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시절보다 더 왼쪽으로 간 역사교과서: 교육현장이 좌파에게 점령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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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의분노 작성일11-07-14 12:08 조회1,431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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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 시절 교과서보다 더 왼쪽으로 간 李明博 교과서
現6종 국가 檢定 한국사 교과서와 2001년 國定 국사 교과서 내용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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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6種 高校 한국사 교과서는 각 출판사가 제작해 정부의 檢定(검정)을 거쳐 출간됐다. 現 檢定 교과서 ‘한국사’(이하 한국사)와 과거 사용됐던 國定(국정) 교과서 ‘국사’(이하 국사)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비교해보았다. 사용된 國定 교과서는 6차 교육과정 때 사용된 2001년刊 ‘고등학교 국사(하)’(1996년 초판 발행)이다.
과거 國定 교과서 ‘국사’에서 다루어진 현대사 내용은 45페이지 정도 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각 내용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다. ‘국사’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내용을 서술한 반면, ‘한국사’는 대부분 3인칭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사실을 나열하는 특징을 보였다. ‘국사’는 ‘우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에 비해 ‘한국사’는 대한민국의 입장을 ‘우익’으로 표현하면서 거리를 둔다.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였다”(국사)의 표현이 “대다수 국민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우익은 반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간 반면, 좌익 세력은 축소되어 갔다”(한국사)가 되는 식이다.
건국 초기의 정세에 대해서도 “(김구, 김규식의 남북 협상에 대해)그들의 노력은 미·소 냉전 체제하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남한만의 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 상 불가피한 일이었다”(국사)의 내용이 “남북 협상은 광복 이후 처음 있었던 남과 북의 지도자 회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 연합 전선 운동과 그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한국사)로 바뀌었다. 외세의 방해를 받아 남북협상이 좌절되었다는 듯한 설명이다.
1. 신탁과 반탁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신탁 통치는 강대국이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일정 기간 동안 통치하는 것인데, 실제로 우리 민족에게는 식민지 지배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의 한반도 신탁 통치 결정은 우리 민족에게는 모욕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전국적으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이는 제2의 광복 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지만, 그들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태도에 실망하였다. (192~193페이지)
<지학사> 오랫동안 독립을 열망해 온 대다수 한국인들은 신탁 통치를 식민지 지배의 연장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김구를 비롯한 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여 신탁 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다. 좌익 세력도 처음에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으나 임시 정부의 수립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하고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 지지로 돌아섰다. 이에 우익 세력과 좌익 세력은 신탁 통치의 반대와 찬성을 둘러싸고 극심하게 대결했다. 대다수 국민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우익은 반탁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간 반면, 좌익 세력은 축소되어 갔다. (263페이지)
<천재교육> 이 결정은 공식 발표도 되기 전에 일부 언론을 통해 신탁 통치를 실시하는 것으로 국내에 알려졌고, 전 민족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와중에 좌파 세력은 반탁 입장을 철회하고,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38도선 이북에 있는 대부분의 정치 세력들도 모스크바 3상 회의의 임시 정부 수립 결정을 중시하고,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지지하였다.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중도파와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미‧소 공동 위원회를 통한 임시 정부 수립이 최우선의 과제이고, 신탁 통치 문제는 차후 문제라고 판단하였다. 이들도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에 찬성의 입장을 취하였다. 반탁 운동 세력은 이들 미‧소 공동 위원회 개최 지지 세력을 소련의 조정을 받는 공산주의 세력이며 매국노라고 공격하였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과 그에 따른 반탁 운동은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우익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좌우 정치 세력은 광복 이후 최초의 3·1 운동 기념식도 따로 할 정도로 격렬히 대립하였다. (310~311페이지)
<비상교육> 즉각 독립을 바라던 우리 민족은 신탁 통치안에 크게 실망하였다. 김구, 이승만, 한국 민주당 등 우익 세력은 즉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익 세력 역시 초기에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후 좌익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의 본질이 신탁 통치보다 임시 정부 수립에 무게가 있다고 보고,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입장을 바꾸었다. (314페이지)
2. 좌우 합작‧남북 협상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남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려는 유엔의 결의는,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만 선거가 실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 만의 선거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 남북의 분단이 계속될 것을 우려하여 남북한이 협상을 통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 등은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미‧소 냉전 체제하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195페이지)
