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려졌다지만 김정일의 중국 방문 목적은 뻔한데, 우리나라 이명박 대통령의 일본 지진 피해 지역 방문 기사를 멀찌감치 뒤로 제켜놓고 뭘하나 했더니 김일성 항일 유적지 방문이라고 한다.
기자는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경력을 빌어 북중간 역사적 유대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두차례나 방문지로 선택된 것으로 해석됩니다."라고 했지만 김정일에겐 복선이 있었다.
뭐!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항일운동, 김정일 아버지가 김일성인지 모를까봐 거기다 아버지를 붙이냐 이 기자야!
가까운 단동 코스를 놔두고(그쪽 김일성 날조 유적은 몇개월 전에 남반부 국민들에게 보여주며 교육시켰으니) 왜 한참을 돌아가는 투먼-무단장->베이징? 경로를 택했나 했더니 무단장에 김일성 우상화 유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보여주려는 것 같고, 항일유적이라고 각인시켜서 김일성이 진짜 항일 투사인 것으로 우리 국민들에게 날조 세뇌시키려는 목적이 읽혀진다.
그곳을 방문해도 무시하면 될 것을 자세하게 보도하면 선전을 북한이 하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이 하는 것이 된다. 진짜 항일투사처럼 영상까지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친북좌파 방송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늬만 공영방송 아닌가?
북한이 청사에 빛나는 청산리 대첩 유적지를 이렇게 자세하게 보려줄 리가 없다.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은 우익이었고 그 아들 김두한은 해방정국에서 빨갱이를 때려잡아 남한의 적화를 몸으로 막았다. 그래서 빨갱이들은 협객 김두한을 단순한 깡패로 매도하고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고 우긴다. 왜 무식한 협객 김두한이 빨갱이들을 때려잡았냐 하면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빨갱이들에게 암살 당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 행적이라고 하면 뭐랄까 만은 꼬박꼬박 항일유적이라고 세뇌시키는 것은 레닌의 "거짓말도 백번하면 참말이 된다"는 지시 때문이었는데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김일성 항일 날조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어 백번을 상회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니 북한 김정일 집단과 남반부의 친북좌파 빨갱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상당 부분 충족시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식의 보도가 먹히면 방송을 장악한 친북좌파들의 친 김정일 편집은 더욱더 활개를 칠 것이다.
누가 막을 것인가. 방송이 대한민국 정부보다 더 센가? 이명박은 자존심도 없고 역사 의식 또한 퀭한가?
======================================================================
방송 해방구 mbc의 실체
http://www.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2&wr_id=35571&sca=&sfl=wr_name%2C1&stx=%C8%E5%C8%CA&sop=and
http://news.kbs.co.kr/tvnews/news9/2011/05/20/2294922.html김정일 위원장 첫 방문지 무단장 행적은?
http://news.kbs.co.kr/tvnews/news9/2011/05/21/2295201.html











|
|
제117호 발언대/ 우리 역사 바로보기
普天堡 사건을 교과서에 실어서는 안된다 |

朴 成 壽 (民族史바로찾기연구원 원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
筆者 略歷
서울사대 역사과 졸업/ 고려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교수/ 국사편찬위 편사실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現)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
김일성의 가짜 사진과 직함
때는 1937년 6월 4일 영시. 일단의 동북항일연군유격대가 야음을 타고 압록강 상류를 건넜다. 목적지는 함경남도의 산수·갑산과 가까운 백두산 아래 첫 동네 普天堡였다. 인원은 약 90명. 그들이 나누어 탄 배는 뗏목이었다. 보천보의 실제 지명은 普天面 保田이었는데 마을의 호수는 불과 308호, 주민 1,383명이 살고 있었고 그중 일본인은 26호에 50명이 살고 있었다. 이런 寒村을 공격한 유격대 지휘관이 김일성이었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은 해방 후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거의 유일한 抗日 업적인 보천보 사건을 사실보다 훨씬 부풀려서 선전하기 시작했다. 첫째 그가 東北抗日聯軍에 소속된 유격대 중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왜곡하여 김일성이 '조국광복회'를 독자적으로 조직하여 지휘한 것처럼 꾸몄다. 그러나 김일성의 실제 직함은 동북항일연군 第1路軍(총사령 양정위) 第1軍 第6師長에 지나지 않았다. 師長이란 중대장의 이름이었다. 사장이라고 하니까 師團長을 연상케 하는데 師의 실제 규모는 일개 중대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러니 사단과 사의 규모는 천양지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으로서는 이것을 사단장으로 고치고 싶었던 같다. 필자가 하르빈에 있는 흑룡강성혁명박물관에 처음(1989년) 갔을 때 일인데 분명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당시의 안경 낀 사진과 그가 속해 있던 동북항일연군 編隊表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갔을 때는 말끔히 치워서 없었다. 왜 그랬을까. 