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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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13 01:24 조회2,1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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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인민위원장의 말로
그러던 어느 날, 아래 윗동네 아저씨들 여러 명이 소금재 고개 넘기 전 왼쪽에 사는 아저씨 집으로 올라갔다. 재산이 아까워 미처 월북하지 못했다고 하는 인민위원장 집으로 손과 손에 지게작대기 등 몽둥이를 모두 하나씩 들고 웅성거리면서 다급히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동네 친구들도 와글거리며 구경거리 났다고 뒤따라갔는데 나도 호기심이 나서 따라가 보았다. 그 집 앞에 다다른 아저씨들 가운데 남쪽(38선 이남)에 나갔다가 고향에 들어온 몇몇 아저씨들이 주동이 되어 집안을 향해 누구누구는 밖으로 나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같은 문중 아저씨들은 그곳까지는 같이 갔으나 멀찍이 떨어져 매질에 합세하지는 않았다. 여러 번 외치자 인민위원장이 흰 무명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힘없이 마당으로 나오니 동네 아저씨들이 다짜고짜로 대들어 둘러싸더니만 지체 없이 몽둥이질이 시작되었다.
어떤 아저씨가 작대기로 인민위원장의 왼팔 가운데를 사정없이 후려치니,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인민위원장 아저씨가 비명을 지르며 휘청댔다. 왼쪽 팔이 부러졌는지 피가 나와 겉옷을 붉게 물들였다. 그 인민위원장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사정하듯이 말하였다. 인민위원장 집터
“이거 너무하는 게 아닌가? 잘 좀 봐주게나…….”
하니 머일 이모할머니의 큰 사위 영옥 아저씨가 큰소리를 지르며
“야, 이 개 같은 놈아! 우리 동네 죄 없는 사람들을 인민재판에서 두들겨 병신을 만들어 놓고 너는 영영 잘 살 줄 알았느냐! 너도 한번 당해 보아라!”
하면서 머리통을 향해 몽둥이를 날렸는데 때를 같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와락 달려들어 몽둥이질이 시작되었다. 그 때의 처참한
인민위원장 가족들, 아주머니와 딸 등이 나와서 울고불고 살려 달라 하니까 한 아저씨가,
“야, 이 여맹위원장인가 뭔가 하는 개 썅년아!”
하더니만 발길로 허리께를 걷어찼다. 그 딸은 우리도 동네에서 가끔 보는 아주 멋쟁이인 공산당 청년 당원인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아이고 선생님”
하며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애원하는 모습이 너무도 처량하고 비겁해 보였다.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 집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인민위원장은 국군이 데려가 집 너머 뒷산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였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말하였지만 목격자가 없어서 확실하지가 않다. 비밀리에 보따리 싸가지고 피해 급하게 북으로 진격한 국방군의 꼭뒤를 따라 요리조리 피해 이북으로 도망을 친 것이다.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물치 장거리에서 어느 쪽 군대인지 모르지만 엄청나게 많은 군인들이 총질을 하면서 복골 쪽으로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상ㆍ중ㆍ하복골 세 마을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상복골 화채봉 올라가는 골짜기로 몰려들어 피신을 하였다. 이때 나는 할머니가 신겨준 두툼한 버선을 신고 집신을 단단히 얽어맨 뒤 어른들을 따라 나섰다.
온 마을 사람들이 이 비탈 저 비탈 바위 뒤와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숲이 있는 곳에 밤새도록 머물면서 비워 두고 온 우리 마을 동정을 살폈다. 늦가을이라지만 설악산 아래는 밤이 되면 벌써 초겨울 날씨로 바뀐다. 남쪽에서 어마어마한 군대가 북쪽으로 공격한다는 말도 있고 북쪽에서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리민다는 말도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종잡을 수 없는 말에 초조감만 가득하였고 그래도 하루 낮밤을 더 피신하다가 망보던 사람들이 올라와서 물치 장께가 조용하다 하여 사람들은 살금살금 자기 집을 찾아들었다.(계속) 설악산 전투 화채봉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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