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그것은 북한이 개입한 무서운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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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력통치 작성일11-07-26 12:00 조회1,399회 댓글5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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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에 대한 당시 북한의 선전
1980년 5월 18일 대한민국의 남쪽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30년 세월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북한 인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변으로 기억된다. 나는 2005년에 북에서 남한에 온 사람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땅의 사람들은 5,18사건을 민주화 운동의 한 부문으로 기억할 뿐 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독재를 부수고 민주를 쟁취하려는 애국학생들과 애국시민들의 투쟁이라고 단순히 기억할 수만은 도저히 없는 기막힌 사건중의 사건인데도 말이다. 내가 감히 이 운동을 사건이라고 말함은 그럴만한 반증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사태에는 북한 특수군이 관여했다. 그러한 증언 자료들은 북한 전역 어디에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5,18사건이 있은 후 북한 전 지역은 벌 둥지를 쑤셔놓은 것처럼 소란했다. 중앙 TV와 조선중앙1,2,3방송들은 연일 남조선에서의 광주인민 봉기에 대해 대거 선전했다. 군에서 갓 제대해 나온 그때 나는 그 선전을 들으며 당장 이 땅에 전쟁의 나는 줄 알았다. 방송뿐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도 일제히 강연회를 열고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영웅적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에 대해 연설했다. 강연내용에는 기막힌 참상들이 생생한 화폭으로 열거돼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전달만이 아니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격분과 증오로 가슴을 불태울 가혹한 잔행들로 역어져 있었다.
강연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두환 중장은 광주사태에 대비하여 내려 보낸 ‘계엄군’ 공수부대 전 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다량 복용시켰다. 전두환의 명령은 잔혹한 명령이었다. 광주시민 70%를 죽여서라도 도시를 즉각 탈환하라는 것이었다. 5,20일 이렇듯 잔혹한 명령을 받은 수천 명의 계엄군이 탱크와 장갑차 최신무기들로 장비한 후 광주시내로 진입했다. 당시 광주는 폭동시민들의 손에 완전 장악되어 있었다. 서라는 명령에 불복하거나 겁을 먹고 뛰면 즉시 사살했다. 도시군의 항전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시내의 경찰서 무기고를 점령하고 젊은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자동총으로 무장했다. 이것은 철두철미 총과 총이 대결한 가혹한 ‘내전’이라고 강연자는 격앙에 넘쳐 연설했다.
-진압현장에서 계엄군이 저지른 만행은 말 그대로 듣는 사람이 증오를 최대한 끌어내는 짐승도 낯을 붉힐 야수적 행동이었다. 그들은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낸다. 끄집어 낸 태아를 대검 끝에 꼬나들고 휘저으며 밀집된 시위 군중을 위협했다. 젊은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도려내고 철사로 포박해 군용차에 매달아 끌고 다녔다. 쇠파이프로 군중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쳐 즉사시키고 연발발포로 무차별 사살을 서슴없이 감행했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이 강연 참가자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명령만 떨어지면 단숨에 남쪽나라 광주까지 달려 나가 전두환 계엄군을 소탕할 열기로 전국이 들끓었다. 5월 25일 전 북한 전역에서는 광주참사를 주도하는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규탄 대회와 각종 모임들이 진행됐다. 사실상 광주사태에 대한 강연을 들은 사람들치고 여기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그만큼 강연은 가장 반인륜적인 인간들만이 저지를 수 있는 참혹한 참살현황을 너무도 생동감 있게 엮어냈던 것이다. 어이하여 민주화를 위해 일어선 자국민들을 그렇듯 참혹한 방법으로 도살할 수 있느냐는 것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안겨왔던 것이다.
계엄군은 시내에 돌입한 후 국내외 기자들의 출입을 엄금했다. 이미 안에 있던 외신기자들이 밖으로 빠져 나올 때도 그들은 기자들이 소지한 모든 기재들과 자료들을 무조건 압수했다. 그렇듯 외부와의 연결을 완전 차단한 상태에서 광주 현황을 어떻게 그리도 생동감있게 전하는지 모두 의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벌어진 사태가 너무도 참혹한 것이기에 그것을 거짓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광주는 시민들 손에 장악된지 10일 만에 다시 계엄군의 손에 들어갔지만 민주화를 위해 피를 바친 전 시민들의 애국적 행동은 영원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라는 연속된 강연은 전 북한 인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남한 소설가 황석영이 방북했다, 그는 조선 영화사 작가와 의합하여 시나리오 ‘님을 위한 교향시’ 를 쓰고 이내 제작에 들어갔다. 이 영화가 북한 전역에서 대 성황리에 상영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광주폭동 진압 당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잔혹한 살인 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남한 사람들이 말하는데, 황석영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내용의 시나리오를 썼는지 의문이 깊어진다.
