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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의 러시아 공산혁명 미화. 더구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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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비탈로즈 작성일11-06-17 02:56 조회1,9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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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이 올라가지 않는군요. 인쇄물을 보시려면
http://blog.naver.com/wjddmldnjsfl/100130655526



1. 글의 문제점

 

제목을 '차가운 땅, 혁명과 예술의 나라 러시아'라고 했으면 러시아의 날씨와 역사와 문화 예술, 특히 역사를 공정하고 구체적으로 다루어야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한 이후 최초로 탄생한 공산국가 소련의 후신 러시아를 미화만 해서야 되겠는가?

 

소련은 공산국가지만 2차대전 승전국 중의 하나였던 것, 카틴 숲 사건(카틴 숲 사건이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0년 독일과 비밀협정을 맺고 폴란드로 쳐들어간 소련의 비밀경찰이 폴란드인 장교와 교수, 의사 등 사회지도층 인사 2만 2천 명을 카틴 지역에서 처형한 것). 승전국의 프리미엄을 악용, 동구권 국가들을 공산위성국가화한 것,

 

그리고 참전하지도 않았던 태평양 전쟁에서 기회만 노리다가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투하(1945년 8월 6일) 직후인 8월 8일 대일선전포고로 생색을 내고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날(8월9일) 조선 백성들을 현혹하기 위해 조선인 오백룡(북한 전호위총국장) 임춘추(전 북한 부주석) 최현(전 인민무력부장) 등을 앞세워 북한에 진주하지만 소련군이 주동이었다(중공군이 6.25때 팔로군의 조선인들을 앞세운 것과 같은 성격). 북한은 당시 철저한 소련의 위성집단이었다.

 

소련은 김성주를 이름난 항일투사 김일성이라 하며 속여 지도자로 세우고 신속히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시키기 위해 무장시켰던 것, 남한도 공산화 하기 위해 스티코프의 지령으로 4.3제주폭동 여순반란사건 대구폭동 등을 사주했던 것, 김일성이 남침(6.25사변, 6.25동란=한국전쟁)하겠다고 하자 스탈린이 허락하고 모택동에게 도와주라고 했던 것(공모), 1983년 사할린 근방을 지나던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시켜 269명의 목숨을 앗게 한 일(미국의 정찰기로 오인했다고 변명하나 어찌 민간항공기를) 등 소련과 그들의 사주에 의한 공산만행은 20세기 최대 최악의 오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소련의 세계공산화 야욕의 영향으로 중국 베트남 북한 캄보디아 동구권 아프리카 등에서 무수한 인명이 공산 이념의 폭압 밑에 짓밟혔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을 언급할 때는 그 러시아 혁명으로 초래된 세계적 역사의 질곡에 대해 간단히라도 설명해 줘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라면 더욱 그렇다.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 남침인지도 모르는 어린이들에게 제목부터 러시아는 혁명의 나라라고 해놓고 러시아 사람들이 어렵고 궁핍했는데 러시아 황제가 해결해주지 않아서 그랬다고 한 후 볼셰비키 혁명을 공산주의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자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해 놓으면 어린이들은 그렇게 탄생한 소련을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와 같은 나라라고 여길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런 나라들을 사회주의 나라라고는 하지만(또는 사회민주주의) 절대로 공산주의라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주의라고 하면 안되고 반드시 공산주의라고 해주어야 한다. 일본에 사회당이 있다가 소멸되었는데(공산당은 아직도 존립) 그 사회당은 일본 공산당 이상으로 북한과 밀접했던 특이한 현상이 있기는 했었다.

 

<--위 인쇄물 밑줄 친 부분: 17세기 표트르 대제가 세운 러시아는 200여년 동안 왕이 다스리는 제국이었지만, 19세기 말부터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어,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사회가 편리해지고 발전하는 듯했지만, 사실 도시의 노동자들은 매우 어려운 환경에서 일해야 했거든,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가 참전하면서 국민들의 형편은 더더욱 궁핍해졌어. 러시아 황제가 이를 해결해 주지 않자 마침내 1917년, 참다못한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 제정시대를 무너뜨린 거야. 그 후 사회주의자 레닌은 볼셰비키혁명을 일으키고 주변의 국가들을 묶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과 대립하며 전 세계를 긴장시켰던 거대한 나라 '소련'이었어. 하지만 두 강대국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해 결국 1991년 소련이 해체됐지.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  중 11개국은 독립국가연합을 이루었어. 그 독립국가연합 중 하나로 연합 내 주도권을 쥐고 있는 나라야.>

