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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김세진(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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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1-06-13 22:46 조회2,40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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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참전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1960년대를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 보면 후반 (1965-69년)의 연평균성장률은 11.8%로서 1960년대전반 (1960-64년)의 실질성장률은 5.5%의 두배를 넘는다. 한국경제의 기적은 1960년대부터가 아니라 1960년대후반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발전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년)은 장면 정권의 계획을 답습한 것이었는데, 기간산업의 수입대체와 1차산품의 수출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발전전략은 인플레이션과 외환부족으로 곧 위기에 부딪쳤고, 한국경제는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개입에 기초한 한일국교 재개와 베트남 특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도약단계로 들어갔다.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시장주의적 해석은,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수입대체 발전전략의 실패와 미국의 개입(이른바 AID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한 이른바 가격의 왜곡의 정정 측면을 중시한다. 즉 1964-66년에 걸친 평가절하, 수출지원제도, 수입자유화 등의 자유주의적 경제개혁에 의해서 국내가격이 상대적으로 왜곡되지 않게 되었으며, 수출 유인이 수입 유인과 동일해졌다는 의미에서 중립적 무역체제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반면 기존의 국가주의적 해석은 초기 발전전략의 실패와 미국의 개입을 통한 발전전략의 변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국가주의적 해석과는 달리 박정희 대통령의 초기 발전전략이 실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의 발전전략의 결함이, 시장주의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이른바 가격의 왜곡을 정정하는 평가절하와 같은 시장개혁을 통해 극복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고도성장의 시동은 영구군비경제의 효과(=베트남 특수)에서 주어졌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1965년 2월 의료반 등 비전투부대 파병으로 시작되어, 그 수는 연간 약 5만명이었으며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 31만여명에 달했다. 한국과 미국은 1966년 이동원 외무장관과 브라운 미국대사 간에 각서를 교환하는 것에 의해,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조건에 관한 수개월에 걸친 교섭에 종지부를 찍었다. 유명한 ‘브라운 각서가 그것이다.

’브라운 각서‘에 따라 한국은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군사원조 이외에,

(1) 주월 병력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원‘화로 한국 측 예산에 방출하고

(2) 주한미군용 물자의 상당분을 한국에서 조달하며,

(3) 주월한국군 소요 물자와 베트남군 소요물자 중 일정 품목도 한국에서 구매하며,

(4) 베트남 건설사업에 한국 건설업체에게 응찰자격을 부여하는 것 등,

대한(對韓)구매 조치를 크게 확대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한국에 대해 베트남은 전장일 뿐만 아니라 거대한 시장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에 수반된 군사비의 확대는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발생시키고 한국경제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외환보유고의 증대, 이것을 계기로 한 급속한 공업화가 그것이다.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병군인의 송금, 미군의 물자 조달 등을 중심으로 연간 2억달러의 특수를 확보했으며 1965년부터 1972년까지 10억 2,200만달러에 달하는 특수를 얻었다. 한국에서 베트남 특수의 중심은 물자조달 내지 상품수출보다도 오히려 무역외수입이었다.

한국의 대베트남 수출총액은 물품 군납의 증가에 힘입어 매년 증가 경향을 보였다. 즉 1965년 1,770만달러로부터 1970년 7,000만달러로 증가했다. 그 결과 베트남은 미국, 일본에 이어 제3위의 수출시장으로 되었다. 한국 수출총액에서 차지하는 베트남의 수출비중은 1965년 10.1%, 1966년 9.5%, 1967년 7.2%, 1968년 8.3%, 1969년 7.6%, 1970년 8.4%였으며 연평균 8.5%였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를 분야별로 보면 ;

(1) 장병, 기술자의 송금이 3억 6770만달러 (특수총액의 36.0%),

(2) 건설 용역의 군납이 2억 8650만달러 (28.0%),

(3) 수출 (물품 군납 포함)이 2억 8310만달러 (27.7%),

(4) 기타 8,470만달러 (8.3%)로 이루어져 있다.