남한만의 총선거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것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 상 불가피한 일이었다. 소련의 팽창 정책과 북한에서 사실상의 공산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남한에서 자유로운 민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때 통일 정부의 수립을 추구하였던 남북 협상파는 총선거에 불참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의 공산화를 위해 이들까지도 이용하려 하였다. (196페이지)
<지학사> 미‧소 공동 위원회가 무기한 중단되자 좌우 세력의 대립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고 지지 세력을 모아갔다. 김규식과 여운형 등은 분열된 정국을 통합하기 위해 좌우 합작 운동을 벌이고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263페이지)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유엔이 남한 단독 선거를 치르겠다는 방침을 세우자,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 세력은 정부 수립 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지원 아래 1946년 2월에 이미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라는 정부 형태의 권력 기구가 출범한 상황이었다. 한국 독립당의 김구와 민족 자주 연맹의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 정부 수립이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이에 남북한의 정치 지도자가 함께 모여 통일 정부 수립 방안을 협의할 것을 북한 당국에 제의하였다. …이와 함께 김구‧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과 별도 회담을 가졌지만, 북한 측의 의도대로 진행된 4자 회담에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1948. 4. 19~4. 30). 남한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각각 한국 독립당과 민족 자주 연맹을 이끌며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총선거 감시 활동을 계속하고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도 이에 적극 호응함으로써, 단독 정부의 수립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267페이지)
<천재교육> 중도파의 여운형과 김규식 등은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과 임시 민주 정부 수립 좌절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하여 좌우 합작을 모색하였다. 미군정도 이런 움직임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런데 좌우파는 각각 서로가 받아들이기 힘든 합작의 원칙을 발표하였고, 토지 개혁 문제나 친일파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이후 좌우 합작 운동은 우여곡절 끝에 남북과 좌우 합작으로 임시 정부를 구성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좌우 합작 7원칙에 합의하면서 활기를 띠었으나 이후 좌우파의 실질적인 합의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313페이지)
<삼화출판사> 우익 세력은 신탁 통치는 식민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반면 좌익은 임시 정부 수립이 중요하다면서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였다. 여운형 등 중도 세력은 미‧소 공동 위원회에는 적극 협조하되, 신탁 통치는 반대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별다른 성과 없이 결렬되자 남한에서는 이를 소련 탓으로 돌려 반소‧반공의 분위기가 강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장하였다. 1946년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휴회에 들어가자, 김규식‧여운형 등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미군정은 한국인들의 지지를 높여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 소련과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고 이 위원회를 지원하였다. 중도 정부의 수립을 지향하던 좌우 합작 운동은 한동안 활기를 띠었으나, 좌우의 대립이 격심해지고 중심인물인 여운형이 암살되자 실패하고 말았다. (306~7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 좌우 합작 7원칙에 대해 좌우 합작과 민족 통일을 중시하는 중도파 세력들은 이를 지지했고, 한국 독립당의 김구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고 하면서 적극 찬성하였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내세워 단독정부 노선을 취했던 우익 측과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리의 급진적 해결을 추구했던 좌익 측은 좌우 합작 운동에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파괴적 행동을 일삼고 좌우 합작을 반대하는 공산 분자와 합작할 필요가 없다고 했고, 한국 민주당은 유상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면 국가 재정이 파탄날 것이라고 하였다. 공산당의 박헌영은 토지의 유상 몰수는 지주를 위한 것이며, 입법 기구는 미군정의 거부권을 넘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게다가 1947년 7월에 이르러 좌우 합작 운동에 기반을 두고 재개되었던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었고, 좌우 합작 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암살당하였다. 결국 좌우 합작 위원회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1947년 12월 해산되고 말았다. (331페이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은 서울로 돌아온 후 총선거에 반대하면서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남북 양쪽에서 추진하는 정부 수립 작업을 모두 민족 분열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민족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남북 협상 운동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된 후 단절되고 말았다. (332페이지)
<법문사>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5명의 좌익 인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5명의 우익 인사는 7월에 좌우 대립을 막고 민족의 단결에 의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구성 이후에도 좌우 합작 위원회의 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좌우 합작 운동은 미군정, 우익‧좌익 세력의 이해관계가 대립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310페이지)
남북 협상은 광복 이후 처음 있었던 남과 북의 지도자 회의였으며, 독립운동 세력의 민족 연합 전선 운동과 그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311페이지)