 

그런데 후반부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사회주의 혁명까지, 러시아는 격동의 근대사를 거친 나라야, 그래서인지 러시아에는 암울한 시대를 깊이 있게 파헤진 예술가들이 많아,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 '전쟁과 평화'와 부활의 작가 톨스토이,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옢스키 등 모두 한 번쯤은 들어 본 이름이지? 시대를 날카롭게 꿰뚫어 본 이들의 위대한 문학 작품은 20세기 세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어. 미술에서도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이 유명했지.

러시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예술과 문화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많은 러시아의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곳이야. 이곳에는 푸시킨을 비롯한 문학가들이 살던 집과 즐겨 가던 카페가 있고, 근대 음악의 대표 작곡가인 차이콥스키가 가르치던 음악원도 남아 있어. 또 에르미타슈 미술관과 같은 건축물들이 황실의 우아했던 문화를 뽐내고 있지.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장소들은 격렬했던 러이사 혁명의 무대였어.

 

[인쇄물 마지막 그림 = 200년 전통 키로프 마린스키, 200년 전통 볼쇼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키로프 마린스키 발레단과 볼쇼이 발레단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발레의 산실이지] 

 

이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제국시대의 화려함과 혁명시대의 긴박함이 어우러진 역사적인 도시야. 웅장한 자연환경과 혁명의 역사, 다양한 문화유산을 뽐내는 러시아가 다시 세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강대국이 될 수 있을 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지? 한국과 외교 관계를 맺은 지 20년째가 된 러시아가 앞으로도 우리와 손을 맞잡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도 하면서 말이야.>

 

라고 했는데 여기에도 상당히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복선이 깔려 있다.

 

이 '차가운 땅, 혁명과 예술의 나라 러시아'에서는 의도적으로 러시아에서 혁명을 자아내려고 한다. 엄연히 소련은 (구)러시아이기를 포기했던 공산국가였다. 지금의 러시아도 구 러시아와 성격이 다른 나라다. 문화와 예술의 연속성 때문에 북한과는 달리 구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이 그나마 면면히 구 러시아의 유적과 유산 속에서 유혈혁명과 전쟁으로 상징되는 소련의 역사를 관통하며 이어지기는 했지만 소련은 한마디로 문화와 예술의 암흑기였다. 소련을 대표하는 작가는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 아니고 소련에서 서방으로 망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수용소 군도'의 솔제니친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암울한 시대를 깊이 있게 파헤친 예술가(작가)들"은 대부분 구 러시아 사람인데 소련의 경우엔 오히려 솔제니친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소련의 절망 속에서 러시아인들이 문화와 예술을 그나마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페테르 대제가 꽃피운 구 러시아의 영향 때문이지 소련은 아니다. 그런데 계속 혁명 타령이다. 그 혁명 때문에 페테르 대제의 후손들이 비극적 삶을 마감했다. 씨를 말살해 버린 소련이었다. 구 러시아는 능력 없는 황제들 밑에서 암울한 점이 다소 있었겠지만 훌륭한 황제들도 있었고 그들 밑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구 러시아 역사는 차르(황제)들의 그 200여년 이전은 동토의 영향 때문인지 솔직히 존재도 미미하다.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들은 유럽의 공통점 아닌가? 조선시대의 김홍도 신윤복 같은 예술가들이 유럽에는 즐비하지 않은가? 그런데 소련에서 민중의 삶을 그려낸 예술가가 도대체 누구였는가? 이름있는 사람이라면 칸딘스키가 생각나서 찾아보니 그는 1944년 사망했고 구 러시아 출신 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추상화의 대가였다. 구 러시아의 세계적인 문호들은 구 러시아의 정서와 사색과 삶과 역사와 문화와 예술과 대자연 속에서 그 천재성을 표출했던 것이지, 소련도 아니요 혁명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은 피의 혁명, 최대의 비극, 실패한 실험, 문화 예술의 암흑기였다. 키로프 마린스키와 볼쇼이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듯 소련이 세계 적화의 야욕을 가리기 위한 가면이었다. 그러나 소련 사람들에게는 암울한 시대를 망각하게 하는 위안이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힘이 소련과 공산주의를 굴복시킨 민중의 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이 말살되고 변질된 북한에서는 그런 힘이 미약하다. 공산주의에서는 인간의 숭고한 자유의지가 꽃피우기 어렵다. 

