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사태 남파 되었던 북한 대남 연락소---증언(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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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좋은나라 작성일11-08-21 17:20 조회1,34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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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사태 참가자인 김명국(가명) 이 증언하는 북한조선인민군 부대의 명칭과 사건 연월일, 참가자 이름 등은 모두 사실임 다만 본인의 요구에 따라 당사자의 이름은 가명으로 밝힘 이름 : 김명국 (가명)
명칭은 112훈련소(아동훈련소) ◆1년 넘게 훈련을 받다가 평양시 서포구역 대양리에 있는 조선 노동당 중앙당 연락소(일명 대남 연락소) 2처 전투정찰에 배치 ◆“ 1980년 5월 19일 날 야외 훈련 하였는데 상급 명령으로 철수 그날 오후 4시 경에 대양리 에서 50명의 전투인원이 북한에서 만든 갱생지프차로 출발 저녁9시 황해남도 장연군 장산곶 북한대남연락소 기지에서 경에 배를 타고 출발
파견대 대장 : 북한 중앙당 대남 연락소 소장 ◆“아니야, 우리 떠날 때는 대장이랑 함께 50명이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보다 먼저 떠난 것 같아." 증언자의 조는 12명 "직속부대에는 3개조가 있었는데 증언자조가 12명이고 3조는 15명, 나머지 사람들은 16정찰에서 배속된 남한 전문가 들이였다.”고 증언 배 길이가 20m / 외형 : 일반 고기잡이 배 / 내부 설계 : 추진기가 4개 달린 배 “우리가 탓 던 배는 일반 남한의 고기 배와 꼭 같아. 길이가 20m쯤 되였을 거야. 여느 때는 일반 배처럼 고기잡이를 하는데 추진기가 4개 달린 배야. 상황이 발생하면 추진기 4개가 다 가동하는데 비행기처럼 속도가 빠르고 자체 폭파하게 되여 있어. 남쪽의 길 안내자 사람 몇 명이 대장한테 와서 자기들이 남한에서 이룩한 성과 부분을 보고... 그들의 파견대장 '문제심'에게 보고내용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과 함께 트럭, 장갑.차들을 노획하였다."는 내용이였다. 23일부터 파견대장 '문제심'은 3일동안 광주시 도심에 있는 봉기군 지휘부에서 남파된 북한군 특전사부대 지휘하였음 ◆1980년5월27일 새벽 북한으로 철수 시작 아침 6시경 철수 중 산 중턱에서 국군 특전사들과 전투중 3명 사살 ◆5월30일 날 새벽에 증언자의 일행이 ‘문경고개’ 근처에서 행군 할 때 부조장이 여자애에게 발각되자 죽여 땅에 묻어 버렸다고 증언 ◆6월4일 휴전선에 도착한때가 저녁11시경 휴전선 지뢰밭과 철조망은 정찰국 성원들이 앞서나가면서 해제 휴전선을 넘어서 보니 6월5일 아침9시 경이였는데 지역을 알아보니 북한 강원도 판교군 지하리 북한군 포사격장에 들어갔다 포탄에 맞아 2명 즉사 본인은 다리에 부상 ◆광주봉기의 북한군 침투 총화는 6월 15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직접적인 참석 하에 평양에서 하였음 남한에 침투 되였다 귀하한 군인, 전사한 군인 모두 에게는 공화국영웅 칭호가 수여 분견대 대장 2명은 조선인민군 교도지도국(특수전 사령부)작전부에 승급 배치 김일성은 소좌급인 분견대장들에게는 대좌의 군사칭호를 수여 하였음 조장들은 7명이 살아 돌아 왔는데 각 군단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상위 급 군사칭호를 상좌로 승격시켜 배속하였음 ◆조선인민군 1010군부대 전투원 김명국은 1980년5월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음 같은 전투공로로 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기훈장1급, 자기 목숨을 바쳐 지휘관을 보위한 공로로 국기훈장1급 수여받았음(국기훈장 2개면 공화국영웅칭호와 맞먹는 대우) 태천군관학교(북한군 특수전 사령부 군관학교) 에 입학 2003년까지 북한군 특수전 부대에서 지휘관으로 복무 마지막 남는 사람은 붙잡히게 되면 자폭하게 되여 있어. 만약 전우가 부상당해 대오의 행군에 지장을 준다고 생각되면 죽여서 땅에 묻어 묻어버림 옷 속에 여러 가지 유형의 작은 물체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데 고성능 폭약 3킬로 그람이 터지는 위력과 맞먹는다.'고 증언 '광주 사태가 진압되면서 우리 부대는 모두 갈라졌는데 혹시 남한의 산속이나 도시속에 숨어 있다가 훗날 북으로 들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2006년 탈북 2006년 대한민국에 입국 현재 서울 수도권 일대에서 살고 있음