3.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먼저 민족정기를 바로 잡기 위하여 제헌 국회에서는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국회의원 10명으로 구성된 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으며, 친일 혐의를 받았던 주요 인사들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반공 정책을 우선하였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하여 친일파 처단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지학사> …이러한 열망에 따라 제헌 헌법은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 아래 친일파 처단을 늦추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의원들을 공산당과 연결되었다는 구실로 구속하였으며,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서류를 압수하고 직원을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민특위는 1949년 8월말 시효가 만료됨으로써 해체되었다. (270~271페이지)
<비상교육> 광복 직후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를 처벌하여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 관료 유지 정책으로 인해 즉각적인 친일파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 국회는 본격적인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그러나 반민 특위의 활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반민족 행위자 처벌보다 반공을 더 중요하게 여긴 이승만 정부는 경찰 고위급이 연행되자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때 국회 프락치 사건에 일부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연루되었다. 그러자 국회 앞에서는 ‘공산당의 앞잡이인 반민 특위에 체포된 사람들은 공사당과 싸운 애국지사’라며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 경찰 출신이었던 일부 경찰들이 반민 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322페이지)
<천재교육> 친일 경찰 출신의 현직 경찰 간부였던 노덕술이 체포되자 경찰이 반민 특위를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공 우선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도 반민 특위의 활동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반민 특위의 활동은 유명무실화되고, 친일 잔재 청산의 과제 해결은 좌절되고 말았다. (319페이지)
<미래엔> 반민 특위에 대한 방해 공작 : 반민족 행위에 대한 처벌은 법을 제정할 때부터 반대에 부딪혔는데, 반민 특위에서 독립 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노덕술을 검거하자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 특위 활동은 3권 분립에 위배’되며, 좌익 반란분자들이 살인, 방화 등을 저지르는 상황에서 경험 있는 경찰관을 마구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특별 담화를 발표한 데 이어, 반민법 개정을 요구하였다. (338페이지) (우측 자료: 반민 특위 피습 상황-반민 특위 조사관 정철용의 증언)
4. 李承晩(이승만)
<6차 교육과정 국정 교과서> 이승만 정부는 공산군의 남침을 경험했기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반공을 강조하였으며, 미국 등 우방 국가와의 외교에 힘을 쏟았다. 전쟁 기간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 포로를 석방하였으며, 후방에서도 공산군의 침투를 막기 위해 계엄을 실시하였다.
정부의 이러한 조처들은 정치적으로 국민들의 자유를 제약하였으며, 국회의 정상적인 정치 활동까지도 제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을 창당하고 재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고치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강압적인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국민의 직선으로 재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위해서 다시 헌법을 개정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이 헌법의 개정을 반대하였던 정치인들은 민주당을 조직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 견제하였다. 그 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추구하면서 독재 정치를 강화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부정과 부패가 심화되었다. (203페이지)
<지학사>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로 남북 협상을 통한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중도 세력(무소속)이 국회에 많이 진출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국회 간접 선거로는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거하는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279페이지)
민심 이반으로 위기에 몰린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진보당을 탄압했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 통일론을 내세우며 선전한 조봉암 후보에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하였다(1958. 7). 또한 언론 통제와 반공 강화를 골자로 한 신국가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280페이지)
<법문사> 개정 헌법에 따라 실시한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장면이 대통령을 승계할 수 있는 부통령에 당선되고, 진보당 대통령 후보 조봉암이 예상 외로 크게 득표를 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 정부는 혁신 정당인 진보당을 탄압하고, 반공 체제의 강화를 내세우며 국가 보안법을 강압적으로 통과시켰다. 또,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 (327페이지)
5. 朴正熙(박정희)
<6차 교육과정 국정 교과서> 박정희 정부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의 권력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헌법에 의거하여 국정을 운용하였다. 조국 근대화의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급속한 경제 성장을 우선적인 정책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성장 정책은 공업화의 급속한 추진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외국으로부터 공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도입하였다. (206페이지)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부터 국제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고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을 철수시켰으며, 그 뒤 베트남은 공산화되고 말았다. 또, 미국은 주한 미군 병력의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사회 질서를 최우선적인 과제로 내세우면서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도 안정된 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장기 집권의 길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선포된 이른바 10월 유신이었다(1972).
