생들 중에서조차도 전두환이 당시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극히 적었다. 5・18 당시 광주시민군 중 전두환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아주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광주시민으로서 당시 전경이었던 곽형렬도 전두환을 알기는커녕 신현확이 국무총리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음을 이렇게 실토한다:
나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시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신현확이니 전두환이가 적힌 플래카드를 시위대 학생들이 들고 다녔지마 나는 그들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나는 데모를 하려면 교문 안에서 하지 왜 밖으로 나올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음에 보니까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었다 (곽형렬 1989).
전경뿐만 아니라 계엄군도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다. 당시 ROTC 장교였던 한동석 중위도 자신은 1980년 6월 이전에는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전혀 들어보지 못했읍니다. 도청 재탈환(5/27) 된 후에 2-3일 동안 시내 무기회수 작전에 부대의 간부(당시호칭: 하사관과 장교) 1명과 예비군 중대장(사복차림)과 사복 형사 3인조로 구성하여 어디인지 지역명은 잘 모르지만 우범지역이었던 것은 확실함. 이미 모두 도주한 상태여서 젊은 남성들은 만나보기 힘들었읍니다. 그리고 시내는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시내를 조금 벗어난 지역에는 방화된 차량등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처참했던 상황들을 예상할 수가 있었읍니다.
그리고, 6월 초에 구례에 있는 예비군 관리대에 보직 명령을 받고 전출되어 구례읍내에서 영외거주(하숙) 하면서 하숙집 TV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연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보았읍니다. 그전에는 전혀 "전두환"이란 세글자를 보지도 못했읍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한동석 2007.07.11 15:47).
20일 오후 1시 반경 시위대가 금남로에서 임신한 여자를 넘어뜨린 후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세워주는 사람 없이 그냥 밟고 도망치기에 바빴을 때 자신도 그녀를 밟았다는 시민군 최영철은 자신이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임신한 여자가 넘어졌다.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세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그냥 밟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도 그 여자를 밟고 한일은행 쪽으로 냅다 뛰었는데 그 여자가 어찌 됐는지는 모르겠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가봤더니 사거리 한가운데에 공수부대가 있었다. 공수들이 트럭을 타고 도로를 왔다갔다 하자 소방서 쪽에서 시민들이 큰돌을 던졌다. 한 트럭 운전병 머리에 정통으로 돌이 맞아 차가 꼬나박히자 놈들이 쫓아왔다. 나는 소방서 뒷길로 해서 MBC 방송국 쪽으로 도망쳤다.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해제하라', '신현확 물러가라', '최규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는데, 그때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후에 상무대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 알게 된 정도였다 (최영철 1988).
중학교 중퇴 학력의 용접공 시민군 김용균도 데모 구호 '전두환 물러가라'에 나오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도 몰랐었기에 5월 28일 오후에 그 구호에 대하여 질문하는 광주경찰서 수사관에게 ‘전두환이 누구냐”고 오히려 되물었던 사실을 증언한다:
도청에서의 활동과 함께 활동한 사람들의 이름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모할 때 외친 구호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수사관들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오히려 '전두환'이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사관은 전두환의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 (김용균 1989).
광주경찰서 수사관과 시민군 김용균이 서로 전두환이 누군지 물어보다가 누군지 몰라 수사관이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는 것은 심지어 광주경찰서 수사관조차 그 당시에는 아직 전두환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당시 23세의 다방 주방장 시민군이었던 염동유는 자기는 얼굴도 모르는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외치고 다녔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광주고속버스를 타고 광주시내 일대를 돌아다녔다. 얼굴도 모르는 전두환이 물러가라고 외치고 김대중 씨를 석방하라고 소리높이 외쳤다. 가끔 애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항상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누군가가 준 태극기를 머리에 두르고 또 대형 태극기를 창밖으로 흔들었다. 그러면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해 주었고 거리거리마다 주먹밥, 음료수, 빵 등을 올려주었다. 일신방직 앞에서는 그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들 7, 8명이 차에 타기도 했다 (염동유 1989).
5월 22일 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한 박금희 양의 부모 박명민과 문귀덕은 당시 광주시민들이 번데기공장 사장 전두환만 알았지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다가 데모대가 농성동 쪽으로 몰려드는 것을 보더니 밖에 나가려고 했다. 내가 못 나가게 말리자 금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대학생들이 다 죽으면 어떡해요? 전두환이 대통령 되려고 한단 말이에요!" "뭣이야? 전두환이 번데기공장 사장인디 뭐가 돼야?"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번데기공장 사장을 말하는 줄 알고 그렇게 말했더니, "엄마는 전두환이 번데기 사장만 있는 줄 아요? 그 전두환이 대통령을 하면 또다시 독재정치를 하게 되는 거예요."
(…)
195[8]0년 당시에는 최규하가 임시 대통령으로 있었기 때문에 '현직 대통령이 있는데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당시 광주상황이 점차로 어려워지고 온 시민이 분노에 떨고 있을 때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금희가 죽기 전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려고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할 때도 번데기공장 사장 전두환 씨만 알았지 또 다른 전두환 때문에 많은 광주 시민이 죽어간다는 사실은 몰랐다 (박명민, 문귀덕 1988, 178-182).