영화는 남녀 두 대학생의 사랑을 그린 영화였는데 시대를 앞서가는 젊은이들의 양심을 그린 영화다. 두 남녀가 남해의 어느 섬에서 한참 휴양을 즐기고 있을 때 광주폭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이 주력군이었다. 여자는 폭동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남자에게는 알려주지 않는다. 남자 대학생은 대학교 학생회장이었기에 알기만 하면 무작정 폭동현장으로 달려 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당시 여자는 임신 중이었다. 섬지기 여자의 삼촌도 광주폭동사실을 알았다. 삼촌은 이 두 남녀를 못마땅하게 지켜본다. 시대를 선도하는 젊은이들이 남들은 피 흘리며 싸우는데 한가하게 연애에 묻혀 세월을 탕진하면 역사 앞에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냐고 말한다. 얼마 후 남자도 폭동 사실을 알게 됐다. 더 지체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여자만을 남겨놓고 시내로 들어와 폭동에 합세하여, 계엄군을 물리치려 용맹하게 싸운다. 싸움 현장은 치열했다. 위에서도 열거했지만 대검으로 찌르고 배를 가르고 옷을 벗겨 군용트럭에 끌고 다니는 등 강연회 때 선전한 모든 장면들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문제는 남한 작가였다. 남한작가가 쓴 영화의 장면이었기에 거기엔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북한 사람들은 광주폭동진압사태의 잔인성을 그대로 믿게 되었다. 환각제 복용은 말 그대로 사람을 짐승으로 돌변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두환은 자기의 정치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남조선 군부 다시 말하면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해 치를 떨었다. 과연 외세와의 싸움도 아닌 자국 국민을 상대로 저렇듯 참혹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가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도처에서 광주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들이 열렸다. 물론 그러한 집회들은 모두 해당 당 조직들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10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광주시민들은 도시를 장악했으나 결국 계엄군의 무차별 살육으로 다시 빼앗겼다. 수천 명의 희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를 남긴 이 폭동은 그렇게 진압되었으나 남조선 혁명에서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민족혁명이라고 북한 정부는 선전했다. 그 후 일 년 쯤 지난 81년 광주 폭동 1돌 기념 강연이라고 기억된다. 중급 간부들만의 모인 간부 강연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왔다. 연사는 도당에서 파견된 사람이었는데 직급은 도당 위원회 통보 과 지도원이라 소개했다. 그 사람의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현 정세는 바야흐로 조국통일의 대 사변을 준비 있게 맞이해야 할 준엄한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강사는 조목조목 실례를 들어가면서 이야기했다. 위대한 수령님(김일성)께서는 얼마 전 당 중앙정치국 위원회 기조연설에서 우리는 벌써 세 번에 걸쳐 조국통일의 기회를 제때에 활용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첫 번째가 1960년 4,19 인민봉기 때이며 두 번째는 1968년 겨울 미군 최첨단 간첩선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때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도대체 언제인가 하는 의문에 강사는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그 대목을 말할 때 강사의 눈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관중도 놀랐다. 그것은 다름 아닌 5,18 광주폭동 때였다는 것이었다.
남조선 전역이, 전두환 군사 파쑈 정권을 반대하는 반정부 기운이 광주폭동과 더불어 최고도로 무르익었던 그때 인민군의 남진이 이루어 졌더라면 통일은 시간 문제였다는 대목에서 관중은 자못 긴장해졌다. 강사는 간부들뿐이기에 말한다고 했다. 광주 폭동은 전적으로 우리의 대남공작의 빛나는 승리의 결과라고 했다. 최근 남조선 정세는 우리 공화국의 의도에 맞게 아주 긍정적인 발전단계를 거쳐 무르익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반외세 애국적 투쟁으로 이름이 나있는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남조선 전역에 걸쳐 우리 공화국을 동경하고 민족의 앞길을 위대한 지름길로 이끄시는 수령님을 흠모하고 칭송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도 강경하게 울려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통일혁명당 전라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최영도, 서울시 인민위원회 김종태 위원장, 그들은 이미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지만 그들이 남조선 전역에 뿌린 수령님의 위대한 사상은 이미 깊숙이 그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목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하조직, 반 지하조직들의 활발한 반정부 투쟁은 잠재단계를 벗어나 이제는 대중운동으로 전환될 시기라고 말하며 바로 광주폭동은 이 끓어오르는 군중운동을 한 계단 더 높은 단계로 끌어 올리는 우리당의 대남정책 실현이라고 말했다. 북한 노동당은 언제나, 남조선 혁명은 자국 내의 인민각성과 주권을 쟁취하려는 스스로의 운동이 폭력전쟁으로 일어나고 전개 되어야만 비로소 혁명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일대 전환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분산된 대중운동을 한 곬에 집결시켜야만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노숙한 당의 주도와 세밀한 원칙에 의거한 유일영도가 이루어 져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그러한 노선에 따라 지난 수십 년 전개된 노동당의 대남정책은 비로소 8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이제 지금껏 축적한 군중운동의 힘을 한 곬에 모을 폭발적인 사변이 절실히 필요했는 바 그 실현이 바로 전라도 광주폭동이었다는 것이다.
모두는 강연을 들으면서 조였던 가슴이 확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광주 폭동에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소문은 이미 전국에 쫘 악 퍼져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조직적인 지시가 없었기에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발설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또 소문뿐이었지 그것을 확증 즉 증명할만한 사안들이 극히 드물었던 때였다. 하지만 사람이란 궁금증이 풀리지 않으면 무엇인가 더 알고 싶어 몸살을 떤다. 이 구석 저 구석 앉으면 쉬쉬 하던 그 소문의 진가를 바로 강연 연사가 시원히 알려주자 일순간 장내는 벌 둥지를 쑤셔 놓은 것처럼 웅성거렸다. 심지어 그 좋은 통일의 기회를 왜 그렇게 속절없이 흘려보냈을까 하고 못내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게 된 데는 바로 김일성이 통일기회 세 번 중의 마지막 하나였다고 했다는 소리가 나왔기 때문이다.