김일성의 해방 전 사진은 단 한 장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김일성이 1940년 일본군에 쫓겨서 만주에서 멀리 시베리아로 망명한 뒤 찍은 사진이다. 소련군복을 입고 소련군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나이가 30대 초반이었을 때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진짜 김일성 사진인데 소위 보천보 전투 당시의 20대 사진이 없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위 '위대한 항일업적'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보천보 전투 당시의 젊은 김일성 사진이 꼭 필요하였다. 필자가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서 본 김일성의 사진 두 장 중 한 장은 도수가 강한 검은 테 안경을 낀 깡마른 병사의 사진이었는데 이것을 김일성의 사진이라는 것이다. 북한은 이 사진을 사진감정사에게 의뢰하여 김일성이 틀림없다는 확답을 얻었다고 하지만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진의 주인공은 전혀 다른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이로 따지면 20대는커녕 30대 후반이다. 이런 엉터리 사진을 가지고 해방 후 북한에 들어온 가짜 김일성을 진짜라고 우기기 어려울 것이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리는 해방 직후 평양시민들 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의 이야기다. 김일성 장군이 너무 젊었던 것이다. "저건 가짜야" 하는 소리가 이구동성으로 나게 되자 자신이 진짜 김일성이란 사실을 사진으로 입증하여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것이 김일성의 사진이요 하면서 사진 한 장을 내미는 사람이 있었다. 사진을 받아보니 자기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리 사진을 구할 수도 없는 처지라 김일성은 "이 사진을 내 사진이라고 해!"라고 명령했다. 김일성의 가짜 사진은 지금 평양의 김일성박물관 입구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르빈의 흑룡강성혁명박물관에는 말끔히 치워져 없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중국의 박물관 당국이 북한의 요구가 끈질겨서 사진과 편대표를 치워버렸을 것이다. 사장을 사단장으로 고치고 가짜인 사진을 진짜라고 우겨 전시하는 것보다 차라리 모두 치워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철거한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자꾸 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자기 자신도 그 거짓말을 참말로 믿어버린다고 한다. 김일성의 사진과 직함이 바로 그런 사례에 속한다. 일제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였다고 하며 보천보 전투 당시 나이 29세로서 고향이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라는 것이었다. 해방 후 소련군에 업혀서 북한에 나타난 김일성과 다섯 살이나 나이 차가 난다. 해방 당시 김일성의 실제 나이가 33세였으니까 그가 만일 보천보 전투의 지휘관 김일성이었다면 37세가 되어야 한다. 사진이 다르고 나이가 맞지 않는 인물은 분명 이력서를 위조한 '사문서 위조범'인 것이다.
보천보 전투의 실상은 이랬다
북한의 교과서를 읽어보면 김일성의 업적이 엄청나게 과장 기술되어 있다. 보천보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김성주는 나이 24세에 조국광복회라는 항일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그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그 산하에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근거지는 백두산 일대였는데 압록·두만강 유역을 부단히 위협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보천보 전투였다. 그런데 북한 역사교과서는 이 전투에 투입된 병력이 200명이었다고 과대 선전하고 있다. 실제로는 90명이었다. 북한의 역사 기술은 모두 빨간 거짓으로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역사왜곡인 것이다. 조국광복회라는 것도 김일성이 조직한 것이 아니고 吳成崙이란 사람이 조직한 것이었고 조선인민혁명군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동북항일연군은 있었으나 조선인민혁명군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던 유령단체였다. 그런데도 지금 북한에서는 북한인민군의 모태가 1936년에 김일성이 조직한 조선인민군이라고 당당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처럼 북한의 역사교과서는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다. 그 연유는 김일성 자신의 이력서 위조에 있는 것이다. 해방 후 돌연 평양에 나타난 김일성은 소련군 극동 제88여단에 소속되어 있던 김성주 대위였다. 소련의 비밀경찰 KGB는 북한을 통치할 인물을 물색하다가 김성주를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켰다. 그러기 위해 김일성을 평양에서 1개월간 특수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평양공설운동장 광장에 내보내어 김일성 장군 환영군중대회를 열었으니 시민 모두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그 뒤 실권을 쥐게 되자 김일성을 의심하거나 김일성의 유일한 항일업적인 보천보 전투를 의심하는 자에 대해서는 모조리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증거로 이런 일화를 들 수 있다. 보천보 전투에 실제로 참가한 한 노장 유격대원이 북한에 귀국하였는데 귀국하여 보니 북한 정부가 너무 사실을 부풀려 선전하고 있어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 어느 날 기자들에게 보천보 사건의 실상을 사실 그대로를 털어놓았다.
