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렬 유고록 ① |
[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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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기념관 '의로운 사람' 코너에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록 원본과 집필할 때 사용했던 만년필과 안경 등이 전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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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과 경찰의 실책 은폐하는데 공분 "가필 안하고 알릴 수 있을 때 발표" 유언
김익렬 유고록 ① 4·3 발발 초기 제9연대장을 지냈던 김익렬 장군이 유고록을 남겼다는 소식을 듣고 유족을 만나기 위해 상경한 것은 1989년 8월 초순께였다. 김 장군의 집은 서울 중구 필동 골목길에 자리한 허름한 2층 집이었다.
서울 주재기자 부영주(정경부 차장)와 함께 김 장군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장군의 부인(최재선), 아들과 딸, 그리고 사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장군의 부인은 첫 아들을 모슬포에서 낳았다면서 제주에서의 생활상을 떠올렸다.
"아이가 설사 나고, 산모인 내가 힘들어하자 사병들이 쌀을 조금 가져 왔어요. 영감이 그걸 알고 당장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치더군요"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김익렬 장군은 1969년 국방대학원장(중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다. 4·3 기록들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데 공분을 느껴 1970년대초부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제9연대장으로 재직할 당시의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증인을 자처한 것이다.
김 장군은 이 회고록 때문에 아픔과 시련을 겪었다. 첫번째는 1970년대 중반 중량감있는 제주출신 국회의원에게 회고록의 존재를 알려 발표하려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두번째는 제남신문에 연재하려 했으나 이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강천종 기자가 직접 김 장군의 유고록을 입수, 발표하려 했지만 공안당국의 제동으로 무산된 것이다.
이어 1980년대초 장창국 장군(육군 대장 예편)이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1984년 「육사졸업생」으로 출간됨)를 연재할 때, 김 장군의 회고록 일부가 건네졌는데, 신문에 발표된 4·3 관련 내용은 김 장군의 회고록과 기존에 나왔던 왜곡 투성이의 자료를 짜깁기한 것이었다.
김 장군은 "김 중령이나 김달삼도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온 일본군 소위였다"는 대목에 분노가 폭발했다. 사실도 아닌 내용을 갖고, 김익렬과 김달삼을 얽으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1948년 김달삼과 벌인 '4·28 평화협상' 때 "연대장이 폭도 두목과 내통했다"는 등의 루머에 시달렸던 기억이 되살아나 김 장군은 가족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되 그 전에는 발표하지 말라"
김 장군은 1988년 12월 영면했으니, 그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장군의 원고를 가필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신문에 발표할테니 맡겨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장군의 부인은 "아직은 시기상조다. 노태우 장군이 대통령을 맡고 있는데, 이 세상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유족들의 생각은 확고했다. 몇차례 간곡한 청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말했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장군께 욕이 되어도 할 수 없다. 기존의 자료들은 김익렬 연대장의 평화협상에도 의심을 품고 있다. 명예스럽지 못한 자료들이 난무하고 있다. 김 장군의 유고록을 이 시점에서 발표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존 자료를 갖고 신문 연재물을 쓸 수밖에 없다. 저 세상에 계신 장군께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달라.