 

 

인용한 예가 전부 구 제정 러시아 사람이고 구 러시아로부터다.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년 6월 6일 ~ 1837년 2월 10일)

톨스토이(1828년 9월 9일 ~ 1910년 11월 20일)

도스토에프스키(1821년 11월 11일 ~ 1881년 2월 9일)

칸딘스키(1866.12.16 ~ 1944.12.13)

차이코프스키(1840. 5. 7(구력 4. 25) 러시아 보트킨스크(지금의 우드무르트에 있음)~1893. 11. 6(구력 10. 25)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1s2562a  소련 때는 이름까지 잃었었음,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슈 미술관: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5a1783a  Gosudarstvenny Ermitazh:

(영)State Hermitage.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술관.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궁정박물관으로 세운 것으로 겨울궁전 옆에 있어 그녀의 개인 수집품을 소장했다. 니콜라이 1세의 재위기간에 개축되었고(1840~52), 1852년 일반에게도 개방되었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황실의 수집품들은 공공재산이 되었다. 미술관은 겨울궁전(1754~62)·소(小)에르미타슈궁·구(舊)에르미타슈궁·신(新)에르미타슈궁 등 5채의 연결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러시아의 회화가 잘 정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화가들과 네덜란드·플랑드르·프랑스의 바로크 화가들이 그린 많은 걸작들을 비롯하여 중세 이래 서유럽의 작품들이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다. 동양의 미술품도 폭넓게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중앙 아시아 미술품이 주목할 만하다.
 
키로프 발레단:  [Balet Imeni Kirova]
(영)Kirov Ballet.
소련의 대표적 발레단.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국립 키로프 아카데미 오페라 발레 극장의 부속기관이다. 러시아 황실 발레단이 전신이었으며, 전통은 쥘 페로, 아르튀르 생 레옹, 마리우스 프티파 같은 19세기의 유명한 안무가들과 마리아 탈리오니, 올가 프레오브라젠스카, 마틸드 크셰신스카야,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타마라 카르사비나, 미하일 포킨, 조지 발란신, 마리아 다닐로바 같은 무용수들의 작업을 기초로 한다. 이 발레단은 173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설립되어 1917년 10월혁명 때까지 러시아 발레의 중심을 이루었던 무용 아카데미에서 비롯되었다. 10월혁명 후에 이 발레단은 전체 인원의 40%를 잃었으나 교사인 아그리피나 바가노바와 예술 감독 콘스탄틴 세르게예프의 지도 아래 그 레퍼토리와 노련한 기교를 유지했다. 이고리 벨스키의 〈희망의 해안 The Coast of Hope〉(1959) 같은 실험적인 작품뿐만 아니라 영웅적인 것을 주제로 한 새로운 작품들도 공연했다. 1961년 이래 서유럽·미국·캐나다 순회공연을 가졌다.
 
=키로프 마린스키 발레단 (The Kirov-Mariinsky Ballet):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qid=3Jlk8

볼쇼이 발레단: Bolshoy Ballet
(영)Bolshoi Ballet.
(러시아어로 '큰 발레단'이라는 뜻)
러시아 최고의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장면(1988), 〈백조의 ...

19세기 고전무용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고전 발레 및 어린이 발레를 정교하게 연출하여 무대에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볼쇼이 발레단이라는 이름은 1825년 새로 지어진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이 1776년에 설립되었던 페트로프스키 극장의 발레단을 인수하면서 생겼다. 나중에 '모스크바 양식'이라 불리게 된 볼쇼이 발레단의 양식이 점차로 형성되었는데, 이것은 러시아 민간예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단들의 특징이던 전통적인 양식보다 율동이 더 자연스럽다. 19세기 내내 마리위스 프티파, 카를로 블라시스, 아르튀르 생레옹 같은 뛰어난 안무가들이 볼쇼이 극장에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19세기말에 한동안 쇠퇴기를 거친 뒤 1900년 알렉산드르 고르스키가 발레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발레단을 다시 한번 일류 발레단으로 만들었으며 무대 배경과 의상에 사실주의를 도입했는데, 그뒤 이것은 볼쇼이 발레단 공연작품의 특징이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볼쇼이 발레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볼쇼이 발레 학교는 1961년 이래 공식적으로 모스크바 아카데미 안무학교로 불린다.