강사는 다시 격앙에 넘쳐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꼼꼼히 들여다보며 한자라도 틀릴세라 읽던 중앙에서 인쇄한 원문을 이번에는 보지 않고 말했다. 이제 우리 공화국은 남조선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완전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우리 군 특수부대가 남파된 것은 한 개 대대 인원이었다. 잠수함과 공중으로 은밀히 전라도에 스며든 우리 군은 자정이 지난 깊은 밤 환각제를 복용한 전두환 계엄군을 광주시 교외에서 먼저 기습했다. 물론 기습할 때는 군복이 아닌 학생복과 시민들이 입는 옷으로 바꾸어 입고 사격했다. 뜻밖의 총격을 받은 계엄군은 일단 뒤로 물러났으나 잠시 후 다시 탱크와 장갑차들을 동원해 물밀듯이 시내로 진입하려 했다. 총격전으로 온통 소란스러워지자 시내에 있던 폭동군중은 모두 잠에서 깨어 대기태세로 이전했고 노약자와 어린이들은 무등산으로 피난을 갔다.
만약 그때 우리 특수군이 계엄군을 제때에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소리 없이 숨어 든 계엄군에 의해 광주시는 말 그대로 피의 바다가 범람했을 것이라고 강연자는 말했다. 폭동군중은 시민으로 위장한 북한 군인들의 선도에 의해 이내 경찰서를 비롯한 주요 군부대 기관들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했고 시내로 진입한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곳곳에서의 저항에 의해 계엄군은 부득불 시내에서 철수하여 외곽에 모였다. 그들은 이렇게 그저 순수한 폭동자들이 무기까지 사용하며 저항할 줄 미처 몰랐던지 급히 전장에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인민군은 각의한 방법으로 시위 군중에게 선전 공세를 했다. 훗날 퍼져나간 말이었지만 북한군인 여러 명도 광주에서 희생되었다고 했다.
그들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훗날 북의 개입이 있었다는 증빙자료가 될 수 있었기에 그들은 그 시체를 한 곳에 모아 휘발유를 뿌리고 태워버렸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은 북한 전역에 퍼져 나갔어도 하등 문제시 되는 것은 없었다. 북한 체제가 강요했듯 당시 북한인민들의 국가관은 대단했다. 국가관이라기보다는 수령관이다. 당과 수령을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운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지 그것은 성스러운 일이었고 영원한 정치적 생명을 안고 수령의 기억 속에 영생하는 복 받은 삶으로 인정됐던 것이다. 조국을 위해 그리고 수령님을 위해 남조선 혁명에서 한목숨 바쳐 싸웠다면 그토록 자랑스러운 일과 명예는 다시없다는 말이다.
1980년대 초반에 전 북한을 경악으로 뒤흔든 전라도 광주폭동은 날자가 흐름에 따라 ‘영명하신 수령’ 김일성에 대한 위대함으로 점차 그 기수를 바꿨다. 악명 높은 전두환 정권의 야수적 탄압에서 받은 전율보다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소문과 간부강연을 통해 그것이 이내 양상을 바꿔 김일성의 위대함과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던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통일의 위대한 성전을 승리로 맞을 수 있다는 승리의 신심으로 가슴 불태웠다는 얘기다. 이것이 국민계몽을 위해 북한 정권이 만들어낸 거짓 강연인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나 아무리 그래도 없는 사실을 오도하여 특수군 광주폭동 개입을 강연까지 해가며 선전했다는 것은 어딘가 어불성설이다.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을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흰 것도 검다고 곧잘 우겨대는 북한 정권이 행태로 봐서는 능히 그런 거짓말도 꾸며 낼 수도 있지만 당시의 환경은 절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세 번의 조국통일 기회를 놓쳤다는 김일성의 말과 관련 된다. 북한군 특수부대까지 한 개 대대 역량이나 파견하는 상황이었다면 남침도발을 벌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분명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미리 알았을 것이었다. 한 개 대대 파견은 그 진상여부를 진찰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고 전혀 내려 보내지 않았다면 이미 전라도에서 싸웠을 비밀 조직들에 미안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진압과정을 겪으면서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원리를 알았을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통일기회를 놓쳤다는 망언은 북한전역에서 거대한 효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들의 대남정책은 그러한 과정을 남조선 혁명의 단계별 성장 과정이라고 규정지으며 그러한 폭동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확산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광주폭동이 광주 한 지역에서 국한되지 않고 그 여파를 타고 남한 전 지역 봉기로 넘어갔다면 북한군이 남한으로 재깍 진격했을 것이다. 김일성 또한 그것을 바라고 광주폭동을 주도했으며 특수 군까지 파견해 각종 반인민적인 만행이 발생하도록 유도했다. 80년 당시 인민군은 비상전시태세에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해 둘 필요가 있다. 반도의 남단 아래쪽에서 일어난 봉기에 왜 괜히 북쪽에서 신발 끈을 조여매고 대기 태세로 돌입했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반증이다. 그러나 북한이 바라던 대로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전국적인 반정부 기운이 무르익어 갔으나 당시 남한은 폭동 그 자체가 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김일성은 그것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그래서 세 번의 통일기회를 놓쳤다고 측근 간부들 앞에서 역설했고 전국적인 간부 강연회를 열고 그 같은 진실게임을 벌인 것이었다. 그 강연을 들은 후 간부들은 ‘내 놓고 광주폭동에 우리 군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말만 빼고’ 어느 때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통일 위업에 대비하라고 선전했다.