이 말을 들은 장군 부인 얼굴에서 동요한 빛이 엿보였다. 장군의 집에 간 시간이 오후 3시께였는데, 오후 6시를 넘기고 있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염치 불구하고 저녁이라도 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자고 운을 뗐더니 장군 부인이 국수라도 삶겠다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사이에 자녀들을 설득했다. 사위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원군을 얻은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지리한 협상을 계속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우리에게 질렸는지 장군 부인의 입에서 "그럼 양 부장을 믿고 원고를 건넬 테니 모든 책임을 져라!"고 다짐받는 게 아닌가? 날아갈 듯이 기뻤다. 장장 6시간의 설득 끝에 입수된 김익렬 장군의 유고는 200자 원고지 346장이었다. 장군이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직접 쓴 원고를 건네받자 나도 모르게 "하늘이 돕는구나"는 독백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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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8453
[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7> 김익렬 유고록 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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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5일 제주공항에 도착한 딘 장군 일행. 미국에서 찾은 이 사진은 유고록에 기록된대로 정확히 최고수뇌회의 참석자 9명이 한 컷에 모두 들어있어 유고록의 신뢰도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왼쪽 두번째부터 딘 장군, 통역관, 유해진 도지사, 맨스필드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중령,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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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 선전 막으려 '공산 반란' 규정했다" 평화 해결 강조하는 연대장을 전격 해임
김익렬 유고록 ②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을 들고 신문사에 돌아오자 편집국이 갑자기 들뜬 분위기가 됐다. 원고를 검토한 송상일 편집국장은 4·3 초기 미군정의 토벌정책과 군·경의 대응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편집회의에서 김익렬 유고를 매주 5회씩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8월 15일 '유언-4·3의 진실'이란 이름으로 첫 회가 발표된 데 이어 그해 9월 23일까지 모두 26회가 연재됐다.
유족들과의 약속대로 친필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다만 유족의 요구에 따라 조 아무개와 박 아무개 등 특정인을 심하게 힐난하는 두 문장을 뺐고, 한자를 한글 표기로 고치는 등 기초 교정만 했다. 노인의 육필이라서 문장 하나가 200자 원고지 서너 장을 훌쩍 넘긴 후에야 비로소 마침표가 찍힐 정도로 장문이 많았다. 송 편집국장은 그 긴 문장을 일일이 잘라 단문으로 만드는 등 손수 수정할 정도로 적극성을 보였다.
예상했던대로 유고 연재에 대한 독자들의 반향은 뜨거웠다.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미군정의 4·3 토벌정책에 대한 고급 정보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다.
김익렬 연대장은 4·3 발발 원인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빚어진 경찰과 서청 등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들고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가세한 것으로 판단했다. 미군정으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았을 때, 제9연대가 '선선무 후토벌' 원칙을 세운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그는 곧 미군정이 '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을 알게 됐다. 소련 측이 UN 무대에서 "소련 점령지역 주민들은 평화롭기만 한데 미군 점령지역에서는 미군정의 폭정에 항거하는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제주도다"라고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정부가 군정장관 딘 장군을 문책하고, 제주도 사태를 조속히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소련의 선전을 봉쇄하기 위해서 제주도 사태를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한 반란'으로 규정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제주도 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이 연대장인 자신에게 전한 말이라고 유고록을 통해 증언했다.
이에 놀란 김익렬 연대장은 "그것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표명하고, 자신은 평화적인 해결에 관심을 보인 맨스필드 군정관의 지원 아래 L-5 비행기를 직접 타고 전단을 뿌리는 등 무장대 측과의 평화협상을 우선 추진했다는 것이다.
김익렬은 이 무렵 '또 다른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하고 있었다고 유고록에 적고 있다. 미군 CIC사무실에서 딘 장군의 정치 고문이란 자를 만났는데, 제주 사태를 조속히 진압하지 않으면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진다면서 "신속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초토작전"이라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김 연대장이 이를 거부하자, 그 정치 고문은 10만 달러를 주겠다, 미국으로 이민을 알선해주겠다는 등의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런 회유를 물리치고 자신의 소신대로 평화협상을 진행하자 이번에는 경찰의 방해 공작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5·1 오라리 방화사건'과 '5·3 기습작전'이라고 주장했다.
김익렬 유고는 1948년 5월 5일 딘 장군이 직접 제주도에 와서 주재한 '9인 최고 수뇌회의'에서 절정에 이른다. 갈림길에 선 제주도 사태에 대해 화평이냐, 유혈이냐의 정책 결정을 하는 최고회의였기 때문이다.
비공개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서 평화적 해결방안을 제시하던 김익렬 연대장을 조병옥 경무부장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면서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딘 장군은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했다. 그것은 제주도 사태의 강경 진압을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출처1 :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8683
출처2 :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58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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