 

결론적으로 러시아 역사에 있어서 제국의 화려함과 혁명시대의 긴박함은 상극이다. 그래서 '차가운 땅, 혁명과 예술의 나라 러시아'에서 구 러시아의 비극을 혁명과 끼워맞추는 것은 무지나 의도에 의한 실례다. 그것도 모자라 현재의 러시아가 세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강대국이 되기를 염원하는 듯한  "다시 세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강대국이 될 수 있을 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지?"  라는 표현은 혹시 소련처럼 러시아가 미국을 견제해주기 바라는 반미의 표현은 아닌가? 그래서 "우리와 손을 맞잡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응원도 하면서 말이야.>" 라는 표현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다. 우리가 꼭 "우리끼리" 같다. 더욱이 조선일보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했기에 더 불쾌하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 그들의 가족들에게 무슨 큰 죄가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20세기 최대의 악마, 공산 소련의 태동과 같은 시기에 구 러시아에서 황제와 그 가족이었기 때문에 타깃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마지막 황제 가족들

 http://imagesearch.naver.com/search.naver?sm=ext&viewloc=0&where=idetail&rev=13&query=%EB%9F%AC%EC%8B%9C%EC%95%84%20%EB%A7%88%EC%A7%80%EB%A7%89%20%ED%99%A9%EC%A0%9C&from=image&sort=0&res_fr=0&res_to=0&merge=0&start=2&img_id=blog37518748%7C4%7C90039429336_5&ie=utf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2&aid=0000197822

 

 

 

 

2. 민중혁명에는 반드시 배후가 있다. 순수한 것은 없다.

 

오늘 조선일보의 '신문은 선생님'란 기사 중 '차가운 땅, 혁명과 예술의 나라 러시아'는 러시아 공산혁명을 사회주의로 미화하며 어린이들을 세뇌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박소영 아이세움 '보물찾기' 시리즈 저자로서 조선일보 기자는 아니나 조선일보가 글을 올리도록 허락 할애해줬고 신문사 차원에서 검사 및 교정도 했을 것이므로 조선일보에게 그 책임이 있다. 기사의 내용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신문사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단, 지금 우리나라 사회가 전 분야에 걸쳐 워낙 친북좌경화가 심화되어 있는지라 박소영씨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은 자료들부터 그 내용들이 좌편향 일색이었을 가능성은 높다.

 

아래 인용한 러시아 혁명 자료(브리태니커, 번역분)도 그러하다. 이 자료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사진의 링크를 타고 들어가자 레닌을 가장 위대한 혁명사상가 및 혁명지도자라고 표현해 놓은 것이 아닌가! 즉 러시아 혁명이 위대하다는 것이다. 

 

3월 봉기에 이어 11월에 볼셰비키(공산주의자)들이 다른 세력을 몰아내고 2차적으로 성공시킨 후, 공산세력들은 러시아 황후와 공주들을 몇개월에 걸쳐 무자비하게 강간한다. 그리고 그 일가를 학살해서 파묻어버린다. 한 명 뿐인 왕자는 혈우병 환우였다. 또 러시아 혁명은 순수한 노동자 농민의 봉기가 아니었으며 군인들이 개입했기 때문에 1905년의 혁명(이후 두마 형성)같이 정부에 의해 진압되지 않은 것이었다. 1차대전으로 인해 지리멸렬해진 제국 군대로는 역량을 결집시킨 후 민중의 뒤에 숨은 공산당과 그 휘하의 군인들을 당해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노동자 농민들이 불만을 가졌기 때문에 뒤집어 엎을 대상이 유럽에서 러시아 뿐이었겠는가? 그런 식이면 산업혁명 때의 영국 황실과 내각도 민중혁명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했을 것이다. 산업혁명 때 어린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고 하며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에는 납중독이 심각했는데도 임신한 여성들까지 투입되었다고 한다. 1950~60년대 일본도 각종 산업병과 재해(이따이따이, 미나마타병 등)를 비켜갈 수 없었다. 시대가 그랬던 것이고 러시아도 그 당시의 선진 국가들보다는 뒤쳐졌지만 산업발전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황제 일가가 부패하고 능력도 없었겠지만 땅이 넓고 인구는 더 많고 기후는 척박하니 더 발전이 느렸을 것이다.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하면 혁명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나 그것이 공산당에 의한 혁명이라서 소련으로 나라 이름이 바뀐 러시아 민중들과 이후 공산화된 동구권 사람들은 서방 유럽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황실의 부정부패만 얘기하자면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지 않나? 명성황후가 억울한 죽음을 당해 요즘 뮤지컬 등으로 엉뚱하게 아니 황당하게 미화되고 있지만 완곡하게 표현해서 그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조선 백성들이 세계 3대 옥토(흑해 일대-우크라이나)를 소유하고 있던 러시아보다 과연 나은 형편이었을까? 동학농민군도 흥선대원군과 더 가까웠었다.  