내가 만난 친구의 형의 증언
그 후 나는 우연히 (정확한 날짜는 기억되지 않는다.) 친구의 친구라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그 이름을 밝힐 수도 있으나 본인의 승인 없이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 친구의 형이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되어 가지고 군에서 제대하여 집에 내려 왔는데 그가 바로 광주폭동 현장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군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친구를 따라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초가을에 접어드는 화창한 날이었는데 친구와 나는 그 사람이 있다는 강변에 나갔다.
그냥 가면 된다는 말에 빈손으로 갔는데 아늑한 풀밭에는 숯불이 이글거리고 통통 살이 찐 검은 색깔이 돼지 한 마리가 벌건 불에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여자 두 명과 그 형이라는 사람과 그리고 또 한사람의 알지 못할 남자가 있었다. 통돼지를 굽고 있는 현장에 나 같은 사람은 난생 처음이어서 어안이 벙벙했지만 친구는 이미 익숙한 자리었는지 스스럼없이 나를 불 앞으로 이끌었다. 벌써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원래 고기라면 나무라지 않는 나는 벌써부터 목을 적시는 군침을 애써 삼키며 두려운 눈으로 그 사람들을 살폈다.
당시 특수 병종 군인들이라면 북한 젊은이들은 모두 무조건 선호했다. 군대에 나갈 나이가 되면 무조건 특수병종에 배치받기를 원했다. 그만큼 강한 남자에 대한 선호는 당시 젊은이들 속에서 유행되었다. 형이라는 사람이 내게 물었다. 넌 어디서 군복무를 했느냐고? 나는 숨김없이 말했다. 진정 우러러 보는 사람 앞에서는 거짓이 없다.
생기기는 여자처럼 왜소하게 생긴 사람이었는데 벌써 말하는 품이 상당한 무게가 있었다. 미리 가져다 놓은 술이 거나하게 돌아가자 그 형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그런데 마디마디 터놓는 말이 모두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이어서 바싹 당겨지는 구미를 느꼈다. 옆에서 시중들다시피 살뜰하게 구는 여자가 이따금 눈을 할쭉거렸으나 술잔이 하나 둘 비워질수록 그 사람이 말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헤엄쳤다. 모두 군에서 있었던 무훈담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광주봉기에 대한 말까지 튀어 나왔다. 자기는 직접 남조선까지 나갔다 온 특수 요원이었다는 것이다.
일이 그쯤 되자 나는 서슴없이 물었다. 그때는 이미 나도 어지간히 술에 취해가던 것 같았다. 진짜로 특수 군이 광주폭동에 참가했냐고 묻자 그 형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럼 내가 공연히 희떠운 소리나 하는 인물로 보이냐는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니라고 내가 손을 홰 홰 내 젖자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너 같이 2제대에서 군복무를 한 놈이 어찌 우리 같은 군인들의 무훈담을 알겠냐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광주사태를 반영한 영화 모두가 거의 진실과 가깝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엄군의 만행은 모두 북에서 들어 간 우리 특수군이 그렇게 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요? 모두의 눈은 자연스레 그 형이 얼굴에 집중되었다. 정말 싸울만한 전투였다, 철저히 신분을 감추고 진행된 일이어서 어쩌면 재미까지 있었다는 거였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하는 말이겠지만 사람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총탄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결코 재미란 것이 타당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이 하는 이야기이기에 언제 그것을 탓할 경황도 없었다.
총성이 울리게 함으로써 계엄군이 부득불 무장을 사용하게끔 유도했다는 이야기였다. 계엄군은 실지 현지에서 총격전을 치렀다. 그 사람이 말했다. 너들 영화에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을 목격했지? 그랬다고 하며 친구가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 형은 그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하며 한참 갑자르다가(말하기 거북하여 뜸들이다) ‘사실 그건 우리부대 특전사들이 한 짓’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자 그는 그래야만 시민들의 격분을 이끌어내고 과격한 행동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적후에서의 특수부대의 임무를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한 만행이 백주에 감행되자 말 그대로 시민들의 격분은 하늘을 찔렀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정치 공작임무를 맡은 인원들이 국내외 기자들에게 그 사진을 넘기며 온 세상에 이 용서 못할 만행을 고발해 달라고 부탁하는 공작도 진행했다. 그렇게 한 목적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그 결과로 전 남조선 땅에 이 처절한 실태를 알리고 세계에 이슈화함으로써 전 남조선 땅에 반정부 시위가 들끓게 하고 세계 앞에서 북한군 진입의 구실을 마련하자는 데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수령님께서 구상하신 위대한 통일 전쟁이며 한반도에서의 승리의 서곡이 될 수 있는 멋진 작전이었다고 긍지에 넘쳐 말했다. 듣는 우리 모두의 가슴이 옥죄어 들었다. 진정 역사적 순간에 진입한 사람의 심정이 되어 그 형의 다음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형이 말이 끝나자 우리 모두의 입에서는 하나같은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런데 왜?? 그 형이 웃었다. 독한 소주를 고뿌 채 들이키면서 울먹이며 말했다. 일이란 언제나 변수를 안고 있다.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바라는 바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바로 세상만사라는 것이었다. 만약 바라는 바대로 그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자기가 지금 여기 촌구석에 와서 이 같은 소주나 병들이 할 까닭이 있겠냐는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전쟁이었다고 했다.