장병 기술자의 송금이 전체의 36%를 점하여 가장 많다. 당시 베트남은 한국에 대해 온갖 잔학한 살륙이 자행되었던 아비규환의 전쟁터였을 뿐만 아니라 서부 개척시대와 같은 개척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전투수당은 미군의 1/6, 필리핀군, 태국군의 1/5에 불과했고 한국군의 대부분을 점한 병사 즉 상병, 일병, 이병 등의 경우는 같은 계급 베트남군 병사의 급료보다 낮고 참전 각국 장병 중에서 최저액이었다.

한국은 베트남 참전국으로서 파견자의 송금, 미군의 물자조달 등을 중심으로 1965년부터 1972년까지 10억달러의 특수를 입수했다. 이러한 베트남 특수는 매년 증대하여 특수가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5년 0.6%에 불과했지만, 1967년 3.5%, 1968년 3.2%, 1969년 3.0%에 달했고, 한국경제성장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베트남 특수가 한국경제에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특수가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과 거의 대등했다. (한국특수는 당시 일본의 GNP의 3.8%에 달했다.) 베트남 특수가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경제에 베트남 특수가 미친 영향은 한국전쟁 특수가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보다 오히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1965년부터 1972년 8년간 10억2200만달러에 달해 같은 기간 일본으로부터 외자도입총액 10억 8900만달러와 거의 같은 규모의 금액이었다.

베트남 특수에 의한 외화수입은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재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자금부족과 심각한 외화부족으로 고민하고 있던 한국경제에 대해 베트남 특수에 의한 외화수입은 단비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61년말 외환보유고는 2억 500만달러였는데, 1964년말에는 1억 2900만달러로 계속 감소해서 1964년말에는 외환위기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1965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한 특수의 증가에 의해 1965년말에는 1억 3800만달러로 증가하고 1966년에는 2억3600만달러, 1968년에는 3억 8800만달러, 1970년에는 5억 8400만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베트남 특수의 중심은 상품수출보다 무역외수입에 의한 것이며 특수 총액 10억 2200만달러 중 7억 4000만달러가 무역외수입으로 되어있다. 이 시기 베트남 특수는 무역외수입의 증가를 결과시켰으며 무역외수입의 증가는 다시 외환보유고 증가의 요인으로 되어 수입능력을 대폭 증대시켰다. 한국경제는 1960년대 들어 미국원조의 감소에 따라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거액의 베트남 특수의 유입은 외환보유고 확충에 기여하고 1960년대 후반 고도성장을 시동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일본으로부터의 외자도입 총액 즉 청구권자금 (무상, 유상원조), 상업차관, 직접투자가 총계 10억 8900만달러였던 것에 대해 같은 기간 베트남 특수의 누계액은 10억 2200만달러로 그것에 필적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가장 걸출한 성과는 다름 아닌 수출의 급증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확대와 함께 수출은 눈부시게 증대하여 1964년에는 1억 2000만달러였던 것이 1972년에는 16억 2400만달러로 13.5배 증대했다. 이러한 높은 증가율은 한국정부의 예상을 훨씬 상회하면서 실현되었다. 즉 한국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하면 같은 기간중 수출의 증가율은 연평균 17%로 1971년의 수출목표는 1965년 수출실적액의 3배에 해당되는 5억 5000만달러로 책정되었지만 실제 동기간 중 수출증가율은 연평균 35.4%로 계획의 2배의 증가율을 기록하여 그 결과 1971년 수출실적은 10억 7000만달러로 정부의 목표액을 2배를 넘었다. 한국경제 발전모형의 가장 주요한 특징으로 들어지는 수출주도형 고도성장은 베트남 전쟁 없이는 시작될 수 없었다.

한국의 수출시장을 무역통계로 보면 한국의 수출총액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1년 47.4%, 1962년 42.%로 1960년대 초반 40%대였지만, 1965년 이후는 20%대로 감소했다. 그러나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2년 21.9%, 1963년 28.0%, 1963년 28.0%, 1964년 29.5%로 1960년대 초반 20%대였지만, 1965년 이후 매년 증가하여 1968년 및 1969년에는 각각 51.7%, 50.1%로 한국수출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 수출되는 것으로 되었다. 즉 1960년대 초반 일본시장의존에서 1965년 이후는 미국시장의존으로 전환했다. 한국의 대미수출의 급속한 증대는 의류, 합판, 전자제품 등 공업제품의 수출증가에 기인한 것이었다.