비단 광주시민들뿐만 아니라 타 도시 시민들도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화순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중5월 21일 무기탈취하러 온 시민군 차량에 주먹밥을 제공했던 당시 나이 49세의 김혜옥도 시민군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을 때 전두환이 누군지 몰랐음을 이런 말로 증언한다:
21일 오후, 젊은 청년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나무토막으로 차를 두들기며 내려왔다. 처음엔 '폭도'들이 내려온 줄 알고 무서웠다. 그러나 그들이 광주에서 내려온 시민들과 학생들이라는 걸 알고는 가게에 있던 음료수와 계란 등을 들고 나갔다. 어떤 여학생은 지프차를 타고 와서는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무엇인가 많은 말을 해댔다. 전두환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물을 경황이 없었다. 나는 그 차에도 음료수를 올려주었다 (김혜옥 1989, 226).
이때 김혜옥이 올려주는 음료수와 빨을 받은 시민군 중에 허춘섭이 있었는데,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차를 세우고 내가 성구에게 말하자, 성구가 뒤에 탄 사람들과 함께 검문소로 향했다. 그들이 몽둥이로 검문소 유리창을 깨자, 2명의 순경들은 산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검문소 안의 모든 선을 잘라버리고 성구가 돌아오자 우리는 계속 화순으로 들어갔다.
화순에서는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대강 소문으로 듣고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화순읍민들은 박수를 치면서 환영을 해주고 음료수와 빵 등을 올려주었다. 나는 앞에 타서 잘 모르지만 슈퍼나 가게의 주인들이 올려준 것 같았다. 내가 탄 차는 그냥 광주의 상황만 알려주고 바로 돌아왔지만 다른 차들은 계속 무기를 털기 위해 경찰서를 습격하고 화순탄광으로 들어간 것으로 안다 (허춘섭 1989).
최근에 광주일고 동문들이 부산저축은행 비리사건이라는 대형 금융비리사건을 저질렀듯이 광주사태 때도 광주일고 동문 및 학생들이 대형사건을 저질렀다. 윤한봉과 윤상원 등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및 광주사태 주동자들 대부분이 광주일고 동문들이었으며, 이홍재 등 광주일고 학생들이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여 유포하였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악성 유언비어는 아주 흉악한 사기꾼이나 아주 무식한 사람이나 지어낼 수 있는 유언비어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악성 유언비어 제작자는 월산동에서 자취하던 광주일고 3학년생 이홍재 군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월산동 특공대'의 유인물 제작”이라는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21일에 이어 22일도 전날 미처 다 찍어내지 못한 것들을 마무리해서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고는 등사기를 교회에 돌려주었다. 그 뒤로는 사태를 관망하다 26일에 한 친구가 다시 교회에서 등사기를 빌려와 유인물을 찍어냈다.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내용과 그에 맞서 광주시민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식의 내용을 아주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써서 유인물을 작성했다 (이홍재 1988).
그러면,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는 내용의 유언비어 유인물을 손수 작성하여 유포한 고딩 이홍재는 전두환 연구 권위자였는가? 그는 전두환이 누군지나 알고 있었는가? 혹은 그는 사실여부를 확인해 본 후에 이런 소문을 퍼뜨렸던 것인가? 운동권의 선동 구호 외에는 전두환이 누군지 알지조차 못하는 고딩이 이런 악성 유언비어들을 퍼뜨렸었을 때 전두환에 대한 그의 평가는 공정하였었는가?
B. 신현확 물러가라 구호의 꼴볼견
1988년 11월 30일의 2차 광주청문회 첫 증인 정동년은 ‘광주항쟁은 정권욕에 눈이 뒤집힌 전두환 군부세력이 권력탈취를 하는 데 대해 광주시민이 일어나 항거한 민중의 투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5・18 광주시민군 중 전두환이 누군지 아는 시민군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런 주장이 성립할 수있겠는가? 5・18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그들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친 것은 주동자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로부터 권력탈취를 하려 하였다는 말인가?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고 외치며 요구한 쪽이 어느 쪽이었던가? 어째서 광주에서만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가 있었는가? 김대중의 외곽단체들의 본래 계획은 5월 19일부터 전국적으로 그 구호를 유포하려 하였다. 그리고, 그 전까지의 시위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와 ‘신현확 물러가라’였다.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명의의1980년 5월 7일자 성명서 ‘민주화 촉진 국민선언’의 7개항의 선언 중 제2항은 신현확 총리 퇴진을 이런 말로 요구한다: “과도정부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이른바 중립을 표방하고 민주정치 발전의 산파 역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유신체제를 미화, 찬양하고 유신정권에 의한 개헌주도를 공언하는 등 국민을 경시, 우롱하는 방약무인한 언동을 일삼음으로써 전국민적 분노를 촉발하고 있는 신현확 총리는 즉각 물러나야 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 673). 여기에 어휘 사용의 모순이 있다. 어떻게 과도정부가 유신정권일 수 있는가?