거의 모두가 30년~40년의 옥고를 치룬 사람들 가운데 유독 단 한사람만은 17년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손성모 남자 당시나이 67세 학력관계 김일성종합대학 졸업생. 거의 대부분의 비전향장기수들은 한국전쟁시기 남한에서 전투하다가 체포된 사람들인데 손성모는 달랐다. 나이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도무지 한국전쟁참가자가 될 수 없었다. 전국적으로 간부학습반에서 손성모의 투쟁업적에 대해 2003년 북한 당 기관지 ‘노동신문’ 2면에 ‘ 나는 김일성 종합대학 졸업생이다.’라는 제목을 달고 글이 실린 적이 있다. 내용 :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위해 1980년 광주봉기때 북에서 파견되어 적구에서 싸우던 중 변절자의 밀고로 여기 저기 ㅤㅉㅗㅈ기다가 산속에서 몇 달 동안 숨어서 활동하다 놈들에게 체포되게 되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 목숨 바칠 비장한 결심을 하고 칼로 목의 대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했으나 공교롭게도 죽음이 쉽게 이루어 지지 않자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비 전향 장기수”로 17년간을 감옥에서 투쟁했다고 씌어 있다. 당, 법 간부학습반에서 ‘손성모동지의 투쟁업적을 따라 배우자!’라는 주제의 내용으로 문답식 학습경연과 궐기모임까지 진행되었다.
[편집] 생애전라북도 부안군 출생이다. 가난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난데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서 교육 기회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했다. 일찍부터 머슴살이를 하는 등 노동자로 일하면서 고학을 하여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대학교 학생으로 재학 중이었다. 개전 사흘만인 6월 28일에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며칠 후 인민의용군으로 지원하여 참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월북한 뒤 1957년에 제대하였고, 제대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함흥시에서 대학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 초반에 전라남도 해안을 통해 공작원으로 남파된 뒤 승려로 위장하여 활동하다가, 1981년 2월에 경상북도 문경시에서 체포되었다. 간첩 수사 기관에서 장기간 조사를 받았으며, 1987년 6월 항쟁 성공 후에야 정식으로 구속되었다.[1] 손성모는 법정에서 간첩 혐의를 부인하고 통일사업을 위해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총 수감 기간은 만 19년이 조금 못 되어, 비전향 장기수 가운데서는 비교적 짧은 편이다. 수감 생활 후반기에는 신광수와 함께 최후의 비전향 장기수 2인으로 알려져 인권단체가 석방 운동을 벌였고[2], 1999년 연말에 김대중 정부의 특사로 광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되었다.[3][4] 출옥 후에는 서울 관악구에서 다른 출소 장기수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하였다.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고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았다. 송환 후 평양에 정착하여 2004년 〈화선 당세포〉라는 시를 발표[5]하는 등 조선작가동맹 소속 시인으로 활동하였다.[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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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지만원님의 댓글
지만원 작성일
* 1980년대초 남파되어 잠복중이 던 '손성모'는 5.18광주사태 당시 남파되었던 북한군 특전사의 길 안내자로 활약하였다
위 내용의 자료원(원천) 좀 알 수 없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