한국이 수출이 급증했던 1960년대 후반 시기는 바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확전시킨 시기였다. 미국의 연간 250억달러를 넘는 베트남 관계 군사지출이 급속한 군사수요의 확대를 낳았고, 이것이 한국에 수출시장을 제공했던 것이다. 즉 미국의 수입상황을 보면 베트남전의 확대와 함께 급속하게 신장했다.

1957-64년 8년간 5.6%였던 연평균수입증가율이 베트남전의 확대 이후 1965-72년 8년간 14.8%라는 높은 수준에 달했다. 그 결과 수입액은 1964년 187억달러에서 1972년 556억달러로 약 3배 증가했다.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은 특히 현저해서 1965-72년 연평균 47.5%라는 경이적인 증가율을 보여서 1964년 겨우 3560만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972년에는 7억6000만달러로 21배 증가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은 Buy American정책에 의해 필요한 물자를 미국 본국에서 조달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공동파병국에서 구매한다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대말 국제수지 대책, 달러방위 대책 차원에서 국방비에 의한 구매를 극력 미국 국내에서 행하고 그 해외유출을 극력 억제했다. 즉 미국정부는 대외군사지출에 의한 달러 유출을 억제하기 위해 군사지출 상대국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무기 등의 구입을 요구하고 대외군사지출액의 미국으로의 환류를 도모했다. (예컨대 ‘국제수지에 관한 존슨대통령의 메시지’ 1968.1.1.)

그러나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연 31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파병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최우선적으로 군수품의 주문을 수주할 수 있었다. 1965년 5월 이루어진 박-존슨 정상회담에서 한국군의 전투부대의 파병이 실질적으로 결정되었는데 미국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한국상품의 수출확대, 대한경제군사원조의 확대를 약속했다. 1965년 5월 18일 발표된 ‘박-존슨 공동성명’은 전부 14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한국상품의 대미수출 확대를 약속한 것이다. 의류품의 수출은 1960년대 후반 대개 수출액의 약 60%로 대부분 대미수출이었다. 1960년 이후 한국의 면직물, 의류 등에 대해 수입제한조치를 취했던 미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보답으로 한국에 대해서는 Buy American정책의 적용을 제외했기 때문에 한국에 주문이 쇄도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수출 증대의 주요 원인은 베트남전의 확대 장기화에 의한 군수의 격증에 있었다. 전자제품의 수출도 1964년 96만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1965년에는 180만달러로 배나 증가했다. 또 1966년에는 360만달러, 1967년에는 980만달러, 1968년에는 1900만달러, 1969년에는 4200만달러, 1970년에는 5500만달러로 급증했다. 한국의 대미 전자제품 수출증가는 미국에서 군수의 격증에 의해 군수품의 OEM생산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미국 시장은 반드시 발전도상국 모두에 대해 열려 있는 시장은 아니었다. 이는 이 시기 이른바 Buy American 정책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수출이 급증했던 1960년대 후반에는 연간 250억달러라는 미국의 베트남 관계 군사지출이 베트남 특수라고 불리워지는 군사수요의 확대를 낳았고 이것이 한국에 결정적인 수출시장을 제공했다.

또 한국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어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의 친미정권 나라들을 중심으로 적극경제외교를 전개하고 수출대상국을 확대했다. 1966년 5월 대한국제경제협의체 (IECOK, International Economic Consultative Organization for Korea)이 세계은행, IMF, 및 미국, 일본, 유럽 각국 등 10개국으로 설립되었다. 이것은 경제협력이 다각화하고 경제외교가 다각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수입시장 구성에서 보면 미국으로부터 수입비중이 감소하고 일본으로부터 수입비중이 높아졌다. 즉 1960년대 초까지 미국으로부터 수입비중이 50%대로 압도적으로 컸지만, 그 후 점점 감소하여 1970년대로 들어서면 20%대로 감소했다. 반면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증가하여 1960년대초는 20%대였던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40%대로 상승한다. 수입상대국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전환한 요인으로서는 수출증가에 따라 수출산업에서 사용하는 원자재와 중간재의 대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으로부터 발주한 특수 물자의 생산을 위해 섬유공업, 합성수지공업 등 소비재공업의 원자재와 중간재를 수입했던 것이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증가하게 된 중요한 요인이다. 실제로 한국의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은 1965년부터 급증했다.

