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신의리(君臣義理) / 김찬수 재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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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0-10-10 19:05 조회2,355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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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의리(君臣義理) / 김찬수 재 구성
군신간의 의리는 예부터 지금까지 의롭고 시종여일 해야 한다. 그 의리라는 덕목의 여파는 곧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 놓고 자기 직분을 다하며 서로의 지혜를 보충해 주는 대의수행(大義遂行) 관계의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간신이 많은 나라는 그 국가가 지탱하지를 못하고 결국 망하였다. 그것은 천리를 역행하는 방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혼군이 나타나면 삽시간에 그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삼국시대의 고구려가 그러했으며 백제가 그러했으며 신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 조차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말엽이 그러 하였고 동서 고금을 통하여 시대에 따라 각나라 말기에는 공통적으로 사치와 방탕으로 국운이 쇄하고 결국 망하였다. 지금의 터어키 즉, 중동의 오스만 트르크(1299~1922) 제국도 중세부터 근세에 이르기 까지 지중해 연안 거의를 623 여년 동안 장악하고 장구한 세월 동안 회교국으로 그 위용을 세계에 떨쳤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특히 공무원들의 사치와 방탕이 너무 지나쳐 결국 망하고 말았다. 위의 모두에 충신은 헌 신짝 처럼 내던져 졌고 간신만 발호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고대 중국 초나라에 장왕(楚 莊王) 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기원전 614년 부터∼591년까지 중국의 초(楚)나라의 제 23대 왕이며, 춘추시대의 5패(五覇)의 한 사람이다.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려(侶)이다.
초장왕에게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초장왕이 집권한 초기에 초나라 내부에 반란이 일어났다. 세력가 투(鬪)씨 집안의 투월초(鬪越椒)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명궁(名弓) 양유기(養由基)가 투월초를 사살하여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장왕은 반란군 진압을 기리어 군신을 불러 이른바 태평연(太平宴)을 열었다. 낮부터 시작한 연회가 밤까지 이르러도 그칠 줄을 몰랐다.
장왕은 사랑하는 허희(許姬)에게 분부하여 모든 대부에게 술을 따르도록하였다. 명을 받은 허희가 공경하는 뜻으로 잔을 따르자 모든 대부는 다 일어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허희가 반쯤 돌았을 때 갑자기 괴상한 바람이 불어 장내의 촛불을 일시에 꺼 버렸다. 내시가 촛불을 가져 오기 전인데 갑자기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대부의 억센 손이 허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 안았다. 어둠속에서 허희는 대부를 밀치고 그의 관(冠)끈을 잡아 끊었다. 그 대부는 크게 놀라 허희의 허리를 놓았다.
허희는 다시 제 자리에 돌아와 초장왕의 귀에다 입을 대고 아뢰었다. "대부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술을 따르는 중 이러이러한 사연으로 무례한 대부의 관끈을 끊었으니 속히 불을 밝히어 관끈 없는 자를 찾아 벌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허희의 이 말을 듣고 초장왕은 황급히 분부하기를 "불을 밝히지 마라. 과인이 이렇듯 잔치를 베푼 뜻은 모든 경들과 함께 기뻐 하기 위해서다. 경들은 우선 거추장스런 관끈부터 끊고 진탕 마시라. 관끈을 끊지 않은 자는 과인과 함께 즐기기를 거역하는 것이라 여기겠노라." 모든 문무백관이 관끈을 끊자 그제서야 초장왕은 불을 켜게 했다. 잔치가 끝나자 허희가 항변했다. "첩이 듣건대, 남녀는 함부로 범하지 못한다 하더이다. 왕은 그 무례한 자를 잡아 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고 서야 어떻게 상하의 예의를 밝히며 남녀의 구별을 바로잡겠습니까?"
초장왕이 웃고 대답하기를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실때엔, 서로 석잔 이상을 못마시는 법이다. 그것도 낮에만 마시고 밤엔 못마시게 되어 있다. 과인은 오늘 모든 신하들과 촛불을 밝혀가면서 취토록 마셨다. 누구나 취하면 탈선하는 것이 인정이다. 만일 그 대부를 찾아내어 처벌하고, 그대의 절개를 표창하고, 그 대부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모든 신하의 흥취가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과인이 오늘 차린 잔치의 뜻이 없지 않겠나뇨?" 허희는 장왕의 큰 도량에 탄복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 잔치를 절영회(絶纓會) 라 하였다.
이후에 장왕은 정(鄭)나라가 진(晉)나라만 섬기고 초나라에 복종하지 않음을 크게 미워하여 대군을 총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초나라 연윤(連尹) 양로(襄老)가 맨 앞부대를 거느리고 진군하였다. 장수 당교(唐狡)가 양로에게 청하기를 "조그만 정나라에 어찌 대군을 수고시키겠습니까? 군사 백명만 주시면 제가 길을 트겠습니다." 하고 목숨을 걸고 돌격하여 정군을 만나는 대로 모두 무찔러 버렸다. 장왕이 정군을 물리친 양로에게 칭찬하니 연윤 양로가 아뢰기를 "이는 저의 공로가 아니라 당교의 목숨건 전투로 승리한 바이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장왕이 당교를 불러 상을 주려 하나 당교가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이미 왕께 너무나 큰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신은 그 은공을 갚고자 목숨을 내 놓고 이번 전투에 임했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장왕이 다시 묻기를 "과인은 경을 잘 모르는데 어찌 경이 과인으로 부터 상을 받았다 하오?" 하니 당교가 절영회 때의 일을 말하면서 미인을 희롱한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실토를 하였다. 장왕이 찬탄한다. "기이한 일이다. 그때 과인이 촛불을 밝히고 죄인을 다스렸던들, 어찌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이런 훌륭한 신하를 둘 수 있었겠는가" 장왕이 군정(軍正)을 불러 제일 공로자로 문서에 기록하게 했다. 정나라를 평정한 뒤에 장차 당교에게 높은 벼슬을 줄 작정이었다.
그날 밤 당교는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떠나기 전 친구에게 말하기를 " 나는 왕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 왕이 나를 죽이지 않았기에 나는 그 은혜를 갚고자 했을 뿐이다. 이젠 모든 걸 다 밝혔다. 죄인이 어찌 다음 날 상을 받을 수 있으리오" 이 말을 전해들은 장왕이 탄식했다. "그는 참으로 열사(烈士)다!"
이어서 장왕은 그 여세로 정나라를 공격하여 정양공(鄭襄公)을 복종시켰다. / 화곡 김찬수
<참고문헌 : 사마천의 사기열전>
댓글목록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적어도 그런 정도의 호탕함이나
장왕정도의 아량이 명박이에게 있기를 바라시는 건
아니신지????
흥!!!
박근혜양과도 각을 세우고 싸우는 명박이가???
절대로 그럴리 없지요!!!!
김찬수님의 댓글
김찬수 작성일심심도사님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