전쟁?? 그럴만한 타당성이 있었다. 당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살사건이 일어 난지 1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12,12군사 쿠테타로 정권을 가로챈 전두환 군독재 정권에 대한 남조선 인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어떤 외부의 물리적 힘이 동반된다면 능히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북한 정부의 시기론이었다. 이렇게 좋은 시기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침 전라도 조직으로부터 희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당시 합법적이다시피 맹활약 중이던 친북 조직은 광주폭동에 불을 지르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김일성도 이것을 기회로 봤다. 수 십 년 꿈꾸던 통일광장의 유일 대통령이 되어 전 인민의 환호를 받는 신적인 자기의 멋진 모습이 상상만 해도 즐거웠을 것이다.
광주폭동을 기점으로 남조선 전역에 4,19와 꼭 같은 민주항쟁이 일어난다면 그것처럼 멋진 기회는 다시없을 거라고 결론짓고 인민군 특수부대 파견을 서둘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광주 폭동은 그렇듯 심혈을 기울이고 특전부대까지 동원되었으나 별로 탐탁한 실효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서 진압됐고 다른 도시들에는 퍼지지 않았다. 나는 간부 강연에서 들었던 그 말이 생각났다. 조국통일의 세 번째 기회, 김일성의 그 세 번째 기회는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때 만약 60년 4,19처럼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났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또다시 한차례 동족상잔의 비극이 연출되었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만약 그때 전쟁이 일어났다면 어느 쪽이 이길 거냐를 떠나서 그 무지한 총포탄의 작렬 속에 한 민족의 가슴 아픈 참혹한 후진을 무엇으로 보상했겠느냐 하는 생각이다. 그때는 가슴을 울렁이며 그 형이 이야기를 격동 속에 들었지만 남한에 떳떳한 국민으로 입국해 사는 지금의 나는 몸서리를 친다. 그 형이 이야기가 결코 지나간 허풍으로 듣기에는 너무도 아귀가 잘 맞는 소리였다.
그 후 그 형은 다시 몸이 완쾌되어 본 부대로 돌아갔다. 가면서 다시 친구와 나를 불러놓고 신신당부했다. 어디 가서 그때들은 말은 없던 것으로 하라고,, 술기운에 뱉은 말이지만 너무도 중대한 사안이어서,,,,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이미 강연을 통해 다 알려진 일이라고, 아마 이일을 모르면 북조선 사람이 아닐 거라고 안심시켰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바로 그거? 그거 말이야?? 우리 둘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안다고 철부지가 아니니 걱정 말라고, 전에 북한 주민의 영화를 보며 치를 떨었던 바로 그 장면,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 낸 천인공노할 극치의 만행을 바로 북한군의 시민감정을 유도하려 저지른 행위였다는 바로 그 말이었다. 그건 함부로 지껄일 말이 아니었다, 출처를 캐려 들면 말한 그 형은 물론 들어버린 우리 둘(그때 두 여자까지) 역시 능지처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 어느 누구나 들으면 치를 떨 만행이지만 그러한 일이 국가를 위해 어떤 정의를 위해 부득불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면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적 범죄여서 그런 것인가? 북에 살던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나는 그러한 테러적 행위가 얼마나 큰 동족말살 행위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 후부터는 남조선에서는 남침을 감행할만한 이변적인 사건들이 없었다. 없을뿐더러 북한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대 발전이 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A씨의 증언
“요즈음에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50대의 탈북자 남성분도 만나보았습니다. 열아홉 청춘에 북한군에 입대하여 중대장의 연락병으로 배를 타고 산을 넘어서 남조선에 왔다가 다른 사람들은 큰 공로를 세웠다고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자신은 나이기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기훈장 1급 훈장만 받았다고 합니다. 그 남성의 말에 의하면 다른 건 다 몰라도 5.18은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우리가 개임한 것만 보아도 순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데서도 진실은 명백히 갈라진다고 봅니다.”
B씨의 증언
“저는 올해 1월 달에 1980년 5월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남한에 내려와서 소문 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50대의 남성분을 만나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신변상의 문제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많이 꺼리고 있지만 5.18광주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기회가 조성되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증언을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분이 광주사건에 직접 참가했다고 주위에서 말이 나올 때 절반은 믿고 나머지 절반은 확실하게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북한특수부대원의 신분으로 남조선에 파견되어 내려와서 직접 참가한 사람이라면 남한에 와서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광주사건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 부분이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는 말을 구체적으로 들어보니까 2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무슨 이유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지 조금씩 이해가 갔습니다. 2006년 남한에 와서 처음으로 합동조사반에서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자기가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당시 북에서 임무를 받고 내려왔었다고 그 때의 상황에 대해서 조사관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조사관의 입에서 앞으로 그런 쓸 데 없는 말을 두번 다시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협박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한다.” (증언집 196-197쪽)
C씨의 증언
“5.18광주에 북한군 중좌였던 JMH씨는 현재 서울교외에 살고 있다. 나는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그의 집을 자주 다닌다. D씨도 내가 그의 집으로 데려가서 만나게 해주었다. JMH의 가족 모두가 탈북했다.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한 식구는 딸이었고 이어서 여동생이 왔다. 2006년 6월경 딸이 먼저 왔는데 국정원 조사관이 가족사항을 묻는 과정에서 딸은 ‘우리 아버지가 5.18 광주에 왔었다’는 말을 처음으로 했고, 얼마 후에 여동생이 왔을 때 여동생 역시 국정원 조사관에게 같은 취지의 진술을 했다. ‘우리 오빠가 5.18에 왔었다’. 곧이어 아버지인 JMH가 탈북해 왔다. 이번에는 국정원 조사관이 먼저 물었다한다. ‘당신이 5.18광주에 왔었는가?’ 바로 이 조사관이 위 붉은 글씨의 협박을 가했던 사람이었다."