 

쿠바혁명도 순수한 노동자 농민 혁명이 아니었다. 그 뒤에는 카스트로(체 게바라와 함께)의 지휘를 받는 무장한 공산게릴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인데 당시로나 이후로나 세계적으로 부패한 정권이 어디 바티스타 정권 뿐이었겠는가? 쿠바는 또 얼마나 좋은 옥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인가? 그런데도 쿠바도 소련과 같이 경제적인 낙후를 답습해 오고 있다(단  근래 유기농으로 농업 발전이 진행되고 있다고 함). 현 브라질 여성 대통령도 사회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하여튼 그런 게릴라였다는데 그래도 브라질에는 강력한 공산세력의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그 세력들에 의해 뒤집어지지 않은 것이었으리라!

 

중국도 미국과 교류하고 세계화 및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지금처럼 되었다. 모택동 또한 수천만 명을 숙청학살했다. 이어서 등소평은 천안문에서 민주화 시위대를 학살했다.  지금도 북한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의 인권은 세계적으로 가장 문제거리다.  프랑스 혁명도 순수한 노동자 농민들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배후세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세계 여러나라의 민중혁명을 불순한 세력들이 미화해대는 이유는 그들의 사주나 배후조종에 의해 민중들이 혹 봉기하면 최대한 키워 대한민국을 뒤엎어버릴려는 것이리라. 그 불순한 세력의 배후엔 불행히도 북한이라는 강력한 군사독재 집단이 버티고 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와 달리 특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불순세력들이 반미를 조장하는 것이고 그렇게 조장하는 자들 때문에 순수한 시민운동이 되지 않고 드물게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출발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친북좌파들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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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 출처:브리태니커

 

20세기의 세계사에서 가장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 사회변혁.
 