수입증가에 따라 수입총액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도 1960년대 초는 20%대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 1965년에는 36.0%, 1966년에는 41.0%, 1967년에는 44.5%, 1968년에는 42.7%, 1969년에는 41.3%, 1970년에는 40.3%로 1960년대 후반으로 되면 40%대를 상회하게 되었다. 즉 특수는 한국의 수중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생산력이나 공급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행해졌던 것은 싼 임금으로 가공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의 베트남 특수는 일본의 원재료와 일본의 기계의 수입증가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한국의 수입총액에서 수출용제품을 위한 원자재의 비중은 1964년 1.7%에서 1972년 27.3%로 대폭 증가했다. 한국의 대일수입에서 자본재가 차지하는 비중은 1963-65년 26%였던 것이 1966-69년 43%로 급증했다.

요컨대 한국은 일본에서 자본재, 공업용원재료 등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조립 가공한 소비재를 미국에 수출하는 것으로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즉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미일의 국제분업관계가 형성되고 말하자면 한미일 삼각구조 속에서 한국은 고도성장과 급속한 공업화의 조건을 갖추었던 것이다. 즉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원자재 및 자본재에 국내에서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조립 가공한 최종제품을 미국시장에 수출한다는 이른바 ‘고도성장의 트라이앵글 구조’가 성립했다. 베트남 특수는 일본-한국-미국으로 이어지는 3각구조의 형성의 계기로 되었다. 즉 한국의 베트남 참전이 그 대가로서 경제군사원조 미국시장에의 진입과 베트남 특수를 불러일으키고 이것이 다시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수입을 가능하게 했다.

1960년대 중반 한국경제가 직면했던 외자도입의 곤란을 극복할 수 있게 했던 것 역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수반된 미국으로부터 차관이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따라 미국은 ‘브라운 각서’에 기초하여 차관공여를 약속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한일정상화 압력을 강화하고 유럽에 대해서는 대한경제협력을 호소했다. 실제로 외자도입이 본격화했던 것은 1965년 이후이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계기로 외자도입은 급속하게 증가했다. 그 내용도 무상원조로부터 개발차관으로 전환했다.

박-존슨 대통령의 1965년 5월 회담에서 개발차관을 약속한 존슨대통령은 거액의 개발차관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연계시켰다. 존슨대통령이 약속했던 개발차관은 한미관계의 전환점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하여 외국자본의 유입은 현저하게 증가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 외자도입액(도착 기준)은 누계 40억9000만달러에 달했다. 내역별로는 차관이 30억8000만달러로 75.3%를 차지하여 가장 많았고, 다음이 무상원조가 7억6400만달러로 18.7%, 직접투자가 2억2500만달러로 6%를 점했다. 국별로는 미국이 19억7000만달러로 약 절반을 차지하여 가장 많았다. 일본은 1/4에 불과했다. 즉 외자도입의 약 절반은 미국 것이며 또 미국으로부터 차관의 절반은 장기 저리의 공공차관이었고 사회간접자본의 정비 및 기간산업의 육성에 사용되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는 무상원조가 대부분이고 차관이나 직접투자의 비중은 낮았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이 되면 차관의 도입이 급속하게 증대하여 1960년대말에는 외자도입액의 3/4을 차지하게 되었다. 외자는 대부분이 차관이었는데 차관도입은 1959년부터이지만 1959-65년 사이 누계액은 1억 4200만달러에 불과했는데 1966년에는 연간 1억달러를 넘어 1억 7300만달러로 되고 1959-65년의 7년간의 누계액을 크게 상회했다.

다음에 1967년 2억 1800만달러, 1968년 3억 6400만달러, 1969년 5억 900만달러, 1970년 4억 3000만달러, 1971년 6억 4500만달러, 1972년 7억 3700만달러로, 1966년부터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6-72년 차관총액은 30억 8000만달러에 달했던 것이다. 미국으로부터 도입 차관은 1959-65년까지 7년간 7400만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6-72년까지 13억달러에 달했다. 이 액수는 차관도입총액의 43%에 해당된다.