"2009년 2월 초, 또 다른 국정원 직원(이BY씨. 35-40)과 차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55-60세 가량의 남자가 분당의 모처에서 JMH와 C씨를 만나자 했다. 타고 온 차는 허름한 소나타. 국정원에서 왔다는 이 두 사람은 다짜고짜 ‘당신들 두 사람 남한에 사기 치러 왔느냐’며 윽박질렀고 쌍방 간에 고성이 오갔다. 3일 후 국정원의 위 이BY가 C씨를 세곡동 근방에서 또 보자 하여 만났다. 음식집에 가더니 또 ‘사기 치러 왔느냐’ '바라는 게 뭐냐, 말해보라' 이렇게 윽박질렀고 두 사람 사이에 또 고성이 오갔다.”
D씨의 증언
“나는 C씨의 안내로 JMH씨를 직접 집으로 찾아가 만났다. 나는 그에게 ‘5.18은 남한 사회에서 상당히 민감한 문제다. 정확한 사실이 아니면 함부로 발언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광주사태 침투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담보할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 ‘내 말이 거짓이라면 목을 내놓겠다. 내 가슴에 총알을 박아도 절대로 다른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5.18 광주사테에 참가했던 일은 하늘이 아는 사실이다.’”
'유언비어의 생산자는 확실히 북한이다'='북한이 5.18 배후 조종자다'
5.18광주에 유포된 유언비어는 광주시민이 생산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생산 유포한 것이다. 유언비어는 광주시민들을 폭발케 한 정신적 환각제다. 유언비어들에 광주시민들이 분노하여 거리로 나온 것이다. 이런 유언비어를 광주시민이 아닌 북한이 생산-유포했다는 것은 5.18을 북한이 배후 조종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피해갈 수 있는 논리가 아니며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바로 공식적인 증거능력을 갖는 통일부 자료인 것이다.
5.18 유언비어는 광주시민들의 이성을 마비시킨 환각제였다고 생각한다. 환각제는 공수부대가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유언비어를 생산한 북한과 이를 유포시킨 일부 광주시민들이 공동으로 사용한 것이다.
광주의 유언비어(수사기록)
“공수대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산부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냈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유언비어의 생산자 추정 논리
1) 공수부대는 위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당시 절대다수에 포위되어 매타작을 당하던 공수부대의 처지를 종합해 보아도 이는 공수부대가 저지를 수 있는 범죄가 아니다.
2) 수사기록에는 유언비어들만 나열돼 있을 뿐, 생산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아무 기록이 없다.
3) 5.18단체는 절대로 광주시민이 생산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광주시민이 생산했다고 인정한다면 인정할만한 증거도 없거니와 만일 인정한다면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는 5.18에 치명적인 독약이 되는 것이다.
4) 북한에서 망명한 거물 강명도씨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을 냈다. 이 책의 240쪽에는“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취지의 글이 들어 있다. 이 책 241쪽에는 “나의 친구 이화섭은 5.18이 터지자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말해주었다”는 구절이 있다.
5)'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증언자들은 5.18 당시 중앙 TV가 유언비어의 내용대로 여성들에 대해 끔찍한 만행을 동영상으로 찍어 반복해서 방송해주었다고 증언한다. 유언비어의 내용 그대로의 동영상을 북한 주민들은 보았고, 남한 국민들은 보지 못한 것이다. 증언들이 사실이라면 그 악랄한 영상을 담은 동영상은 북한군이 광주에 와서 저질러놓고 동영상을 찍어 전두환과 계엄군과 미국을 모략하기 위해 북한주민들에게 방영해준 것이다,
6) 탈북 증언자들은 정말로 그런 동영상을 보았는가? 통일원이 북한으로부터 입수한 각종 자료를 보면 위 유언비어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언비어는 확실하게 북한이 생산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유언비어를 북한이 생산했다는 데 대한 증명
1. 환각제에 대한 탈북자들 증언의 사실여부
<탈북자들의 증언>
증언1: “북한에서는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들이 환각제를 마시고 시민군 진압에 나섰다고 선전하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탈북자가 거의 없지만 북한의 당시로써는 계엄군들이 광주에 돌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는 장면이 나오면 당연히 환각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없는 상태로 평화적인 시민들을 상대로 저질적인 만행과 패륜적인 악행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였다.”(증26, 57쪽 끝줄-58쪽 9쪽)
증언3: “북한이 5.18당시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것처럼 전두환군부가 공수부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먹이고 무차별적인 양민학살을 지시해서, 또한 그것이 발단이 되고 빌미가 돼서 생긴 일이라면 . .” (증26, 177쪽 1-4)
증언7: “북한정권은 북한인민군과 인민들을 기만(남조선에 와서 북한에서 말하던 것과는 사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하기 위해서 전두환이 공수특전단에 환각제를 먹이고 광주봉기진압에 내몰았다고 선전하였다.” (증26, 233쪽 12-14줄)
