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전옥주(5.18선동꾼)의 학력을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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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0-10-11 13:44 조회2,63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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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모란꽃 전옥주
신동아 98년 5월호를 비롯하여 여러 인터넷 매체들에는 5.18의 모란꽃이라는 두 여인, 전옥주(31)와 차명숙(19)에 대한 소개의 글들이 실려 있다. 전옥주는 원광대학 무용과 4학년 때 학내시위에 연루되었다 제적을 당했고, 차명숙은 당시 19세로 학업을 포기하고 국제양재학원 기숙사에 있다가 5.18을 맞았다. 전옥주의 본명은 전춘심이며, 1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5년형으로 확정됐다. 전옥주와 함께 가두방송을 했던 또 다른 여인 차명숙은 당시 19세였고, 그녀 역시 1심에서 징역10년, 2심에서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전옥주는 81년4월 3일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고, 차명숙은 12월 24일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5.18의 모란꽃’이라는 전옥주씨가 광주에서 처음 가두방송을 시작한 것은 19일 밤에서 다음날로 넘어가는 새벽이라 한다, 전씨는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처음에는 도청까지 걸어가면서 방송을 했고, 이어 소형 트럭에 옮겨 타고 다녔다고 진술한다.
계엄군이 물러난 22일, 전씨가 오전 방송을 하고 잠시 쉬는 사이 갑자기 군중 속에서“저 여자 간첩이다”라면서 신체 건장한 40대 남자 몇 명이 전씨를 끌고 갔다 한다. 군중 속에서는“간첩이면 잡아가야 한다”는 소리와“저 여자를 구하자”는 목소리가 엇갈렸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한다. 전씨는 31사단 보안대에 끌려갔다가 일단 풀려났다가 다시 기소됐다. 형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포장마차 등을 하며 생활하던 전씨는 김상현 의원의 주례로 전통혼례를 치룬 후 세 아이의 어머니로 서울 성동구에 살았다 한다. 그 무렵 전씨는 영부인이 된 이희호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91년 제1기 지자체 선거에 영부인은 전씨에게 성동구 시의원 출마를 권유했지만 그녀는‘5·18의 전옥주’로 남기 위해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91년 4월에 다시 광주로 내려갔고, 95년에는 국민회의 광주지역 시의원 후보로 내락됐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후보 자리를 노린 여인들의 음해가 있었고, 이들 여인들은 5·18 당시 함께 투쟁하던 세 여성동지였다고 한다. 세 여인은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를 비롯하여, 당과 동교동계 의원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서를 하거나 전화를 하여 모함했다고 한다. 결국 전씨는 후보자격을 놓고 당무회의에서 투표에 붙여진 결과 선거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남편으로부터 이혼 통고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전씨는 세 아이를 데리고 광주를 떠나 경기도 시흥으로 갔다고 한다. 2007년 11월 30일 연합뉴스에는 민주당 이인제 후보가 전남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전옥주를 특보로 삼았다는 보도가 있다. 이인제 후보는 기자에게 "5.18 광주항쟁 당시 전남도청 내에서 현장방송을 했던 전옥주 여사가 저의 특보를 맡고 있다. 혁명의 현장에 있었던 전옥주 여사가 큰 역할을 해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다.
댓글목록
금강야차님의 댓글
금강야차 작성일
박사님 답변 감사합니다.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404p(上)에 제가 형광펜으로 전옥주 표시를 해 놓았었습니다.
(사실 나중에 참고를 할려고 사람이름에는 모두 형광펜 색칠을 해놓았습니다.)
질문의 의도는 전에 다른 곳에서 '전옥주'의 5.18 당시 학력에 관한 의혹의 '댓글' '글'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도 '차명숙'의 학력과 '전옥주'의 학력을 착각은 한 듯 싶습니다.)
부득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올렸습니다. (또한 신정아 사건때의 대반전이 생각이 났었습니다.)
책을 읽고도 제 머리가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19세때 학업을 포기한 '차명숙'의 학력을 전옥주의 학력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둘을 바꿔서 기억)
다음에는 좀 더 책을 찾아본 후에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