운동권은 신현확 총리의 퇴진을 집요하게 몇 달간 요구했고 그 요구대로 신현확 총리가 이미 5월 19일에 사임하였음에도, 영암에서 21일에 '신현확이 물러가라'는 구호가 등장하였던바, 영암주민 최철환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시위대가 떠나고 나자 시위 동참에 대한 얘기가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영암읍에는 차량이 다 빠져나가고 없었으므로 '도갑사'에서 완행버스 두 대를 끌고 왔다. 여기서 마련한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 철폐하라', '신현확이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버스에 부착했다” (현사연 1990).
광주에서도 여전히 시민군이 “신현확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고 있었음을 당시 수피아여고 2학년생 표강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21일 광주상고 앞에서 화순, 나주 등지로 시위차량들이 빠져나갔다. 서방주유소쪽에서 투석전이 벌어졌는지 돌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계림국민학교 앞까지 나가 구경을 했다. 차에는 어린 학생들도 많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두들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막대기 하나씩을 들고 차체를 두들기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표강님 1989, 174).
자, 이것이 신현확 국무총리 독재에 대한 항쟁이었는가? 이미 신현확 총리 내각이 사퇴하였는데도 '신현확이 물러가라'고 외친 것은 사실에 바탕을 둔 항쟁이었는가? 그들은 신현확이 누군지도 그가 이미 사퇴하였다는 것도 모른 채 '신현확이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선동했으며 선동당했다. 여기서 우리는 선동과 항쟁을 구별해야 한다. 2008년의 광우(狂牛) 사태가 항쟁이었는가? 아니다. 광우병 유언비어에 선동당한 것은 항쟁이 아니다.
김대중이 그의 사조직 국민연합 명의로 보낸 5월 19일까지 퇴진하라는 최후통첩에 응하여 신현확 총리내각이 그날 총사퇴하였음에도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의 그 날의 시위선동 유인물은 “저 개 같은 최규하, 신현확, 유신잔당 놈들과 유신독재자의 아들 전두환 놈은 최후의 발악을 시작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자, 대통령과 총리를 동시에 퇴진시킴으로써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쪽이 어느 쪽이었는가? 그때 모든 김대중 그룹과 운동권의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한 편으로 보았다. 따라서 광주사태 당시의 성명서와 정동년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조선대학교 운동권은 이미 신현확 총리가 퇴진하였음에도 “발악을 시작하였다”는 표현을 쓰며 “신현확 물러가라” 구호 선창을 한 것은 실로 가관이 아니던가!
광주사태 선동 유인물들 중 북한 간첩이 작성하였거나, 운동권을 교육시킨 간첩의 용어가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관찰되는 유인물들 중 하나가 바로 “우리는 피의 투쟁을 계속한다”라는 제목의 5월 21일자 유인물이다. 이 유인물은 ‘범시민민주투쟁위원회’와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 명의로 발행되었다 (김영택 1996, 122). 이 두 명의 중 ‘민주투쟁위원회’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산하조직 명칭이므로 북한세력 명칭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어설픈 한국말 명칭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한 명칭이다. 첫째로는 조선대학교 학생혁명위원회를 뜻하는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데, 조선대학교 내에 학생혁명위원회가 있었는가? 만약 있었다면 이것은 내란음모의 증거물이다. 둘째로는, 전 남조선대학생 학생혁명위원회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유인물 전체 내용을 살피면 후자의 의미가 부합한다.
이 유인물은 “저 악랄한 유신독재자 박정희 놈의 하수인 최규하, 신현확, 전두환 놈의 악랄한 만행을 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을 박정희 놈, 최규하 대통령을 최규하 놈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남한의 정치지도자들을 놈으로 호칭하는 것은 북한식 표현이다.
신현확 총리 퇴진을 요구하며 광주사태가 일어났으므로 그 요구에 굴복하여 19일 신현확 총리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21일자 유인물에서 “신현확 놈의 악랄한 만행을 보라”는 표현이 등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신 총리가 이미 퇴진하였는데 도대체 왜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매일)" "무기를 제작하라 (총보다 더 긴 무기, 손수건, 화염병 제작,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휴대)" 등의 행동강령들이 필요하였다는 말인가? 이미 이틀 전에 퇴진한 총리를 퇴진시키기 위해 무기를 제작하며 매일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인가?
신현확 총리 퇴진 요구를 시위 명분으로 세우며 내란을 선동하던 세력의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이 차기 공화당 대선 후보로 신현확 총리를 지명하려 한다는 유언비어에 근거하였었다. 그런데, 19일 신 총리가 사퇴하였으므로 그런 유언비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더 이상 신 전 총리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퇴진을 압박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유인물은 그 날 상황의 상식에서 한참 벗어나는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북한 말투가 들어가 있는 이 유인물은 분명 남한 최신 정세에 어두운 누군가에 의해 , 신현확 총리가 그렇게 빨리 순순하게 물러날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누군가에 의해 작성되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