증언15: “또한 광주에서 벌어진 살인 만행들은 전두환 군부가 진압에 동원된 군인들한테 공개적으로 대량의 환각제를 먹여서 투입했다고 하였으며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부녀자건 할 것 없이 가리지 말고 진압군에 대항하는 사람은 인정사정을 보지 말고 모조리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증26, 418, 5-10줄)
탈북자 LJM: “강연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중장은 광주사태에 대비하여 내려 보낸 ‘계엄군’ 공수부대 전 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다량 복용시켰다. 전두환의 명령은 잔혹한 명령이었다. 광주시민 70%를 죽여서라도 도시를 즉각 탈환하라.”(증27,2쪽 1줄)
“문제는 남한 작가였다. 남한작가가 쓴 영화의 장면이었기에 거기엔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북한 사람들은 광주폭동진압사태의 잔인성을 그대로 믿게 되었다. 환각제 복용은 말 그대로 사람을 짐승으로 돌변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두환은 자기의 정치권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증27, 3쪽 23-26줄)
<탈북자들의 위 증언을 사실로 뒷받침하는 통일원 자료>
가) “광주는 잊지 않는다”[조선녀성 1990년 제3호] “심지어 파쑈살인마들은 환각제를 먹인 공수특전대놈들을 봉기진압에 내몰면서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젊은이들은 모조리 죽이라.>는 살인명령을 내리였으며 신경가스탄을 비롯한 유독성화학무기까지 사용하여 봉기군중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다 못해 녀학생들의 유방을 도려내여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꺼내여 참살하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광주의 거리거리에는 항쟁용사들의 붉은 피가 랑자하였다.”(증30, 39쪽 3단 중간 당구장 표시)
나)‘님을 위한 교향시’비디오(이법철스님의 북한영화감상기) (증29, 2쪽 사진)
2. 전두환이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고 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의 사실여부
<탈북자 증언>
LJM의 증언: “강연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중장은 광주사태에 대비하여 내려 보낸 ‘계엄군’ 공수부대 전 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다량 복용시켰다. 전두환의 명령은 잔혹한 명령이었다. 광주시민 70%를 죽여서라도 도시를 즉각 탈환하라.”(증27,2쪽 1줄)
<탈북자들의 위 증언을 사실로 뒷받침하는 통일원 자료>
“광주는 잊지 않는다”[조선녀성 1990년 제3호]: “심지어 파쑈살인마들은 환각제를 먹인 공수특전대놈들을 봉기진압에 내몰면서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젊은이들은 모조리 죽이라>는 살인명령을 내리였으며 신경가스탄을 비롯한 유독성화학무기까지 사용하여 봉기군중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다못해 녀학생들의 유방을 도려내여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꺼내여 참살하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광주의 거리거리에는 항쟁용사들의 붉은 피가 랑자하였다.”(증30, 39쪽 3단 중간 당구장 표시)
3. 유방과 태아에 대한 탈북자들 증언의 사실여부
<탈북자들의 증언들>
증언6: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것은 임신을 하여 만삭인 여인의 배를 총창으로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모습과 벌거벗은 젊은 처녀의 팔을 도끼로 자르고 어떤 새파란 아가씨의 옷을 홀딱 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증26, 222쪽 9-12줄)
증언10: “장검으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장면과 처녀의 옷을 발가벗긴 다음 자궁 안으로 장검을 깊숙이 박아 넣는 장면은 아무리 남자고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고 몸서리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증26, 299쪽 하 4-8줄)
증언12: “남조선 국군이 광주의 봉기자들을 무참히 학살한다고 하면서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과 대학생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구타하는 장면 등, 끔찍한 장면들을 방영하면서 전두환 괴뢰도당이 애국적 시민들을 총칼로 진압한다고, 살인 만행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 (증26, 360쪽 11-16줄)
증언15: “화장실에 숨어 있는 대학생인지 사회직장에서 일하는 여자인지 젊은 여성의 머리를 가격해서 두개골을 박살내고 그 자리에서 옷을 홀딱 벗기고 젓 가슴을 도려내는 장면이 한참동안 생생하게 그대로 나오다가 다음 장면에서는 중년여성으로 보이는 임산부의 머리채를 잡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끌고 서는 치마를 찢어 버리고 팬티를 장검으로 베버리더니 긴 칼로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끌어내는 등 예술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몸서리치는 장면들이 그대로 여과 없이 생생하게 나왔습니다.”(증26, 416쪽 4-11)
LJM의 수기:“너들 영화에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을 목격했지? 그랬다고 하며 친구가 그게 사실이냐고 묻자 그 형은 그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하며 한참 갑 자르다가 사실 그건 우리부대 특전사들이 한 짓이라고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자 그는 그래야만 시민들의 격분을 이끌어내고 과격한 행동에로 유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적후에서의 특수부대의 임무를 원활하게 진행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증27, 7쪽 하2줄-8쪽 5줄)