유신 체제는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였다. 그것은 곧 국가 행정의 능률을 극대화하고 국력을 집약해서 사회를 조직화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 활동을 제약한 독재 체제였다. (206페이지)
6. 북한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김일성 독재 체제를 강화해 갔다. 그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지 않는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즉, 김일성은 전쟁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남로당을 비롯한 그 과정에서 그를 추종하지 않는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즉, 김일성은 전쟁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남로당을 비롯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게 전가하여 이들을 제거하였으며, 이어서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까지도 숙청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유일 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1972년에 김일성은 새 헌법을 채택해서 국가 주석이라는 지위를 만들어 그 자신이 이를 차지하였으며, 강력한 국가 권력 기관인 중앙 인민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주요 권력 기관을 김일성 일가와 그 일파가 지배하는 북한 특유의 전제적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었다. 특히, 북한의 김일성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부자 세습의 권력 승계를 꾀하여, 아들 김정일이 김일성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210~211페이지)
<지학사> 김일성은 6.25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그 책임을 물어 박헌영 등의 남로당 세력을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종파 분자를 없앤다는 명목 아래 최창익 등의 친중국 세력과 허가이 등의 친소련 세력을 숙청하였다(반종파 투쟁, 1956~58). 그리하여 1950년대 말까지는 북한에서는 권력이 김일성에게 완전히 집중되었다. 때마침 6.25 전쟁에 참가했던 중국 인민 지원군도 모두 철수하여 대항 세력이 없었다(1958). 이후 북한은 이른바 자주 노선을 표방하면서 김일성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284페이지)
7. 새마을 운동
<6차 교육과정 국정 교과서> 산업화와 도시화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먼저 농촌 새마을 운동을 도시에도 정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즉, 도시의 이웃끼리도 공통된 문제를 함께 의논하고 협동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일에 힘을 쏟았다. 또, 공장 새마을 운동으로 작업장 내에서의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이룩해서 생산성을 높이려는 움직임도 전개하였다. (217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어촌 사이의 소득과 문화 격차가 갈수록 커지자 박정희 정부는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였다(1970). …이로 인해 새마을 운동은 농어촌 근대화에 기여하였으나 유신 체제 유지에 이용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381페이지)
<천재교육> 정부는 농촌의 근대화를 위한 방법으로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작용도 발생하였다. 과도한 영농 설비 투자, 그리고 공급과 수요를 예측하는 시스템의 부재, 불투명한 판로 등으로 인한 농산물 가격의 불안정한 등락은 농가 부채 증가의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도시 문화의 급속한 유입은 농촌의 소비도 급증시켰다. 국가의 기획에 의한 새마을 운동은 획일적인 농촌의 모습과 생활양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379페이지)
8. 反共(반공)
<6차 교육과정 국정교과서> 우리나라는 통일을 민족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서,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왔다. 1960년대까지는 반공을 강조했는데, 이는 북한의 무력 도발을 막기 위하여 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경제가 성장하면서, 자주 국방에도 힘을 쏟게 되었으며,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 외교를 추진하게 되었다. (208~209페이지)
<미래엔컬처그룹> 6·25 전쟁은 무력 통일의 무모함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남북간에 서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고조시켰다. 특히, 남북의 두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를 부추겨 자신들의 장기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1960년대 남한에서는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가 반공을 내세워 4·19 혁명 이후 분출된 민간 차원의 다양한 평화 통일 운동을 탄압하고, ‘승공 통일’을 강조하며 강경한 대북 정책을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도 남조선 혁명론을 바탕으로 무장 공비 남파 등 군사적 도발을 통해 위기 상황을 고조시켰다. (39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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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앞부분은 ‘필수’, 뒷부분은 ‘선택’이 된 반쪽짜리 高校 국사 교육
高校 국사 교과서의 역사 및 현황 정리
제6차 교육과정인 2001년 以前까지 고등학교 국사는 필수 과목이었다. 학교에서도 필수 과목으로 가르쳤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사회탐구영역의 공통과목에 포함되어 있어 모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했다. 이때 사용된 교과서는 國定(국정)으로, 선사문화부터 근세(16세기 후반)까지를 다루는 국사(上), 근대태동기(조선 후기)부터 근·현대사를 다루는 국사(下)로 나뉘어져 있었다.
2002년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적용된 제7차 교육과정부터 우리나라 고등학교 역사 교육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國定교과서인 ‘국사’를 배우는데, (上)ㆍ(下)가 사라지고 한 권짜리가 되었다. 목차에는 근·현대의 부분도 등장하나 내용의 중심은 근세 시기까지다. 그 이후의 근·현대사 부분은 高 2~3학년 중 ‘한국 근ㆍ현대사’ 시간에 6개의 출판사가 발간한 檢定교과서 중에서 학교가 택한 책으로 배우게 되었다. 근ㆍ현대사는 선택과목이기 때문에 학교에 따라 택하지 않을 수도 있게 되어, 이때부터 한국의 근·현대사를 자세히 배우지 않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근세 시기까지의 부분은 필수, 근ㆍ현대사 부분은 선택이 된 것이다.