개요
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으며 통상 러시아 혁명이라고 하면 1917년의 혁명을 가리키기도 한다.
1905년의 혁명
러시아 제국의 정치·사회 체제에 대한 불만은 1905년 이전 몇 년 동안, 특히 굴욕적인 러일전쟁(1904~05)이후 다양한 사회단체의 시위로 폭발했다. 그들의 항거는 자유주의적 의사개진으로부터 파업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양상을 띠었으며, 학생소요와 테러범들의 암살이 포함되었다. '해방동맹'과 연계되어 있었던 이러한 시도들은 '피의 일요일'(1905. 1. 22)에 동궁(冬宮) 앞 광장에 집결해 있던 평화로운 시위군중들을 제국 군대가 무차별 살상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색인:피의 일요일). 총파업이 수도와 산업 중심지에서 뒤따라 일어났으며, 2월에 니콜라이 황제가 정부의 자문기관으로서 의회의 설립을 약속했지만, 이러한 제안은 파업중인 노동자와 농민, 심지어 젬스트보(지방자치적 농민공동체)의 자유주의자들이나, 4월경에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진보적 전문 직업인들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
폭동은 비러시아 지역, 특히 폴란드, 핀란드, 발트해 연안지방, 그루지야 등으로 확산되어갔으며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반혁명세력인 '검은 백인단'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는데,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군대 또한 폭동에 가담했으며, 시베리아 횡단철도변에 주둔한 부대들이 반기를 들었다. 6월에는 오데사 항에 정박중이던 전함 '포툠킨호'에서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자문의회의 선거절차를 알리는 8월 6일자 정부포고문은 더욱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9월 1개월 간 가중된 폭동은 10월과 11월 사이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10월 7일에 시작된 철도파업은 대부분의 대도시에서 총파업으로 발전되었다. 파업위원회의 구실을 한 '소비에트'는 이바노보보스네센스크에서 최초로 결성되었다. 초기에 총파업을 주도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였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 특히 멘셰비키가 가담하자 혁명정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소비에트는 모스크바·오데사 등 러시아 내 여러 도시로 급속히 파급되어갔다.
니콜라이는 엄청난 규모의 파업에 당면하자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그는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의 자문을 받아 헌법제정과 의회(두마)의 창설을 약속하는 '10월선언'을 발표했다(→ 색인 : 10월선언). 비테는 새로운 각료회의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의회 혹은 공화국에 대한 급진 반대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혁명지도자들은 타협을 거절했으며 심지어 자유주의자들조차 비테의 내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부 온건파는 만족스러워했으며, 10월선언을 승리로 받아들인 많은 노동자들은 작업대로 복귀했다. 이것은 반대파의 제휴를 해체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약화시키기에 충분했다.
11월말 정부는 소비에트 의장이며 멘셰비키인 흐루스탈레프 노사르를 체포하고, 12월 3일에는 소비에트 건물을 점거하고 레프 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새로운 총파업이 무르익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무력충돌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일부 악법을 철폐함으로써 핀란드는 질서를 회복했지만 폴란드, 발트 해 연안지역, 그루지야에는 특별원정부대가 파견되어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감행했다. 1906년초 정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군대의 통제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으며 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1905년의 봉기는 전제정치를 민주공화정으로 대체하지 못했고, 제헌의회 소집에도 실패했으며, 혁명의 지도자들은 거의 체포되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로 하여금 광범위한 개혁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결실은 헌법의 기능을 수행하도록 제정된 '기본법'(1906) 및 합법적인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의 발전을 촉진시킨 의회의 창설이었다(→ 색인 : 두마).
1917년의 혁명
1917년에 두차례에 걸쳐 일어난 혁명. 3월(구력 2월) 혁명은 차르 체제를 붕괴시켰고, 11월(구력 10월)의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권력장악에 성공했다. 차르와 러시아 국민들 사이의 유대는 1917년에 이르러 완전히 해체되었다. 정부의 부패와 무능은 누구나 명백히 아는 사실이었다. 1905년 혁명의 주요성과의 하나인 의회가 걸핏하면 해산되는 등, 반동정책이 계속되자 온건파들에게까지 불만이 확산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는 소수민족들도 점차 반항적으로 되어갔다.
그러나 제국정권에 결정적으로 타격이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러시아의 전쟁수행능력 부족이었다. 장비의 열세와 지휘관들의 무력함으로 인해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다. 전쟁은 2가지 면에서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는데, 러시아가 더이상 중부 유럽과 서유럽 국가들의 군사적 상대가 아님을 입증해주었고, 러시아의 국민경제를 대책도 없이 파탄 직전에까지 몰고 갔다.
3월 8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식량부족을 견디다 못해 일으킨 시민의 봉기에는 대다수의 수도경비대도 참여했다.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퇴위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300년 이상 지속되어온 로마노프 왕조는 니콜라이의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제위승계를 거절함으로써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두마 위원회는 제정의 뒤를 이을 임시정부를 결성했지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경쟁세력으로 등장했다. 이 소비에트는 페트로그라드 시내와 외곽지역의 공장 및 군부대에서 선출된 2,500명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는 유럽 전쟁 참전을 지지한 임시정부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3월 14일,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의 명령이 아닌 오로지 소비에트의 명령에만 복종할 것을 군대에 지시한 유명한 '명령 제1호'를 공표했다. 임시정부는 그러한 명령을 철회시킬 능력이 없었다. 소비에트는 자신들이 실질적인 러시아의 정부임을 대내외에 선포할 수도 있었지만, 보수파의 쿠데타를 유발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자제했다. 임시정부는 3~10월에 4차례나 개편되었다. 최초의 내각은 사회혁명당(SR) 당원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각료들로 조직되었으며, 후속 내각들은 일종의 연립내각이었다(→ 색인:케렌스키). 이 가운데 어느 내각도 국가의 위기를 초래한 제반 문제들, 즉 농민들의 무단 토지점유, 비(非)러시아 지역에서의 소수민족 독립운동, 전선에서의 사기저하 등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도시·촌락·군대에서 페트로그라드를 본보기로 삼아 많은 소비에트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보다 민중들에 훨씬 더 가까이 있었다. 소비에트들에서는 거의 무조건적인 참전중지를 요구하는 패배주의적인 기운이 무르익어갔는데, 급진사회주의자들이 점차 소비에트 운동을 지배하게 된 것이 그 원인 중의 하나였다. 6월 16일에 소집된 제1차 전(全)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최다석을 차지한 단일 블록은 사회혁명당이었으며, 그 다음이 멘셰비키와 볼셰비키 순이었다.
7월에 임시정부의 총리가 된 케렌스키는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의 쿠데타를 진압했다(→ 색인:코르닐로프). 그러나 그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대혼란에 빠져드는 러시아의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으며, 사회혁명당은 좌익의 탈퇴로 인한 심각한 내분사태에 직면했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권력이 쇠퇴해가는 동안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내부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어갔다. 9월 무렵에는 볼셰비키와 그들의 제휴세력인 좌파 사회혁명당원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제압하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 군림했다.
가을이 되자 '평화·토지·빵'을 약속하는 볼셰비키의 강령은 굶주린 도시 노동자들과, 이미 무더기로 부대를 이탈해 있던 사병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비록 7월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혁명의 때가 무르익은 듯이 여겨졌다. 11월 7일 볼셰비키와 좌익 사회주의 혁명당원들은 정부청사와 전신국 및 기타 전략적 요지를 점거함으로써 거의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색인:10월혁명). 저항운동을 전개하려던 케렌스키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그 자신은 국외로 망명했다. 쿠데타와 때를 같이하여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집된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조직된 새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승인했으며,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의장직에 취임했다.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6r0215a


