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웃다 / 獨笑
有粟無人食 (유속무인식) 곡식 있는 사람은 먹을 이 없고
多男必患飢 (다남필환기) 아들이 많고 보면 배곯아 걱정.
達官必憃愚 (달관필준우) 지체 높은 벼슬아치 꼭 멍청하고
才者無所施 (재자무소시) 재주 있는 사람은 쓰일 데 없네.
家室少完福 (가실소완복) 집마다 온전한 복은 드물고
至道常陵遲 (지도상능지) 지극한 도리는 늘 쇠약하구나.
翁嗇子每蕩 (옹색자매탕) 인색한 아비에 방탕한 자식
婦慧郞必癡 (부혜낭필치) 지혜로운 아내는 꼭 못난 서방.
月滿頻値雲 (월만빈치운) 달이 차면 구름과 자주 만나고
花開風誤之 (화개풍오지) 꽃 피자 바람이 그르쳐 놓네.
物物盡如此 (물물진여차) 사물이 모두다 이와 같거니
獨笑無人知 (독소무인지) 홀로 웃는 웃음 아는 이 아무도 없네.
茶山 丁若鏞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선생의 生家인 여유당(與猶堂/사진 위)과 묘소 및 사당 전경>
정약용(丁若鏞) / 1762년 6월(음) ~ 1836년 2월(음)
조선 정조 때의 문신으로,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기도 했다. 호는 다산(茶山), 자는 미용(美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 있다. 이 마을은 지금은 팔당호수로 인해
외딴 곳이 되었지만 원래 그윽한 강마을이었다고 한다. 生家는 1925년 대홍수 때 떠내려 가고 1975년
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5대조부터 여기에 자리를 잡았으며, 다산은 여기에서 태어나 세상을 떠났고 이
집 뒷산에 묻혔다.
다산은 1800년 정조 서거 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 와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與兮若冬涉川),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兮若畏四隣)"는
'노자'의 말을 빌어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를 짓고 칩거했다.
그렇게 조심했던 다산이었건만 그는 결국 유배객이 되어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보내고
나이 57세가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이 곳에서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다가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