<탈북자들의 위 증언들을 사실로 뒷받침하는 통일부 자료>
가) “광주는 잊지 않는다”[조선녀성 1990년 제3호] (증 30)
“심지어 파쑈살인마들은 환각제를 먹인 공수특전대놈들을 봉기진압에 내몰면서 <광주시민 70%를 죽여도 좋다. 젊은이들은 모조리 죽이라.>는 살인명령을 내리였으며 신경가스탄을 비롯한 유독성화학무기까지 사용하여 봉기군중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다못해 녀학생들의 유방을 도려내여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까지 꺼내여 참살하는 등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광주의 거리거리에는 항쟁용사들의 붉은 피가 랑자하였다. 여기에 한 해외동포가 친척집을 방문하기 위하여 광주에 갔다가 인간백정들의 피비린 살육만행을 목격하고 쓴 수기의 일부가 있다. <<...참으로 무섭고 끔찍한 살인 행위였다. 여자대학생으로 짐작되는 세명의 처녀들이 공수병에 의하여 옷을 벗기우고 있었다. 속옷까지 모조리 찢어낸 다음 험악하게 생긴 공수병이 처녀들의 앞가슴을 걷어차면서 성난 늑대처럼 내몰았다. 처녀들은 하나와 같이 가슴을 감싸고 길바닥에 꺼꾸러졌다. 순간 처녀들의 등에는 대검이 똑같이 박아지면서 피가 분수처럼 뿜었다. 역전광장앞에서도 조선대학교의 6명의 대학생들과 3명의 녀공들을 창고에 가두고 발가벗겨 희롱하다가 나중에는 광장에 끌어내여 분수대에 매달고 유방을 도려내어 전선대에 묶어높고 칼로 가슴과 배를 찌르던 나머지 사지를 찢어죽이였다. 두명의 공수병이 만삭이 가까운 임신부를 끌어다놓고 <야, 이년아, 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이 뭐냐?>하고 묻자 임신부는 미처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한 공수병이 <머슴애는 모조리 죽이라는 것이 전두환총장의 분부다.>하고 소리치면서 <새끼주머니에 든것이 머슴인가 계집앤가,>고 다그쳐물었다. 이때 옆에 있던 다른 공수병이 <내가 알려주지,>라고 하면서 녀인이 반항할 짬도 없이 옷을 나꿔채자 원피스가 쭉찢어지고 속살이 드러났다. 후비면서 찔렀는지 금방 창자가 튀여나왔다. 그들은 다시 그 녀인의 아랫배를 가르더니 태아를 끄집어내여 아직도 할딱거리며 마지막으로 숨져가는 녀인에게 던졌다.”(증30, 39쪽 3단 중하단)
나) 단행본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1982 조국통일사)
“악귀 같은 교형리들은 녀학생들을 그들의 부모가 보는 가운데 발가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낸 다음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죽였다. 무차별 하갈의 잔학성은 어린이나 늙은이, 임산부들에 대한 만행에서 더욱 몸서리치게 드러났는데 놈들은 광주천 기슭에 쓰러진 어머니의 시체를 붙잡고 우는 4살 짜리 어린이에게도 달려들어 ‘폭도의 종자를 멸종시키라’고 하면서 총검으로 참살하고 살인만행에 항거하였다 하여 70대의 할아버지도 하수구에 밀어넣어 죽였고,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창자가 튀어나온 배에서 태아를 꺼내 던지는 귀축같은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증31, 590쪽 하4줄-591쪽 3줄)
5.18광주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증언한 사람들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왔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들의 증언과, 수사기록과 기타 많은 자료들을 분석하였고, 그 결과 5.18광주에 북한특수군이 와서 작전을 지휘하고 갔을 것이라는 심증을 다시 한 번 굳히게 됐다는 표현을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역사책의 머리말에 삽입했습니다.
40명의 탈북자들은 어떤 증언들을 했습니까? 북한특수군이 광주에 와서 광주시민들을 총으로 뒤에서 쏘고 여인들에게 만행을 저질렀고 나체 여인의 목을 자르고 두개골을 전기톱으로 쪼갰다고 구체적으로 단정했습니다. 5.18을 '사기극' 그것도 '화려한 사기극'이라고 멸시하는 표현을 하여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까지 올려놓았습니다. 필자가 불구속 기소감이라면 탈북자들은 구속 기소감이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5.18사람들은 필자의 표현보다 더 단정적으로 북한의 개입을 표현한 과거의 정부 당국자들, 거물간첩, 신문보도 등에 대해서도 고소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변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를 기소한 안양지청 박윤희 검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1) 1980.5.21.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담화문: “지난 18일 수백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날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 없는 악성 유언비어
댓글목록
강력통치님의 댓글
강력통치 작성일강력통치님의 댓글
강력통치 작성일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정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광주공산통일 시도 반란은 공산군이 주도했다는 것을 머리속에 달달외워
광주빨갱이 반역질에 대해 병신같이 떠들어대는 인간들에게 욕해가며 이야기 해줍시다.
청곡님의 댓글
청곡 작성일강력통치님 감사 합니다 ^^
PATRIOTISM님의 댓글
PATRIOTISM 작성일강력통치님 감사합니다._()()()_
초보자님의 댓글
초보자 작성일
.........................................
전두환 중장은 광주사태에 대비하여 내려 보낸 ‘계엄군’ 공수부대 전 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다량 복용시켰다. 전두환의 명령은 잔혹한 명령이었다. 광주시민 70%를 죽여서라도 도시를 즉각 탈환하라는 것이었다. 5,20일 이렇듯 잔혹한 명령을 받은 수천 명의 계엄군이 탱크와 장갑차 최신무기들로 장비한 후 광주시내로 진입했다........................
시작부분이 이상하군요. 냉철하게 판단하심이... 아주 단언을하면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