70년 한 서린 ‘카틴 숲’, 폴란드 대통령부부를…

최종편집 2010.08.15 11:50:15

 

최유경 의 다른 기사 보기

 
 

15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2010년 4월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폴란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와 관련된 의혹을 다뤘다.

대통령 부부는 ‘카틴 숲 학살사건’ 제 70주년 추모제 참석차 비행기를 탔다가 전용기가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건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1940년 카틴 숲에서 소련은 폴란드의 주요인사 4000여명의 총살한다. 그러나 소련은 “카틴 숲의 학살은 독일 나치의 짓”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반발, 독일은 1941년 6월 독소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소련을 공습한다. 결국 독일은 자체적으로 국제위원회를 구성, 카틴 숲에서 폴란드인들 대학살 주범은 소련이라며 증거로 “발견된 시신들의 사망시기는 1940년대, 소련이 폴란드를 점령하던 시기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폴란드인들은 분개했고 소련의 공식사과와 진상규명 요구했다. 그러나 이때 직접 진상조사에 나섰던 시코르스키 총리마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폴란드인들은 소련에 의해 총리가 희생된 것이라고 주장. 카틴 숲 학살 사건의 주범인 소련이 이 같은 일을 벌였다고 믿는다.

이후 소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폴란드는 40여 년간 카틴 숲에 대한 언급이 금지됐다. 폴란드 역사책은 물론 소련정권이 붕괴되기까지 폴란드인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89년 소련이 붕괴되자, 소련학자들은 스탈린이 2만2000명의 폴란드인을 살해, 암매장했다는 학살 명령서를 공개했다. 폴란드군 장교 등 엘리드들을 중심으로 재판도 없이 대 학살이 이뤄진 것. 이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인정, 이후 엘친 대통령은 카틴 추도비를 방문,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친스키 대통령은 진상공개와 관련자처벌에 관해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고, 결국 70주년 추도식에 참석차 비행기에 올랐던 카친스키 대통령은 사망하게 됐다. 일각의 폴란드인들은 이를 ‘카틴 숲의 저주’라 부르며 러시아가 비행기 추락사고에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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