반쪽짜리 國史 교육에 기름을 부은 ‘선택형 수능’
2005년 수능시험이 ‘선택형 수능’으로 바뀌면서 문제는 더 커졌다. 수능 사회탐구영역의 공통과목이었던 국사가 11개의 선택과목 중 하나로 변하게 된 것이다.
국사, 한국 근·현대사, 세계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경제지리, 사회문화, 정치, 법과문화, 경제, 윤리 중에서 학생이 최대 4개까지 골라 시험을 보도록 했다. 여기서 ‘최대 4개’까지라는 것은, 1개부터 4개까지 개수를 선택하는 것은 학생의 자율이라는 뜻이다. 학생은 수험 과정에서 진학하고 싶은 대학이 요구하는 특정 과목이나 과목 개수를 충족시키는 내에서 선택과목을 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사를 포함한 3개 과목’의 점수를 요구하고 있는 ㅇㅇ대에 지원하려면 국사와 나머지 2개의 과목을 선택해 시험을 치러야 한다. 과목을 적게 선택해 집중해서 공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생긴다. 선택과목을 2개만 정해서 수능을 치렀을 경우, 선택과목 3개의 점수를 요구하는 대학에는 지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선택과목을 적게 선정하는 것이 불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2012년부터는 선택 개수가 최대 3개까지로 줄어들게 된다)
교육 현장에서 존재감 잃은 國史
수능에서 선택과목이 된 ‘국사’는 수업 현장에서 존재감을 잃게 됐다. ‘교육과정’ 상의 필수일 뿐, 高校 교육 현장의 실질적인 목표인 ‘대학 진학’에는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의무적으로 수업시간을 채우는 데 그치게 되면서 ‘국사’와 ‘한국 근ㆍ현대사’는 학생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된다.
실제로 대부분 高 3학년들은 ‘국사’를 기피하고 있다. 국사를 입시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있는 대학이 서울대뿐인 탓에 상위권 학생들만 수능 선택과목으로 국사를 택하기 때문이다. 상위권 학생들이 국사를 택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불리해지는 중·하위권 학생들은 국사를 선택하지 않는다. 필수로 국사를 배워야 하는 1학년 때도 한 학기 정도 수박겉핥기식으로 배울 뿐, 수능 범위가 아닌 이상 손을 놓게 된다.
2011년 또다시 잡음 속에 새로운 고교 한국사 교과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2009 개정교육과정(제7차 교육과정의 기본철학 및 체제를 유지했다고 하여 제8차로는 부르지 않음)을 거친 교과서이다. (주)미래엔컬처그룹, (주)삼화출판사, (주)지학사, (주)천재교육, (주)비상교육, 법문사 등 6개의 출판사가 발간한 檢定 교과서로, 선사 문화부터 한국 근·현대사의 기간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체제부터 반쪽짜리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기존의 國定 교과서 국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한국사’ 교과서 체제는 2011년에 입학한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적용되어 수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 한국사 수업은 필수과목이 아니라 선택으로 분류되어 잇다. 수능에서도 역시 선택과목으로 밀려난 만큼, 이제 학교 및 학생에 따라 한국의 역사를 배우지 않고 졸업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2012년부터 경기도 내 高校에서 역사 관련 교과목이 필수 이수 과목으로 지정되고, 교육과학기술부에서도 한국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사 교육이 정상화 되려면, 반드시 학교 수업 내의 필수 과목 선정과 수능 내 필수 과목 선정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지난 한국근ㆍ현대사 교과서 때부터 지적되어 온 교과서의 편향성에 대해서도 국가 차원의 엄격한 지적 및 수정이 필요하다. ‘잘못된 내용’을 ‘필수’로 배우는 것은, 배우지 않는 것보다 더 못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편향성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기존의 한국 근ㆍ현대사(檢定) 교과서와 국사(國定) 교과서는 2010년 高校 입학생(현재 高 2)까지 적용되므로, 수업 현장에서는 내년(2012년)까지 사용된다>
댓글목록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집에서 우파 교육 다시 해야합니다!!!!
정말 진실이 뭔지 분명하게.....
한가람님의 댓글
한가람 작성일
예상대로네요...
국사 교육을 안 시킨다고 난리처서 국사교육 부활시킬 즈음... 걱정되던게 교과서 내용이었습니다.
좌편향이 더 심화되었다면... 가르칠 수록 문제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