【기자】 그 날의 실상을 말해 주시오. 【유격대원】 그날 (1937년 6월 4일) 밤 우리는 뗏목을 타고 보천보에 들어갔는데 전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가서 보니 일본인들이 바지를 벗고 잠을 자고 있었고 놀라 깨어나더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그냥 쏘아 죽였습니다. 【기자】 그날 밤 보천보에서 현지의 조국광복회원들과 회의를 하였다는데요. 【유격대원】 그럴 사이가 어디 있습니까. 사공의 실수로 시간이 늦어져 해가 뜨기 직전에 가까스로 강을 건너 도망쳤습니다. 죽을 뻔했습니다. 【기자】 무엇 때문에 보천보를 습격했습니까. 【유격대원】 배가 고파서 식량을 훔치러 갔던 것이지요. 혁명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옳은 말을 한 것이다. 뗏목을 나누어 타고 압록강을 건넌 유격대는 먼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주재소에는 일본인 경찰 5명이 있었는데 모두 도망하여 한 명도 없었다. 대신 죽인 것은 미쳐 도망하지 못한 한 순경의 어린 아이였다. 어린이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있다가 유격대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이 죽었는데 식당을 경영하던 무고한 일본인이었다. 그는 유격대원에게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으나 "일본인은 모조리 죽여라"는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즉시 죽이고 말았다. 그밖에 유격대원들은 면사무소와 우편국 그리고 소학교 등을 습격하여 금품을 털고 난 뒤 여지없이 방화했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철수하였다. 다만 유격대가 공을 세운 것은 추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를 역습하여 적 7명을 죽이고 한 명을 부상케 한 사실이다. 이처럼 보천보 전투의 실상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대첩은 물론 아니고 전투라고 하기에도 낯부끄러운 사건이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실제로 유격대와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선전하고, 유격대가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했다고 과장선전하고 있다. 북한 역사책은 또 보천보 마을을 습격하였을 때 김일성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열렬한 혁명 연설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 연설 내용은 모두 뒤에 조작된 것이 확실한 데 그 증거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일제의 창씨개명을 김일성이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김일성이 얼마나 현명한지 시작도 하지 않은 창씨개명을 예견하여 미리 반대하였다는 것이니 기막힌 일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김일성은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있어 보천보 전투가 거의 유일한 항일유격전의 증거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보천보 전투를 '조국 해방을 위한 횃불'이라 찬양하게 만들고 해마다 이날을 크게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 곳곳에 기념탑을 세워 마치 김일성이 청산리대첩이라도 한 것처럼 과장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역사교과서에 오르려면 확실한 사실이어야 한다. 왜곡된 사실이거나 과장된 사실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보천보 사건은 크게 부풀려 있다
김일성은 집권 후 자신의 이름과 이력서를 위조하는데 온 정력을 쏟았다. 그 결과 북한에서는 처음 '朝鮮通史'가 나왔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 내용에 만족하지 않았다. 만족하지 않았다기 보다 그 내용을 읽고 대노하였다. 유엔 인권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李羅英을 비롯한 집필자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냈는데 지금도 갇혀 있다는 것이다. '조선통사'가 김일성 예찬에 인색하다는 것이었고 같은 이유로 이 책을 모두 회수하고 역사를 다시 쓰라고 명령하였다. 그 결과 나온 책이'朝鮮全史'였다. '조선전사'는 '조선통사'보다 훨씬 강하게 김일성의 업적을 과대포장하여 세계가 모두 웃는 역사책이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1937년 6월 4일의 보천보 사건이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어린아이를 죽이고 밤에 곤히 잠을 자던 무고한 일본인을 죽인 '보천보 사건'을 '보천보 전투'라 이름 붙이고 위대한 김일성 장군의 업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런 역사를 과연 우리 교과서에 실어야 하는가. 북한이 이 사건을 빌미로 올바른 한국독립운동사 전체를 왜곡하고 있는데도 이것을 굳이 우리 역사교과서에 올리려고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금년인가 작년인가 중학교 국어 교과서가 개편되었다고 해서 서점에 나가 보았더니 책은 총천연색으로 잘 포장되어 있어 보기가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교과서의 外裝이 세계 최악이란 누명을 쓰고 있었던지라 하루 속히 교과서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교과서 안을 들여다 본 순간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국어교과서에는 애국적인 내용의 글이 듬뿍 실려 있었다. 그런데 새 국어교과서에는 그런 글이 모두 삭제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나라 사랑의 마음이 필요 없다는 것인가. 현행 국어교과서를 만든 K대학 교육학과 교수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에서 무엇을 배워 왔는가고. 그러더니 요번에는 역사교과서가 문제이다. 내년에 개편된다는 시안을 읽어보니 앞서 나온 국어교과서보다 훨씬 위험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신문에는 현정부의 업적을 너무 과장했다는 것이 새 교과서의 흠이라 말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보다도 더 위험한 내용, 즉 실어서는 안 되는 내용이 보천보 사건이라 생각한다. 보천보 사건이 적어도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에 실리기 위해서는 학계의 동의가 필요하다. 지난 날 아니 지금도 일본교과서에는 우리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3·1운동 이후에는 김일성이 혼자서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다. 임시정부도 없고 독립군도 없었던 것처럼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교과서마저도 우리의 독립운동과 진실된 역사를 외면한다면 어느 나라 교과서가 진실을 말해주고 진실을 가르쳐준단 말인가. 묻고 싶다.
|
=========================================================
다음날 뉴스
방중 김정일, 남방행… ‘양저우’ 도착
http://news.kbs.co.kr/tvnews/news9/2011/05/22/2295446.html
="선양을 거쳐 오늘 오전 베이징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열차는 톈진을 거쳐 남쪽으로 그대로 달렸습니다."
"방중 첫날 김 위원장은 무단장에서 아버지의 항일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항일 상징도시인데다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난징 방문 가능성이 높은 이유입니다."
<흐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