이 기간의 차관도입이 미국으로부터 급속한 증가에 의한 것임을 보여준다. 즉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방문 이후 미국으로부터 차관 도입이 급증했던 것이다. 즉 베트남 파병에 수반하여 대미관계는 극히 긴밀한 관계로 되었으며 미국자본이 대량으로 도입될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전쟁과 한일조약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 미국의 대한군사원조는 급속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미국은 1964년 군사원조 삭감을 통고했으나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군사원조는 급속하게 증가하여 1966-70년간 16억8000만달러를 기록했다. 1960년대전반에 비해 2배 이상의 비약적인 증가를 보인 것이다. 미국은 1964년 군사원조이관계획 실시를 통고했지만 한국의 베트남 전투부대 파견의 대가로 베트남에 한국군 병력의 파견이 이루어지는 동안 군사원조 이관계획의 실시는 중단되었다.

여기에서 군사원조 이관계획이란, 이제까지 미국의 직접 군사원조에 의해 충당되던 한국군의 무기 장비 탄약 중 국내생산이 가능한 것 혹은 한국정부 보유 달러를 갖고 수입할 수 있는 군사물자의 충당 책임을 한국 측에 이관하는 것을 말한다. 이 군사원조 이관계획의 중지에 의해 한국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9300만달러의 예산을 절약할 수 있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의 증대는 한국의 국방비를 억제시켰다는 점에서 경제적 효과는 극히 높았다. 1966-72년 7년간 군사원조액은 한국재정지출의 36.3%에 해당되며 또 국방비를 상회한다.

이를 통해 한국정부는 1968년1월 북한의 무장게릴라의 서울 침투,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으로 남북 간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던 1960년대 후반 군사장비 구입을 위해 외화를 사용하지 않고 군비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북한과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국방비의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운 각서에 기초한 파병의 대가로서 군사원조의 대량화이다.

미국의 대한군사원조는 1960년대에는 후퇴하여 1961-65년 약 8억2000만달러였지만,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견했던 1966-70년에는 약 16억 8000만달러로 2배 이상의 비약적 증가를 보였다. 1966년부터 1970년까지 군사원조액은 한국 재정지출의 연평균 37.1%나 되었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국방비의 거의 대부분을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재정적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공업화 자금으로 그 여유를 이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의 재정투융자는 단지 거대한 국가의 정책의 소산이라기보다 베트남 참전에 수반된 군사원조의 대량화가 국방비의 감소를 가능하게 하고 그 결과 재정적으로 여유를 얻어 재정투융자가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1960년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자유시장의 작동의 자동적 결과도 아니라면 단순한 국가정책의 소산도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은 한국전쟁과 함께 시작되고 베트남 전쟁에서 확대재생산된,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구군비경제의 효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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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위 글은 인터넷과 과거 논문들을 뒤져,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당시 수업시간에 "월남에 계신 국군 아저씨께"라는 제목으로 위문편지를 썼던 국민학생 꼬마였습니다. 이제 50대 중반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온갖 현상을 겪으면서, 흐트러진 우리나라 국기(國基)를 시급히 바로 세워야 한다는 인식을 스스로 갖게 되었고, 그 중 하나가 월남파병의 역사적/경제적 의의를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국가라면) 당시 생명과 청춘을 희생한 분들에게도 정당한 대우를 해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저희 세대 이하는 부끄러워 감히 낯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이 땅 위에 역사를 제대로 평가할 줄 아는「올바른 보수정치」가 들어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김세진)

댓글목록

현산님의 댓글

현산 작성일

좋은 자료인데, 후일 누군가에게라도 참고가 되게 편집을 좀 다시 하여 올려 주시면 좋을 것 같스니다.
글자 호수가 너무 작아 읽기 어렵고 독자들도 그냥 지나칠 것 같습니다.

正道님의 댓글

正道 작성일

좋은 정보에 깊히 감사드립니다.......충성!!        참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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